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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
세아를 데리고 나왔지만, 막상 할 건 없다.
뭘 해야 하지? 이것도 나름 데이트잖아?
하지만 이 세상은 극장도 맛집도 카페도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나는 데이트 플랜 같은 건 잘 모른다. 뭘 제대로 해봤어야 알지.
"필요한 거 있어?"
결국,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사실 이게 맞지. 이런 망한 세상에서 제대로 된 데이트가 가능할 리가 없는 건 누구나 다 아는 거잖아.
"딱히…."
분명 있는데 말을 못 하는 표정이다.
뭘까? 뭔데 이 당돌한 아가씨가 말을 제대로 못 할까?
"없어? 뭔가 불편하고 필요한 게 있을 것 같은데."
"없다고. 왜 몇 번이나 말하게 만들어요."
흠…. 참 귀여운 여자다. 이런 둔한 나도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야.
"그래? 그럼 내가 너랑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되지?"
"네? 나랑 가고 싶은 곳요?"
"응."
"어…. 어딘데요?"
"가보면 알아."
세아는 내가 어디로 데려가는지 몰라서 약간 궁금함과 걱정이 반반 섞여 있는 모습이다.
저래도 결국은 쭐레줄레 잘 쫓아오는 거 보면 참 웃기다니까.
한참을 걷는데 세아가 내게 물어본다.
"오빠."
"응?"
"오빠는 왜 밖에서 자꾸 여자들을 주워와요?"
"사람이 무슨 물건이야? 주워온다고 그러게?"
아까 빌려 간다는 말에 세아가 반박했던 말을 그대로 썼더니 나를 도끼눈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보면 무서울 줄 알아? 귀엽기만 한데?
"남자를 주워올 수는 없으니까."
"무슨 대답이 그래요?"
"말 그대로인걸? 난 남자 싫어. 남자는 닥치는 대로 죽여."
잠깐 말이 없는 세아.
뭔가를 생각하더니 나에게 다시 물어본다.
"승규 아저씨는요? 거기에 민준 씨랑 동현 씨랑 진영 씨도 있고 승주랑 종현이도 있는데?"
"난 남자 이름 다 못 외워. 물류센터에 있는 놈들 말하는 거지?"
"이름도 못 외우는 건 좀 심한데."
"거기 남자들…. 그래 거기 남자들은 이유가 있긴 하지.“
잠시 뜸을 들이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 한다.
”승규 형은 아기 키우는 게 대단해 보였지. 살아남는 방식이 똑똑해서 잘 살 거 같기도 했고. 세상이 이렇게 되고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 중에 그렇게 책임감이 커 보이는 사람은 처음 봤었으니까."
"확실히…. 아이를 키우는 건 대단하긴 하죠."
"그리고 또 누구? 민준이랑 동현? 걔네가 마트인가?"
"개네가 마트인가는 뭔소리에요."
"아…. 넌 모르겠구나. 걔들이 그거지? 금속화랑 투명?"
"네. 와. 사람을 스킬로 인지하다니. 진짜 심하네."
"어쩔 수 없어. 암튼, 걔들은…. 조폭에 잡혀있었지. 여자애들 둘이랑. 사실 뭐 구하고 그럴 마음은 없었는데 조폭 놈들이 남기고 간 걸 관리할 사람들이 필요했어. 그리고 그놈들은 잡혀있던 걸 스스로 탈출했거든. 여자애들 구하려고. 뭐 나 때문에 빈틈이 생겨서 그런 거긴 하지만."
"그거 이야기는 들었어요. 유진 언니랑 지원 언니가 오빠 이야기를 자주 해서."
남자는 -씨인데 여자는 언니라고 부르는 세아. 아직 남자 혐오가 완전히 치유된 건 아닌가 보네.
"그리고 진영이. 진영이도 나름 대단한 거지. 동생을 데리고 그 쓰레기 같은 스킬로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니까. 그 책임감이 맘에 들었지. 그리고 살려두길 잘했잖아? 걔 없었으면 물류센터 돌리기 조금 빠듯했을걸?"
"진영 씨가 하는 일이 많긴 하죠."
"그래. 그리고 미래랑 같이 온 그놈들은…. 기특했지. 미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보육원에서 나와서 누나를 지키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거 아냐. 대단한 거지."
"공통점은 다 책임감이네요."
