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50화 (15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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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그렇게 세아와 사흘 정도 더 백마촌 앞에서 머물렀다.

다행인 건 세아가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 다는 것?

마음 같아서는 세아와 며칠 더 있으면서 오는 놈들을 다 잡고 싶지만, 처음부터 굳이 하드하게 달릴 필요는 없다.

그리고 마냥 이렇게 세아하고만 있을 수도 없고…. 승희랑 미나도 있으니까.

그렇게 새벽 네 시까지 기다리며 백마촌에 오는 놈들을 털고 조금 쉬다 보니 해가 밝았다.

"이제 돌아가자."

"물류센터로?"

"응."

"그래? 어쩔 수 없죠."

그동안은 그렇게 츤츤거리더니 지금은 대놓고 아쉬움을 내비친다.

안돼…. 좀 더 츤츤거리란 말이야. 본인의 매력을 스스로 버리지 말라고!

물류센터로 가는길.

세아는 투명화를 걸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해제하고, 그러기를 반복한다.

투명화가 없던 시절에도 맨몸으로 돌아다니던 그녀다. 아주 살판나 보이는 모습.

"오빠."

"응?"

"투명화 있으니까 밖에 돌아다녀도 되나?"

"상관없긴 하지. 근데 너무 멀리는 안돼."

"왜?"

"왜긴 왜야. 걱정되니까 그렇지."

"뭘 걱정을 해. 평소엔 신경도 안 쓰면서."

"내가 놀러 다니는 게 아니잖니. 그리고 물류센터 안에 있으면 걱정 안 되지."

"흥. 그래. 놀러 다니는 건 아니지. 다른 여자들 만나시겠지."

쳇. 저렇게 말해버리면 내가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굽히고 들어가면 안 된다. 뻔뻔하게 나가야지.

"그래서? 싫어?"

여자를 잘 모르는 내 망상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세아가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니 세아가 매달리게 해야 한다. 솔직히 아쉬운 건 세아잖아?

남녀 사이의 밀당 같은 건 귀찮아서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확인은 해야지.

세아가 좋긴 하지만, 내 머리 위에서 놀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건 세아 뿐만이 아니다. 승희든 미나든 그 누구도 마찬가지.

"정말 나쁜 남자야."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앞을 바라본다.

귀여운 녀석. 나는 그런 세아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자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기를 쓰고 내색을 안 하려 하는 모습이 웃긴다.

세상 여자들이 이렇게 알기 쉽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런 면에서는 미나가 제일 알기 어렵다.

걸그룹 아이돌을 했어서 그런지 속마음을 쉽게 내비치지 않는다. 세아에 비하면 정말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느낌.

"거의 다 왔네. 혼자 들어가. 같이 들어가면 또 번거로워지니까."

"그래요. 나도 그러려고 했으니까. 가서 투명화로 놀라게 해 줘야지."

"공격 스킬 있는 사람한텐 함부로 하지 마. 실수로 공격당할라."

"알았어요.“

"그럼 들어가."

"다음엔 언제 와요?"

"글쎄. 몇 군데 공략할 곳이 있어서…. 장담은 못 하겠네."

"공략? 위험한 거예요?"

"뭘 하든 위험하겠지. 쉬운 일은 없잖아?"

내 말을 들은 세아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 있다.

그러더니 내 옷자락을 쥐고 작게 말한다.

"죽지 마요…. 늦게 와도 되니까. 죽지만 마."

그런 세아가 너무 귀여워 한번 꼭 안아줬다.

그렇게 세아가 들어가고 탐지로 그 기척을 끝까지 지켜봤다.

애도 아닌데 나도 참…. 걱정도 많아.

내 문제는 이거다.

걱정 근심이 너무 많다는 것.

그게 나한테만 적용되는 거면 상관없겠는데, 내가 아끼는 사람까지 적용하게 되면…. 감당이 안 된다.

아무리 내가 걱정해도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내 말만 들으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두 내가 케어해 줄 수도 없고.

그래서 자꾸 한자리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몰라.

그래야 변수가 최대한 줄어드니까.

근데 그것도 쉽지가 않다. 이제 겨우 세아 한 명한테 허락받았는걸.

무엇보다 아직 셋 다 한곳에서 살만한 곳도 없다.

