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73화 (7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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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

한참을 말이 없이 있던 지연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딘데."

"갈 거야?"

"갈 거니까 물어보잖아!"

"좋아. 그럼 네 배낭 메고 밖으로 나가."

"네가 앞장서야지!"

"그러니까 밖으로 나가. 나는 너와 가까이 붙을 생각 없어."

나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가는 지연.

나는 그녀를 따라가 번개 파동 범위에 닿지 않을 뒤에서 말했다.

"그대로 앞으로 쭉 가."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나는 너를 뒤에 두고 가고 싶지 않아. 잔말 말고 앞으로 가."

불쾌한 표정을 짓지만 어쨌든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지연.

"저 앞에서 왼쪽."

그렇게 나는 지연이를 데리고 한참을 걸어 지하상가로 갔다.

"...여기야?"

"아니. 이쪽."

지하상가 옆쪽 골목에 엉망이 된 통신사 대리점 안쪽.

지연이는 거기에 가지런히 모여있는 음식 봉지를 보자 깜짝 놀란다.

"뭐…. 뭐야. 이건?

"뭐긴 뭐야. 음식이지. 여기 위치 기억 잘해라. 나와."

지하상가가 그렇게 되고 시간이 꽤 흘렀지만, 대부분이 통조림 같은 물건이라 크게 문제는 없을 거다.

이정도면 적은 양은 아니니 나름 유용할 테고.

"여긴 뭐야? 왜 이리 음식이 많아?"

"빨리 나와."

좀처럼 시원하게 대답을 해주는 일이 없는 나 때문에 약간 불만이 많은 듯한 지연.

굳이 투명 듀오의 일을 꺼내고 싶지는 않다.

괜히 가라앉은 진흙을 파 뒤집어 물을 흙탕물로 만들 필요는 없지.

"가. 쭉."

그렇게 다시 지연이를 앞세워 대형 마트로 향했다.

텅 비어 버린 중동이라 인기척이 없어서 쾌적했지만, 지연이는 그걸 모르기에 걸음이 자꾸 처진다.

"아무도 없으니까 마음껏 걸어가."

"그럼 네가 앞장서서 가던가."

"뒤를 보면서 가고 싶진 않아."

"왜 그러는 거야!? 설마 내가 너를 공격할까 봐 그러는 거야?"

"당연하지. 안 그러면 뭐하러 이러고 있겠어."

"아무리 그래도 날 살려준 사람을 공격하고 싶지는 않다고!"

"그거야 니 생각이고."

"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가.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그럼 내가 입을 막으면 되나? 너 테이프 있지? 그거 줘. 내가 입을 막고 갈 테니까."

"그러려면 팔도 묶어야 해. 몸이랑 같이. 그러면 걷기가 힘들 거고 겉보기가 썩 좋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좀 그냥 가자."

완고한 나의 말에 지연이는 결국 입을 다물고 걸어갔다.

어휴 씨발. 이제야 좀 조용하네.

대형 마트에 도착하니 탐지에 제법 많은 기척이 걸린다.

한참 만에 온건에 그래도 잘 모여 살고 있는 것 같다.

누구 하나가 몰살시킨 다음 도망가서 텅 비어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이네.

마트 입구 근처로 가자 입구 안에 있던 한 명이 나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어!?"

쟤가 누구더라. 기억이 안 나네. 어쨌든 내가 구해준 놈이긴 한데…. 처음에 있던 네 명이었나? 그 남매였나?

아. 남매 맞는 거 같다. 스킬이 아마….

"소주."

"오랜만이네요!"

이 녀석은 나에게 악감정도 없고 스킬도 위협적이지 않다. 그래도 적당히 긴장은 유지해야지.

아무리 내가 구해줬다고 하더라도 아무나 믿을 수는 없는 세상이니까.

"가까이 오지는 말고."

다소 냉담한 나의 말에 소주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

맞아. 이 녀석도 나름 똑똑한 놈이었지. 쓸데없는 짓은 안 하는 녀석이었어.

"지금 여기 리더는 누가 하고 있지?"

"리더요? 딱히 없는데…. 그래도 리더라고 한다면 승규 형님?"

"애 아빠?"

"네. 맞아요. 하율이 아빠."

"불러와."

"네!"

소주는 환한 표정으로 위로 올라갔다.

