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72화 (72/703)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낚시

지연이가 아마도 첫 살인을 한 이후 2주.

그동안 남자 하나를 만났고, 또 그녀에게 죽었다.

경험이 없을 뿐, 멍청한 여자는 아니었다.

자칫 당할 뻔했지만, 이번에도 이긴 것은 그녀였으니까.

그리고 그날도 지연이는 울었다.

지랄 같겠지. 그저 남들보다 조금 늦게 세상을 봐버린 거다.

밝혀진 세상의 무자비한 현실에 여린 살이 굳어가고 있을 뿐이다.

지연이는 여러 군데를 떠돌아다녔다.

처음 나와서 일주일간 같은 모텔에서 있었던 것 빼고는 날마다 다른 곳을 옮겨 다녔다.

그래도 상동을 벗어나진 않았다. 이유가 있나? 그건 잘 모르겠다.

상동을 벗어난 것 같으면 어김없이 다시 크게 돌아서라도 상동으로 돌아왔다.

딱히 목적지는 없어 보이는데, 왜 그럴까.

뭐, 나야 관리하기 편해서 좋지만.

그날도 지연이는 아침부터 움직이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운 좋게 편의점 안쪽 창고에서 칼로리바 한 상자를 줍고 나서 해맑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애잔했다.

그리고 기분 좋게 한입 베어 물고는 격렬하게 입에서 뱉어내는 것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아이고 이 여자야. 그게 멀쩡하겠냐? 응?

머리는 잘 쓰는데 이상한 부분에서는 맹하다. 내가 따라다니는 것도 아직 눈치를 못 채고 있기도 하고.

정말…. 보면 볼수록 신기한 여자다. 보고 있는 게 심심하지 않을 정도.

그런 지연이를 보면서 길고 긴 스토킹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데, 탐지에 뭔가가 걸렸다.

사람, 네 명.

갑자기 나타난 네 명이 각자 모르는 사이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배치가 특이했다.

셋은 지상에서 일정한 간격을 훑고 있고 한 명은 3층 높이의 건물로 올라가고 있다.

나는 몸을 잘 숨기고 3층에 있는 녀석을 살펴봤다.

쌍안경 너머로 보이는 남자. 그 남자도 쌍안경을 들고 있다. 그리고 다른 손에 들려있는 무전기.

남자가 무전기를 들고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한쪽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지연. 밑의 세 놈이 천천히 지연이에게 다가간다.

조직적이다. 상당히 움직임이 좋다.

아마도 오랫동안 같이 다닌 듯 네명의 움직임이 제법 매끄럽다.

3층에서 쌍안경을 들고 있던 녀석이 한참을 둘러보더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밑에 있던 세 녀석은 거의 지연이 근처까지 도달했다.

나는 소리를 줄이고 최대한 그들의 근처로 이동했다.

말소리가 들릴 만한 위치까지 이동해서 몸을 숨긴다.

쌍안경을 들고 망을 본다는 것은 탐지 스킬이 없다는 이야기겠지.

탐지만 없으면 어떤 녀석들이든 걱정이 없다. 숫자도 넷밖에 안 되면 더더욱 무서울 게 없고.

"우리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여자 목소리? 나는 조심히 지연이 쪽을 바라봤다.

놀랍게도 지연이에게 다가온 세 명 중 두 명이 여자였다.

약간 덩치가 있는 여자 하나, 이쁘장한 여자 하나, 덩치가 큰 남자 하나.

"다가오지 마!"

지연이는 거리를 벌렸다. 순식간에 세 명의 남녀와 마주친 그녀는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네. 다가가지 않아요. 그저 우리는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알리고 싶을 뿐이에요!"

덩치 있는 여자가 조곤조곤하게 말했지만, 지연이의 경계심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하긴 저기에서 경계심을 풀면 병신 머저리 쪼다 년이지. 당장 죽어도 자연사라고 불러줄 수 있다.

"우리가 조금 뒤로 갈게요! 그러니 서로 공격하지 말죠!"

대체 무슨 개수작일까? 숫자가 많은데 습격을 안 하고 대화를 한다고?

미친 소리다. 대화는 일단 다 잡아서 테이프로 눈과 손발을 묶어놓은 다음에 하는 게 대화지.

탐지를 돌려본 나는 저들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아까 망보던 남자. 그 남자가 돌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도 여자가 둘이나 되죠. 당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같은 여자니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요. 우리는 당신에게 아무런 볼일이 없으니까. 그저 서로 공격하지 말고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에 모습을 드러낸 거예요!"

