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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71화 (7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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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

지연이는 참 열심히 살고 있다.

모텔방이 완전히 안전한 곳은 아니라지만 어쨌든 살 수는 있는 곳이고, 먹을 것만 충분하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그래. 문제는 음식.

그녀가 코인을 얼마나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진 코인으로 음식을 사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다.

어떻게든 현실에서 음식을 구해야 한다. 누구라도 예외 없이.

하지만 이미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사람들이 모조리 쓸어서 갔고, 간혹 남아있다 하더라도 이미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약탈, 혹은 살인.

이 세상은 그렇게 됐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선 누군가의 목숨을 취해야 한다.

투명 듀오를 통해서 편하게 음식을 얻은 게 얼마나 된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급격하게 바뀐 세상이 익숙하진 않은 것 같다.

이미 비어버린 상점, 마트, 편의점…. 이런 곳을 배회하는 모습은 너무 어리숙하다.

상식적으로 거기 뭐가 남아있겠냐고. 이 얼빵한 여자야.

숨겨져 있던 통조림 창고 같은 것을 발견하지 않는 이상 현실에서 뭔가를 얻을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아직은 내가 배낭에 넣어놨던 음식이 있으니 당장 굶지는 않겠지만, 음식이 떨어질수록 초조해질 거다.

과연 그녀는 어떻게 될까?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연이를 지켜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스킬이 있다지만 그녀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 자신을 노릴 수 있다는 불안감.

내가 탐지를 얻고 난 뒤에야 겨우 버릴 수 있었던 그 공포감은 상당히 무서운 감정이다.

같은 행동을 해도 두세 배는 조심해야 하며 이동할 때도 탐색할 때도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렇기에 행동은 위축되고 굼떠진다. 움직이는 반경이 상당히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단지 문제가 되는 건 잠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수면을 쓰지 않는 이상 잠을 쉽게 못 자기 때문에 지연이가 자는 것을 확인해야 잘 수 있다.

다만 한번 자버리면 열 몇 시간씩 자버린다는 거다. 도중에 깨기도 쉽지 않고.

만약 내가 자고 있는데 지연이가 어디론가 떠나버린다면 굉장히 귀찮아지게 된다.

게다가 자는 줄 알고 나도 자버렸는데 밤사이 어디론가 떠나버려도 답이 없다.

빌어먹을. 이 생각을 못 했어.

GPS 같은 거라도 되면 좋겠는데…. 에휴. 바랄 걸 바라야지.

어쩔 수 없이 최대한 토막잠을 자기로 했다. 진동으로 알람을 잔뜩 맞춰놓고 꽉 쥐고 자는 수밖에.

씨발. 괜한 짓을 해서 내 생활 사이클을 바꿔버리게 됐네.

그렇게 일주일을 지켜봤다.

지연이가 자는 사이 승희에게도 한번 다녀왔지만, 아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도 않았고, 이쪽으로 누군가 오지도 않았다.

예전에 그 누구냐. 서현이. 서현이가 있는 체육관에 왔던 두 녀석의 말이 생각났다.

상동에 사람이 없다고. 그 씹쌔끼들이 다 털어서.

그 말이 진짜인가보다. 주변 일대를 다 뒤져봐도 사람의 기척이 없다.

이래서는 지연이가 굶어 죽는 수밖에 없는데.

슬슬 배낭에 넣어줬던 음식이 동날 때가 됐을 거다.

코인이 있을 테니 바로 굶어 죽지는 않겠지만 슬슬 뭔가를 조치하지 않으면 위험할 텐데?

과연 자기 처지를 알까?

다행히 그녀는 멍청하진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주변이 밝아지자마자 지연은 모텔에서 나왔다.

비어버린 배낭 덕분에 몸이 가벼운지 움직임은 이전보다 나아졌다.

과연 그녀는 어디로 갈까? 생각해 둔 곳이 있을까?

일단 따라간다. 뭐 어디든 따라가는 수밖에 없지.

한참을 따라가니 그녀는 창고형 대형 마트로 갔다.

음…. 참 일차원적이구만. 거기에 뭐가 있겠니?

세상이 이 꼴이 난 뒤로 가장 먼저 털린 곳 중에 하나다. 그 안에 인간이 입으로 삼킬 수 있는 게 있을 리가 없다.

