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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88화 (88/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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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 센터 밸리

세상이 이따위로 변하고 나서 내가 가장 신기해한 것은 20대의 생존 비율이 가장 높다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멸망할 당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던 이들이 가장 유연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사회라는 틀과 규범, 그리고 도덕과 법에 머리가 굳어버린 나이 많은 이들보단 적응이 쉬웠다고 봐야 할까?

왜 이따위로 변했는지에 대해 불평불만을 하고 푸념을 할 시간에 그들은 빠르게 적응한 거다.

게다가 피지컬 적인 부분도 있을 테고.

내 앞에 이놈들이 그런 경우다.

매혹당한 한 명의 여자와 잠들어있는 두 명의 남자 놈들.

"말해봐. 너희들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내 질문에 매혹당한 여자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저희는 같은 보육원에 있었고요. 처음에는 여덟 명이 모여서 살았는데 지금은 셋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오빠를 만난 거 고요…. 그리고…."

매혹의 문제점은 어떤 여자든 걸리기만 하면 나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인다는 거다.

자꾸 엉겨 붙으려고 하는 여자애를 못하게 했더니 이글거리는 갈망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씨발…. 이 스킬 편하긴 한데 절대 정신건강엔 좋은 스킬이 아니야.

여자들이 나한테 무한한 애정을 보이면 무슨 몰래카메라 같다고.

"그래서 어디로 가려고 했는데?"

"딱히 정해 놓고 살진 않아요. 그냥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찾아 다니는 거죠. 기왕이면 농촌 쪽으로 돌아요. 미곡저장소 같은데 잘 보면 아직 먹을 수 있는 쌀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소나 돼지 닭 같은 것들도 농촌 쪽을 돌면 알아서 자생해서 많이 크고 있어요. 그런 거 잡아먹고 사는 거죠."

신기한 생존 방식이다. 굳이 사람들을 습격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니.

기특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애들이다. 그런 녀석들에겐 생존의 기회를 줘도 되겠지.

나름 알고 있는 것도 많은 것 같고.

"너희 스킬은 뭐지?"

"전 기절이고요. 승주는 바람 칼날, 중현이는 투명화요."

바람 칼날이라. 전에 짱개 대가리가 썼던 그건가?

팔이랑 목이랑 댕강댕강 잘 썰던 그 스킬 같던데. 나름 괜찮아 보였지.

투명화…. 역시 남자들은 생각하는 게 다 똑같아. 근데 어쩌냐 여탕이 없어졌는데.

게다가 기절이라니. 이젠 기절 부대도 가능하겠네.

"너 스킬 숙련도는?"

"어…. 고급 기절요."

"기절 세 명 가능하지?"

"네."

나연이랑 이 아이를 매혹해서 다니면 기절만 여섯 명, 내가 수면이 네 명이 되니까 합이 열 명.

씨발, 무서울 게 없네. 무슨 군단이냐.

고작 세 명이 순식간에 열 명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확실히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스킬이 비슷비슷하다.

CC스킬이나 즉발성 공격 스킬이 아니면 생존해 있는 게 신기한 세상이니까.

무리나 그룹이 영원한 게 아니니 생성 스킬이나 잡스킬들은 일찍 일찍 죽어 자빠졌으니.

"너 몇 살이냐?"

"스무 살요."

외모로 봐선 이제 중학생이나 겨우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외모다.

아무래도 영양섭취가 그리 원활하지는 않아서 그런가? 키도 작고 가슴도 작고 암튼 다 작다.

"누가 나이가 제일 많지?"

"승주는 열아홉이고 중현이는 열여덟이에요. 제가 제일 누나예요."

"넌 이름이 뭐야."

"저는 미래요. 성미래."

"그럼 어디로 이동하거나 뭘 할 때는 미래 네 의견을 따르나?"

"아뇨. 셋이 의논해서 의견통일이 되면 정해요."

"그래? 아주 민주적인 방식이네."

"셋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조금 기다리지."

남자애들이 일어나고, 여자애의 매혹이 풀린 다음 이야기를 권유해야지, 지금 상태에서 말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남자애들이 일어났다.

적대적이지 않은 나와 나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미래의 모습에 두 녀석은 주춤거리며 얌전히 있다.

미래가 이들에겐 누나이자 엄마 같은 느낌인가? 잘 따르는 모습이네.

시간이 또 지나서 미래도 매혹이 풀렸다.

하지만 매혹이 풀려도 나에 대한 호의가 남아있다. 신기한 애야.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어. 듣고 나서 따르든 안 따르든 상관없어. 너희가 결정하는 거니까. 물류센터라는 곳이 있다. 거기 가면 적어도 굶을 일은 없어. 음식을 찾아 돌아다닐 필요도 없지. 대신 거기를 지킬 사람들이 필요해. 그래서 너희가 원한다면 그곳으로 보낼까 한다. 질문 있나?"

"그…. 왜 저희를 도와주시는 거죠? 분명 다 죽일 수 있었는데도? 게다가 다른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었는데…."

미래의 말에 남자애들 두 명이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표정이 변한다.

음…. 확실히 이 여자애는 제법 똘똘하네. 이 빌어먹을 세상에 최적화되어있는 사고방식이야.

"너희 스킬이 쓸만해서."

"스킬이 별로였으면 죽였을 거예요?"

"아니. 가보면 알겠지만, 거기엔 쓸모없는 스킬 가진 사람도 꽤 된다."

"그럼 스킬이 쓸만해서 살려둔 건 아닌 거 아니에요?"

