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08화 (108/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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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 센터

나는 왜 내가 사지로 밀어 넣어 놓고선 나연이를 살리려 했을까?

죽으라고 보내놓고선 왜 기껏 죽으니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걸까.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나연이가 그렇게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나?

그것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오랫동안 잡아 죽이기를 벼르고 있던 일당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보였던 살가운 모습들은 매혹에 걸려 가짜로 만들어진 모습일 뿐이다.

정작 희주는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던가? 그래놓고선 왜 나연이는 살리려고 했던 거야?

그리고 왜 이렇게 허무한 거야?

머리가 혼란스럽고 짜증과 신경질이 마구 솟아오른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나는 쓰러져 있는 남자들을 차근차근 찍어 죽이고 있다.

할 건 해야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든 몸은 착실히 주변에 있는 불확실 요소를 하나씩 처리한다.

죽일 때마다 코인이 들어왔다는 메시지가 뜨지만, 숫자를 봐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는다.

쓰러져있는 한나를 보았더니 그녀는 가슴에 날붙이가 꼽혀 죽어가고 있었다.

언제 당한 거지…. 아까 덮쳤던 남자기 찌른 건가.

웃긴 건 나연이와 다르게 죽어가는 한나에게서는 아무런 감정이 안 느껴진다는 거다.

죽음의 무게와 의미가 다르다는 것. 충분히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일깨워지는 기분.

"고생했어. 미안."

최대한 다정하게 그녀에게 말해주고 그녀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줬다.

텅 비어 버린 체육센터. 이제 위협은 없다. 아무도 없는 건물이 된 곳.

아니지. 4층에 여자 셋이 있었지.

4층으로 올라가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열자마자 여자들을 재웠다.

발가벗고 있는 여자 셋. 사람이 아니라 가축처럼 보인다.

살려줄까 생각도 했지만, 그럴 기분이 안 들었다.

물류센터로 보내도 되긴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전부 다 죽은 거로 치자.

세 여자까지 다 죽이고 탐지를 돌렸다.

주변 반경 100m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아무도 없다.

이제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든 위협은 사라졌고 이제 미나도 조금 더 안전해지겠지.

"하아."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 털썩하고 앉았다.

갑자기 많은 상념이 머릿속에서 회오리치며 춤춘다.

뭔가를 잔뜩 저질렀으니 이제 자기합리화를 해야지.

변명이든 핑계든 잔뜩 끄집어내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나 자신을 정당화시켜야지.

그래. 나는 나연이든 정아든 처리하려고 했어.

안 그래도 망가지고 있던 여자들이었다고. 유지비도 많이 들고. 애초에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여자들이잖아?

한나는 그저 써먹기 위해 매혹을 걸었을 뿐이야. 원래 죽이려 했어.

이 모든 것은 미나의 안전을 위해서야.

자기합리화 끝.

씨발…. 정말 끝이야? 이게 다야?

더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텐데. 없나? 내가 옳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한 사정…. 그런 거 없어?

"하아."

없다. 그런 게 있을 리가.

가장 중요한 것을 빼놓고 이야기하려니 말이 안 되지.

그냥 내가 쓰레기일 뿐이다.

쓰레기 같은 새끼가 멍청한 짓을 잔뜩 저질러 놓고 합리화하려니 말이 될 리가 있나.

세상이 이렇게 된 이후 줄곧 해왔던 짓이고 거기에 매혹이 추가되어 조금 더 수법이 악랄해진 것뿐이다.

당장 죽여야 할 것을 매혹이란 스킬로 조금 더 기만하고 농락했을 뿐이다.

결국은 죽일 거였잖아.

방법이 조금 추잡해졌을 뿐이지.

"하아."

몇 번째 한숨인지.

결국은 그게 문제다.

누구는 죽이고 누구는 안 죽이느냐. 그 문제.

승희와 미나. 그리고 물류센터의 사람들. 그리고 예지, 민지, 희주, 나연…. 그녀들과의 차이점.

첫 만남이 문제다. 악감정을 가지고 시작한 사람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돌이킬 수 없다.

한번 골이 파이고 시작한 인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골을 매울 수 없다.

매혹도 그걸 매울 수 있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거다.

24시간 365일 매혹을 걸고 있을 게 아닌 이상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가짜로 만들어진 호감은 매혹이 풀리는 순간 신기루가 되어 사라져버린다.

이 단순한 걸 꼭 이렇게 지랄 염병을 해야 깨우치다니.

병신 새끼.

나연이가 죽으면서 했던 말이 다 맞았다. 병신에 나쁜 새끼. 정확하네. 역시 똑똑한 여자였어.

