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54화 (15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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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그리 오래 나갔다 온 것도 아닌데 굉장히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은 멀티.

벙커로 들어가자 승희가 반갑게 맞이한다.

"왔어요!? 내 선물은?"

"어? 선물?"

"없어요? 붕어빵이나 타코야키 좀 사오지."

"어? 붕어빵? 타코야키?"

"미안해요. 그냥 헛소리해봤어요. 너무 먹고 싶어서."

그러면서 피식 웃는 승희.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웃게 된다.

배낭을 내려놓고 옷을 벗는데 승희는 옆에서 나를 계속 지켜본다.

"음? 뭐 할 말 있어?"

"아뇨. 그냥 보는 건데요?"

"그래. 그럼 좀 야하게 벗어야 하나?"

그러면서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옷을 벗자 승희가 소리를 지른다.

"꺅! 변태다! 변태가 나타났다! 근데 고작 그것밖에 못 해요? 좀 더 노력해봐요."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

"어…. 좀 더 섹시한 느낌으로? 나를 홀려버릴 것 같이?"

"이렇게?"

최대한 허우적거려 봤지만, 승희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미안해요. 내가 오늘 너무 많은걸 바라는 거 같네."

몸을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가자 내 옷들을 세탁기에 넣어놓고 화장실 앞으로 와서 씻는 나를 지켜본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뭘요? 감상 중이니 계속 씻어요."

"너 하는 짓이 음흉한 아저씨 같다."

그러자 제 딴엔 음흉한 표정을 짓는데 별로 음흉해 보이진 않는다. 하여간 재밌다니까.

그리고 그런 승희를 보며 약간 마음 한구석이 찔리는 느낌을 받는다.

빨리 이야기를 하는 게 낫겠네.

내가 왜 이렇게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냐고. 난 당당한데.

사실 그리 당당하지도 않다.

미나와 세아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승희는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다.

배짱질을 못하는 상대.

무조건 승희가 이해해주기를 바라야만 하는 상황.

샤워를 마치고 승희가 건네주는 수건으로 머리와 몸을 닦았다.

머리는 왜 이렇게 빨리 자라는지…. 또 한 번 밀어버릴 때가 됐네.

"승희야."

"네."

"이리와. 앉아봐."

질질 끈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성공률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할 거면 빨리 끝내야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잖아.

"왜요? 스킬 때문에? 저 힐 마스터 했어요."

"스킬 이야기가 아니야. 앉아봐."

사뭇 진지한 나의 모습에 승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있는 내 앞에 앉는다.

"뭔데 이렇게 무게를 잡고 있는 거예요."

승희가 앉자 나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빙빙 돌리거나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말하고 싶지는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나는 만나고 있는 여자가 두 명 더 있어. 그리고 나는 너와 그 두 명을 모두 한곳에 모아놓고 같이 살고 싶어."

몸통 안쪽 한가운데 꽉 찬 직구. 공은 내 손을 떠났다.

스트라이크냐 아니면 뚜드려 맞느냐. 과연 4번 타자 최승희의 반응은?

"와. 이 오빠 상남자네. 그걸 말한다고? 그리고 한 명이 아니고 두 명이었어? 게다가 같이 산다고?"

어라? 뭔가 핀트가 안 맞는다?

"잠깐…. 뭐야? 그 반응은?"

"뭐가요."

"마치…. 알고 있었다는 것 같은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죠. 두 명일 줄은 몰랐지만. 아니다. 겨우 한 명일 거라고 생각도 안 했구나."

"예상했다고?"

"네."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담담하게 말하는 승희.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아니…. 어떻게?"

"궁금해요?"

"어. 아니. 어…. 아니지 그러니까. 궁금하긴 한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아오. 왜 이리 정리가 안 되냐."

이런 머저리 등신이. 내가 당황하면 어쩌자는 거야.

"하아. 정말 굉장히 똑똑하고 치밀해 보이는 남잔데 또 어떨 때는 바보 같다니까."

