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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
"그래서. 뭘 하라고요?"
"오피스텔 문을 열라고."
"그러니까 어디요."
"무슨 소리야."
"몇 호 열면 되냐고요."
"뭘 몇 호야. 전부 다 열라고."
"에엑? 전부다?"
"그래. 시간 좀 걸릴 테니 부지런히 하자. 따라와."
"아니! 잠깐만! 이 많은 오피스텔 문을 어떻게 다 열어요? 내가 열 수 있는 건 하루에 많아 봐야 20개라고요!"
"나도 알아. 알고 있으니까 잔말 말고 하기나 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세아.
어쩜, 무슨 표정을 지어도 귀엽네.
승희랑 하고 오지 않았으면 일단 덮치고 시작했을 뻔했어.
예전에 2층이랑 3층을 뒤져 봤었으니 4층으로 올라가 하나씩 문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이거 열어."
"해제."
문이 열리는 걸 확인하고 다음 집으로 넘어간다.
어. 여기는 안 잠겨있네. 패스.
다시 다음 집. 잠겨있네.
"여기 열어."
"해제."
뚱한 표정이지만 시키는 대로 문을 연다.
4층의 문을 다 열고 위로 올라가려는데 세아가 지쳐 쓰러지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더…. 더는 못해요. 허억. 허억."
나는 회복 포션 소를 하나 사서 세아에게 건네줬다.
"마셔."
"에?"
"마시라고. 왜 여러 번 말하게 하는 거야?"
의심스러운 듯 인상을 쓰며 나를 바라보지만 어쨌든 마시긴 마신다.
매혹이 걸렸는데도 저런 표정을 짓다니. 정말 대단한 여자야.
"어어?"
회복 포션의 효과는 확실하다.
제일 작은 회복 포션만 먹어도 피로 정도는 깔끔하게 회복된다는 것은 이미 내가 수백 번을 먹어보고 확인한 사항이다.
"이거…. 뭐에요?"
"회복 포션 소."
"아…. 이게? 헉. 근데 이거 2,000코인짜리 아니에요?"
"맞아."
"아니 이 비싼 걸 대체…."
"회복됐으면 따라와."
5층으로 가서 다시 반복한다.
문을 열어보고 안 열리면 세아에게 열게 하는 간단한 작업.
그렇게 5층도 다 열고 6층에서 회복 포션을 하나 줬다.
마시기 전에 주저하는 세아.
"미친 거 아냐? 그쪽은 코인이 썩어나요?"
"왜 또."
"아니, 무슨 포션을 물 마시듯이 먹게 하냐고! 한두 푼짜리도 아니고!"
"너 코인 얼마 있냐?"
"5만 천요."
"그거 전에 백화점에 있던 놈들 죽이고 나온 거지?"
"...네."
"그럼 걔들 죽이기 전엔 얼마 있었는데?"
"500…. 요."
아. 맞다. 사람은 처음 죽이는 것처럼 보였지.
죽일 능력도 없었고.
그래. 뭐 이해한다. 코인이 별로 없었던 녀석이니 2천 코인에 저렇게 바들거리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너 스킬 숙련도는 몇 퍼센트야?"
"72퍼센트요."
어휴 많이 올렸네. 금방 두번째 스킬 올릴 수 있겠어.
그러려면 사람을 죽이게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진 않겠지만 말야.
그건 뭐 나중에 천천히 설득해 보고.
"코인은 신경 쓰지 마. 이 정도는 별로 티도 안날만큼 있으니까. 그러니 주는 대로 먹고 문이나 열어."
"대체 여기 뭐가 있길래 이렇게 전부 문을 여는 거예요?"
"그건 알 거 없고."
야동 찾으려고 이런다는 걸 말할 수는 없잖아? 뭔가 그럴듯한 핑계가 있으면 좋겠지만 생각나는 게 없다.
이럴 땐 그냥 뭔가 있어 보이는 척하고 입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지.
어떨떨한 표정으로 포션을 들이킨 세아는 다시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렇게 10층까지 문을 열었더니 세아의 상태가 살짝 안 좋아졌다.
