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06화 (106/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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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 센터

승희와의 거리가 확 줄어들어서 기분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승희에게만 전념하는 것은 아니다.

미나도 있고 나연이와 정아도 있으니까.

바다에 다녀온 뒤 미나에게 들르니까 나를 보자마자 바로 안긴다.

"왜? 무슨 일 있어?"

"그게…."

미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제 이 앞으로 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냥 지나갔으면 모르겠는데 아파트 안쪽이랑 주변을 한 번씩 훑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래서는요…. 그냥 죽은 듯이 소리 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죠…."

"불을 끄거나 왔다 갔다 하거나 하진 않았지?"

"네…. 당연하죠."

전기가 무제한이라 집에 불이 켜있는 집들은 어지간해서는 꺼지지 않는다.

이게 다 LED 램프 수명이 좋아서 그래. 수명이 다할 생각을 안 해.

그래도 세상이 이렇게 된 지 꽤 돼서 그런지 하나둘씩 꺼지는 집이 생기긴 한다.

그러니 불이 꺼지는 것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만 그 불이 다시 켜지면 바로 살펴봐야지.

탐지가 없던 시절 그런 식으로 많이 사냥하기도 했다. 야경을 사진 찍어놓고 비교하면서 불 켜진 집 찾아가기.

"열 명이라. 알겠어. 무서웠겠다."

미나를 품에 안고 다독여주니 가냘픈 몸이 파르르 떨린다.

다소 분위기가 그런 쪽으로 흘렀지만, 내가 선을 그었다.

미나는 좀 더 나에게 매달릴 필요가 있으니 적당히 거리 조절을 하긴 해야 하니까.

"무서워도 조금 더 혼자 있어 봐. 주변 정리하고 올 테니."

"꼭…. 나가야 해요?"

"무서움에 떨게 하는 것보단 원인을 없애는 게 낫지."

"걱정되는데…."

"괜찮아. 무사히 돌아올 테니."

미나를 두고 밖으로 나갔다.

열 명? 어디서 그런 놈들이 튀어나왔지?

게다가 주변을 뒤졌다니…. 뭔가를 찾는 거야? 바로 앞에 미나가 숨어있는데도 못 찾는 주제에 뭘 찾는다는 거야?

탐지가 없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발견한다 해도 이쪽에서 치는 것은 문제가 안 되긴 하는데.

일단 발견 하는 게 우선이겠지?

하지만 내가 찾는다고 놈들이 딱 하고 나올 리는 없었다.

주변에는 확실히 없는 것을 확인하고 미나에게 돌아가 일단 안심을 시켜줬다.

미나는 자신의 곁에 계속 있어 주길 바랐지만, 나는 좋게 말로 다독이고 밖으로 나왔다.

조금 더 나에 대한 갈망을 키워주려면 지금 혹해서 넘어가면 안 돼.

게다가 나는 봐야 할 여자들이 많이 있다고.

본진으로 돌아와 나연이와 정아를 확인했다.

그사이 서로 싸워 둘 중의 하나는 죽어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여자들.

다행히 아직 둘 다 살아있긴 했다.

상태는….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골치가 아프다.

계속 이렇게 두자니 찝찝하고 죽이자니 아깝다.

죽이더라도 화려하게 써먹고 죽여야 하는데. 빨리 그 무리를 찾아야지.

그래야 거기에라도 꼬라박지.

매혹을 걸어서 기분 업이라도 시켜줄까 했지만, 관뒀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매혹이 끝나면 더 처참해질 텐데.

마약쟁이에게 잠깐의 행복을 위해서 약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매혹은 마약과 같다. 매혹에 취해버린 여자들은 일상생활에서 그만한 만족감을 얻기 힘들지.

미나처럼 조금만, 마치 마약을 진통제로 쓰는 것처럼 필요한 만큼만 조금 쓰고 끊어버리면 상관이 없지만, 나연이와 정아는 이미 늦었다.