잔뜩 실망한 듯한 지연. 웃기는 여자야. 재밌네 정말.

지연은 그렇게 꼬박 하루를 이곳저곳을 다녔다.

음식이 있을 만한 곳은 다 들어가서 뒤지는 지연. 혼자만 4년 정도 시간이 늦은 것 같다.

대체 얼마나 편한 삶을 산 거야? 투명 듀오 녀석들 고생 좀 했겠네.

해가 질 무렵 지연은 한 공원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봤다.

제법 멀리 떨어져서 쌍안경으로 보고 있어서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그녀는 울고 있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석양이 비추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쁘장한 여자가 울고 있으니 무슨 화보 같네. 씨발. 불공평한 세상이야.

내가 저러고 있으면 존나 찌질해 보일텐데.

지연은 또다시 눈에 보이는 아무 모텔로 들어갔다.

누가 있을지도 모를까 봐 모텔 하나 들어가는데도 상당한 시간을 소요한다.

그나마 그녀가 공격 스킬을 가지고 있기에 저 정도지. 캔맥주 제작 같은 쓰레기 스킬이었으면 엄두도 못 냈겠지.

아니다. 그럼 애초에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구나.

지연이의 일과 별개로, 나는 상동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했다.

중동은 그나마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내가 다 잡아 죽이긴 했지만 말이지.

근데 상동은 정말 없어도 너무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됐지? 정말 그 씹쌔끼들이 다 잡아죽여서 그런가?

그럼 그 새끼들도 상동에 남아있지 않을 확률이 높다.

목초지의 풀을 다 뜯어 먹으면 목동은 양 떼를 다른 목초지로 옮기는 법이니까.

씨발. 낚시를 해야 하는데 물고기가 없네.

미끼가 아무리 A급이면 뭘 하냐고. 피라미 새끼 하나도 없는데.

다음날 점심.

말이 무섭게 피라미가 걸렸다.

탐지에 걸린 두 명. 거리는 아직 여유가 있다. 대략 50m 정도?

지연이와 남자 사이는 거리가 한 80m 정도. 마주치려나? 아니면 엇갈리려나?

조금 있으니 근처 2층 건물에서 지연이 들어간 작은 마트를 내려다보고 있는 내 시야에 다른 두 명도 들어왔다.

남자 두 명. 30대 초반 정도?

딱 내가 원하던 그림이다. 과연 어떨까? 흥미진진 한데?

남자들 중에 탐지는 없는 것 같다. 탐지가 있으면 저런 움직임이 나올 리가 없지.

그들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돌아다니고 있다. 그런데 방향이 조금 안 맞는다.

이대로라면 안 마주치고 서로 엇갈릴 거 같은데.

어쩐다.

마침 지연이가 마트에서 나왔다. 남자 둘은 지연의 반대 방향으로 슬금슬금 가고 있다.

어차피 저 남자 둘은 내가 죽이긴 해야 하는데.

아…. 엇갈리지마. 제발.

난간에 몸을 숨기고 셋을 번갈아 가면서 지켜보고 있는 나는 약간 초조해졌다.

좋은 방법 없나?

내 발밑에 비어있는 캔 하나가 보였다. 혹시…? 음…. 일단 해본다.

안되면 내가 다 죽이면 되지.

빈 캔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빈 캔은 남자 둘과 지연이가 있는 사이쯤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깡! 깡! 데구르르르르

조용한 거리에 빈 캔이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그리고 그걸 본 양쪽은 반응이 완전히 달랐다.

다른 쪽으로 가려던 남자 둘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빠르고 조용하게 캔이 구른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지연이는 그대로 숨었다.

거리가 줄어드는 양쪽. 남자 둘은 캔이 구르고 있는 쪽으로 와서는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꼼짝 못 하고 숨어서 남자들 쪽을 바라보고 있는 지연이와 주변을 둘러보는 남자 둘.

2층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는 나에게는 흥미진진한 상황.

남자 둘이 지연이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발견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남자 둘이 그대로 몇 걸음만 더 가면 지연이가 숨어있는 바로 앞을 지나갈 테니까.

의외로 행동은 지연이가 먼저 했다.

