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89화 (89/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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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 센터 밸리

매혹의 무서운 점은 자기가 걸렸는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뭐 해?"

물류센터 외곽의 팬스에 나무를 키워놔서 벽처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자매.

"어? 왔어?"

"와! 얼마 만이야?"

말을 걸기 전에 둘에게 저 멀리서부터 매혹을 걸었다.

지금 저들은 자신들이 매혹에 걸려있는지도 모르는 상태.

매혹에 걸려있을 때의 기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매혹으로 만들어진 친밀도는 그대로 남게 된다.

기절이나 수면, 마비 같은 것들은 스킬이 걸렸었다는 자각이라도 있지.

매혹은 그런 게 없다.

물론 매혹이 풀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거짓으로 만들어진 친밀도가 사라지게 되었을 때 곰곰이 따진다면 자신이 뭔가를 당했다는 것을 알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친밀도가 체 사라지기도 전에 매혹이 다시 걸린다면?

과연 인간이 그것을 냉정하게 인지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세희 년에게 매혹이 걸린 남자들을 봐서 안다.

매혹이 없었을 때도 그 외모만으로도 여왕벌 짓을 했던 년인데. 매혹이 생긴 이후에는…. 아주 끔찍했었지.

"벽 보강하는 거야?"

"응. 조금 더 촘촘하고 튼튼하게 해야지."

"맞아. 그래야 외부에서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오지."

내가 물어보자 대답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와서 달라붙는다.

살짝씩 스킨쉽을 하며 흔히 말하는 여자들의 여우 짓들을 한다.

팔에 닿는 가슴과 일부러 속살을 보이는 모습을 보며 눈이 즐겁긴 하지만 인생이 참 허무하다고 느껴진다.

키 크고 몸 좋은 존잘남이면 매혹 같은 게 없어도 이런 것들을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겪는다는 거잖아?

에이 씨발. 존나 부럽네.

이제 와서 그런 걸 부러워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

키 크고 몸 좋은 존잘남들은 내가 다 죽였으니 상관없어.

매혹만 있으면 나도 부러울 게 없다 이거야.

"사는 건 어때? 숙소나 이런 곳은 괜찮아?"

"아! 우리 방 구경할래? 같이 가자."

"그래. 방 구경하러 가자. 보여줄게."

적당히 건수를 던져주니 냉큼 덥석 받아 문다.

"방은 여러 명이 같이 써?"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방이 남아서 나랑 미연이 둘이서만 같이 쓰지."

"아. 그래?"

"응. 빨리 가자."

둘 다 몸이 한껏 달아오른 게 느껴진다. 아마 지금 보지를 만져보면 젖어있을 수도 있다.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들이 서둘러서 나와 섹스하려 드는 것들.

저런 것들이 나중에 현혹이 풀리면 당황스러워지게 만드는 것들이다.

내가 미쳤나 봐, 혹은 내가 뭐에 씌웠었나 봐 수준으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자매의 방으로 가는데 서현이와 마주쳤다.

서현이는 자매가 양쪽에서 나에게 가슴을 바짝 붙이고 팔짱 끼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약간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짜게 식은 눈으로 우리를 향해 말했다.

"여기 있었네요. 승규 아저씨가 불러요. 새로 온 사람들 있으니 환영회 하자고."

아…. 이렇게 방해가 들어오네. 역시 공동생활을 하는 곳에서 마음껏 뭔가를 하기는 쉽지 않나.

근데 서현이 쟤 표정은 왜 저 모양이야. 누가 보면 바람 피우는 애인이라도 본 줄 알겠네.

"그렇데. 가봐."

"어? 너는 안가?"

"같이 안 가?"

자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며 물어본다.

"내가 거길 왜 가."

"어? 왜에! 같이 가자."

"그래. 같이 가자!"

"됐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가봐. 난 떠날 거야."

매혹 건 사람의 말은 절대적이기에 자매는 더는 나에게 조르지 못했다.

"알았어. 조심히 가."

"아쉽다…. 알겠어."

자매는 서현이와 함께 환영식을 한다는 곳으로 가버렸다.

가면서 서현이가 나를 다시 한번 째려보듯이 힐끔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린다.

뭐야? 대체 알 수가 없네. 뭐가 나한테 불만인 거야?

더 있기 애매해서 나는 물류센터 밖으로 나가기 위해 컨테이너로 갔다.

아 씨발. 오늘이야말로 자매들이랑 질펀하게 섹스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삑사리가 나네.

공동생활이라는 건 생각보다 번거롭다. 티 안 나게 사람을 빼돌리기가 쉽지 않다.

존나 귀찮네. 그렇다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도 힘들고.

그냥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릴까? 내가 언제부터 남의 눈치 보고 살았다고.

그런 생각이 잔뜩 들었지만, 그러고 싶어도 지금은 좀 참는 게 나을 것 같다.

승규가 갖은 애를 써가면서 팀워크를 다지고 있는데 내가 앞장서서 산통 깨버리면 좀 미안하니까.

에이. 시발. 그냥 좀 참자. 어차피 자매가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니까.

기회야 얼마든지 생기겠지.

컨테이너로 가니 소주가 한가롭게 밖을 지켜 보고 있었다.

얘 이름이 뭐였지? 맨날 소주라 부르는 것도 미안하네.

"뭐하냐."

"아. 가려고요? 벌써?"

"어. 무슨 환영회 한다더니 너는 안가냐?"

"그럼 입구가 비잖아요. 금방 교대해 준다고 했어요."

"열심이네."

"이게 맡은 일이니까요."

그냥 갈까 하다가 이 녀석이랑 대화나 조금 하다 가기로 생각하고 컨테이너 안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녀석도 심심했는지 내가 자리에 앉자 내심 반가워하는 표정이다.