한숨을 폭 내쉬는 승희.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요. 중요한 이야기부터 하자고요. 뭐라고 했죠? 만나는 여자가 두 명 더 있고 나까지 해서 다 같이 모여 살고 싶다고요?"

"어…."

"같이 모여 살고 싶다는 것 때문에 말한 거구나. 그거 아니었으면 말 안 했을 텐데. 그쵸?"

"어…."

뭔가 주도권을 빼앗겼다.

승희의 손아귀에 잡혀서 탈탈 털리는 느낌인데.

"크흠. 자. 내 입장을 말해줄 테니까 잘 들어요."

"응."

그저 입 다물고 승희가 말하기를 기다린다. 그래. 지금은 그냥 듣자.

"오빠가 죽을 뻔한 걸 내가 구해줬어요. 그리고 오빠를 내 아지트에 살게 해주고 편의 시설과 굶을 염려 없이 살게 해주고 있다고 해봐요. 근데 내가 만나는 남자가 두 명 있다고 해봐요. 그리고 다 같이 모여서 살자고 해요. 어떤 기분일까요?"

"어…. 별로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존나 싫네. 미안."

"그쵸? 그건 당연한 거예요. 다시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오빠가 나를 부양해주고 있죠. 나는 솔직히 하나도 하는 게 없어요. 그저 오빠에게 달린 짐일 뿐이라고요. 오빠가 나를 보고 나가라고 하면 나는 두말없이 나가야 한다고요. 이해해요?"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내가 거부할 처지가 아닌 거 알아요. 얹혀사는 주제에 감히 거부를?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오빠가 솔직하게 말했기 때문에 나도 솔직하게 말하는 거예요. 그 어떤 여자라도 자기의 남자가 한 명이든 두 명이든 백 명이든 다른 여자가 있다고 하면 좋아할 사람은 없어요. 알아요?"

"알지."

"그 두 명에겐 말했어요?"

"응."

"그렇게 하자니까 승낙했죠?"

"응."

"그래서 결국 저한테만 허락받으면 된다는 거고요?"

"응."

"어때요. 그 두 사람이 허락했을 때 그녀들은 어떤 심정이었을 거 같아요?"

"그거야 나는 모르지."

"어휴. 이 답답이. 들어봐요. 그 두 사람. 내가 본 적은 없지만, 확실히 알 수 있어요. 속이 끊어지는 기분이었을걸요? 내장이 토막 나는 기분? 아무리 세상이 망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전 세상에서 보고 배우고 당연시했던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요. 근데 그걸 쉽게 이해했을 거 같아요?"

"그렇진 않았겠지."

"그래요.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말했든 그녀들도 나랑 같은 심정이었을 거라고요. 남자들이 말하는 할렘. 거기서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죠.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을 공유해요?"

"그건…. 나도 알아. 내가 하는 말이 말 같지 않은 것도.“

"그 사람들도 오빠를 어지간히 좋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말 같지 않은 것을 승낙했다는 건."

"그래. 그것도 알아."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하는 거 보면 오빠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겠죠? 단지 철부지처럼 여자 셋이랑 함께 섹스하겠다! 이런 것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맞아. 당연히 그렇지."

"뭔데요."

"말하자면 긴데…. 짧게 말할게. 보안상의 이유가 가장 크지. 그리고 너희들이 모여있는 게 차라리 덜 심심하고 나을 것 같아서…."

"여러 군데 돌아다니기 귀찮아진 건 아니고요?"

...뭐지? 미치겠네. 내 마음이 투명 재질로 되어있나?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왜 이렇게 잘 알지?

"솔직하게 말해서 그런 것도 있긴 하지. 세 명 모두한테 못 할 짓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세 명을 모아 놓는 건 할만한 짓이고요?"

"최악보단 차악이니까."

"하아. 오빤 정말 똑똑하고 이성적인데 답답한 남자야. 진짜로."

폭포수처럼 말을 하던 승희가 잠시 말을 멈춘다.

내 상태는 마치 태풍이 지나간 해안가 같은 느낌이다.