신기하네. 이런 삶에도 저런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떠돌아다니는 것보단 낫다 이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애 아빠가 내려왔다.

그리고 그 뒤로 알고 있는 얼굴들이 잔뜩 따라왔다.

처음에 구해준 네 명, 서현이, 남매 쪽의 동생, 아이를 안고 있는 애 엄마.

"왜 전부…. 아저씨. 거기서 멈춰요."

이 안에서 주의해야 할 사람은 애 아빠 하나밖에 없다.

그와 거리를 벌리고 서자 다들 그 뒤에 서서 나를 바라본다.

감전 스킬을 가진 사람 옆에 저렇게 무방비하게 서 있다니…. 나는 저러고 있을 수가 없다.

친분이나 동료의식 같은 불확실한 감정만으로 사람을 믿을 수 없으니까.

"너…. 그때 그 녀석이구나."

"지하철역에서 안 나갈 것처럼 굴더니 왔네요."

"그렇게 됐네."

"왜 아저씨가 리더를 안 하죠?"

"아니…. 왜 아저씨라 부르지? 너 나랑 나이 차이 크게 안 나는 거 같은데? 형이라 불러."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요. 물어보는 말에만 대답해요."

"왜 그렇게 고압적으로 구는 거야?"

"사근사근하게 굴 필요가 있나요?"

"에휴. 리더는 제일 뛰어난 사람이 해야지. 나이가 많다고 리더야?"

"아뇨. 이 중에는 아저씨가 제일 뛰어나요. 유일한 공격 스킬 사용자니까.“

아니 유일하진 않지. 파이어 볼 쓰는 여자도 있으니까. 그래도 그건 공격 스킬로 쳐주기도 싫다. 쓰레기지.

"그래도 안 돼. 내가 리더가 되면 와이프랑 아이한테 편파적이게 될 수밖에 없어."

...음. 그래도 나이를 먹은 티가 나는 건가.

생각하는 게 확실히 나랑 조금 다르네.

"그럼 다른 사람들도 와이프랑 자식 대하듯 해요. 암튼 아저씨가 리더 해요. 이거 받고."

나는 가방에서 무전기 네 개 중 세 개를 꺼내 바닥에 그것들을 내려놨다.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르지만, 이거 써요."

애 아빠는 무전기를 집으려고 다가왔지만, 나는 그에게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요."

피식 웃은 애 아빠는 나를 보고 말했다.

"나만? 아니면 전부?"

"아저씨만."

"스킬 때문에?"

"네."

"좋아. 서현아. 저것 좀 가져다줄래?"

애 아빠의 말에 서현이가 내 앞으로 다가와 무전기를 집어간다.

서현이가 무전기를 집으며 나를 힐끔 바라보는 표정이 약간 묘하다. 저걸 무슨 표정이라고 해야 해? 반가움? 미쳤나?

무전기를 받아 살펴보던 애 아빠는 내게 말했다.

"이건 별로네. 생활용이라 반경도 별로고 충전기도 없잖아. 숫자도 몇 개 없고. 이런 거 쓸 필요 없어. 민준아. 우리 쓰는 거 몇 개 남지?"

"세 개요."

"그럼 그거 한 개만 가져다줄래? 충전기까지?"

쟤가 금속화였나 투명화였나…. 스킬이랑 얼굴이 매치가 안 되네. 이래서 남자들 얼굴은 기억하기가 어렵다니까. 굳이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암튼 금방 충전기 한 세트를 가져온 녀석은 내게 그걸 건네며 말했다.

"여기 보시면 이걸로 두 자리 채널을 맞출 수 있거든요? 지금은 59로 돼 있죠? 이거 날마다 한 번씩 바꾸는데 원주율로 바꿔요. 3.1415926535 여기까지만 쓰고요. 59니까 내일은 하나 띄고 65에요. 다음엔 51이고요. 아시겠죠?"

나는 무전기를 받아들고 대충 배낭에 넣었다.

나름 되게 머리 쓰네. 누가 이렇게 똑똑한 거야?

"그거 써. 업무용인 데다가 여기 마트에 중계기까지 달았으니 제법 넓게 터질 거야.

중계기는 뭐고 업무용은 뭐야. 암튼 된다니까 얌전히 써야지.

"그리고…. 그 여자분은 누구?"

내가 지연이를 바라보자 다들 그녀를 바라본다.

