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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승희와 미나.
둘에겐 공통점이 있다.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현재의 삶을 받아들였다는 것.
바깥을 그리워하지 않는 여자들이다.
그녀들은 어떻게 보면 이 현실에서 도피했다고 볼 수 있다.
멸망해 버린 세상에서 완벽하게 이탈한 여자들.
그녀들은 내가 사라진다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자력으로 살아날 방법이 없다.
또 누군가에게 의탁하거나 감금당하는 수밖에 없는 삶.
게다가공교롭게도 스킬 역시 치료계라는 공통점이 있다.
힐과 질병 치료. 자주 쓰이진 않지만 언젠가는 꼭 필요한 순간이 오게 될 것이다.
그 스킬들은 혼자 살아가기 위한 스킬이 아닌, 무리를 지어 살아갈 때 빛을 발휘하는 스킬들이니까.
하지만 나연이와 정아는 그렇지 않다.
그녀들은 세상과 싸워온 여자들이다. 스킬도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스킬이며 그녀들은 스스로의 자유를 원한다.
그래서 그런지 갇혀 사는 그녀들은 날이 갈수록 불평불만이 늘어가고 있다.
특히나 나연이는 희주가 없어진 이후로 눈에 띄게 상태가 나빠졌다.
불안함과 초조함을 항상 달고 사는 그녀.
그런 나연이 때문에 정아 역시 상태는 썩 좋지 않다.
"하아."
승희와 미나를 만나면 행복한 기분이 들고 이 거지 같은 세상을 어떻게든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나연이와 정아를 만나러 오는 순간 급격히 다운된다.
부정적인 모습의 두 여자.
결국, 나는 그녀들을 매혹하고 또다시 거리를 나선다.
"와. 덥다. 진짜 덥네. 옷을 벗고 다니고 싶은 기분이야."
"아….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 마셨으면 소원이 없겠네."
매혹을 걸면 나연이와 정아는 우울하고 불안했던 모습들은 모두 사라지고 한없이 밝아 보이는 여자가 된다.
그런 그녀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매혹은 미친 스킬 같아.
걸린 사람의 정신을 망가뜨리는 스킬이라니. 정상이 아니야.
그런 나연이와 정아를 볼 때마다 세희 년이 생각난다.
아마 지금 그녀의 종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매혹과 관계없지 않을 거다.
고작 몇 개월 쓴 나에 비해 그년은 근 4년을 넘게 써댔으니 그 주변 놈들이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정종찬…. 그 새끼도 지금쯤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르지.
4년이 넘게 매혹을 지속해서 당했으면…. 어휴. 생각할수록 끔찍하네.
나연이와 정아를 끌고 나오긴 했지만, 이 둘은 항공모함의 전투기 같은 느낌이다.
위력은 확실하지만, 가용 시간이 길지 않다.
나와는 달리 그녀들은 잠을 안 자고 하루를 넘기면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급속도로 떨어진다.
그렇다고 매혹을 풀고 아무 데서나 잠을 잘 수도 없는 노릇.
결국, 그녀들은 무언가를 하러 나오면 하루를 넘길 수가 없기에 상당히 불편하다.
급하면 그냥 묶어버리고 재우면 되긴 하겠지만…. 그럼 또 뒤처리가 불편해지니까.
아무리 이쁘장한 여자들이라도 다 큰 아가씨들의 배설물을 닦아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수영장 가고 싶다. 바다도 가고 싶다. 이게 뭐람. 재미없어."
"치킨 한 마리 시켜놓고 시원한 맥주나 한잔하고 싶다. 날씨 진짜 너무하네."
밖에 나와서 좋은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매혹당해서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두 여자.
하지만 웃긴 건 매혹이 걸렸을 때, 두 여자는 서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
매혹이 걸렸으니 둘 다 나에게 한계에 가까운 호감을 느끼고 있기에 두 여자는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그저 없는 사람 취급할 뿐.
내가 지시를 내려야 그제야 서로를 평범하게 대한다.
아마도 그러한 이질감이 매혹에 대한 반감을 품게 하는 거 같다.
여러모로 정상이 아닌 스킬이야. 찝찝해.
승희에게는 절대 쓰지 말아야지. 미나에게도 앞으로는 쓰지 말고.