갈 길이 멀다 정말….

집. 내가 말하는 집은 지금은 승희가 있는 곳이 집이다.

그런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나에게 들리기로 했다.

승희에게 가서 미나 걱정을 하고 싶지 않다.

음….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냐. 아주 지랄 났네.

아주 당당하게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네.

평온한 아파트 근처.

사람의 기척은 없다.

탐지에도 미나의 기척만 잡힌다. 지극히 마음이 놓이는 상황.

퇴근하고 온 직장인처럼 자연스럽게 아파트로 들어간다.

노크를 하고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어! 왔어요!? 뭐야. 또 밤새고 온 거예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는 미나.

짧은 반팔티에 편해 보이는 반바지.

가느다란 팔과 다리가 확 눈에 띈다. 어떻게 저렇게 얇을 수가 있지? 근데 또 체력은 좋단 말이지. 힘도 제법 세고.

배낭을 벗고 파카를 벗자 훈훈한 집안의 기운이 확 느껴진다.

뭐라고 해야 하지? 사람 사는 곳 같은 느낌?

내가 들고 있던 것을 다 내려놓자 미나가 가만히 다가와 안긴다.

그런 미나를 꼭 안아준다.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너무나 느낌이 좋다.

"밥은 먹었어요? 배고파요?"

"음. 그러고 보니 먹은 게 없네."

"그럼 앉아있어 봐요. 금방 차려줄게요. 아주 배고픈 건 아니죠? 이십 분 정도는 걸릴 텐데."

"천천히 해도 돼."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미나를 바라봤다.

기분이 묘하다.

약간 신혼부부 같은 느낌이야.

막 퇴근한 남편에게 저녁 밥상을 차려주는 새댁 같잖아?

그러기엔 너무 어리고, 지금이 저녁이 아닌 아침이라는 게 다르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는 냄새가 났다.

그렇게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음식 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배가 고파진다.

이게 무슨 냄새지? 찌개 냄새 같은데.

조금 더 기다리니 미나가 나를 부른다.

"오세요. 다 됐어요."

식탁에 앉으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흰 쌀밥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찌개, 통조림 햄 구워놓은 것, 김치.

오랜만에 받은 밥상에 가슴이 따듯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또 드는 생각.

민지도 이런 식으로 찌개를 차려준 적 있었지.

나쁜 년.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이런 식탁을 볼 때마다 그 여자가 생각나겠지?

복수라고 한다면 확실한 복수였네. 적어도 평생 나를 괴롭힐 테니.

"잘 먹을게."

죽은 여자의 생각에 얽매일 내가 아니다.

그런 거로 고통스러워하는 건 사치야.

매번 간단한 음식과 생존을 위한 끼니만 먹다가 이렇게 제대로 된 식탁을 마주하니 밥을 먹느라 손이 바쁠 지경이다.

찌개가 상당히 많았는데 맛이 있어서 그런지 거의 다 비워버렸다.

내 맞은편에 앉아 내가 먹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미나.

"너는 왜 안 먹어?"

혼자 너무 열심히 먹는 것 같아 머쓱한 기분에 물어보니 상큼하게 웃으며 말한다.

"아이돌은 밥 안 먹어요. 이슬만 먹고 사는데."

"풉."

하마터면 씹고 있던 밥알을 발사할 뻔했다.

어휴. 추한 꼴 안 보여서 다행이네.

"그거 정말 재밌는 농담이었어."

겨우 음식을 씹어 삼키고 물을 한잔 마신 뒤 미나에게 말하자, 그녀는 정색하고 말한다.

"어? 농담 아닌데. 이 몸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먹고 싶은 거 다 먹고살면 이렇게 유지 못 해요."

"아니…. 이젠 마음껏 먹어도 되잖아. 내가 음식을 적게 주고 간 것도 아닌데."

"맞아요. 적게 주고 갔다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제가 적게 먹는 거죠. 원래부터 아침은 안 먹은 지 꽤 됐어요."

"그래? 아니. 그렇게 안 먹고 그 정도로 움직이는 게 가능한 거야? 춤추는 거 체력 소모 심하잖아?"

"그래야 이 몸을 유지한다니까요."

"조금 더 통통해져도 괜찮은데. 물론 나야 지금이 좋지만."