"책임감…. 맞아. 내가 남자들을 보는 가장 큰 조건이긴 해. 뭔가를 짊어지고 있느냐. 뭔가를 지키고 있느냐. 그런 것들."
"왜요?"
"왜긴. 어깨에 짊어진 거 다 훌훌 던져버리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데 이런 꼴이 되도록 아직 짊어지고 있는 거 아냐. 그런 거기에 대한 나름대로 보상이 있어야지."
"그래서 살렸다고요?"
"응."
"그럼 오빠는요?"
"응? 나?"
"오빠는 책임감이 있나요?"
세아의 질문에 잠시 말이 막혔다.
책임감? 나에게 그런 게 있나?
"없어. 나 같은 쓰레기가 그런 게 어딨어."
내 말에 세아가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나를 항변해주는 듯이 말을 한다.
"하지만 물류센터랑…. 다른 사람들을…."
"아냐. 그건 책임감이랑 달라. 솔직하게 다 말하면 내가 싫어질 텐데?"
차가운 바람이 나와 세아 사이를 쓸고 지나간다.
세아는 나를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살짝 떨리는 눈동자. 저런 모습을 보면서 약간의 가학적인 즐거움이 느껴진다.
진짜 변태 새끼라고 말해도 아무런 변명거리가 없네.
"싫어진…. 다고요?"
"아마 그럴걸?"
"뭔데요?"
"진짜 괜찮겠어? 들어도?"
잠시 말이 없던 세아는 결심한 듯 대답한다.
"네."
재밌다. 재밌어. 과연 이 아이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동거하고 있는 여자가 있어."
다짜고짜 시작된 나의 고백에 세아는 약간 충격받은 표정을 짓는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동거하고 있는 여자 외에도 다른 아지트에 여자가 하나 더 있어. 그리고 너. 이렇게 셋.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이지."
연속된 나의 스트레이트 펀치에 세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 이런 이야기는 셀프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게 너무 웃기다.
하긴…. 지금이라고 이게 정당화되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면 그 세 여자를 안전한 곳에 한데 모아놓고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어. 그리고 사이좋게 살고 싶어 하지. 생존하는 것을 제외하고 내 삶의 가장 큰 목표는 그거야."
미친 소리를 너무 당당하게 하고 있는 나.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아까 물어봤지? 여자들을 왜 주워오냐고? 물류센터는 그런 곳이야. 내가 당장 데리고 살기는 힘들고 죽이거나 버리긴 힘든 여자들을 데려오는 곳. 남자들? 내 어장 관리인이야. 물론 냉동창고에 쌓인 MRE의 관리도 있지만. 어때. 쓰레기봉투를 열어본 소감은? 실망했지?"
솔직히 말해서 내 급발진이긴 하다.
충분히 구슬리고 혓바닥을 놀리면 어떻게든 더 좋게 이야기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약간 주사위를 던지는 느낌이랄까?
6이 뜨면 성공, 나머지가 뜨면 실패. 실패해도 크게 상관은 없다. 세아가 뭐 나불거리면서 주변에 내 이야기를 할 것 같지도 않고.
어차피 승희라는 안정적인 여자가 있으니 던질 수 있는 주사위다.
세아나 미나가 싫으면 나는 승희와 살면 되니까.
게다가…. 약간 느낌이 들었다. 6이 뜰 것 같은 느낌.
한참을 말이 없는 세아.
이상하게 초조해하거나 걱정되지 않는다.
"대충…. 예상은 했는데…. 직접 들으니 조금 충격적이긴 하네요. 한 명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두 명이라니. 그래도 실망은 안 했어요."
6이 떴다.
하하. 이것 참. 재밌네. 진짜 재밌어. 이걸 받아들인다고?
"너도 진짜 희한한 애구나?"
"뭐라는 거에요! 자기가 제일 이상하면서!"
"난 당연히 내가 이상한 거 알고 있지. 근데 너도 이상하다고."
"세…. 세상이 이상한 거죠! 세상이 이상한데 나라고 안 이상하겠어요!?"
빼액 소리 지르는 것처럼 말한 세아는 다시 조용히 말을 하기 시작한다.
"솔직히…. 난 지금보단 나을 것 같은데요. 물론 물류센터 생활이 맘에 안 드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렇게 가끔 보는 것보단 차라리 같이 있는 게 더 자주 볼 테니까. 혼자…. 독점할 수 없다 해도 차라리 그게 낫지."