캬. 씨발 개소리를 정성껏 하네.

서로 공격하지 말고 사이좋게 가던 길 가자고? 지랄 염병 발차기를 하고 있네.

뒤로 돌고 있는 저 남자는 그럼 똥 누러 가는 거냐? 아무리 봐도 뒤에서 기습하려는 거 아냐?

내가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저 세 명이다. 그냥 지들이 스킬로 선빵하면 되잖아?

그게 안 된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제압 스킬이 아니거나, 죽이기 싫거나.

아마도 나같이 제압할 수 있는 스킬은 아닐 거다. 맞추면 죽거나 몸이 상하는 스킬들. 아니면 전혀 상관없는 생산 스킬이나 그런 것.

저들은 지연이를 잡고 싶은 거다. 이유야 뭐 말하지 않아도 알지. 덩치 큰 남자 새끼 표정에서 은근슬쩍 드러나니까.

아마 지연이가 이쁜 여자가 아니었다면, 이미 세 명은 협공해서 코인 주머니로 만들었을 거다.

그거 말고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

지연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뭐야? 또 마비야? 요즘 마비가 유행인가? 아니지. 생존에 유리한 스킬이라 살아남았다고 봐야 인과 관계가 맞겠지.

"아싸. 나이스!"

"오오."

"에휴. 발정 난 새끼들."

"내버려 둬."

여자 둘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지연이에게 달려가는 덩치와 탐색남을 바라본다.

뒤로 돌았던 저 탐색남의 스킬이 마비겠지? 서 있는 지연이에게 다가와 입에 재갈을 물린다.

"흐흐. 기가 막힌 데? 요즘 이런 여자 보기 힘들잖아?"

"그러게. 오랜만에 좋은 거 하나 잡았네."

그렇게 대화하며 덩치랑 탐색남은 지연의 몸을 이리저리 만진다.

"야. 대충하고 처리해라. 우리는 가방 뒤지고 있을게."

"씨발. 또 끌고 다니니 이딴 소리 하면 내가 너네부터 죽여버릴 거야?"

"야! 이정도 여자 구하기가 쉽냐? 좀 오래 두고 하자. 개년아!!"

"조까 돼지 새꺄! 그따위로 할 거면 너희끼리 다녀! 왜 자꾸 엉겨 붙고 지랄인데?"

이쁘게 생긴 여자의 말투가 상당히 고압적인데 덩치랑 탐색남은 제대로 대답을 못 한다.

존나 웃긴 관계네? 탐구 대상이야.

덩치남이 지연이의 몸에서 배낭을 벗겨서 덩치녀에게 줬고, 이쁜 여자는 남자 둘에게 말했다.

"추우니까 이 옆에 건물 안에 있는다. 적당히 하고 와라. 알았냐?"

"씨발. 알았다."

그러더니 덩치남과 탐색남이 지연이를 들고 옮기려는 듯 자세를 잡았다.

마비에 당했지만, 눈동자는 움직일 수 있는 지연이의 눈이 불안하게 떨린다.

에휴.

속으로 한숨을 쉰 나는 남자 둘을 재웠다.

그리고 그들이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 돌아본 여자 둘도 재웠다.

갑자기 쓰러지는 연놈들을 보고 동공이 커지는 지연이.

나는 그런 그들 앞으로 나섰다.

나를 보는 지연. 그녀의 눈이 상당히 복잡해 보인다.

"어휴. 이게 뭐 하는 거니?"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전기를 집었다. 전에 조폭 새끼들한테 이걸 안 가져와서 얼마나 후회했던지.

그리고 마체테를 들어 덩치남의 목을 찍은 뒤 바로 탐색남의 목도 찍었다.

[4,331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6,577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지연아. 너 방금 강간당하고 죽을뻔했어."

이번엔 덩치녀와 이쁜 여자에게 다가갔다.

이들의 무전기까지 집어서 옆에다 놓고 덩치녀부터 찍어 죽였다.

[5,218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쓰러진 이쁜 여자의 겉옷을 벗겼다. 제법 따듯해 보이는 이쁜 롱패딩.

나는 아직도 마비되어 꼼짝도 못 하는 지연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겉옷도 벗겼다.

내보내면서 입히긴 했지만, 영 촌스러웠던 게 걸렸는데 잘됐네.

