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11화 (11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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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뭐야?

세상이 망한 지 4년.

이제 5년 차에 접어들면서 양상이 많이 변하는 것 같다.

세상에 남아있던 음식들은 이미 유통기한이 다했다.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것들은 통조림 같은 것들. 아니면 밀봉이 잘되어 있는 음식들.

그런 것들도 이제 시중에 있는 것들은 거의다 소모가 되어 남아있지 않다.

마트나 식자재마트, 편의점, 슈퍼 같은 곳을 아무리 뒤져도 이젠 식료품을 구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

자체적으로 식량을 생산하던가, 아니면 끊임없이 사람을 죽이면서 코인으로 음식을 사서 연명하던가.

도시는 그 이점을 잃었다.

그게 아마도 점점 사람들을 보기 힘들어지는 이유겠지.

어쨌든 나에겐 그다지 문제가 될만한 상황은 아니다.

아직은 코인도 넉넉하고 MRE도 넘쳐나며 물류센터도 있다.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니 생활에 그리 조급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놀 수는 없지.

게으름은 날이 추워지고 겨울이 되면 피우자.

움직이기 딱 좋은 계절이니 부지런히 벌어 놔야지.

전동 휠을 타고 도로 위주로 돌아다니며 텀을 두고 탐지를 돌린다.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 도시. 미나가 있는 아파트로 가서 주변을 돌고 다시 물류센터 주변을 돈다.

이렇게 사람이 없어서야 물류센터에 있는 사람들은 스킬을 마스터 해도 두번째 스킬은 힘들겠어.

그리고 그건 비단 물류센터의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닐 거다.

살아남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

두번째 스킬을 코인까지 주고 허접스러운 걸 배울 놈은 없을 거다.

최소 20만에서 30만은 있어야 할 테고 그 정도 코인을 모으려면 그야말로 학살을 하고 다녀야 한다.

생계유지도 해야 하니 벌어야 하는 코인은 더 많다.

쉽게 모으기 힘든 양의 코인.

그게 멀티 스킬이 없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스킬 마스터도 마스터지만 코인이 가장 큰 문제니까.

사람을 죽이기 위해 돌아다니면 자신이 죽을 확률도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그야말로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

주사위를 두 개 가지기 위해서는 하나 있는 주사위를 계속 6을 띄워야 하는 거랑 마찬가지다.

실력이 좋고 스킬도 좋고 운도 좋아야 한다. 그런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

어쨌든 적어도 스킬이 세 개나 있는 나는 이 세계에서 나름 강력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가진 스킬들도 군더더기가 없는 스킬들이잖아? 생존을 위해서 딱 필요한 스킬들만 가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네 번째 스킬은…. 반사를 얻어야겠지?

목표 타겟 단일 스킬을 모두 막아줄 수 있는 스킬.

첫 번째 스킬로 반사를 골랐다면 생존 하드 모드였겠지만, 지금 나 같은 경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스킬이다.

반사만 얻는다면 타겟을 지정하지 않는 광역 스킬 말고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게다가 반사는 숙련도 올리기도 쉽다.

지속시간을 전부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해제 후 다시 반사를 걸 수 있다는 것은 희주 덕분에 알게 됐다.

미친 듯이 숙련도 쌓기가 가능하다는 소리지.

그리고 필요한 건…. 상대의 반사를 무효화시키는 스킬.

이것도 시급하다. 언제까지 상대가 반사가 아니길 바라면서 잽 날리듯이 수면을 걸 수는 없어.

그러다가 운 나쁘게 반사된 수면에 한방에 잠들게 되면 내 인생은 끝이니까.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이 찝찝함을 계속 안고 살 수는 없다.

상대가 반사일 확률 x 켜놨을 확률 x 반사된 수면에 내가 한방에 잠들 확률이 아무리 낮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찝찝한 건 찝찝한 거야. 요즘 들어서는 크게 신경 안 쓰고 쓰긴 하지만.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일단 지금까지 나온 스킬엔 없단 말이야?

