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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퍼니
11월이 되었다.
내 겨울 계획은 완벽했다.
날이 풀릴 때까지 승희와 벙커에 콕 박혀서 야동을 보고 섹스를 한다.
사나흘에 한번 미나에게 가서 하루나 이틀 정도 같이 있고 주변을 탐색한다.
일주일이나 이주에 한번 세아를 불러서 지금껏 잠겨서 못 열고 다니던 곳들을 열고 다닌다.
아주 추울 때 말고는 주변 탐색도 틈틈이 하며 겨울을 보내는 것.
그게 5년 차에 접어든 멸망한 세상에서 내가 하게 될 완벽한 겨울나기였다.
어제까지는.
오랜만에 본진에 와서 카메라를 돌려본 순간, 모든 계획을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벙커 앞쪽을 지나가는 한 무리의 인간.
그리고 그 무리의 맨 앞에서 당당하게 걷고 있는 정종찬. 그놈을 봐버렸으니까.
서둘러 카메라를 돌려봤다.
날짜는 3일 전. 가는 방향은…. 상동 쪽.
머리를 굴려본다. 저 새끼가 왜 저쪽으로 갔을까.
그것도 열 명 정도나 이끌고.
웃긴 건 놈들의 복장이었다.
이 지랄이 난 세상에서 정장이라니? 전부 다 정장을 입고 있던 녀석들.
무슨 조폭이야? 아니면 회사 연수라도 왔어?
웃긴 건 여자도 하나 껴있는데 여자도 정장을 입고 있다. 아주 지랄 났네. 지랄 났어.
카메라를 끝까지 돌려도 그 방향으로 가는 것만 나오고 돌아오지는 않았다.
물론 다른 길로 왔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상동 쪽으로 간 건 확실하다.
3일 전이라. 아직 있을까? 있어야 할 텐데.
급하게 준비를 하고 상동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3일 전이다. 게다가 상동이 조금 넓어야지.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돌아본다. 지금이 아니면 저 새끼를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근데 뭐였을까.
정장이라니? 단체로 대가리가 이상해지는 전염병이라도 걸렸나?
물론 정장이 멋은 있고 활동하기도 나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리고 지금은 구하기도 쉽고 뭐 이래저래 좋겠지.
근데 굳이 저 지랄을 할 필요가 있나?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저러고 다니는 거야?
일단 이틀 동안 상동을 돌아봤지만 역시 발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으. 아깝네. 3일이라니. 너무 늦었어.
무작정 하루를 더 돌아봤지만 역시 이래선 무리다. 아 씨발 열 받네.
찝찝한 마음에 돌아가려는데 번뜩 생각나는 곳이 있었다.
나연이와 희주가 있었던 씹쌔끼들의 아지트.
혹시 그쪽으로 간 게 아닐까? 아니어도 상관없지. 둘러보는데 이유가 있나? 가보면 되는 거지.
아지트 근처에 도착하니 인기척이 하나 느껴진다.
바로 옆집. 내가 침투했었던 그 루트.
누군지는 몰라도 씹쌔끼들이랑 연관이 있을 거다. 안 그러면 빈집에 저러고 있을 리가 없지.
일단 저쪽은 탐지가 아닌거 같다. 내가 가까이 가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적당히 어두운 밤이니 소리만 조심해서 집 근처로 다가갔다.
기척을 보아하니 2층이다. 창문에서 내려보고 있으려나?
밤인 데다가 담장에 붙어서 왔으니 육안으로는 내가 발견되지 않았을 테고…. 밖을 보고 있나? 확인해볼까?
기척은 그냥 방안이다. 창가에서 이쪽 밖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뭐지? 왜 저러고 있는 거야?
2층에 난 창문. 저기 얼굴이라도 보이면 바로 재울 수 있을 거 같은데.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대문 옆에 몸을 숨기고 그 틈으로 2층 창문이 잘 보이는지 확인한 다음 돌멩이 하나를 창문 쪽으로 던졌다.
탁!
깨질 정도는 아니고 그저 유리에 맞고 떨어질 정도.
씨발 사람인 이상 이러면 내다보지 않을 수가 없겠지.
역시 얼굴 하나가 창문 쪽으로 쓰윽 나타났고, 나는 바로 재웠다.
슬쩍 보였던 얼굴이 사라졌다.
과연? 잠들었나?
반사 당한 것은 아닌거 같고 저놈의 움직임도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돌을 던졌다.
창문 옆의 벽에 맞고 떨어지는 돌. 에이 씨발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던지네.
하지만 움직임은 전혀 없다.
보이기라도 하면 시간이 뜨니 자는지 알 수 있을 텐데.
다시 한번 돌멩이를 던졌다.