"아니. 스킬의 성능이 가장 중요한 척도인 것은 맞아. 그리고 너희가 기특한 것도 있지. 그거야 내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잠시 말이 없는 미래. 잠깐 생각하더니 나에게 다시 물어본다.

"오빠가 거기 관리자인가요?"

"아니. 나는 거기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네? 근데 왜…."

"속해있진 않지만 만든 사람이긴 하지."

"만들었는데 속해있진 않다고요?"

"그래."

"그럼…. 거기 가면 저희가 받는 불이익은요?"

당돌한 아이다. 까놓고 말하자는 건가? 시간 낭비가 없는 저런 모습은 맘에 드네.

"글쎄. 노동 착취나 성 착취 같은 건 없을 거야. 적어도 지금 삶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거기 리더는 나름 성실한 사람이니까. 이딴 세상에서 4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이해가 되겠니?"

"아…. 아이요?"

"그래. 다른 걸 다 젖혀두고라도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사람이지."

"아이라니…. 세상에."

뭐지? 내가 뭔가를 건드렸나? 세 명의 표정이 약간 진지해졌다.

"저희끼리 이야기 좀 해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이 편하게 이야기하도록 조금 물러났다.

원래대로라면 한창 모내기가 되어있어야 할 논은 전부 잡초밭이 되어버렸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땅은 금세 이렇게 자연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런 걸 보면 농부라는 직업이 역시 쉬운 게 아니야. 자연과 싸워서 이긴 승리자들이잖아.

생각해보니 어촌으로 가면 자급자족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 같다.

바다는 넓고 생선은 얼마든지 잡을 수 있을 테니까.

1년 365일을 생선만 먹고 살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굶어 죽지는 않겠지.

기름 생성 같은 스킬만 있어도 배는 얼마든지 띄울 수 있을 테고.

오히려 스킬이 있으면 어부일 하는 게 조금 더 편해지지 않을까?

"저기요."

미래가 나를 불렀고,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저희, 갈게요."

"그럴래? 잘 생각했다."

탐지를 한번 돌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한다.

강박증이야 정말. 탐지 없던 시절엔 어떻게 살았나 몰라.

그리고 조용히 미래에게 매혹을 썼다.

기절 스킬 가진 아이를 곁에 두고 방심하는 것보단, 매혹을 쓰는 게 훨씬 편하다.

"앞장서라. 내가 뒤에 서지."

"네?"

"내 습관이야. 잔말 말고 가."

여기서 물류센터까지는 한 2km 정도밖에 안 된다.

걸어가도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

나는 세 명을 앞장세우고 물류센터로 향했고 매혹이 풀릴 때쯤 도착했다.

물류센터를 점거한 지 3주 만에 많은 것이 변했다.

일단 물류센터의 커다란 입구는 컨테이너로 틀어막아 버렸다.

리더인 승규가 지게차를 몇 번 움직여보더니 컨테이너를 옮겨서 화끈하게 막아버렸다.

양쪽에 잠글 수 있는 문이 있는 컨테이너 덕분에 출입구를 완전히 막아도 사람이 오갈 수 있게 되자 그것만으로도 보안이 한층 강화되었다.

그리고 담장 펜스를 따라 빽빽하게 심어진 나무들과 서로 얽혀있는 나무들.

물류센터는 하나의 커다란 숲처럼 되었다.

물론 외곽만 나무가 심어진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물류센터는 침투하기가 아주 거지 같아졌다.

나라면 침투하는 것을 깔끔하게 포기할 만큼 펜스 안쪽에 촘촘하게 심어진 나무들. 나무의 벽.

게다가 이것들은 살아있는 나무다. 불도 안 붙고 손상돼도 성장 한방이면 다시 키울 수 있다.

나름 쓸만한 방어체계가 갖춰진 물류센터.

나와 함께 가고 있는 남자애 둘은 그 모습을 보고 반쯤은 홀렸다.

"오오오."

"와. 이거 뭐야."

그래. 남자면 이런 건 못 참지. 마. 이게 판타지다 판타지.

"어! 왔어요?"

컨테이너 안에서 밖을 살피던 소주가 나를 보고 문을 열고 나온다.

"야. 넌 왜 장소가 바뀌었어도 맨날 너만 경비를 보고 있냐?"

"그러게요. 이상하게 제가 경비할 때만 형이 오네요. 근데 이 사람들은?"

"신입이야. 리더 좀 불러줘."

"네. 일단 들어오세요."

컨테이너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예전과는 완전히 바뀐 안쪽이 보인다.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물류센터 한쪽 구석에 있는 커다란 닭장.

닭의 숫자가 제법 많아서 거의 양계장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 옆에는 빈 땅이 안보일 정도로 텃밭들이 있다.

"어? 왔어?"

텃밭에서 아이와 함께 곡괭이 질을 하고 있던 승규는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전 그럼 다시 경비 보러 갈게요!"

소주는 나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컨테이너로 돌아간다.

"이분들은?"

"신입이요. 잘 이야기 해봐요."

"아. 그래? 어서 와요. 반가워요. 안으로 들어갈까요? 하율아. 새로운 언니랑 오빠들이네. 안녕하세요. 해봐."

"앙녕하에요."

"꺄. 귀여워."

미래와 남자애들의 표정이 제법 괜찮다. 아마 그림 같은 물류센터의 모습과 아이 때문에 긴장이 많이 풀린 것 같다.

승규와 아이, 그리고 미래와 남자애들이 전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되었다.

음. 뭐하지?

기왕 온 김에 자매나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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