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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곳
다시 본진이 조용해졌다.
뭐…. 나연이랑 다른 여자들이 있을 때도 그리 시끄럽지는 않았지.
워낙 과묵한 여자들이었으니까. 게다가 점점 망가지면서 더 조용해지기도 했고.
방을 치우면서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당분간은 누굴 가두거나 하진 않아야겠어. 너무 귀찮아.
승희와 미나에게 집중하자. 그만한 여자가 더 생기는 게 아니라면.
비어있는 도시를 전동 휠을 타고 빠르게 지나간다.
귀찮다 정말. 나가는 것도, 뭔가를 해야 하는 것도.
나연이와 여자들, 체육센터의 놈들이 가지고 있던 코인까지 모두 얻어서 코인은 70만이 넘었다.
코인이 이 정도 있으면 써야지.
죽을 때 코인 많다고 다시 살려주는 거 아니잖아? 아끼다 똥 되는 법이다. 쓸 때는 써야 한다.
"자주 오네요?"
"문제 있어?"
"아뇨. 승규 형 불러드려요?"
"아니 됐어. 오늘은 그냥 온 거야."
"사실 이미 불렀는데."
"알게 뭐야."
물류센터 입구를 지키는 진영이를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닭장, 돼지우리, 텃밭.
물류센터 안쪽은 비어있는 곳 하나 없이 빼곡하게 활용되고 있다.
아스팔트를 깨부수고 텃밭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본격적이네.
"어? 왔어요?"
"오랜만이에요."
연서와 미연 자매가 나를 보고 반가워한다.
매혹을 걸려다가 잠시 주춤하게 된다.
나연이 때문인가? 에휴. 매혹 숙련도를 올리러 왔으면서 주춤하면 어쩌자는 거야. 멍청이.
자매에게 매혹을 걸었다. 그리고 별 관심 없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 물류센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을 보지 않아도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부담스러워….
매혹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스킬이지만 부담스럽다.
빨리 숙련도를 올리고 될 수 있으면 쓰지 말아야겠어.
텃밭 중앙에 나무로 만들어진 쉼터가 있었다.
살아있는 나무가 얽혀서 지붕을 만들고 있었고, 생생한 잎사귀들이 그늘을 만들어 준다.
식물 조종과 성장은 역시 캐미가 좋아. 이런 것도 가능하니까.
자매는 나를 계속 힐끔거리며 텃밭 일을 하고 있다.
아…. 진짜 부담스럽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오셨어요?"
미래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멈추라고 할까, 아니면 매혹을 걸까.
기절 스킬을 가진 미래를 내 범위 안쪽에 들여놓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매몰차게 오지 말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그냥 매혹을 걸자. 반응만 해주지 않으면 되니까.
"여기서 뭐 하세요?"
"구경."
"토마토 하나 드릴까요?"
"됐어. 가서 일 봐."
매혹이 걸린 여자한테는 일부러 냉랭하게 대한다.
그래야 매혹이 풀려도 나에 대한 쓸데없는 호감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앞으로 여기 여자들에게 매혹을 잔뜩 걸어야 하니 될 수 있으면 냉랭한 태도를 유지할 생각이다.
저쪽에서는 지연이가 일하고 있다. 나를 봤음에도 애써 아는 척도 안 하는 모습.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애써 무시하는 모습이 제법 귀엽네.
지연이도 아직 매혹은 한 번도 건적이 없다.
그런데 솔직히 지연이한테는 매혹을 걸기가 무섭다. 약간…. 좀 그래.
그건 서현이도 마찬가지다.
지연이랑 서현이는…. 둔한 나도 알아차릴 만큼 나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다.
물론 승희나 미나가 나에게 보여주는 호감이랑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지연이는 애증, 서현이는 동경? 그런 느낌.
그런 호감을 매혹이라는 스킬로 덮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고.
일단 매혹이 세 명 걸려있으니…. 한 명에게 더 걸어야 번갈아 가면서 쓸 수 있는데.
누굴 더 걸지?
"여기 있었어요? 뭐해요?"
입구에서 컨테이너를 지키고 있어야 할 진영이가 나에게 와서 내 옆에 앉는다.
"너 입구 경비는 어쩌고."
"교대시간요. 민준이랑 교대했어요."
"민준이는 또 누구야."
"엥? 형이 구해줘 놓고도 이름도 몰라요?"