매혹을 쓰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나에게 마음을 솔직하게 밝히는 여자가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나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비록 처음에 매혹으로 호감을 쌓았다고 해도…. 세아는 몇 번 되진 않는다.
지금 세아의 이 감정들은 오롯하게 본인의 진짜 감정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래도 참. 실감이 안 나네.
이런 미친 소리를 받아준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는다. 그만큼 불안하다는 건가? 내가 미치도록 좋아서 저런 걸 받아준다는 건 이해가 안 가긴 하는데.
"의외네. 고마워. 솔직하게 말해줘서."
"아. 몰라요. 나도 내가 미친 거 같아. 이런 남자가 뭐가 좋다고."
"그러게. 더 좋은 남자 많을 텐데."
"시끄러워요. 오빠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뻔뻔하게 여러 여자 만나고 있다는 걸 당당하게 밝히는 주제에."
"그래서? 불만이야?"
"와. 이것 봐. 미쳤나 봐 정말."
그렇게 말하면서도 잡은 손은 놓지 않는다.
얼떨떨하면서도 내심 기쁘다.
이게 정말 가능하다니…. 나 원 참.
그렇게 나와 세아는 비즈니스호텔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자."
"뭐야!? 가겠다고 한 게 호텔이었어!? 이 변태가…. 머릿속에 그런 것밖에 안 들었어?"
"뭐가?"
"아니. 기껏 이렇게 걸어서 온 게 호텔이냐고요? 원하는 건 내 몸뿐이야?"
"음? 무슨 생각하는 거야? 난 이 안에 볼일이 있다고. 네가 열어줘야 할 금고가 있단 말이야."
"에에? 금고…?"
"여기는 아까 안나를 구해온 곳이야. 안나를 감금해놓고 있던 놈들에게 정보를 빼야 한다고. 그래서 데리고 온건데…. 뭐라고?"
그제야 무안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하는 세아.
"어휴. 따라 들어와. 하여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5층, 백마촌의 돼지가 있던 방 앞까지 가면서도 세아는 그저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숙이고 쫓아 왔다.
놀리는 재미가 쏠쏠한 여자야. 이래서 놀리는 걸 멈출 수가 없어.
스위트 룸으로 가서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
방 안에 들어가니 약간 좋지 못한 냄새가 난다.
담배 냄새. 그리고 남자 냄새.
딱 싫어하는 냄새다. 홀아비 냄새 같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냄새.
아까 방 문을 열어봤을 때 봤었던 금고로 향했다.
묵직하고 커다란 금고. 원래 호텔에 있던 금고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건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들고 왔을까? 궁금하다 정말.
나는 세아에게 말했다.
"여기 열어봐."
작게 '해제'라고 중얼거리며 문을 열어준 세아.
금고 안에는 금괴랑 서류 뭉치가 들어있다.
금괴라니. 요즘 시대에 이딴 게 무슨 소용이람.
금은방만 몇 군데만 털어도 잔뜩 나오는데.
"가질래?"
금괴를 하나 건네주니 세아는 심통 난 얼굴로 '됐어'라고 작게 말한다.
에휴. 어쩔 수 없지.
세아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나왔다.
"어디가?"
바로 옆방 문 앞으로 가서 세아에게 말한다.
"여기 열어봐."
세아의 잠금 해제 스킬은 이런 호텔 방 문 같은 건 간단하게 열 수 있다.
참 좋은 스킬이야. 스킬의 여유가 있다면 찍어둬도 참 편할 텐데.
스위트 룸. 오래 사용되지 않았지만, 세월의 흔적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약간 먼지가 쌓여있는 정도. 밀폐되고 환기 시스템이 살아있으면 생각보다 먼지는 별로 안 쌓인다.
나는 푹신해 보이는 침대로 가서 앉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세아.
"이리와."
내가 부르자 쭈뼛거리며 다가온다.
내가 무릎에 손짓하자 마지못해서 해준다는 식으로 내 무릎 위에 옆으로 앉는다.
"삐졌어?"
"안 삐졌어!"
"그래? 그럼 키스해줘."
나를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작게 중얼거린다.
"뻔뻔해."
그러곤 결국은 내 목을 팔로 감으며 키스한다.
하여간…. 귀여운 여자야.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