이쁜 여자가 입고 있던 롱패딩을 입혀놓으니 지연이의 모습이 한결 나아졌다.

하. 이 와중에 이런 짓이나 하고 있고. 나도 참 제정신 아냐.

"사실 내가 너한테 할 말은 아니긴 하네."

낮이지만 명색이 겨울이라 밖은 아직 춥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쁜 여자의 겉옷을 올렸다.

지연이가 보는 앞에서 여자의 가슴을 만지며 나는 계속 말을 했다.

"이러면서 하는 말이 무슨 설득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들어봐. 나는 니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

차가운 곳에 있어서 그런가? 가슴을 만져도 별 감흥이 없다. 죽이기 아까운 외모지만 귀찮다.

마체테를 들어 여자의 목도 찍었다.

[11,428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씨발. 이것 봐라. 이쁜 여자들은 꼭 코인이 많다니까. 쓸 필요가 없는 거지. 주변에서 떠먹여 주니까.

그렇게 주변을 정리한 나는 내 배낭에 무전기 네 개를 전부 집어넣었다.

그리고 지연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입에 채워진 재갈을 풀어줬다.

추운 곳에 계속 서 있어서 그런지 마비당한 지연이의 볼이 새빨갛다.

아직 풀리려면 멀었나? 모양 빠지게 이러고 기다려야 하나?

근데 얘는 두번째 마비에 걸렸는데도 두번 다 안 넘어지네. 균형감각이 좋은가? 신기하네.

"내가 변태 같은 새끼라서 너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살려줄 수 있었어. 근데 이제 그것도 안 하려고. 대신 내가 제안을 하나 할게. 니가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고 어떻게든 살아가고 싶다면, 살만한 곳을 추천해줄게. 그게 싫다면 마비가 풀리면 혼자 떠나면 돼. 잘 생각해봐. 마비 풀리게 될 때까지 시간은 있으니까."

지연이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는 거 보니 서서히 마비가 풀리나 보다.

나는 그녀의 배낭을 들고 말했다.

"여기 안에 있을 테니 마비 풀리면 들어와."

바로 옆 모퉁이에 있는 제법 큰 설렁탕집으로 들어간 나는 가장 안쪽에 의자를 하나 놓고 앉았다.

조금 지나자 지연이가 비틀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고 내가 말했다.

"거기 앉아."

내가 내려놓은 배낭. 그 옆에 의자 하나.

적당히 번개 파동이 맞지 않을 만큼의 거리. 난 쫄보니까 이정도 대비는 해야지.

"왜. 날 살려줘?"

의자에 앉아 자신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는 지연. 혼란스러운듯한 표정.

"전에도 말했잖아. 이쁘장해서. 왜? 이쁘다는 소리가 또 듣고 싶었어?"

"장난 좀 치지 마!"

"내 맘이야."

"대체 왜 그렇게 이죽대는 거야? 좀 진지하게 말하면 안 돼?"

"그것도 내 맘이야."

"니가 어떤 사람인지 대체 모르겠어! 그냥 정신병자 같아!"

"정확하네."

"쫌!"

"뭘 알려고 들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데."

"이 롱패딩 여자는 왜 죽인 거야?"

"널 죽이려고 했잖아."

"니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

"뭔 상관이긴 몸을 섞은 사이지."

"아오! 씨발 진짜!"

"왜? 롱패딩 여자는 죽였으면 안 됐나?"

"그 여자도 이뻤잖아! 왜 그 여자는 죽이고 나는 살리냐고!"

"글쎄다. 왜 그랬을까?"

지연이의 표정은 답답함을 넘어서 화병이 날 것 같아 보였다.

근데 그건 나도 대답을 못 하겠다. 그냥 그러고 싶었으니 그런 건데.

"너. 나 좋아하니?"

"지랄하네."

"아니! 그럼 왜 살리냐고! 눈앞에서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미친놈처럼 칼로 사람 목을 찍어 죽이는 놈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널 풀어준 이유는 너를 미끼로 이 동네에 남은 놈들을 끌어내려 한 거야. 그거 말고는 별다른 이유는 없어."

"헛소리 하지 말고. 안 죽인 이유를 말하라고!"

하…. 참. 이유가 없는데 왜 자꾸 이유를 만들어내려 하지.

그냥 변덕인데.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

"그럼 내가 너 좋아한다고 치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좋아한다고 치자가 무슨 소리야!?"

"그래. 개소리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떻게 할지나 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