뭐…. 새로운 스킬들이 계속 나오는 거 보니 언젠간 나오긴 하겠지.

없으면 말고.

여전히 사람은 코빼기도 찾을 수 없다.

조금 탐색 범위를 늘려야 할까?

전동 휠이 있다지만 탐색 범위를 넓히면 많이 번거로워지는데….

일단 돌아보자. 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범위를 늘려도 사람은 없다. 진짜 다 죽여버렸나?

그렇게 2주가 지났다.

"그거 알아요? 오늘이 추석이래요."

뜬금없는 승희의 말.

"추석? 아아. 근데 이제는 뭐 상관없잖아?"

"그렇죠. 근데 추석 하니까 송편 생각이 나는 거 있죠. 막상 옛날엔 잘 안 먹었는데 못 먹게 되니 먹고 싶어져요."

"송편…. 맛있지. 구할 수가 없는 게 문제지만."

"그러게요.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근데 송편은 뭐로 만들죠?"

"글쎄. 쌀 아닐까? 쌀이라면 코인 상점에서 살 수 있을 텐데."

"쌀만 있으면 뭐해요. 만드는 방법을 모르는데. 인터넷 검색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쌀을 사서 한번 이리저리해볼까?"

"됐어요. 먹는 거 가지고 장난 치는 거 아니에요."

"쩝. 괜히 말해서 생각나네."

"포기해요. 먹고 싶은 거 말하면 한도 끝도 없지."

"안돼. 말하지 마. 나도 방금 머릿속에서 이것저것 생각나긴 했는데…. 겨우 지웠단 말이야."

내 말을 들은 승희가 키득거리며 웃는다.

"아. 내가 음식 솜씨가 좀 있었으면 좋았을걸."

"어쩔 수 없지 뭐."

그렇게 말하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어라? 어디 가요? 오늘도 나가요?"

"추워지기 전에 계속 돌아봐야지. 마냥 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요. 그거야 뭐. 어쩔 수 없지."

나는 알몸인 승희의 가슴을 한 번 더 만지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폭신한 이불과 승희의 알몸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는 것은 상당한 각오가 필요하다.

빌어먹을. 찬바람만 불어봐라. 꼼짝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테다.

아. 미나 때문에 그것도 힘든가.

전동 휠을 타고 오늘도 밖을 돌아본다.

매번 다른 루트로 구석구석 살피며 마치 게임에서 지도에 가려져 있는 안개를 밝히듯이 탐색을 한다.

사람의 흔적은 없다. 있을 리가 없지. 올 이유가 없으니까.

마트를 지나 하동 외곽까지 탐색을 나선다.

이쪽은 공단이 있는 쪽이라 그다지 살펴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공장이나 창고들만 가득한 이런 곳을 대체 누가 오겠어?

그렇게 적당히 지나가는데 갑자기 기척 하나가 느껴졌다.

뭐지? 이런 곳에 사람이?

숫자는 하나. 내 기준 도로 오른쪽에서 두번째 공장 쪽으로 이동하는 기척. 아니, 공장이 아니네. 뭐지? 창고인가?

일단 전동 휠에서 내려 근처에 숨겨 놨다.

그리고 탐지를 유지하며 근처로 다가간다. 별 미동이 없는 것으로 봐선 탐지는 없는 것 같고…. 근데 여긴 뭐 하는 곳이지?

건물 옆으로 돌아가니 그제야 뭐 하는 곳인지 알 수 있었다.

냉동 물류라고 적혀있는 건물. 여긴 아마도 냉동창고.

냉동창고를 뒤지는 건가? 그렇다면 이해가 가지. 혹시 알아? 여기 안에도 MRE 같은 게 잔뜩 있을지.

물론 그럴 확률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냉동창고를 털려는 생각은 나름 괜찮다.

저온으로 얼어있는 음식들은 잘 하면 먹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이런 공단 한복판에 있는 냉동창고라면 털렸을 확률도 낮겠지.

조용히 숨어서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봤다.