살짝 비틀거리는 세아. 포션을 받고도 마시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
"몸 상태가 안 좋나?"
"됐어요. 계속하죠."
"계속하기는."
포션을 안 먹어봤을 테니 저러는게 이해가 간다.
떨어진 체력이 포션으로 다시 회복됐다지만, 그게 정상적인 상태일 리가 없다.
사람 몸은 데이터 쪼가리가 아니라서 회복됐다고 바로 그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요즘은 사실 우리가 모두 데이터 쪼가리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긴 한다.
스킬이 적용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잖아.
마치 게임이랑 다를게 없는 세상인데.
하지만 나는 데카르트가 말한 것을 믿는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적어도 세상을 의심하고 나 자신을 의심하는 나는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생각하는 나까지 데이터로 구현된 거라면 할 말이 없게 되긴 하지만.
"좀 쉬자."
나는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나도 발 있거든!? 누가 함부로 만지래!"
"나도 알아. 너 발 있는 거."
세아는 매혹이 풀려있기에 내가 안아 들자 나보고 뭐라고 하긴 하지만 심하게 저항하거나 거절하진 않는다.
나는 아까 봐둔 오피스텔 방중 가장 깔끔한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옷장 하나.
그 외에 잡다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는 방.
살았던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다. 대체 이 방의 주인은 뭐 하는 사람이었을까?
"좀 누워 있어."
세아를 침대에 눕혀주고 신발을 벗겨서 현관에 놨다.
내가 신발을 벗기려고 발목을 만지자 질색을 했지만, 표정만 그럴 뿐 순순히 내가 하는 대로 따른다.
책상에 있는 의자를 벽에 붙여 놓고 거기에 앉았다.
나를 힐끔 보더니 다소곳하게 누워 있는 세아.
"상태가 나아지면 뭘 좀 먹자. 먹고 싶은 건 있나?"
"폭립."
"아쉽네. 그런 건 없어."
"햄버거."
"그건 나도 먹고 싶다."
"돈가스."
"그것도 좋지. 다음엔 뭐냐? 제육? 국밥?"
"아저씨 같은 메뉴네."
"지금은 의미 없지만, 남자한테 '뭐 먹을래?'라고 물어봤을 때 남자가 '아무거나'라고 대답하면 돈가스, 제육, 국밥. 셋에 하나 먹으러 가면 실패하지 않아. 그냥 알아두라고."
"갑자기 뜬금없이 그게 무슨소리야?"
"그냥 헛소리지 뭐."
"이상한 사람이네."
세아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몸을 일으켜 세운다.
"더 누워 있어. 배고파서 그래?"
"아뇨. 잠깐 이리로 와볼래요?"
"왜?"
"아. 그냥 이리 와봐요. 물어보지 말고."
내가 다가가자 침대 한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앉아봐요."
"거기 말고 여기요. 벽에 등지고 다리 펴고 앉아봐요."
세아가 말한 대로 앉으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 허벅지를 베고 옆으로 눕는다.
"조금 높네. 그래도 이 정도면 뭐."
"뭐 하는 거야?"
"아. 베개가 없어서."
"저기 있잖아."
"저건 누가 썼는지 모르잖아요. 찝찝해요."
"내 다리는 안 찝찝하고?"
"베개보단 나으니까."
웃기는 여자애야. 라이브로 츤츤거리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하다.
그래도 속으론 기분이 좋았다.
지금은 매혹이 걸려있지 않은데도 베개 핑계를 대며 내 다리를 베고 있는 세아의 모습.
어쨌든 나에게 마음은 열었다는 소리니까.
물론 매혹을 걸지 않고도 섹스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하겠지만….
음. 지금도 가능한가? 조금 밀어붙이면 가능할 거 같긴 한데…. 모르겠다.
여자 마음에는 젬병이라 뭐가 됐든 내가 생각하는 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겠지.
미나를 운 좋게 성공했다고 자만하면 안 되잖아?
누워 있는 세아의 목덜미가 보였다.
뒷머리에서 목으로 떨어지는 라인. 부드러워 보이는 솜털.
