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95화 (95/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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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재

미나를 데리고 아파트로 이동하는 것은 상당한 연기의 연속이었다.

탐지를 하고 있어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뻔히 알지만, 혹시나 누가 있을까 봐 은밀히 이동하는 척 해야 했으니까.

세상이 이 꼴이 나고 여태껏 감금되어있던 그녀에게 바깥은 공포와 두려움의 세상이다.

자신이 알던 세상이 끝장나고 완전히 모르는 세상으로 변한 이상, 그녀는 바깥을 좀 더 무서워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섣불리 바깥으로 나오지 않을 테니까.

미나에겐 특별한 자물쇠나 족쇄가 필요 없게 만들 거다.

공포가 그녀의 자물쇠고 두려움이 그녀의 족쇄다.

가는 도중에 사람이라도 만나면 좋겠다…. 그래야 그 자물쇠와 족쇄가 더 크고 견고해질 테니까.

일부러 길을 빙빙 돌아서 아파트로 걸어간다.

그나마 자신이 알던 유일하고 익숙한 공간이 멀어져야 한다.

좋든 나쁘든 그녀를 익숙한 곳에서 고립시켜야 한다.

내가 준 것들이 그녀에게 전부가 되게 해야 나에게 의존할 테니까.

가장 좋은 것은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난폭함과 광기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으니까.

내가 수상함을 빌미 삼아 멈출 때마다 미나는 내 팔에 몸을 밀착하며 붙어온다.

위에는 노브라인지 말캉한 가슴이 팔에 그대로 느껴진다.

당장이라도 옷을 벗기고 빨고 싶은 가슴.

다행히 그 정도로 막장은 아니기에 충분히 참을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니다.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아파트 근처는 제대로 정리를 안 해서 그런지 조금 떨어지니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 많은 건 아니지만 하동 정도는 있는 것 같다.

움직이는 두 명의 기척, 그리고 다른 세 명의 기척.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두 그룹을 마주치게 하는 것…. 가능할까?

팔에 닿은 미나의 가슴을 느끼며 각오를 다진다.

가능하게 하자. 안되면 그냥 처리해 버리면 되니까.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돼. 발걸음 소리랑 숨 쉬는 소리마저 조심해야 해."

"아…. 알겠어요."

잔뜩 겁먹은 미나. 아기 토끼 같은 모습이다.

누구나 보기만 해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애처로운 모습.

그녀의 움직임은 조심한다고 하지만 소음투성이이다.

마체테와 손도끼, 석궁에 배낭까지 메고 가는 나보다 소음을 더 많이 내는 미나.

자신이 내는 소리에 움찔거리며 놀라는 모습. 절대 데리고 나오면 안 되는 부류야.

좋아. 덕분에 두 명의 기척이 우리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나는 미나를 잡아끌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내가 어깨를 감싸 안자 미나는 얼굴이 빨개지며 내 쪽을 바라보지도 못한다.

효과 참 좋네. 매혹 만세다 씨발.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 명의 인기척이 있는 그곳까지 왔다.

좋아. 생각보다 쉽게 됐어. 이제는 서로 마주치기만 하면….

"엇!"

"뭐야!"

좋아. 남자 두 놈과 남자 세 놈이 서로 마주쳤다.

거리를 두고 주춤하는 남자 두 놈.

나는 숨으라는 시늉을 하며 미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대치하기 시작한 남자들에게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나에게 바짝 안기는 미나.

남자 둘은 주춤거리다가 뒤로 물러나기 위해 한 걸음씩 뒷걸음친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나는 미나가 듣지 못하게 작게 속삭이며 남자 셋 중 하나를 재웠다.

"뭐, 뭐야! 씨발!"

갑자기 동료가 하나 쓰러져서 깜짝 놀란 남자들.

"죽어! 바람!"

바람 칼날이 만들어져 우리를 쫓아 왔던 두 남자 중 하나를 덮쳤다.

"끄아아악!"

순식간에 피범벅이 된 남자.

미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틀어막고 내 품으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세 명이었던 쪽 남은 두 명을 모두 재웠다.

미나가 다시 남자들을 봤을 땐, 세 명은 그 자리에 쓰러져있고 한 남자는 피범벅이 되어 죽어가고 있는 데다가 남은 하나는 당황하며 자신의 동료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람 칼날에 당한 남자는 계속 피를 뿜더니 얼마 있지 않아 빛이 되어 사라졌다.

졸지에 동료의 코인을 먹게 된 남자는 소리를 지르더니 쓰러진 세 남자에게 다가가 품에서 회칼을 꺼내 마구 찔렀다.

미나는 다시 내 품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남자가 세 남자를 다 처리했을 무렵, 나는 미나에게 머리를 숙이고 땅에 엎드리라는 몸짓을 취했다.

시키는 대로 하는 미나.

나는 미나가 바닥을 바라보고 몸을 숙이는 것을 확인하고 남은 한 명의 남자를 바로 재웠다.

그리고 남자에게 뛰쳐나가 그대로 마체테를 휘둘렀다.

[32,401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음…. 그리 많은 건 아니네. 다섯 명 분량치고는 평범한 정도.

남자를 처리하고 아직 엎드려 있는 미나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됐어. 이제 일어나도 돼."

"흐…. 흐아앙."