이크. 이번엔 너무 세게 던졌는지 창문에 살짝 금이 간 게 보였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녀석. 이정도면 잠든 거라고 봐야지.
안으로 들어간다.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갔지만 역시나 움직임이 없다.
어딘가 트랩이 깔려있을지도 모르니 최대한 기상천외한 움직임으로 2층으로 향한다.
누가 보면 존나 병신같다고 웃겠네.
어쩔 수 없잖아. 트랩 밟고 뒤지는 것보단 최대한 바닥을 안 밟으며 가는 게 낫지.
조심히 방문을 열고 거울로 안을 들여다보니 한 남자가 쓰러져있다. 그리고 시간도 보인다.
자고 있네. 그럼 됐지 뭐.
방 입구까지 확실히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가 남자를 살펴봤다.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
나이는 30대 후반 정도? 뭐, 남자의 나이 따위 알 바 아니지.
일단 테이프 질을 했다.
오랜만에 테이프 질이네. 한동안 안 했는데.
팔, 다리, 몸, 눈을 확실히 테이프 질 하고 방 안에 있는 침대를 세워서 남자의 앞쪽을 막았다.
그리고 자는 남자의 조인트를 깠다.
한 번에 안 일어나길래 두세 번 더 까버리니 그제야 몸을 꿈틀거린다.
"크으…. 뭐야!"
혹시나 광역기일 수 있으니 침대 뒤로 숨어 머리만 내놓고 남자에게 말했다.
"아저씨. 물어볼 게 있으니 대답해줄 수 있어?"
"씨발…. 넌 뭐냐."
"지금 처지를 이해 못하는 거 같은데, 아저씨 그러다 죽어. 그러니 물어보는 말에 순순히 대답해."
"크크. 지랄 마라. 죽는 건 너지."
탐지에 걸리는 건 아무도 없다. 새끼 허세는.
"아저씨. 지금부터 헛소리 한번 할 때마다 정강이뼈가 남아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잘 생각하고 대답해. 아저씨 스킬 뭐야."
"조까."
약속대로 정강이를 발로 찼다.
"크윽."
이래도 얼음 회오리나 번개 파동 같은 걸 안 쓰는 거 보면 일단 그런 스킬은 아닌거 같고.
"아프지? 그러니 잘 생각하고 말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스킬은 뭔지."
"크크크. 좇이나 까 잡수라고."
"어휴. 씨발 맞는 걸 좋아하는 변태일 줄은 몰랐네."
조인트를 한 번 더 까니 좋아 죽는다.
아주 좋아서 데굴데굴 구를 기세.
나는 그런 남자를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씹쌔끼들의 아지트 옆에서 이러는 것은 분명 그들과 상관이 있을 거다.
근데 왜 혼자일까? 이 새끼도 정장인 거 보면 정종찬 그 새끼랑 상관있는 거 같은데.
"그냥 속 시원하게 알려주면 안 돼? 혹시 알아? 목숨이라도 건질지?"
"조까라고. 새꺄. 살려줄 생각도 없으면서 야부리는. 븅신이."
"하아. 왜 이렇게 생을 쉽게 포기하는 새끼들이 많을까."
"등신 새끼. 죽일 거면 빨리 죽여라. 이 좇같은 세상 더는 안 봐도 되게."
이런 새끼들이 제일 싫다.
술술 정보 좀 불어주지…. 사람 피곤하게.
역시 정보는 여자를 잡아서 매혹시키는게 가장 편해. 옛날엔 이 짓을 어떻게 했나 몰라.
아무리 봐도 이 새끼는 뭘 말해줄 놈이 아니다.
제일 번거로운 타입. 죽을 때도 곱게 안 죽는 새끼들.
그럼 뭐 어차피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흔들어 봐야지. 손해볼건 없으니까.
"하. 아저씨 제법 기개 있는데? 근데 정종찬 그 새끼는 왜 아저씨를 죽이라고 했을까? 자기 일에 방해됐나? 아저씨 말 좀 해봐. 정종찬이랑 무슨 원수졌길래 그래?"
그럴 리 없다. 그냥 내가 지어서 한 말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효과는 좋았다. 조금 전까지 죽음을 각오한 남자가 말을 더듬을 정도로.
"정…. 정 차장이 나를?"
"그래. 내가 원래 죽을 사람한테 이런 거 궁금해하는 성격은 아닌데 정종찬이 그 새끼 하는 건 관심이 조금 있어서 말이야. 그러니 말하고 죽어줘라. 아저씨 정종찬 그놈 약점 쥔 거 있어? 처리하라고 하는 거 보면 뭔가 큰 거 잡고 있나 본데?"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아무 말이 없는 남자.