여자들은 이 부분이 참 매력적이다. 보기만 해도 약간 설렌달까?
평상시에 잘 안 보이는 데다가 함부로 손을 대기 힘든 부분이라 그런 거 같다.
다른 이유가 있나? 잘 모르겠네. 어쨌든 참 매력적인 부분이야.
그래서 포니테일이 좋은 걸지도. 목선이 다 드러나니까.
나도 모르게 손끝으로 세아의 목덜미를 살짝 만졌다.
"으힉!"
마치 고양이가 펄쩍 뛰듯이 몸을 튕겨 일으키며 나를 노려보는 세아.
"아. 미안."
"아! 뭐 하는 거야! 아오. 깜짝이야. 어우 소름 돋아."
거 반응 한번 격렬하네. 그 정도로 펄쩍 뛸 일인가?
"미친 거 아냐? 왜 함부로 만지고 그래?"
"미안하다고 했잖아."
"아오씨. 미안하다면 다인가. 아직도 소름이 안 가라앉네."
그러더니 나를 흘겨보고는 다시 내 허벅지를 베고 눕는다.
이번에는 나를 등지고 눕는 게 아니고 똑바로 눕는 세아.
"뭐야. 결국은 또 눕네."
"아. 베개가 없잖아. 베개가!"
하는 짓 참…. 귀여워 죽겠네. 저 말하는 것만 좀 사근사근하면 더 나을 텐데.
아닌가? 저런 외모로 저렇게 츤츤거리는게 매력이지. 그게 사라지면 매력을 잃는 거랑 마찬가지잖아?
눈을 감고 아미를 약간 찡그린 채 누워 있는 세아.
방의 불이 눈부셔서 그런가? 머리가 아픈가?
몸을 살짝 기울여 내 머리로 세아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준다.
"뭐 하는 거야?"
"눈부신 거 같아서."
"하. 별걸 다 신경 쓰네."
말은 그렇게 해도 찡그리고 있던 얼굴이 펴졌다.
정말 솔직하지 못한 여자야. 노리고 하는 것은 아닌거 같은데.
말 그대로 천연 츤데레네. 훌륭한 자연산 츤데레야.
눈을 감고 있는 세아의 얼굴은 확실히 어려 보였다.
피부가 아기 피부처럼 깨끗하다. 화장 같은 걸 전혀 안 한 얼굴인데 피부가 이렇게 깨끗하다니.
아마 어려 보이는 가장 큰 이유가 저 피부 때문인 거 같다.
한 번도 여드름 같은 게 나본 적 없을 것 같은 피부.
마치 조선 시대 백자 같은 얼굴이다.
매끄럽고 하얀 얼굴.
"계속 그렇게 보고 있으면 신경 쓰이는데."
"눈 감고 있는데 어떻게 알아?"
"그쪽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눈감아도 알 수 있을 정도야."
"신기한 능력이네. 근데."
"??"
"왜 또 은근슬쩍 말을 놓는 거야? 게다가 언제까지 그쪽이라고 부를 건데?"
"칫. 예민하기는. 이게 다 그쪽이 내 목덜미를 건드려서 그런 거 아냐!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그리고 왜 그렇게 연장자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거야? 어차피 다 같이 망한 세상인데."
"글쎄. 더 나은 게 나이 더 먹은 거밖에 없으니 그거라도 지키려고 그러는 거지."
"할 줄 아는 거 엄청 많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글쎄. 사람 죽이는 거? 그건 잘해도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니잖아."
"어떤 사람을 죽이느냐 문제지. 적어도 나한테는 칭찬받을 만한 사람인데."
"그건 다행이네. 너한테만 칭찬받으면 됐지."
내 말에 고개를 획 돌리더니 팔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세아.
"왜?"
"그러고 있으면 자세가 불편할 거 아냐! 편하게 앉으라고요."
팔로 가린 얼굴이 약간 불그스름해져 있는 게 보였다.
아오. 귀여운 자식. 미치겠네.
손을 대고 싶지만, 일단은 참는다.
다 익어가는 밥을 뜸이 다 안 들었는데 벌써 뚜껑을 열려고 하는 건 병신 머저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