행동 방침이 확실해졌다. 그나마 혼탁했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진 느낌이 든다.

더는 진짜 병신이 될 수는 없지. 정리할 건 빠르게 정리하고 잊자.

정말로 여자를 거느리고 싶으면, 조금 더 교활해지던가 미련 없이 포기해야 해.

앞으로는 이런 병신같고 얼뜨기 같은 짓은 하지 말아야지.

처음은 실수지만 두번째부터는 실력이라 그랬던가.

더는 이렇게 아마추어 같은 짓은 하지 말자. 너무 추하다.

결국, 결론이 이렇게 나네. 하지 말아야겠다고 반성하는 게 아니고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꼴이라니.

진짜 미친 세상에 걸맞은 바람직한 자세야.

쓰레기 같은 세상에 더 없이 잘 어울리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네.

자. 정리 끝.

이제 다시는 쓸데 없는 생각 말고 미친 세상을 좀 더 미친 듯이 살아보자.

1층으로 내려갔다.

텅 빈 건물. 누군가 들어와서 살기 딱 좋아 보인다.

불을 지를까? 음. 됐다. 누가 들어와서 살면 또 잡아 죽이지 뭐.

꿀꿀

내 상념을 방해하는 돼지 소리.

아…. 저게 있었지.

"이걸 어쩐다. 죽이긴 아깝고…. 역시 물류센터에 가져가야 하나?"

사람은 픽픽 죽이면서 돼지는 아깝다고 느끼는 모습. 정말 제정신이 아니다.

근데 이걸 어떻게 가지고 가지? 귀찮네.

돼지는 총 세 마리.

이번 기회에 동물에도 수면이 들어가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나는 돼지를 정확하게 노리고 수면을 썼다.

바로 쓰러져 잠든 돼지. 오…. 되는구나? 이걸 이제야 알게 되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으니 들고 옮길 수는 있을 것 같다.

차만 있으면 물류센터로 데리고 갈 수 있겠어.

근처에 세워진 차들을 살펴보았다. 혹시 운행할 수 있는 차들이 있으려나?

다행히도 이놈들은 의외로 차가 많았다. 아무래도 인원이 많으니 멀리까지 다녀야 해서 그랬던 거 같은데.

승용차, SUV, 트럭…. 차 키도 전부 차 안에 있었다.

이건 참 고마운 일이네. 수고를 덜었어.

트럭…. 다행히 오토였다. 이것도 정말 다행이네…. 수동이었으면 때려치웠을 텐데.

클러치 잘못 밟아서 시동 꺼트리고 뒤에 있는 차에게 빵빵거리는 소리를 들을 리는 없겠지만, 수동은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느껴진다.

오토가 범퍼카라면 수동은 우주 전함 같은 느낌이야.

수동 몰 줄 아는 사람이 들으면 코웃음 칠 이야기지만 지들도 처음엔 그랬을 거면서.

차를 끌고 와 돼지우리 곁으로 대고 돼지를 트럭 뒤에 실었다.

이러다 돼지가 잠에서 깨면 그대로 트럭 뒤로 튀어나가는 거 아냐? 그렇다고 돼지에게 테이프 질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조심조심 운전해서 가보자. 어차피 트럭도 처음 몰고 가니 운전을 그리 격하게 하진 못할 테니까.

돼지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게다가 더러운 것들이 옷에 묻는 게 짜증 난다. 씨발. 그냥 와서 가져가라고 할걸.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대.

어차피 시작한 이상 이대로 멈추면 더 병신같아지니 마무리는 지어야지…. 어휴 씨발 냄새 하고는.

돼지 세 마리를 다 싣고 트럭을 출발시켰다.

냄새가 지독해서 창문을 열고 가는데도 가시질 않는다.

탐지를 유지하면서 대충 방향을 가늠하고 물류센터 쪽으로 향했다.

네비가 없어서 길은 좀 돌아도 최대한 아는 길로 움직이며 천천히 트럭을 몰고 간다.

근데 트럭 존나 시끄럽네…. 탐지가 없는 놈들은 무슨 깡으로 차를 몰고 다니는 거야? 주변 인간들 다 끌어모을 것 같은데.

이놈들은 이런걸 몰고 다니면서 어떻게 살았던 거야? 깡도 좋다 정말.

중간에 수면을 한번 리필까지 하고 우여곡절 끝에 물류센터에 도착했다.

갑자기 차가 다가가면 놀랄까 봐 얼굴을 내밀고 갔더니 소주가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다.

"아니! 깜짝 놀랐잖아요! 갑자기 트럭은 뭐에요!?"