세희 년은 아예 종적이 끊겼다.
대체 어디로 갔을까? 아무리 인원이 줄었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다니지는 않을 텐데.
사람이란 건 생각보다 많은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나처럼 몸을 숨기고 다니면서 만나는 족족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닌 이상 결국은 목격정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게 하나도 없다.
진짜 지랄 같네…. 사람 참 피곤하게 만들고 있어.
정말 어딘가에서 객사했거나 감금당해서 재갈 물리고 육변기가 됐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나연이와 정아를 데리고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방법뿐이다.
전동 휠을 타고 물류센터 주변을 둘러보던가 천천히 걸어서 하동이나 미나가 있는 아파트 주변인 장동을 배회한다.
그렇게 내가 지나가는 곳은 그저 죽음과 인적이 남지 않는 빈 땅뿐.
캬…. 멋있네. 무슨 재앙이나 마왕 같은 느낌이야.
...멋있기는 염병. 지랄 같은 소리 하네. 중2병인가?
번거로워도 무조건 잡아 죽이기보단 최대한 정보를 캐내고 죽이고 있다.
하지만 하동이나 장동은 정세희나 마녀를 아는 사람이 없다.
물류센터 근처는 아예 사람 자체가 없고.
그렇게 무의미한 살육과 탐색으로만 가득한 7월 한 달이 지나갔다.
8월이 되니 너무 더워져서 아예 탐색을 포기했다.
이런 날씨에 나다니는 건 그 자체로 고문이야. 할 짓이 못돼.
전기가 무제한이라는 게 너무 감사하다. 그리고 캐리어 선생님도 너무 감사하다.
에어컨이야 말로 인류에게 가장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 발명품이야. 이게 없었으면 진작에 더위 먹고 죽었을지도 몰라.
슬슬 승희와 바다를 가야겠는데…. 다행히 차는 시동이 걸렸다.
기름만 구하면 되는데 기름이야 뭐 어디서든 구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으니까.
근데 과연 팔자 좋게 바다까지 가는 게 제대로 된 짓인지 모르겠네.
막상 하려니까 이것저것 걸리는 게 너무 많다.
과연 그 모든 것들을 감수하고 바다에 갈 만한가?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갈 만하다.
아무리 내가 안전제일주의에 변태 쫄보라고 하지만 여자랑 바다에 다녀오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도 못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해.
필요한 준비를 차근차근해놓는다.
나연이와 정아는 뭐, 책 같은 거랑 음식만 잔뜩 넣어주면 되니 큰 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미나였다.
"괜찮은 거예요? 위험한 거 아니에요?"
한 일주일 정도 먼 곳으로 원정 나간다고 하니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걱정한다.
씨발. 존나 이쁘네. 걱정해주는 표정도 이렇게 이쁘냐….
한창 마음을 열기 시작한 그녀이기에 멀리 떨어지는 것에 대해 상당히 걱정되나 보다.
한참을 다독여준 끝에 겨우 그녀를 진정시키고 나왔다. 뭐, 주변을 싹 정리해 놨으니 일주일 정도는 문제는 없겠지.
"승희야. 가자."
승희의 수영복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항상 벙커 근처에만 살짝 나왔던 그녀이기에 밖에 나가는 걸 약간 설레하는 그녀.
"괜찮은 거죠? 막 밖에 나갔다가 위험한 건 아니죠?"
"걱정하지 마. 이 일대 주변에 사람은 너랑 나밖에 없어."
내 말뜻에 포함된 뜻을 이해한 승희는 표정에서 근심을 지운다.
하긴, 그녀는 나를 조금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하다.
자기 아빠의 원수인 조폭들도 혼자서 다 쓸어버린 사람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사실이기도 하고.
작렬하는 태양 빛이 너무 뜨거워 밖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날씨지만, 승희와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새롭다.
누군가를 이렇게 경계하지 않으며 옆에 두고 걷는 게 얼마 만인지.
승희는 이렇게 더운 날인데도 내게 찰싹 붙어 팔짱을 낀다.
그래. 이렇게 더운데도 달라붙어 있는 그녀가 전혀 거추장스럽지 않다. 신기한 기분이야.