"스킬로 말해."
"민준이…. 금속화요."
"아. 걔."
"와…. 사람을 스킬로 외우는 거예요?"
"남자만."
"심하다…."
"신소리 하지 말고 볼일 없으면 가라."
"왜요? 좀 옆에 있으면 안 돼요?"
이 녀석은 왜 이리 붙임성이 좋은 걸까?
남자 놈인데도 그리 거부감이 들거나 꼴 보기 싫지가 않다.
이것도 능력이면 능력인 거겠지.
"오빠. 일 끝났어? 아…. 안녕하세요."
진영이의 동생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고, 내게 인사했다.
살짝 고개를 끄덕여서 인사를 받아주고 신경을 껐다.
이쁘장한 아이. 잘 때 내가 한번 했는데…. 본인은 모르고 있는 여자.
아니 본인뿐만 아니라 세상 그 누구도 모르지. 나만 아는 비밀이니까.
근데 이름이 뭐더라. 아이씨. 사람이 많으니까 이름 기억하기도 쉽지 않네.
"돼지 밥 줬어?"
"응. 돼지는 아무거나 잘 먹어서 다행이야."
얘한테 매혹을 쓸까? 진영이가 있어서 괜히 귀찮아 질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누구 하나를 누굴 걸지? 매혹 안 걸렸던 여자들에겐 별로 걸고 싶지 않은데.
"돼지는 잘 크나?"
"네! 크게 문제는 없는 거 같아요! 축사도 맘에 들어 하는 거 같고요. 냄새는 조금 나지만."
내가 물어보자 동생이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 대답한다.
"그래. 잘 키워서 삼겹살 좀 구해줘 봐."
"삼겹살요? 저 돼지를 죽여요?"
"음? 그럼? 애완용으로 기르려고?"
"아니…. 저렇게 귀여운데 죽인다고요?"
"배가 덜 고프구나…."
"현정아. 우리가 돼지 키우는 건 번식 시켜서 고기를 얻으려고 하는 거야. 안 그러면 뭐하러 키우겠어?"
아. 그래. 이름이 현정이었구나. 그랬어.
"아니…. 근데 저렇게 귀여운 애들을?"
어휴. 여기 생활이 편하긴 한가 보네. 얘도 생각하는 게 꽃밭이야.
현정이는 약간 충격받았는지 어디론 가로 가버렸다.
웃기는 애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성장은 써봤나?"
"돼지한테요? 아뇨. 아직 돼지한테는 안 써봤어요. 유진이랑 미연이 누나는 요즘에 식물 쪽에 성장 쓰고 있어서 바쁘거든요."
"식물? 무슨 식물?"
"토마토요. 포만감도 있고 자라는 것도 쑥쑥 자라니까요. 게다가 지금이 딱 나오는 시기라 토마토에 성장 스킬을 올인하고 있어요."
"그래? 토마토라. 나쁘지 않네. 근데 토마토는 칼로리가 별로인데."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래서 여자들이 더 좋아하던데요."
"이런 상황에서도 다이어트를 생각하는 거야?"
"그러게요. 조금 배가 부른 생각이죠?"
"조금? 많이 배부른 생각이지. 조금만 먹어도 칼로리를 많이 섭취할 수 있는 것들을 키워내도 시원찮은데."
"근데 유정 누나가 케첩을 만들고 싶어해서 그런 것도 있어요. 다들 케첩을 너무 그리워해서."
어휴. 유정 누나는 또 누구야. 얘한테 누나고 내가 이름을 모르는 여자는 아기 엄마밖에 없는데.
"아기 엄마?"
"네. 하율이 엄마."
"케첩이라. 케첩은 좋지."
"만들게 되면 좀 드릴게요."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맘에 드네. 근데 그걸 만들 수 있나? 뭐가 많이 들어갈 텐데."
"모르겠어요. 저야 만들어 주면 맛있게 먹을 뿐이죠."
"흠. 역시 다들 먹고살 걱정이 없으니 이것저것 시도를 하네."
"원래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배가 불러야 문화가 발달하는 거죠."
내가 대꾸를 안 하고 잠시 입을 다물자 진영이도 잠시 말이 없어진다.
자매는 어디론가 가버렸고 미래도 보이질 않는다.
생각보다 물류센터에서 매혹을 걸기가 귀찮네. 다들 한자리에 모여있는 게 아니니까.