모든 게 너덜너덜하고 멀쩡한 게 하나도 없는 거 같아.

"좋아요. 오빠의 생각이 뭔지 모르는게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거부할 이유도 없고. 난 상관없어요. 단, 조건이 있어요. 내가 조건을 걸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뭔데."

"두 사람과 만나보고 싶어요. 함께 살기 전에 미리 만나보고 싶단 말이에요. 오빠는 여자 셋이 모여 산다는 뜻을 전혀 이해 못하는 거 같아요. 잘 맞으면 정말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는데 하나라도 맘에 안 들면 셋이 죽을 만큼 싸우는 걸 볼 수도 있다고요. 그런 생각은…. 해본 거겠죠?"

"내가 중간에서 잘하면…."

"어휴. 거기에 오빠가 낄 자리는 없어요. 오빠와는 별개의 이야기라고요. 이 오빠. 완전 여자에 대해 아는 게 없네."

예리한 계집애. 어떻게 알았지? 내가 그렇게 티가 많이 나나?

"셋이 미리 보고 싶다고?"

"당연하죠. 그 두 명은 그런 소리 안 해요?"

"딱히 그런 말은 없었는데…."

"오빠. 그 사람들한테 강압적으로 굴어요? 막 독선적이고 위압적으로?"

"내가 그럴 리가."

"하긴. 그건 좀 안 어울리긴 하다. 죽이면 죽였지."

얘는 왜 이리 나를 잘 아는 걸까. 발가벗겨진 기분이네.

"아무튼. 분명 그 사람들도 보고 싶어 할 거예요. 그러니 자리를 만들어줘요. 서로 어떤 사람인인지는 알아야 같이 살든 말든 할 거 아니에요."

"그래. 알았어."

승희의 박력에 완전히 밀려버렸다.

질질 끌려다니다가 이제야 겨우 일어선 기분이다. 조건을 걸긴 했지만…. 허락했다는 걸 위안 삼아야 하나.

"으휴…. 정말. 이리 와 봐요."

말 잘 듣는 개처럼 승희에게 다가간다.

자신의 허벅지를 손으로 탁탁 치는 승희.

"누워요."

얌전히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눕는다. 하라면 해야지.

내가 눕자 승희는 천천히 입을 떼고 말했다.

"있잖아요. 내가 큰소리치긴 했지만, 오빠한테는 늘 감사하고 있어요. 사실 내가 이렇게 큰소리칠 처지가 아닌데 화내지 않고 들어줘서 고마워요."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을 한다.

"내가 이러는 건 다 오빠가 좋아서 그런 거예요. 오빠가 싫었으면 이런 소리도 안 했지."

"왠지 조련당하는 기분인데. 이게 가스라이팅인가 뭔가 그거냐?"

"쳇. 왜 이런 건 또 눈치가 빨라. 맞아요. 오빠 길들이고 있는 거예요. 다른 여자들이랑 있어도 나 버리지 말라고."

"안 그래."

"모르는 일이에요. 사람 일이라는 게 확실한 게 어딨어."

"그랬으면 애초에 너를 배제하고 일을 꾸몄겠지."

"거봐. 잔인한 남자라니까. 어쩌다가 이런 남자를 좋아하게 돼서."

"내가 할 소리다. 어쩌다가 너 같은 여자를 좋아하게 돼서."

"칫. 그 말 다른 여자한테도 썼어요?"

"몰라."

"흥칫뿡이다. 못된 남자야."

그러더니 나에게 키스를 한다.

짧은 입맞춤으로도 많은 것을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녀가 가진 불안감, 걱정, 우려와 고민. 그리고 수용.

백 마디 말이 필요 없이 한 번의 키스로 이해가 갔다.

"나를 처음 만난 거죠?"

"응."

"그럴 거 같았어."

"근데…. 어떻게 알았어?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궁금해요?"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지."

승희는 나를 보고 싱긋 웃는다. 어우. 여우 같은 계집애. 사람 안달 나게 하는 데는 뭐가 있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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