"와. 여기가 말로만 듣던 마트구나."
물류센터로 전부 이동해서 이제는 다시 폐허가 된 마트.
하지만 승희는 자신이 무전기로 들었던 마트를 직접 보니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승희를 물류센터에 한 번 데려가야 하나? 가서 사람들 좀 만나게 하면 좋아할 것 같긴 한데.
아니다…. 그럼 대참사가 날지도 몰라.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승희는 어떻게든 꼭꼭 숨겨야 해. 여자들의 질투는…. 무시무시하니까.
큰 마트여서 수영복을 취급하는 매장이 있었기에 마음껏 수영복을 고른다.
"이거 어때요? 조금 야한가? 아니면 이게 낫나?"
"뭐가 걱정이야. 둘 다 가져가면 되는데."
"아. 그러네. 고민할 필요가 없구나? 근데 둘 다 입고 바다에서 놀 수는 없잖아요."
"한 시간마다 갈아입어. 근데 어차피 가면 알몸으로 벗길 건데."
"네!? 아이참! 그게 뭐예요!"
"무슨 상관이야. 아무도 없을 건데. 우리가 대한민국 최초로 누드 비치를 만들어 보는 거야."
"그래도…. 그건 조금…. 근데 아무도 없으면 뭐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승희는 야한 여자가 됐어.
맘에 드는 여자야.
"아무튼. 어느 게 더 좋아 보여요?"
"글쎄. 그렇게 대보고 있어 봐야 몰라. 입어봐야 알겠는데?"
"지금 입어 보라고요?"
"뭐 어때."
"싫어요. 뭘 모르시네. 이런 건 바다에서 짠하고 입고 나오는 거라고요."
"그런가? 뭘 해봤어야 알지."
"후후. 그럼 이번 기회에 경험해봐요."
아주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구나. 요망한 계집애.
승희는 다 가져가도 되는 수영복을 들고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세 개를 골라 집었다.
"온 김에 다른 것도 좀 봐도 되죠?"
"물론이지."
나연이랑 정아에게 했던 걸 그대로 하는 느낌이라 약간 찔리긴 했지만, 시치미 뚝 떼고 모른 척했다.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승희가 그런걸 알 리가 없으니까.
"짜잔!"
어디서 구해왔는지 돌핀 팬츠를 입고 나에게 자랑하는 승희.
역시…. 돌핀 팬츠는 세기의 발명품이야. 에어컨 다음으로 놔도 무방해.
"어때요?"
"좋은데? 지금 당장 덮쳐버리고 싶을 정도로."
"에엑?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뭐 어때? 너무 옛날 시대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거 아냐? 지금은 하고 싶은걸 아무 때나 마음껏 해도 되는 시대라고."
그러면서 내가 다가가자 정말로 당황했는지 살짝 뒷걸음친다.
"지…. 진짜로 여기서 하려고요?"
"왜? 농담 같아?"
"꺄아! 변태다! 변태가 나타났다!"
재빨리 도망치려는 승희를 붙잡아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리고 손을 옷 안으로 밀어 넣어 가슴을 움켜잡았다.
마트 내부는 엉망이 되었어도 적당히 시원하게 유지가 돼 있어서 다행히도 승희의 살결은 끈적이지도 않고 매끄럽다.
"아이잇…. 진짜 하려고요?"
"왜?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으읏."
양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으며 꼭지를 꼬집자 신음을 내는 승희.
순식간에 스위치가 올라가 버리는 모습.
그걸 보니 장난기가 발동해서 가슴을 잡고 있던 손을 빼버렸다.
"어어?"
"아니…. 싫으면 나중에 하고."
"아이잇! 정말! 진짜!"
승희가 내 등을 막 때렸지만, 나는 그저 재미있어서 한참을 웃었다.
덕분에 한껏 뾰로통해진 그녀.
"걱정하지 마. 돌아가서 다리가 풀릴 때까지 해줄 테니까."
내가 그녀를 잡고 귓가에 속삭이자 그제야 얼굴을 붉히며 나를 툭 친다.
"됐어요. 구경이나 더 할래요."
그러면서 다시 옷들을 구경하러 가는 승희.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어쩜 저렇게 귀여운 여자가 다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