"근데 그게 잘 안돼요. 약간 강박증 같은 게 있어서."

"아. 그래. 그건 나도 이해한다."

나도 한 강박증 하니까…. 무슨 느낌인지 알지.

밥을 다 먹고 소파에 앉아있자 그릇을 다 치우고 온 미나가 내 옆에 바짝 앉는다.

다소 어색해 보이는 모습.

내가 어깨에 팔을 두르자 그제야 조금 자연스러워진다.

"혼자 있자니 심심하지?"

"아뇨. 괜찮아요. 차분하게 있는 게 좋아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뭐 필요한 거 있어?"

"음. 책이요?"

"책?"

"네. 종일 뜨개질만 하는 건 심심해서.“

“한지 꽤 되지 않았어? 뭐 만든 거 없어? 있으면 보여줘 봐.”

“아직 뭐 보여주고 할만한 실력은 안 돼요.”

“처음엔 다 비슷하지. 그래도 봐봐.”

“싫어요. 나중에.”

"그래? 그럼 뭐. 언젠간 보여주겠지. 전에 노트북 준 거는?"

"그것도 재밌게 보고 있죠. 너무 빨리 보면 나중에 심심할 것 같아서 아껴보고 있긴 하지만."

"영화 제법 많잖아? 그렇게 아껴서 볼 정도야?"

"그래도. 저거 다 보면 볼 게 없어지잖아요."

"하긴. 그렇긴 하다."

"그래서 책도 좀 볼까 하고요. 혼자 나가기는 힘드니까."

"그럼 책 가지러 갈까?"

"당연히 좋죠."

"그래. 그럼 바로 가자."

"좀 쉬었다. 안가도 되요?"

"계속 이러고 있으면 자꾸 만지고 싶어질 거 같아서. 오로지 너랑 하는 게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게 싫으니까."

미나도 그렇고 비즈니스호텔에서 구해온 안나도 그렇고.

이렇게 압도적으로 이쁜 여자에겐 이상하게 쉬이 손이 안 간다.

오로지 몸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그런 게 있다. 그렇기에 보자마자 몸을 탐하지 않는 거다.

하지만 이쁜 여자와 섹스하고 싶은 건 어느 남자나 다 똑같기에 나도 다를 건 없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결국은 손이 갈 수밖에 없다.

아끼고 싶은 마음과 손대고 싶은 마음이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싸운단 말이지.

그럴 바에야 그냥 다른 거에 몰두하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응?"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요. 제 몸만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번거롭게 보살피진 않았겠죠."

"이해해주면 고맙고."

"근데…. 굳이 참을 필요도 없잖아요…."

나는 살짝 놀라서 미나를 바라봤다.

부끄러워 하는 미나.

하….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데 가만히 있으면 내가 고자 새끼인 거잖아?

그대로 옆에 앉은 미나의 허리를 감아서 내 무릎 위로 앉혔다.

"꺅."

가볍다. 뭐가 이렇게 가볍냐. 세아랑 키가 차이가 나는데도 몸무게는 비슷한 느낌이야.

"너무 가벼운 거 아니야?"

"놀랐잖아요."

"한 40킬로 되니?"

"그건 너무 갔다…. 40킬로면 뼈만 있는 건데."

"너 뼈만 있잖아."

미나가 입고 있는 몸에 딱 붙는 티셔츠를 올려서 배를 드러내자 마른 몸매가 드러난다.

앙상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떻게 이 안에 장기가 다 들어있나 의심이 될 정도.

그런데도 이 정도 가슴이라니. 참…. 감사합니다.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에요…. 45 정도?"

"40이나 45나."

"무슨 소리여요. 제 몸무게에 5킬로면 엄청난 건데."

"하긴. 그렇네. 내가 느끼는 5킬로랑 네가 느끼는 5킬로는 차이가 엄청 크구나."

뭐가 됐든 미나가 날씬하다는 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나는 슬렌더를 좋아한다.

고로 나는 미나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캬. 이 완벽한 삼단논법.

가만히 안고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세아랑은 또 다른 느낌. 앉은키가 더 커서 그런지 턱이 어깨에 안 닿는다.

대신 가슴이 좀 더 가깝다.

이야.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여자랑 비교하고 있다니.

진짜 나는 쓰레기 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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