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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와. 여기 진짜 좋네."
우리가 온 곳은 하조대라는 곳.
하조대 해수욕장에서 옆쪽 안으로 쭉 들어가면 나오는 곳이다.
야트막한 산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곳을 걸어 올라가면 소나무 사이로 멋진 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다.
"멋지다아."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아무리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라고 해도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본다면 뭔가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질 만한 곳.
"좋지?"
"네! 똑같은 바다인데 훨씬 멋지네요. 와."
불어오는 바람과 햇살이 반사되며 넘실거리는 바다. 그리고 푸른 하늘.
정자에 가만히 앉아 그런 풍광을 보고 있으면 마음속이 깨끗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어요?"
"옛날에 와봤어. 너무 좋아서 기억하고 있었지."
"흐응. 기억에 남을 만하네요. 저도 평생 기억할 거 같아요. 근데 저건 뭐예요?"
한참을 정자에서 구경하다가 옆쪽의 하얀 건물을 보고 승희가 물어본다.
"가볼래? 저긴 등대야."
"네! 가볼래요!"
파란 바다와 파란 하늘, 그리고 하얀 등대.
"별거 아닌데 진짜 이쁘네요. 색이 하얘서 그런가?"
"그치? 괜히 사람들이 찾아왔었던 게 아니라니까? 갬-성이라는 게 있잖아?"
"갬-성인가요? 재밌네요."
그렇게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승희는 인상 깊었었는지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내년에도 올 수 있겠죠?"
"그래. 한번 왔으니 또 오는 건 어렵지 않겠지."
"과연 우리가 언제까지 올 수 있을까요?"
"글쎄. 살아남아 있으면 얼마든지 올 수 있겠지?"
"그러네요. 제가 너무 갑자기 무거운 이야기를 했네요. 미안해요."
"아냐. 세상이 너한테 미안해해야지. 네가 미안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호텔로 돌아와 요기를 하고 해가 지자 불꽃놀이를 챙겨서 해변으로 나갔다.
갖가지 불꽃놀이를 잔뜩 챙겨온 승희 덕분에 마음껏 질릴 때까지 불꽃놀이가 가능했다.
20연발 불꽃놀이를 양손에 세 개씩 들고 이곳저곳에 발사하니 자기는 무섭다고 하지 말라는 승희.
"으…. 조심해요. 이쪽에 쏘지 말고요. 꺅! 조심하래도요!"
"야.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래? 더 무서운 일도 엄청 겪어 놓고."
"그거랑 이거랑 다르죠. 으! 안 끝났어요? 화상은 뜨겁단 말이에요. 난 싫어."
신나게 팡팡 터트리는 불꽃을 쏘고 분수 불꽃에서 불을 붙여 구경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역시 스파클러.
천천히 타오르며 소리 없이 요란한 빛을 내는 스파클러를 바라보고 있자 조금 낭만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이쁘다아."
빨려 들어갈 것처럼 감동적인 표정으로 불꽃을 바라보는 승희.
하지만 나는 불꽃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승희는 눈치를 못 챘지만, 아까 하조대에서 봤을 때 바다 한쪽에 배가 떠 있었다.
그 말은 조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녀석들이 이쪽이 보일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불꽃놀이를 하는 것을 봤을 수도 있다.
과연…. 어제 처럼 쳐들어올까?
아니면 어제 침입했던 녀석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알고 주저할까?
뭐가 됐든 오늘 밤은 조금 긴장을 해야 할 거다. 어제처럼 그냥 픽하고 잠들어버리면 안 된다.
그나저나 진짜 신기하네. 어떻게 그렇게 스르륵 잠이 들 수 있었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야.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승희가 나한테 뭔가를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불꽃놀이도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적당히 치우고 올라오려는데 승희는 우리가 놀았던 것들을 꼼꼼하게 치운다.
"아무도 없는데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치워?"
"내년에도 또 와야 하는데 어지럽혀 있으면 안 되죠. 여긴 이제 우리 전용 해수욕장인데."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렇네."
졸지에 벙커 두 개에 고급 아파트 하나, 일반 아파트 하나, 그리고 리조트까지 하나 생겨버렸네.
어쩌다 보니 점점 부자가 되는 느낌이야. 재산세라도 내줘야 할 것 같은 느낌.
호텔로 돌아와 승희 몰래 회복 포션을 하나 마시고 정성을 들여 섹스했다.
몇 번을 해도 즐거운 행위. 질릴 이유가 없다.
온몸 구석구석을 애무해주며 승희가 지쳐 쓰러져 잠들 때까지 섹스했다.
평온한 얼굴로 내 팔을 붙잡고 잠든 승희.
적어도 그녀에게는 이번 바다 여행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됐으면 좋겠는데.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은 말짱하다.
몸의 피로야 뭐 회복 포션 먹으면 해결되니까…. 별 문제가 안 된다.
대신 정신은 깨어있어야 한다. 불청객들이 몇 시에 오겠다고 약속하고 오는 것도 아니니까.
다행히 동이 틀 때까지 탐지에 걸리는 기척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어제 왔던 녀석들이 이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전부였나? 그럼 그 배는 뭐였을까? 거리가 좀 되나?
하긴. 이 넓은 해안가에 어촌 마을이 한두 개도 아닐 텐데…. 내가 너무 과민반응 한 것일 수도 있겠네.
그렇다고 긴장을 안 할 수도 없잖아?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아침이 되고 승희가 일어났다.