내 실패작. 이리될 걸 알면서도 망가뜨려 버린 장난감들.

본진을 나왔다.

저들 곁에 있으면 나까지 우울해진다.

저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그들이 죽을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게 낫겠지.

며칠을 미나에게 왔다 갔다 하면서 아파트 주변의 탐색을 넓혔다.

하지만 잠은 꼭 멀티로 가서 잤다.

승희를 끌어안고 자야 하니까.

승희를 곁에 두고 잘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지.

기회가 되면 좀 큰 사이즈의 침대도 구해야 하는데.

침대는 대체 어디서 구하지?

아니, 구하기야 할 수 있다지만…. 그걸 나 혼자 옮길 수는 있나?

자잘한 놈들은 보이는 족족 정보를 캐며 탐색을 이어갔지만, 딱히 얻은 것은 없었다.

그냥 잔챙이들. 운 좋게 아직 살아남은 녀석들.

정보도 없고 쓸만한 여자도 없다.

대체 그 열 명 정도 되는 놈들은 누구였을까? 예전에 대학교에서 나올 때 봤던 그 짱개들이었을까?

탐색을 한 지 9일째가 되는 날,

드디어 녀석들을 찾아냈다.

녀석들은 체육센터 안쪽에서 살고 있었다. 어쩐지 샅샅이 뒤져도 없더라….

체육센터. 상당히 좋은 입지다.

약간 교외 쪽에 있는 체육센터는 상당히 큰 건물이고 주변이 테니스장과 운동장, 축구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게다가 녀석들이 전부 치워버렸는지 중간을 가로막고 있던 펜스나 이런 것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체육센터 주변은 시야가 탁 트인 허허벌판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조명 같은 것들은 그대로 남겨놓고 각도를 틀어놔서 밤이 되어도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낮이건 밤이건 침투 자체가 쉽지 않은 곳. 저기를 이끄는 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입지 자체는 기가 막히게 골랐다.

방어와 감시에는 더없이 좋은 곳.

근데…. 식량은?

쌍안경으로 살펴보니 녀석들은 농사를 짓고 있었다.

쌀농사는 아닌 것 같은데…. 하여간 뭔가를 키우고 있다. 게다가 닭장도 있고 돼지우리도 있었다.

본격적인 자급자족 체계. 물론 저걸로 완벽하게 자급자족은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보조는 가능할 것 같다.

어쩐다.

방법이 없다. 공격은 무리. 주변의 공활지가 너무 커서 탐색도 안쪽에 제대로 닿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것은 밖으로 나온 녀석들을 하나씩 쳐 죽이는 방법밖에 없는데.

그건 너무 장기전이 될것 같다.

게다가 한번 건드리면, 경계도 심해지고 대응도 견고해질 것이다.

내가 본 것만 해도 안쪽에 인원은 20명 이상.

게다가 저 안에 탐지가 있는지는 확실하진 않다.

음…. 드디어 나연이와 정아를 써먹을 시간인가.

기왕이면 여자 하나를 더 구하고 가고 싶은데.

일단 저들의 본거지를 알았으니 됐다.

나는 저들을 알고 저들은 나를 모른다. 그게 가장 큰 장점이지.

여자 하나를 찾아보자.

대충 잡스킬이라도 뭐든 있기만 하면 쓸모는 있겠지.

주변을 뒤졌다.

여자면 된다. 아무나 하나만 잡혀라.

기왕이면…. 보기 좋은 여자로. 더는 아줌마나 못생긴 여자에게 매혹하거든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애정이 어려있는 아줌마들의 그 눈빛, 그 몸짓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트라우마가 남을 것 같은 기분이었어.

하지만 이 세상에 여자는 그리 흔한 생물이 아니다.

사람도 보기 힘든데 여자는 더더욱 그렇다. 찾으려면 고생 좀 해야겠는데….

상동, 중동, 하동, 미나의 아파트 주변, 물류센터 주변까지 전동휠을 타고 다니며 이 잡듯이 뒤졌다.