하긴, 종일 아무도 없는 밖에만 바라보고 있으면 심심하긴 하겠지.

"여기 CCTV는 결국 못 살리냐?"

"아. 그거요? 그게 통신사 서버를 쓰는 거라 서버를 안 쓰고 CCTV를 돌리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좀 어려워서요. 뭔가 내부망으로 돌려서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게다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럼 랜선을 전부 유선으로 돌려야 할 수도 있는데 WIFI로 하자니 이게 제대로 되는지도 모르겠고…. 광케이블로 하면 더 좋을 텐데 그것도 조금 무리고…."

혼자 신나서 뭐라고 말하는데 반도 못 알아듣겠다. 얘는 이런 걸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

"그러니까. 어쨌든 지금은 안된다는 거지?"

"네."

"그럼 이런 커다란 건물에서 사용되는 CCTV는 어지간해선 안 된다고 보면 되는 건가?"

"아마…. 그렇죠? 보통 CCTV 있는 건물이면 앞에 뭐 붙어있잖아요. 무슨무슨텔레캅이니 뭐 그런 것들?"

"어."

"그런 것들은 거의 다 보안회사 서버를 써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지금 전기랑 물은 돼도 인터넷은 안 되잖아요. 그러니 서버 쓰는 CCTV는 전부 다 안된다고 보면 되죠."

"나 사는 곳에는 CCTV 다 잘 돌아가는데?"

"그래요? 그럼 거긴 서버 안 쓰나 보죠. 내부망으로 직접 연결해 놓은 거면 상관없겠죠."

"그래? 좋은 걸 알았네."

정말 좋은 것을 알았다. 내가 4년 동안 뻘짓을 했다는 것도.

앞으로 큰 건물 침투할 때는 좀 더 자신감 있게 쳐들어가도 괜찮겠어.

"넌 뭐 고민 없냐?"

소주 이 녀석은 스킬이 위협적인 스킬이 아니어서 그런가 대하기가 편하다.

뭐, 똘똘한 데다가 동생을 챙기는 녀석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여기 있는 사람 중 가장 대화하기가 편한 건 사실이다.

그러니 이런 사적인 질문도 물어볼 수 있는 거고.

"고민요? 딱히 없죠. 동생 데리고 싸돌아다닐 때랑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죠."

이런 낙천적인 성격도 한몫 할테고.

"동생은? 문제없고?"

"네. 세상이 이렇게 된 이후 가장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죠."

"그래. 그러면 됐지."

모여 살면 갈등이나 문제가 항상 터질 줄 알았는데 이 사람들을 보면 무작정 그런 것만은 아닌 거 같다.

나름대로 잘 돌아가는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

아마 식량이 충분해서 나오는 여유일 수도 있겠지. 아니면 승규가 리더의 자질이 있던가.

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니까.

"저…. 그런데요."

"응?"

"물어볼 게 있는데 해도 돼요?"

"해.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잠시 머뭇거리던 소주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서현이랑 무슨 사이세요?"

"엥?"

나와 서현이 사이의 관계를 물어보는 소주는 뻘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하하. 등따습고 배부르니 슬슬 아랫도리가 불끈불끈 한가 보네.

암. 여기 있는 여자들은 나름 다들 평균 이상은 되는 여자들만 살려뒀으니 혈기왕성한 소주의 나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뭐, 어차피 나랑 한살인가 밖에 차이가 안 나긴 하지만.

"아무 사이 아닌데? 굳이 관계를 따져 보면 내가 두번 구해준 거?"

"아…. 그래서 그런가."

"왜? 뭐가 그래서 그런가야."

"서현이가 형 왔을 때 종종 물끄러미 바라보는 경우가 있어서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걔가 나를 왜 봐.

아. 그러고 보니 체육관에서 마트로 보낼 때 나를 따라가면 안 되냐는 소리도 했었지.

설마 그게 호감이었다고? 그냥 살기 위해서 수작 부리는 거로 들었는데.

그럼 아까 나를 째려본 것도 질투라고? 하하. 이거 참 별일을 다 겪네.

"걔 좋아하냐?"

"...네."

"힘내. 종일 붙어사니까 기회는 얼마든지 있잖아."

"근데…. 저한테는 관심이 별로 없어서.“

”그럼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 그냥 마냥 보고만 있다고 너한테 관심이 생기는 게 아니잖아.“

”혹시나 형이랑 서현이가 그런 관계면 제가 실례를 저지르는 거니까요.“

”상관 없어. 마음대로 해도 돼.“

”아...알겠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뭘 감사해? 내가 허락하면 뭐 바로 꼬실 수 있는 거야?

서현이랑 섹스한 건 비밀로 해야겠다. 비밀이고 뭐고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되겠지.

"난 간다."

"에? 좀 더 있다 가시지."

"됐어. 갈 거야. 다음에 보자."

"알겠어요. 들어가세요."

이야기하는 것은 나름 즐겁지만, 나와는 안 맞는 느낌이 든다.

공동생활, 타인과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삶, 정해진 규칙에 순응하고 모두의 공익을 위해 힘쓰는 삶, 이해관계와 손득실.

그런 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저런 연애나 남녀 사이의 복잡한 관계 같은 것은 껴들고 싶지 않다.

내가 끼면 뭐든지 엉망이 되니까.

무슨 기대를 하고 저들 사이에 슬쩍 끼어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데.

너무 재미있어 보여서 안에 휩쓸려 들어가 버릴 뻔했어.

지랄 말자. 지랄 말고 내 할 일이나 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본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매들이랑 섹스를 못 했으니 다른 여자들이랑 이라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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