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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더 없이 좋은 승희와의 여행이지만, 먹는것이 부실한 게 아쉽다.
코인으로 상점에서 사는 것도 가능하고 챙겨온 MRE도 있지만, 결국은 생존을 위한 식량이다.
모름지기 여행이란 먹는 낙인데. 가장 큰 즐거움이 빠져버렸어.
다음번엔 정말 먹을 것을 조금 신경 써서 준비해 봐야겠다.
준비한다고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저기…."
"왜?"
밥을 다 먹은 승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그…. 산책하러 가지 않을래요?"
"그래."
"어? 정말요?"
"자기가 말해놓고 정말요는 뭔데?"
"아니…. 당연히 안된다고 할 줄 알았죠. 위험하다거나 뭐 그런 말 하면서."
"괜찮아. 지금까지는 아무런 위협이 없으니까."
"지금까지는?"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너는 내가 지키니까."
그냥 당연한 말을 한 건데 승희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왠지 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네.
역시 여자의 마음은 모르겠어. 감동할 타이밍이 자기 멋대로야.
승희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이 리조트는 제법 크기가 커서 산책하기가 좋다.
잘 꾸며진 산책로와 전용 해변, 이런저런 볼거리들이 적당히 있다. 다만 너무 번져버린 식물들이 길들을 막아서 문제지.
"그거…. 잘 가져왔네요."
"마체테? 어딜 다녀도 이걸 놓고 다니긴 찜찜해서."
'재우는 것까진 할 수 있지만 죽이려면 날붙이가 있어야 하니까.'라고 말할 수는 없지.
덕분에 이리저리 자란 나무들을 손쉽게 쳐내고 산책을 한다.
"하아. 진짜 너무 좋다. 진짜로. 정말로. 진심으로."
"다행이네. 이렇게 좋아해 주다니."
"그거 알아요?"
"음?"
"오빠가 아니었으면, 난 죽어버렸을 거예요."
갑자기 심각한 이야기를 훅 꺼내는 승희.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말을 고르고 있는데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그날. 아빠가 죽고 그 쓰레기들에게 잡힌 날. 정말 암담했어요. 아빠가 나를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니까. 그런데 그런 아빠가 눈앞에서 빛으로 사라지니…. 암담했죠. 내 세상이 무너진 거니까요."
아무리 말을 골라 보려 해도 저런 이야기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잠자코 있었다. 승희 역시 나에게 대답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든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그 새끼들한테 잡히고 나서 제가 한 생각은 '기회가 되면 자살하자'였어요. 삼촌들 같았던 상가회 아저씨들, 저한테 잘해줬던 아줌마들, 거기에 아빠까지 죽고 난 다음 잡혀가는 나. 앞으로 무슨 일을 당할지 뻔히 알잖아요? 그러니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자살하자. 최대한 빨리 자살하자. 하지만 깨어난 다음엔 오빠가 있었죠. 조금 당황했어요.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꿈을 꾸고 있나? 그런 생각."
"내가 너에게 처음엔 그다지 정중하지는 않았는데."
승희를 보면 항상 드는 생각이었다.
처음에 그렇게 미친놈 처럼 굴지 말걸. 그런 생각.
물론 이렇게 될지는 몰랐으니 그랬었지만 볼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게다가 그 때문에 아직도 완전하게 승희를 믿지 못하는 부분도 있는 거고.
"알긴 아네요.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뭐, 변명의 여지는 없지."
"신경 쓰지 마요. 별거 아니니까. 오빠한테 처음에 당했던 짓들이 그리 유쾌한 일들은 아니었죠. 근데 지금은 신경 쓰지 않아요. 그 당시에 제 머릿속은 오로지 복수만 가득했으니까. 그리고 오빠는 이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생각보다 단순했으니까."
"단순했다고?"
"거짓말 하는 거 싫어하죠?"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
"강박증 있고."
"그것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있잖아."
"자신을 머리 좋다고 생각하고."
"아닌데? 난 멍청해."
"자기 집 안뜰에 잡초 피어있는 거 못 참죠?"
"...그것도 누구나 다 그러는 거 아냐?"
"사람 안 믿고, 필요한 일이면 이를 악물고라도 해버리고, 가성비랑 효율 높은 일 위주로 하고."
"야…. 그건 누구나 다 그러는 거잖아. 그게 왜 단순한 거야."
"아니요. 누구나 다 그렇게 하진 못해요. 그러니까 다들 죽지."
승희가 말하는 죽는다는 말은 뭔가 무게가 있었다.
그냥 단순한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조금 더 깊고…. 무겁다.
"오빠가 저한테 억지로 섹스하고 바이브레이터 같은 거로 힘들게 했어도 참을 수 있었어요. 왜냐면 오빠가 아빠 죽인 새끼들을 꼭 죽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건…. 미안해. 내가 할 말이 없지."
"아뇨. 미안할 필요 없어요. 그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뒤끝 같은 건 남지 않았으니까. 오빠가 영철이 그 개새끼 죽기 직전 사진을 보여주는 순간 다 잊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이 아이는 뭔데 나의 잘못을 마음대로 지워주는 걸까.
