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22화 (12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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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

세아와 밖으로 나섰다.

텅 빈 거리, 텅 빈 도시.

멸망한 세상을 한가로이 거니는 살벌한 데이트.

"뭐 필요한 건 없어?"

"많죠. 옷도 필요하고 속옷도 모자라고 이것저것 없는 거투성이인데."

마음을 열었다고 갑자기 세아의 말투나 행동이 확 변할 리는 없다.

투덜거리는 것도, 사이에 벽을 두는 것도 여전하다.

다만 예전보다는 많이 말투가 부드럽다는 것?

그전에는 한 3m 정도 되는 벽이었다면 지금은 가슴께 정도 오는 안쪽이 보이는 벽이라는 것?

"따라와."

"어디 가는데요."

"쇼핑."

마트도 좋지만 좀 물건이 많은 곳으로 가봐야겠다.

세아를 데리고 지하철역에 붙어있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여기라면 뭔가 많이 있겠지.

"백화점…. 별로 좋아하는 곳은 아닌데."

겨우 들릴 정도로 중얼거리는 세아. 이크. 생각해보니 그렇네.

나는 세아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함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무언의 격려.

하지만 세아는 손을 잡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말한다.

"징그럽게 왜 갑자기 손은 잡고 그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잡은 손을 놓지는 않는다.

어휴. 정말…. 자꾸 그렇게 귀여우면 이 자리에서 덮쳐버리는 수가 있어.

사람이 없는 백화점은 조금 을씨년스럽다.

뭐 그건 어디나 마찬가지긴 하지만 여기는 유독 심하다.

화장품과 고가의 매장들이 있던 1층은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있다.

여기가 이렇게 될 이유가 있나? 이유를 모르겠네.

"위로 가자."

1층에 비해 2층 여성 옷 판매장은 마치 그때 그 시간에서 멈춘 듯 깔끔하다.

하긴 이쪽을 약탈하거나 할 이유가 없긴 하지. 지하 식품관이면 모를까.

"여긴 볼일 없어요. 위로 가죠."

"응? 왜?"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세아.

아. 여기선 입을만한 옷이 없나 보다.

세아가 향한 곳은 6층. 영 앤 스포츠, 아웃도어용품 이라고 적혀있는 층.

세아는 올라오자마자 바로 스포츠 브랜드 매장으로 간다.

진열되어있는 백팩을 하나 꺼내더니 후드티와 츄리닝을 살펴보며 사이즈가 맞는 옷들을 부지런히 담는다.

"그런 옷만 입는 거야?"

또다시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더니 입을 연다.

"보시다시피 몸이 이런 체형이라."

"그게 어때서. 좋기만 한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계속해서 옷을 담는 세아.

한쪽에서 스포츠 속옷을 발견하고는 신중하게 고르며 백팩에 넣는다.

참 어렵게 사는구나.

한 번도 속옷 고르면서 고민해본 적이 없으니 저런 게 이해가 갈 리가 없지.

"저런 곳에서는 속옷 없어?"

내가 여성 속옷 브랜드 매장을 가리키며 말하자 힐끔 바라보더니 다시 하던 일에 열중하며 말한다.

"네.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런 거 못 입어요. 제 스타일이 아니라. 사이즈도 없고."

"그래? 아쉽네. 저런 거 입으면 보기 좋을 텐데."

"아이고. 내가 뭐 그쪽 보기 좋으라고 속옷 입어요?"

"그러네. 내 생각이 짧았네."

에스컬레이터 옆에 마련된 의자에 한가롭게 앉아서 세아가 옷을 고르는 것을 기다렸다.

한참을 옷을 고르던 세아는 빵빵하게 가득 찬 백팩을 매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다 골랐어?"

"대충요."

저게 대충이라고? 역시…. 여자들이랑 쇼핑을 가면 안 돼.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야.

"있어 봐요."

그렇게 말하더니 세아는 내가 말했던 속옷 브랜드로 들어갔다.

"어? 거긴 뭐 없다며?"

"아. 그냥 좀 기다리고 있어요."

매장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것저것을 살펴보며 한참을 뒤진다.

오래 걸리려나…. 뭐가 저렇게 깐깐한 거야 대체.