"설마 정종찬이 그럴 리가 없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정종찬을 어떻게 알까? 아저씨가 여기 있는걸 어떻게 알까? 현실을 직시해. 아저씨는 배신당한 거야."
"씨발. 그럴 리가 없어…."
"와 정종찬이가 사람 구워삶는 건 기가 막히게 한다더니 역시 대박이네. 이 지경이 됐는데 믿음을 잃지 않고 있어? 하. 그 새끼 약점 좀 알아낼까 했는데 안 되겠네. 암튼 뭐 아저씨 표정 볼만했어. 그럼 이제 잘 가."
"자…. 잠깐!"
"아. 왜 또. 그냥 곱게 죽으면 안 될까?"
"살려줘. 그럼 정종찬이가 주기로 한 거 두 배로 주마."
정종찬이 주기로 한 거? 그런 거 없는데…. 뭐라고 하지? 아. 그래. 좋은 게 있네.
"아저씨가 구할 수 있을 거 같진 않은데?"
"웃기지 마. 정 차장이 구할 수 있는 거면 나도 구할 수 있어."
"진짜? 아저씨도 프로포폴을 구할 수 있어?"
"뭐? 이 씨발…. 이젠 못 구한다더니…."
"못 구하긴. 아저씨 진짜 아는 거 하나도 없구나? 정종찬이 여기 왜 왔는지는 알아?"
아무 말도 못하는 남자.
"하…. 진짜 아저씨도 아는 거 하나도 없구나? 그럼 원장도 모르겠네."
"워…. 원장? 네가 원장을 어떻게?"
"어? 뭐야. 원장은 또 알아?"
예전에 희주에게 들었던 내용들.
아무렇게나 막 던지고 있는데 알아서 듣고 호응해준다. 이런게 먹히다니…. 신기하네.
"네가 원장을 아는 게 더 신기한데!?"
"나야 원장의 훌륭한 고객이니까. 근데 아저씨가 프로포폴을 구할 수 있다고? 에이. 농담도."
"그래…. 그건 힘들어. 하지만 다른 걸 주마! 그러니 살려줘."
"글쎄. 다른 건 필요 없는데? 프로포폴도 딱히 크게 필요 있는 건 아니라."
"씨발…. 씨발! 정 차장 그 개새끼가!!!"
어떻게 할까. 이 아저씨를 살려놓고 놔두면 정종찬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 거 같은데…. 고민이네.
"좋아. 그럼 하나 제안할 게 있어."
"말해라. 살려만 주면 뭐든지 말하지."
"근데. 아까까지만 해도 죽음에 초연하더니 갑자기 왜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 치는 거야? 아까 그건 허세였어?"
"기왕 죽을 거면 이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 차장, 아니 정종찬이 멱살을 잡고 왜 그랬냐고 따지고 죽어야지."
"어이구. 마음대로 하세요.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음…. 어디 보자."
내가 잠시 주저하자 남자의 표정이 약간 불안하게 바뀐다.
당장이라도 내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저러는 거겠지?
"정종찬이 옆에 있던 여자. 이름이 뭐야?"
"...이 대리?"
"아. 이 대린지 뭔지는 모르고. 당신네 이번에 온 사람 중에 여자 하나 껴있잖아."
"설마. 이 대리도 정 차장 편이야?"
"아오씨. 자꾸 딴소리할래? 네 편 내 편인지는 뭔지 모르겠고! 근데 무슨 대리니 차장이니 그 짓 계속 해야 해? 존나 병신같은데?"
"...어쩔 수 없다. 컴퍼니 소속인 이상 직급은 확실하게 해야 하니까."
"아오. 지랄 염병을 하네. 세상이 이 꼴이 났는데도 무슨 회사놀이야. 병신들이. 정종찬 그 새끼는 회사는커녕 취업 시도도 안 해본 새낀데 차장은 개뿔이."
"너…. 정 차장 그 새끼에 대해 잘 아는군."
"아오. 병신같은 아저씨야. 그놈이 내게 와서 이런 거래도 하는데 설마 그 새끼를 모르겠냐? 생각 좀하고 말해라. 생각 좀. 암튼 좀 지랄 말고 그 이 대린지 뭔지 하는 여자 이름을 말하라고!"
"이은미다."
"흐흠. 이은미. 나이는?"
"몰라. 한 스물다섯 정도."
"그래? 스킬은 뭔지 아나?"
"진동파. 근데 이 대리는 왜 물어보지?"
"아. 그건 알 필요 없고. 한 가지만 더 말해주면 진짜로 살려주지. 적어도 나한텐 프로포폴보다 더 가치 있는 정보일 테니까."
"말해봐."
"그 여자. 이은미랑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