당사자라서? 당사자가 용서해준다고 내가 한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승희의 말에 안도하고 내 잘못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그건 내가 개쓰레기라는 것을 인증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승희가 나에게 신경 쓰지 말라 하더라도 나는 내가 나쁜 새끼인 걸 자각하고 살아야 한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나는 사람을 죽일 때마다, 강간을 할 때마다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해서 그렇게 했다는 핑계 같은 것은 아무런 변명이 되지 않는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랬다는 핑계나 변명도 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편하기 위해서,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을 믿지 않는 것. 이해해요. 그래서 오빠한테 저를 믿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아요. 오빠가 저를 의심하고 경계하고 모든 의혹을 없애기 위해 뭔가를 한다고 해도 전부 이해해요. 그게 오빠가 편하게 되는 방법이라면 그걸 거스를 생각은 없어요. 다만."
"다만?"
"나는 오빠를 믿어요. 그리고 오빠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옆에 있고 싶어요. 그게 내 본심이에요. 물론 이 말을 믿어달라는 건 아니에요. 말로는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오빠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저는 오빠를 믿고 곁에 머물 거에요."
음.
이런 말을 듣고 뭔가 가슴이 뭉클했으면 좋겠지만, 승희가 말한 대로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말로는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 맞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방금도 참 감동적인 말이긴 했지만 나는 속으로 '얘는 오빠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게 나다.
어쩔 수 없다.
성격 문제인지, 정신병인지, 사회성 결여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렇다. 나는 그렇다.
승희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인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가 사람인 이상 완벽하게 믿지는 않는다.
사람의 말과 생각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그건 진리고 불변의 법칙이다.
지금 승희가 했던 말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당장 몇 시간 뒤라도 바뀔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의 말은 고맙긴 하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기 전에 저런 말을 들었다면 좋았을 것을.
"승희야."
"네."
"부디 그렇게 계속 있어 주길 바라."
"네? 당연하죠."
"내가 너를 내 손으로 죽이는 날이 오게 되면…. 나는 정말 슬플 거야."
내 병신같은 말에도 승희는 내 말뜻을 이해하는 것 같다.
"그래요. 노력할게요."
그래…. 말뿐이라도 고맙다. 적어도 그녀는 나의 이런 비루한 모습까지도 이해해 줄 수 있는 여자다.
그녀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한, 나는 전력을 다해 그녀를 지킬 것이다. 내 목숨과 마찬가지라는 마음으로.
"후아. 홀가분하네."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나를 보고 가만히 웃으며 말한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어요. 오빠에게도, 나에게도."
해맑은 미소. 그녀가 나에게 저런 미소를 보여주는 것은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방안에 들어오고 우리는 격정적으로 키스했다.
이제 겨우 스무 살 아가씨…. 아니지 해가 바뀌었으니 스물 한 살의 아가씨의 철없고 책임감 없는 말일지라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나라고 아주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나도 완벽한 인간은 아니니까.
아무리 사람을 안 믿는다고 하더라도 기대와 희망을 품는 것 정도는 해도 되잖아.
매번 같은 패턴의 섹스지만,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조금 더 애틋해지고 조금 더 진심이 담겨있다.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손길도 조금 더 조심스러워지고 그녀의 몸 안에 들어간 나의 물건도 조금 더 섬세해진다.
사랑이라는 것. 그건 쉽게 말로 표현하기엔 아까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누는 대화 속에서, 맞닿은 살결에서. 이어지는 몸과 몸에서 피어나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그것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서 흔하고 상투적이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배려하는 말 한마디와 손끝에 닿은 그녀의 피부, 그녀의 몸 안에 들어있는 나의 몸. 그런 것들이 사랑이다.
나는 승희와 사랑을 했다.
몇 번이고 사랑을 했다.
사랑을 했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할 것이다.
토해내는 뜨거운 숨결도 사랑이고 헐떡이는 신음 또한 사랑이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구슬땀도 사랑이며 그녀의 몸속에 뿌려지는 뜨거운 것들도 사랑이다.
나와 많은 사랑을 나눈 승희는 행복한 표정으로 잠이 들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감히 이런 여자를 곁에 둬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김 첨지가 은화 한 닢을 쥐고 있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을까?
모를 일이지. 내가 김 첨지는 아니니까.
사람을 믿는 것. 가능할까?
하지만 승희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자신 없지만.
만약 배신한다 하더라도 그런 그녀의 손에 죽어줄 수 있다면…. 그게 믿음일까?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 손에 죽어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아직은.
하지만 언젠가는 답을 찾아낼 수 있겠지.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따로 할 일이 있다.
기껏 땅에서 움트고 나온 새싹.
그것을 짓밟고 빼앗아가려는 것들이 있다.
저 멀리에서 느껴지는 기척.
여름을 맞아 우리처럼 바다를 보러 온 사람들은 아니겠지.
사랑에 대해서는 다음에 생각해야겠다.
지금은 불청객을 맞이하러 가야 할 시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