간단하게 씻고 아침을 먹은 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차에 타서 시동을 걸어놓고 승희에게 물었다.
"바다 한 번 더 안 가도 되겠어?"
"네. 이제 괜찮아요. 피부가 따가워서 가지도 못해요."
고작 이틀 사이에 새카매진 승희.
자외선 차단제를 전혀 못 발라서 그런지 피부 일부가 하얗게 까지고 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뭐 어때. 이것도 여름의 훈장이지 뭐.
"그래도 몸은 이쁘게 태웠잖아? 비키니 라인 따위는 없는 전신 선텐."
"당연히 알몸으로 있었으니 비키니 라인이 있을 리가 없죠."
"음. 좋았지. 새하얀 해변에서 눈부신 나신으로 뛰어다니는 너의 모습은 마치…."
"아잇! 진짜! 좋았으면 그냥 속으로 생각해요! 굳이 말로 할 필요 있어요?"
"뭐 어때서.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차에 탄 우리는 집으로 출발했다.
고속도로에 오르자 아무 말 없던 승희가 그제야 한마디를 했다.
"아. 정말 좋았다. 잘 있어 바다야."
"고기만 구워 먹을 수 있었으면 완벽했는데. 그치?"
"그러게요. 그거 빼고는 다 좋았어요. 점수로 따지면 99점?"
"고기가 1점밖에 안 돼? 이교도네."
"어…. 그렇네. 그럼 95점?"
"정말 다음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삼겹살 구해 온다."
"화이팅! 새끼 돼지라도 한 마리 잡아 와봐요. 그럼 내가 키워볼게."
"키운 거 잡아먹을 자신은 있어?"
"음…. 힘들려나? 힘들까요?"
"글쎄. 죽일 때는 마음이 아파도 고기가 입에 들어가면 그 아픈 마음이 다 치유될걸?"
"아니야. 그럼 고기 맛이 없어져서 안 돼요. 아예 정을 주지 말고 사육을 하든가 해야지. 근데 돼지 키우는 거 힘들까요?"
"당연하지. 살아있는 거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 먹이며 똥이며 어떻게 다 하려고."
"그렇네요. 음…. 뭐 방법 없나."
"알아서 구해와 볼게. 대충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진짜요? 어디서요?"
"물류센터."
"아아. 그렇구나. 근데 거기 닭만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니 돼지도 키우게 해야지."
"흐음. 좋은 생각이네요. 빨리 키웠으면 좋겠다."
결국은 승희와 집으로 가는 내내 고기 이야기만 잔뜩 하게 됐다.
먹고 싶은 고기 종류, 요리, 요리법, 고기 예찬.
지치지도 않고 옆에서 재잘거리는 승희 덕에 집으로 별문제 없이 돌아올 수 있었다.
차를 차고에 잘 집어넣어 놓고 벙커에 들어와 문을 잠그는 순간 그제야 실감이 났다.
"바다 다녀온 게 꿈같다. 그치?"
"그러게요. 다시 돌아오니까 확 느껴지네. 피부 탄 게 아니었다면 정말 꿈꿨다고 생각이 들 정도예요."
"그만큼 좋았었으니까. 자. 이제 좀 쉬자. 안 하던 운전을 오래 했더니 힘드네."
"고생했어요. 나 때문에 이렇게 장거리 운전도 하고."
"나도 좋았으니 됐어."
그러면서 승희의 가슴을 움켜쥔다.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품에 안기는 승희.
귀여운 녀석.
그렇게 우리의 여름 여행은 끝났다.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잠시나마 여름 바다의 꿈에 취해있었지만, 이제는 다시 혹독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여행을 다녀오고 바뀐 게 있었다면, 승희 방의 문을 잠그지 않게 된 것이다.
"진짜 괜찮아요? 괜히 불안해 하지 말고 그냥 잠가 도 되는데."
"됐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 대신 벙커 밖에 나가는 것은 안 돼. 나갈 때는 나에게 꼭 이야기를 해야 해. 내가 없을 때는 나가면 안 되고. 그리고 모니터 룸은 웬만해선 들어가지 마. 괜히 아무거나 만지면 안 되니까. 저거 고장 나면 나도 수리 못 해."
"알겠어요. 나는 말 잘 듣는 어린이니까."
"그치. 우리 초졸 어린이."
"이익. 그걸 또 그렇게 공격하네. 괜히 말해줬나 봐."
"어이구. 우리 어린이 삐졌어요?"
"안 삐졌거든요? 흥."
그러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사춘기 딸을 가진 아버지가 이런 느낌일까? 신선한 경험이네.
어쨌든 승희에게 자유를 준 것은 나에게도 큰 변화라고 볼 수 있다.
나라고 언제까지 사람을 마냥 불신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믿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오직 승희만 가능한 일이다. 쌓인 신뢰와 허심탄회한 속마음을 밝혔기에 가능했던 일.
물론 언젠간 이 일 때문에 후회할 날도 올 수 있겠지만…. 그런 것까지 다 각오한 일이기에 한 일이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일, 내가 선택한 일.
기왕이면 후회하는 일이 없길 바랄 뿐이지만.
오늘까지만 쉬고 내일부터는 또 빡쎄게 살아야겠다.
꿈에서 깨고 잠에서 깼다고 바로 침대에서 박차고 일어나는 것은 아니잖아.
조금 더 누워서 뭉그적댄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으니까.
딱 오늘까지만 게으름을 부려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