간혹가다 남자들만 있는 무리만 걸렸고 그들은 코인이 되었다.

꼭 이렇지. 찾으려면 없어.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야.

그렇게 2주간을 탐색한 끝에 드디어 여자를 하나 찾았다.

남자 셋에 여자 하나의 무리. 순식간에 처리했다.

솔직히 말해서 예전 같았으면 강간하고 죽였을 여자다. 하지만 더는 못 참겠다.

"이름이랑 나이?"

"이한나요. 32살."

"스킬은?"

"보호막이요."

크…. 또 보호막이야. 하여간 여자들은 보호막 드럽게 좋아한다니까.

어쩔 수 없다. 보호막이든 뭐든 상관없어. 뭐라도 하겠지.

본진으로 가서 나연이와 정아에게 매혹을 걸었다.

다 죽어가는 생기 잃은 얼굴이 환하게 바뀌며 나에게 살갑게 군다.

한나까지 포함해서 세 명을 이끌고 체육센터 근처로 향했다.

그저 내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셋 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섭다.

매혹이란 스킬의 시스템을 정확하게 이해를 못 하겠다.

그저 호감도만 MAX로 늘린 거야? 그렇다면, '네가 너무 좋아서 같이 죽자'도 가능한 거 아닌가?

일단은 지금까지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네가 너무 좋아서 대신 죽을게' 는 가능한 거 같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런 행동은 가능하니까.

이런 여자들을 볼 때마다 정말로 정세희 그년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과연 어떻게 하고 있을까? 4년이나 이런 스킬을 써왔는데.

이런 문제들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지금도 스킬 쓰면서 잘살고 있을까?

아니면 정말 객사라도 당했거나 감금당해서 육변기라도 하고 있니?

탐지가 닿지 않는 체육센터.

우습게도 쌍안경으로는 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돼지우리에 밥을 주는 남자.

알 수 없는 작물이 잔뜩 피어있는 곳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남자들.

좋아. 어디 한번 찔러보자. 어디까지 가능한지 한번 해보자고.

"셋 다 잘 들어. 저쪽에 다가가서 음식을 나눠달라는 척을 해. 아마 너희가 여자라서 다짜고짜 공격은 하지 않을 거야. 나연이와 정아가 기절과 마비를 시키면 여섯까지는 무력화가 가능하니 보이는 족족 스킬 쓰고 한나 너는 이걸로 쓰러진 인간들은 바로바로 죽여. 그래야 둘이 스킬을 계속 쓸 수 있으니까. 나연이랑 정아 너희도 이걸로 바로바로 죽여. 안까지는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 최대한 저놈들이 나오게 해. 그리고 한 번에 여섯이 넘게 나오면 무조건 이 근처까지 도망쳐. 서로 보조해 주면서. 알았지?"

세 여자에게 빨간 조끼 녀석들이 썼던 도끼를 하나씩 나눠 주며 말했다.

셋 다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런 그녀들을 보며 출발하라고 말하려 하는데 나연이가 나에게 말을 건다.

"드디어 오늘이야?"

"뭐?"

"아니야. 갈게."

나연이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뭐야. 다른 여자들이랑 같이 가야지. 다들 가봐."

정아와 한나는 그런 나연이의 뒤를 따랐다.

근데, 방금 나연이가 한 말은 뭐였지? 드디어 오늘이야?

...설마. 자신들을 죽게 하려는 걸 알고 있는 건가?

맨눈으로 보이는 나연이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매혹은 걸린 사람을 멍청이나 인형으로 만드는 스킬이 아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오늘 죽을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매혹에 걸렸으니 그 명령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주저 없이 움직이는 거다.

잔인한 스킬.

아니지. 그걸 쓰는 내가 잔인한 거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이래서 매혹은 싫다.

잠재우고 목을 내리찍는 것보다 잔인한 느낌이야.

나는 체육센터로 다가가는 여자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적어도 그녀들의 움직임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것. 그게 최소한의 도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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