게다가 매혹 건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우습고.
네 번째 매혹을 걸만한 여자도 애매하다. 쩝. 생각보다 번거롭네.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하나. 그건 또 귀찮은데…. 여기만큼 편한 곳이 없단 말이지.
"서현이랑은 잘 돼 가냐?"
지난번에 이 녀석이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나서 물었다.
그러자 진영이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나에게 말했다.
"어…. 네. 사실은 사귀기로 했어요."
"음? 그래? 잘됐네."
의외네. 역시 나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건 그냥 내 착각이었구나?
하긴 내가 인기 있을 리가 없지.
"근데 현정이한테는 아직 비밀이에요. 아는 사람도 몇 없긴 하지만."
"그걸 왜 숨겨? 이런 폐쇄적인 곳에서는 그런 건 바로바로 밝히고 공개적으로 만나는 게 좋아. 그래야 잡음이 덜 생겨."
"그런가요…. 근데 왜요?"
"이런 공동체가 무너지는 가장 큰 원인이 뭔 줄 아냐?"
"남녀관계요?"
"그래. 막말로 너랑 서현이가 깨지면, 그다음엔 여기 분위기가 어떨 거 같냐? 둘 중 하나가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곳이야. 끔찍해지는 거지."
"이제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깨진다고 그래요."
"쉽게 생각하지 말라 이거지. 너희가 어느 정도 서로를 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었으면 책임을 져야 해. 쉽게 생각하지 말고."
"네…. 알았어요."
"근데 뭐하러 사귀냐. 그냥 다 같이 모여 살면서 원하는 사람끼리 섹스하고 편하게 살지. 어차피 임신도 안 되는데."
"...와. 바로 전에까지는 정말 보수적으로 이야기하시더니 지금 말은 급진보적이네요."
"도리와 편의성의 차이지. 차라리 이런 곳은 자유롭게 섹스 하는 게 나아. 가뜩이나 남자도 적은데 굳이 한 여자한테 얽매일 필요가 있냐."
"으…. 저는 형이 말하는 내용을 따라갈 수가 없네요. 제 가치관으로는 이해를 못 하겠어요."
"모르겠다. 니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어차피 나야 외부인이니까."
"형 말대로 하는 게…. 가능하긴 해요?"
"글쎄. 내가 여기 리더였다면 그렇게 유도했겠지. 아이 아빠를 리더로 만든 게 실수였나."
"왜 실수에요? 승규 형만 한 리더가 어딨다고?"
"능력과는 별개로 가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리더면 성적으로 개방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힘들지."
"기혼자라서요?"
"그래. 아이 아빠가 다른 여자랑 놀아나면 아기 엄마가 그걸 순순히 보겠냐?"
"그렇긴 하네요…."
"됐다. 내가 뭐라고 이런 걸 걱정 하는지. 내 코가 석 자인데."
"근데, 어차피 유진이랑 민준이도 커플이고 지원이랑 동현이도 커플이라…. 형이 말하는 그런 건 불가능했을 거예요."
아마 처음 네 명 걔들 말하는 거겠지? 하긴 걔들은 쌍쌍이 커플이었던 거 같긴 했지.
"남자가 확실히 적네. 걔들 뭐야. 미래가 데려온 애들."
"승주랑 중현이요?"
"이름으로 말해도 잘 몰라. 암튼 어린 걔들. 걔들은 잘 지내나?"
"네. 그럼요. 착하고 말도 잘 듣고 시키는 일도 잘하고 그래요."
"결국, FA로 풀려있는 남자는 걔들 둘밖에 없는 건가…."
"네?"
"아냐. 됐어. 혼잣말이야."
확실히 이곳은 남자가 적다.
결국, 미래랑 자매랑 지연이는 남자도 없이 굶주리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지연이한테는 안 했어도 그런 여자들한테 매혹을 걸어댔으니…. 어휴. 몹쓸 짓을 했네.
"갈란다."
"왜요. 더 있다가 저녁도 먹고 가시죠."
"됐어. 너네나 많이 먹어라."
나는 몇 번을 더 권하는 진영이를 무시하고 물류센터 밖으로 나왔다.
좀 더 동물의 왕국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건전한 곳이 되어가고 있네.
에이. 모르겠다. 내가 그걸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남의 연애사와 성욕 해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
애들도 아니고. 다들 알아서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