매장을 거의 뒤집어놓고서야 뭔가를 자신의 후드 주머니에 넣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내 쪽으로 돌아온다.

"뭐 건졌나 보네?"

"아. 진짜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으실까?"

알몸도 서로 보여줘 놓고 겨우 속옷으로 저러는게 이해가 안 가지만, 그래도 저게 여자의 마음이겠지.

사실 남자들은 여자들 속옷 같은 거 전혀 신경도 안 쓰는데 말이야.

뭐든 벗기는 과정이 좋은 거지 속옷 색이나 모양 같은 건 기억도 못 한다고.

음. 다음에 만날 때는 기대를 해봐도 좋으려나? 나름 신중하게 고른 거 같은데.

백화점을 내려가며 나는 세아에게 말했다.

"세아야."

"왜요."

"두번째 스킬을 배우려면 조건이 있어."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말해 봐요. 뭔데요?"

"첫 번째 스킬의 숙련도 마스터랑 대량의 코인."

"코인? 얼마나요?"

"글쎄. 쓸만한 스킬은 20만이나 30만 정도."

"...미쳤네."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두번째 스킬을 배우려면 많은 코인이 필요하지. 근데 이 세상에선 코인을 구할 수 있는 경우는 딱 하나밖에 없어."

"알아요. 그래서요?"

"할 수 있겠어? 네가 강해지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걸?"

"하아. 정말 빌어먹을 세상이네요."

잠시 말이 없는 세아.

"근데 죽이니 어쩌니 해도 나는 죽일 방법이 없는걸요."

"당연히 내가 떠다 먹일 생각이지. 숟가락으로 떠서 입 바로 앞까지."

물류센터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탐지 스킬 정도는 하나 있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승규의 딸에게 탐지를 배우게 하고 싶지만…. 그 아이는 너무 어린이다.

사람다운 행동을 하려면 아직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하고, 과연 그때까지 모두 살아있을지도 의문이다.

감전 스킬이 있는 승규가 코인을 벌기는 더 쉽겠지만, 모든 권력을 승규에게만 몰아주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짓은 아니지.

어떻게든 나눠서 서로 견제도 하고 힘을 합치기도 해야 물류센터가 제대로 돌아갈 테니까.

"하아. 쉽게 말할 내용은 아니네요."

"될 수 있으면 너희들에게 가혹한 일을 강요하고 싶진 않아. 하지만 그러면 결국은 약해지겠지. 팔자 좋은 소리를 하고 있을 때는 아니니까. 솔직히 말해서 내가 마음먹으면 물류센터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가서 다 죽인다고 해도 몇 시간 안 걸려. 그런 꼴을 당하기 싫으면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야. 무슨 짓을 해서도 힘을 기르고 그 힘을 바탕으로 안전을 도모해야 해."

담담한 나의 말에 세아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내 말이 허풍이 아닌 것을 잘 알겠지. 눈앞에서 자신이 악몽처럼 생각했던 놈들이 순식간에 세상을 뜨는 것을 지켜봤으니까.

"못할 것은…. 없죠. 나도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하니까."

"좀 더 생각해봐. 고민이 되면 리더하고도 이야기해 보고. 남자라서 말하기 조금 부담스러운가?"

"나도 필요하면 대화 정도는 해요. 사람을 환자로 만들지 말라고요."

"그래. 좋은 자세야. 스스로를 가두고 살 필요는 없지. 너를 괴롭히던 놈들은 다 죽었으니까. 그놈들이 문제였지 남자가 모두 잘못한 것은 아니잖아."

"팔자 좋은 소리 하시네요. 그쪽은 남자니까 이해 못 하지."

"아니. 이해하지. 나는 따지고 보면 가해자인걸. 네게 그런 짓을 했던 그놈들 같은."

내 말에 세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굳이 좋은 관계를 만들어 놓고 이런 걸 모두 나불거리는 것은 초를 치는 행동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세아도 알아야 할 내용이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미리 맞는 게 훨씬 낫지.

승희나 미나에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구구절절하게 알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녀들을 이끌고 사람을 쳐 죽이러 다닐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하지만 세아는 다르다.

나는 그녀를 단지 섹스 파트너 정도로 두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필요할 때는 함께 다니며 같이 전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고 싶다.