커다란 창고 문 앞으로 다가오는 배낭을 멘 소녀…. 엥? 소녀?

아무리 봐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다. 근데 어설픔보다는 노련함이 느껴진다.

거참 신기한 애네.

고개를 끄덕이며 잠겨있는 창고 문 앞에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손에서 살짝 빛이 난다.

뭐야? 지금 자물쇠를 연 거야? 아…. 잠금 해제 스킬인가 보구나? 근데 진짜 저걸 고른 사람이 있단 말야?

유유히 자물쇠를 연 소녀는 옆의 고리에 자물쇠를 걸어놓고 손을 비빈 다음 창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소녀.

내가 있는 곳에서는 안쪽이 잘 안 보여서 나는 조금 위치를 이동했다.

어차피 밖에는 신경도 안 쓰는 거 같으니 내가 움직여도 알아채지도 못하겠지.

안쪽을 살펴보니 소녀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문 안쪽엔 자물쇠가 아닌 전자식 잠금장치가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다시 손이 번쩍인다.

설마? 카드키나 비밀번호로 열어야 하는 저런 잠금장치도 스킬로 풀린다고?

정말 그런지 잠금장치의 빨간 불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와. 저건 좀 신기하네. 뭐든 잠겨있으면 다 열 수 있는 거야?

어떻게 보면 내 벙커랑 상성이 최악이네. 저런 능력이라면 발견되는 순간 그대로 입구가 돌파당한다는 뜻이니까.

물론 신체 능력은 별 볼 일 없어 보이니 그리 위협적이진 않지만…. 다른 동료들이 있다면 상당히 무서워질 수 있는 스킬이다.

문을 열고 안쪽에서 나오는 냉기에 몸을 부르르 떠는 소녀.

자신의 배낭을 내려놓고 안쪽에서 두툼해 보이는 롱패딩과 장갑, 귀마개를 쓰더니 안쪽으로 들어간다.

굉장히 이런 일이 익숙해 보이는 모습.

저게 저 소녀의 생존 방식인가?

일단 스킬은 잠금 해제인 거 같고…. 아무리 봐도 사람을 마구 죽여서 코인을 잔뜩 얻었을 것 같지는 않다. 스킬이 하나 더 있을 거 같지는 않아.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상대.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지.

나는 창고 입구로 가서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섰다.

"에이. 꽃게가 뭐냐? 꽃게가. 망했네 망했어. 오랜만에 보물상자였는데…. 아! 깜짝이야!"

냉동창고에서 나오며 나와 마주치자 놀라는 소녀.

"뭐야.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깜짝 놀랐네. 나한테 볼일 있어?"

별거 아니라는 듯 냉동창고 문을 닫고 입고 있던 롱패딩과 귀마개, 장갑을 벗어 배낭에 넣는다.

너무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그 모습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뭐지? 왜 저렇게 당당해? 너무 당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다.

"야."

"왜?"

"너 왜 그렇게 당당하냐?"

"뭐? 그럼 내가 널 보고 무릎 꿇고 빌어야 하냐?"

...뭐지? 얜? 생긴 건 어려 보이는 여자애인데 알맹이는 무슨 50대 아저씨 같은 느낌이야.

"스킬도 잠금 해제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그러고 있냐 이거지."

"자신감은 무슨…. 이게 자신감이다!"

갑자기 배낭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던지더니 재빨리 도망가는 소녀.

내 앞에서 뭔가가 팍하고 깨졌고 갑자기 매캐한 냄새가 확 하고 퍼졌다.

"콜록. 콜록!"

씨발! 이게 뭐지? 순식간에 눈물과 기침이 난다. 당장 말도 못할 정도로.

고통스럽고 정신없긴 하지만 반응은 내가 더 빨랐다. 소녀는 이미 재워졌으니까.

조금이라도 방심하고 있었다면 손도 못 쓰고 놓칠뻔했네. 시부랄.

아우. 근데 이거 뭔데 이리 독하냐. 미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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