"살려주세요!"

갑자기 나타난 여자, 그것도 이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살려달라고 하며 나타나자 남자 둘은 당황해하면서도 약간 주저했다.

그리고 그 약간의 주저함은 그들의 미래를 결정했다.

"번개!"

앙칼진 지연의 외침.

남자 둘이 그대로 번개 파동에 직격당했다.

멀리서 지켜보는 나야 번개 파동이 퍼지는 것을 볼 수 있었지, 바로 앞에서 당한 그들은 자기가 뭐에 당했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인간들답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스킬을 쓸 수 있었는지 지연이 꼼짝도 못 하고 그대로 굳었다.

뭐지? 마비인가? 아무래도 그대로 굳어있는 걸 보면 마비인 거 같은데. 석화는 접촉해야 하니까.

아니면 기절인가? 기절이면 쓰러질 테지? 암튼 저건 마비가 맞는 거 같다. 나도 당해봐서 아니까.

지연이는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굳어있었다. 나는 넘어졌었는데…. 다행이네.

이런 날씨에 잘못 넘어지면 위험해. 조심해야지.

번개 파동에 직격당한 남자 둘은 꼼짝도 못 하고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쌍안경으로 살펴보니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완전히 죽지는 않은 듯?

그리고 지연이도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다.

마비 지속시간이 어떻게 되더라? 나는 그때 제법 빨리 풀렸는데.

20분 정도가 지나자 지연이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대로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는 그녀.

남자 둘은 아직도 일어날 기색이 없다. 결국, 끝이네.

"번…. 번개."

파즈즈즈

번개 파동이 한 번 더 남자 둘을 직격했다.

보기만 하는데도 살타는 냄새가 나는 듯하다.

"번개!"

파즈즈즈

세번째 번개가 남자 둘을 통과하자 그들은 빛이 되어 사라졌다.

자리에 남아 있는 금색 주머니 두개.

지연이는 그 주머니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설마…. 사람한테 처음 쓴 거야? 저건 사람을 죽여본 사람의 표정이 아닌데?

하지만 충격은 충격이고 생존은 생존이다.

지연이는 쓰러진 남자들의 코인에 다가갔다. 빨려 들어가는 코인.

그리고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난다. 굉장히 힘들어하는 모습.

의외다. 저런 모습이라니.

그녀가 보여준 모습들은 다 허세였던가.

아니면 각오나 분노 없이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서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가?

뭐가 됐든 의외다. 정말로.

지연이는 그대로 거리를 벗어났다.

위험을 느꼈는지 그대로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모텔로 찾아 들어갔다.

여기는 싸구려 모텔이 아니고 제법 있어 보이는 곳이네.

이런 곳은 참 잘도 찾아 들어가는구나.

능숙하게 카운터를 뒤져 도어락 카드를 찾아낸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안 무섭나? 관리도 안 된 엘리베이터를 타네. 진짜 대단한데.

오늘은 나도 같은 곳에서 자야겠다. 나도 카운터에서 카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엘리베이터는 4층에 멈춰있었고, 내 카드에는 607호라고 쓰여 있었다.

6층. 딱 좋네.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 4층에서 탐지를 돌리려는데 굳이 안 돌려도 될것 같다.

입실 불이 들어와 있는 403호. 그 앞에 서니 방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흑흑하는 소리가 아닌 엉엉 우는 소리.

그야말로 대성통곡을 하고 있다. 뭐지 이건? 자기가 죽인 두 사람 때문에 울고 있는 건가?

한참을 서서 그녀의 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조금 있다가 물소리가 났다. 씻는 건가?

이 모텔인지 호텔인지는 방음이 형편없네.

조용히 움직여야겠어.

나는 6층 내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배낭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에 올라갔다.

몸을 기대고 누워 지연이에 대해 생각했다.

신기한 여자.

마냥 독하고 위험한 여자처럼 보였는데, 속 알맹이는 여리고 약한 온실 속의 화초일 뿐이다.

의외야. 정말 의외야.

지연이라는 여자를 모르겠다. 아니 여자 자체를 모르겠다. 정말 어려운 생물이다.

과연, 내가 그 생물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날이 오긴 할까?

아마 그건 불가능할 것 같다. 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남자도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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