졸지에 츤데레 로리 거유 하프미소녀 육성 시뮬이 되겠지만 언제까지고 나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낼 수는 없으니까.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형편없는 쓰레기고 나와 함께 다니다 보면 그런 모습을 자주 보게 될 거야. 그러니 잘 생각해봐. 적당히 선을 지키면서 가끔 내가 필요한 일에만 도움을 주던가, 아니면 선을 완전히 넘어와서 나와 함께 더러운 꼴을 보던가."

세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긴 당장 대답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어차피 나도 바로 지금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전동휠을 타고 물류센터로 돌아간다.

선선한 10월의 바람과 높고 푸른 하늘은 전동 휠을 타고 다니기엔 제법 좋은 날씨다.

옷을 잔뜩 넣은 가방이 무거워 보여 내가 들어준다고 했더니 세아는 코웃음을 쳤다.

"고작 이 정도 가방도 못 들고 가면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겠어요?"

그래. 저런 마음가짐.

내가 세아를 좋아하는 이유다.

생존에 완전 특화된 스킬도 아니면서 연약한 몸으로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남은 것에 대한 존중이랄까.

그런 부분을 높게 평가하는 거고, 저런 근성을 인정하는 거다.

물류센터에 거의다 와 갈 때쯤 진영이가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UTP 케이블. 아 그걸 안 찾아봤네. 뭐…. 가게가 안 보였으니까 어쩔 수 없긴 한데.

이제 와 돌아갈 수도 없고…. 어차피 진영이랑도 한번 나가야 하니까. 나중에 구하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세아가 천천히 전동휠의 속도를 줄였다.

"어? 왜?"

완전히 멈춘 세아가 전동휠에서 내렸다.

나 역시 어리둥절하며 전동휠에서 내렸고, 세아는 그런 내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오빠."

"오."

"아. 이상한 소리 할 거면 나 말 안 해요."

"알았어. 입 다물고 있을게."

내가 빠르게 꼬리를 내리자 만족한 듯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오는 내내 생각해봤어요.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오빠 말은 틀린 게 없으니까. 그러니 하라는 대로 할게요. 뭘 하면 돼요?"

세아의 말에 나는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똑똑한 여자다. 그리고 나는 저 당당함이 좋다.

"잘 생각했어. 일단은 곧 겨울이니 자주 나가진 못할 거야. 일단은 혼자서 스킬을 마스터 하는 걸 목표로 해. 포션 같은 거 없이 날마다 쓸 수 있는 한계까지 잠금 해제 스킬을 써. 자기 전에 하는 게 좋아. 그러면 푹 잘 수 있으니까."

"그리고요?"

"일단은 그걸 목표로 해. 그리고 내가 탐색 나갈 때 같이 나가면 되고. 그건 조금 천천히 하자. 급하게 할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그리고….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너무 신경 쓰지는 말고."

"알겠어요."

세아는 다시 전동휠에 올라타려다가 다시 나에게 와서 말했다.

"잠깐 귀 좀 대봐요."

"아니 둘밖에 없는데 무슨 귓속말을 하려고."

"대라면 좀 대봐요."

나는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귀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세아는 내 얼굴을 잡고 그대로 나에게 키스했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러더니 세아는 전동휠에 오르지 않고 내게 말한다.

"이대로 들어갈 테니 따라오지 마요."

"아니, 그래도 입구까진…."

"제발 한번 말하면 좀 들어요. 나 따라오면 방금 일 없던 거로 할 거야. 부르는 호칭도 다시는 그렇게 안 부를 거고."

"협박이 너무 무서운데."

"알아들었으면 가요. 갈게요."

그렇게 몸을 돌려 그대로 걸어가는 세아.

몸을 돌리기 직전 얼굴이 빨개진걸 본 거 같은데…. 그래서 저러나.

세아가 한 협박이 나름 무서워 나는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탐지를 켜서 세아의 기척을 확인했다.

저 끝에 걸리는 건 아마 물류센터 입구를 지키는 진영이나 다른 놈일 거고…. 세아는 열심히 걸어가 물류센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것 참…. 단순히 야동 구하러 나왔다가 더 많은 것을 얻어가는 기분이다.

귀여운 녀석. 앞으로 탐색 나가는 게 심심하지는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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