"왜 올 때마다 소주 니가 경비를 서고 있냐? 너 혹시 따돌림당하거나 그러는 거 아니지?"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이게 제 역할이니까 그렇죠. 그리고 맨날 소주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 좀 불러주면 안 돼요? 제 이름은 서진영이거든요?"

"알았어. 기억할 수 있으면. 가서 리더 좀 불러와 줘."

"안 그래도 무전 했어요. 곧 올 거예요."

"아. 이제 무전 되나?"

"네. 마트에서 안테나 떼오는데 고생 좀 했죠."

음. 그럼 승희한테 있는 무전기도 다시 되려나? 여기에서 벙커까지 거리가 되나 모르겠네.

"왔어? 어? 뭐야? 이 트럭은?"

무전을 듣고 나온 승규가 트럭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와 적당히 거리를 벌려 감전 범위에서 멀어진 다음 말했다.

"뒤에 있는걸 보면 더 놀랄 텐데요."

"뒤에 뭐가 있길래…. 오오. 돼지!? 그것도 세 마리나? 어디서 난 거야? 야생에서 잡은 거야?"

"아뇨. 말하자면 긴데…. 암튼 주웠어요. 키울 수 있죠?"

"안 그래도 꼭 키우고 싶었는데…. 이렇게 고마울 데가."

"혹시 닭도 더 필요해요?"

"닭? 당연하지. 닭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이런 세상에서 닭이 필요 없다는 놈은 제정신이 아니지."

"잘됐네요. 혹시 장동 옆쪽에 체육센터 어딘지 알아요?"

"글쎄…. 그렇게 말해서는 모르겠는데."

"아씨…. 지도가 없으니 설명하기가 어렵네. 지도 없어요?"

"지도? 있지. 진영아. 지도 좀 가져다줄래?"

"네. 형."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는 진영.

"근데 체육센터는 왜?"

"이 돼지도 거기에서 가져온 거니까요. 거기 닭장에 닭 많이 있으니 알아서 옮겨요."

"음…. 그래."

승규는 굳이 거기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인 거냐고 물어보거나 하진 않았다.

역시 눈치가 좋은 사람이야. 아마 세상이 망하기 전에는 사회생활을 잘했을 것 같다.

진영이가 금방 지도를 들고 왔고, 나는 지도를 펼쳐 체육센터 위치를 알려주고 진영이에게 전달했다.

"내가 너를 해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도 계속 그렇게 거리를 둘 셈이야?"

"아직은 일러요. 거리는 천천히 좁히죠."

내가 반사를 배우게 되면, 그때는 스스럼없이 그의 근처까지 갈 수 있겠지. 그전까지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

"그래. 그건 네 자유니까. 그래서. 여기 가면 닭이 있다고?"

"네. 열 마리는 넘게 있을 테니 가봐요. 이 트럭도 줄 테니 알아서 쓰시고요."

"이걸 주고 간다고? 그럼 너는?"

"걸어가야죠."

"어휴. 진짜 피곤하게 사네. 그래. 뭐 네 생각이 있으니 말리지는 않을게. 그리고 트럭도 고맙게 받겠어. 안 그래도 필요했는데 딱 좋네."

"그럼 갈게요. 고생해요."

"벌써 가려고? 잠깐만 기다려. 진영아. 가서 유정이한테 말하면 쟤 주려고 준비해놓은 거 있어. 그것 좀 가져와. 자꾸 시켜서 미안하네."

"아니에요. 이쯤이야. 알겠어요. 빨리 갔다 올게요!"

진영이가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가 말한 준비해놓은 게 뭔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뭘 주려고요?"

"기대해도 좋아."

잠시 뒤 진영이가 뭔가를 들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나에게 보냉백에 든 것을 전해주었고 나는 그걸 열어봤다.

"닭?"

"그래. 손질까지 다 끝내놓은 거야. 가서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알아서 하라고. 혹시나 양념 같은 게 없을 것 같아서 그런 것들도 챙겼으니 잘 해 먹어봐."

"생닭이라. 이것 참…. 귀하네요. 근데 이렇게 많이 줘도 돼요? 세 마리나?"

"네가 해주는 게 얼마인데 고작 닭 세 마리까지고 그러냐?"

"그건 그거고."

"암튼, 받아. MRE도 다 먹어가면 와서 가져가고. 볼일 없어도 종종 놀러 오고."

"봐서요. 그럼 더 없죠? 갈게요."

"그래. 가봐. 몸조심하고."

"형! 잘 가요!"

이딴 세상답지 않게 훈훈한 장면이다. 잠시나마 세상이 정상적이라고 착각할 만큼.

그나저나 생닭이라니…. 승희가 좋아하겠네. 보면 어떤 반응일까? 당연히 좋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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