일어나자마자 나에게 또 와락 안기는 미나.

정말 어설픈 상황이었는데도 미나에겐 상당히 자극적인 장면이었나보다.

이거 효과가 너무 좋은걸?

이런 허접스러운 연출에도 의아함을 느끼지 않고 이렇게 오열하다니.

역시 몸만 컸을 뿐, 미나는 아직 미성년자의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딴 사회에 대한 정신적인 내성이 전혀 없는 모습.

"그렇게 울면 다른 녀석들이 이쪽으로 또 올지 몰라. 조용히."

내 말에 울음을 바로 그치는 미나.

그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핀다.

에휴. 그렇게 살피면 뭐 보여?

주변에는 이제 기척이 전혀 없는데?

"이쪽으로…. 위험한 거 같으니 빨리 아지트로 가자."

이미 무서움을 잔뜩 맛본 미나라 그런지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조심해서 걸었던 것들은 다 까먹고 내가 가자는 대로 바로 따라온다.

그런 미나를 데리고 바로 아파트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카드키를 꺼내 공동 입구를 열고 3층으로 올라가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 문을 닫자 그제야 미나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흐아…."

"됐어. 여기는 어느 정도 안전해. 이제 안심해도 좋아."

"흑…."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미나.

나는 그런 미나를 번쩍 안아 들어 거실에 있는 소파로 옮겼다.

내게 공주님 안기를 당한 미나는 굉장히 당황해했지만, 표정은 제법 밝아졌다.

"여…. 여기는 어디예요?"

"예전에 내 동생이 있었던 곳."

"동생요?"

"그래."

"그럼…. 동생분은?"

"이젠 없어."

"아….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게 뭐 있어. 내가 못난 건데."

동생은 개뿔. 이 집에서 살던 남자 두 놈은 직접 죽이고 하나는 신나게 강간하다가 한번 내쫓고 물류센터로 보내버렸는데.

굳이 그런 걸 말해줄 필요는 없지. 어차피 미나는 영원히 모를 일이니까.

내가 조금 침울한 표정을 짓자, 미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를 안아준다.

매혹이 아직 걸려있기에 이 아가씨는 기회만 되면 나에게 스킨쉽을 하려든다.

게다가 내가 이렇게 건수를 던져주니 얼씨구나 하고 안기는 모습.

나는 그런 미나를 살짝 밀어내고 부엌으로 가 상점을 열었다.

코인도 많이 얻었겠다. 식료품을 한 일주일 치는 사서 식탁 위에 쌓아놨다.

"식량은 일단 이정도면 될 거야. 다 떨어지기 전에 다시 올 테니 그동안은 여기서 있어. 집이…. 조금 정리는 안 돼 있을 거야. 불편해도 참아줘. 여긴 보안도 잘 돼 있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은 이미 확인되어있으니 너무 숨죽이면서 있을 필요는 없어. 다만 너도 봤다시피 밖은 위험하니까, 안 나가는 게 좋을 거야. 답답해도 이 안에 있어."

그렇게 말하고 나는 다시 나갈 것처럼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미나가 다급하게 나를 잡으며 말한다.

"저…. 저기요."

"왜? 궁금한 거라도 있어?"

"아니…. 그…. 진짜 죄송한데요…."

"부담가지지 말고 말해. 솔직히 말해서 내가 널 도와줄 의무는 없지만…. 내 동생 생각이 나서 그러는 거니까."

내 말에 미나는 약간 망설이는 표정이 된다.

의외로 여자들은 이런 스토리텔링에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 이렇게 설정을 과하게 잡았는데도 먹히다니. 실제로 해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너무 잘 먹혀서 나 자신도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그…."

"응?"

"오늘 밤만….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돼요?"

미나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그러더니 자신의 말이 뭔가 오해를 살만한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손을 내저으며 급하게 다시 말했다.

"아…. 아뇨. 그런 뜻은 아니고…. 혼자 있기 무서워서…. 이제 해도 지고 있고…."

미나의 제안은 참 듣기 좋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매혹에 빠진 여자의 제안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저 말은 매혹에 걸리지 않았을 때 나와야 한다.

그리고 미나는 오늘 밤 혼자라는 무서움을 밤새 톡톡히 겪어야 하므로 내가 같이 있으면 의미가 없다.

세상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나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테니까.

"아니. 그럴 수는 없어. 나는 지금 바로 가볼 곳이 있으니까. 대신, 일이 끝나면 바로 와준다고 약속하지."

내 냉정한 말에 미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다시 와준다는 말에 그나마 용기를 얻은 그녀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어렵게 말을 한다.

"알겠어요…. 대신 꼭 와줘야 해요. 최대한 빨리요."

"그래. 그리고 문이 자동으로 잠기니 실수로라도 문 바깥으로 나가지 마."

"네…. 명심할게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집 바깥으로 나왔다.

자. 이제 나는 어떻게 한담?

날씨도 따듯한데…. 여기 위층 복도에서 한숨 잘까?

아니면 승희에게 다녀올까?

아니다. 승희에게 다녀오면 꼭 섹스할 수밖에 없어.

지금은 좀 참자. 여기 위에서 하루 정도 푹 자버리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심스럽게 걸어서 5층으로 향했다.

이정도면 실수로 잠꼬대를 해도 들리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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