갑자기 주목을 받은 지연이는 의외로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쟨 또 왜 저래.

"이 여자. 여기서 받아줘요. 그리고 사람들 데리고 이 여자 따라가서 음식 가져오세요. 자세한 건 알아서 하고요."

"음식?"

"쟤한테 들으세요. 난 가요."

"뭐야? 벌써 가는 거야?"

"그럼요? 밥이라도 먹고 갈까요?"

"거참. 그렇게 틱틱거리지마. 너 좋은 사람인 거 다 아는데 왜 그리 나쁜 놈인 것처럼 굴어."

애 아빠의 말에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역시, 저 사람들과 나는 사고방식이 다르다. 좋은 사람이라니. 씨발 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내가 당신들을 여기다가 몰아넣은 건 내 변덕이에요.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니 그딴 말 하지 말아요. 당장이라도 남자는 다 죽이고 여자는 강간한 다음 죽일 수도 있으니까."

"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다 하네."

웃으며 말하는 애 아빠.

나는 그 모습에 기운이 빠져서 빨리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연이도 대충 처리했으니 여길 뜨는 게 낫겠다. 더 있다간 나도 이들처럼 말랑말랑해질 것 같아.

난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이봐!"

"저기요!"

"야!"

각양각색으로 나를 불렀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내 갈 길을 갔다.

내가 무전기를 주려고 했던 것, 그리고 받아왔던 이유는 딱 하나다.

쌍안경으로 지켜볼 때 소리는 들리지 않으니까.

아직 제대로 지켜보진 않았지만, 그저 지켜본다고 정보를 얻기는 힘들다.

저들도 정보를 얻을 테고, 그 정보를 공유하려면 저들의 대화를 함께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혼자 있어서 심심한 승희에게도 할 일을 만들어 줘야지.

아차. 닌X도...

마트에 간 김에 하나 가져오려고 했는데…. 에이씨. 괜히 똥폼 잡다가 못 가져왔네. 마트에는 있었을 텐데.

가져다준다고 해놓고 지연이를 스토킹하느라 한참을 못 줬는데…. 아휴 병신.

하여간 안 하던 짓을 하려니까 존나게 힘드네. 에휴.

바로 멀티로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그 빌어먹을 닌X도를 구하기 위해 조금 더 밖을 돌았다.

그래도 다행히 다른 폐허가 된 마트에서 게임기랑 소프트 여러 개를 구할 수 있었다.

대형 마트로 안 돌아가도 돼서 다행이네.

벙커로 돌아가 승희에게 건네주니 생각했던 것보다 좋아해서 의외였다.

마치 아이처럼 좋아하는 승희.

하긴, 이제 스무 살짜리고 사실상 열여섯에서 크게 나아질 게 없던 아이일 텐데.

저렇게 좋아하는 게 당연하려나.

게다가 무전기를 건네주고 방법을 알려주니 상당히 흥미를 보였다.

무전기가 되는 것은 오면서 확인했다.

내가 듣고 있을 걸 알면서도 나에 대해서 농담을 하던 녀석들.

'꼬우면 다시 오던가.' 이런 말을 들었을 때는 울컥했지만 겨우 참을 수 있었다.

"이거 듣고 있다가 쓸만한 내용이나 중요한 내용 있으면 기억해놔. 자신 없으면 기록해놔도 되고."

"와. 그래요. 앞으로 심심하진 않겠네."

얘는 왜 이렇게 해맑을까? 이해가 안 간다.

아니 승희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이해가 안 간다.

씻고 자리에 누워서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내가 너무 강박적인 걸까?

누군가에게 목숨을 잃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경계하는 게 이상한 걸까?

내가 스킬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아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있기에 과민해질 수밖에 없다.

찰나의 틈이라도 있으면 먼저 스킬을 써서 상대를 제압하는 게 일상이 되었는데, 인제 와서 그걸 버리라고 하는 것은 무리야.

마트에서, 아니면 물류 창고에서 모여 사는 인간들이 정상일까? 아니면 나처럼 보이는 대로 잡아 죽이는 게 정상일까?

세상이 정상이 아닌데…. 어떻게 살아야 정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모르겠다.

모르지만 굳이 답을 내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저 마트에 사는 사람들을 지켜보면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쓸모없는 스킬과 힘도 없고 짐만 되는 사람들을 떠안고 저들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지를 보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나오겠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나는 나에게 수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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