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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탐사
물류센터.
여기서 한 시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곳.
집을 나선 지 10분 만에 후회했다. 아 씨발 존나 춥네.
왜 아직도 겨울인 거야. 미치겠네 진짜.
한 3개월 정도만 집안에서 겨울잠이라도 잘까? 존나 싫다 정말.
겨울이면 추운 게 당연하지만, 오늘은 유독 춥다.
진짜 너무 춥다. 진짜 이건 아닌 거 같다.
가면 안 될 이유 없나? 없을까? 찾아보자. 가면 안 될 이유.
없네. 씨발.
가자. 이 핑계 저 핑계 다대고 안 가려 들면 평생 못가.
운동한다고 생각하자. 차갑고 신선한 공기와 함께하는 유산소 트래킹. 존나 좋네 씨발.
전기가 무제한이라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기가 뒤졌다면 멸망 이후 서로 쳐 죽이지 않았어도 이정도만 남지 않았을까?
대체 왜 전기랑 물을 남긴 걸까? 그게 가장 헷갈리는 일이다.
확실한 건 이 짓을 한 놈들의 목적은 인류의 멸절이 아니다.
뭔가 노리는 게 있어.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길은 이쪽이 맞을 텐데.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바뀐다. 높은 건물들이 많이 없어지고 전체적으로 낮아지며 낡아간다.
제대로 오고 있는 거 같다. 물류센터는 안 가봤어도 그게 있는 동네는 가봤으니까.
사람은…. 없다. 한 시간을 걸어왔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긴…. 이 주변이야 사람이 있기가 힘들지. 뭐가 좋다고 이런 데서 살겠어.
이제 여기만 돌면 물류센터가 나올 텐데…. 이쪽이 맞지?
아. 보인다. 저거구나.
존나 크네 씨발. 마트 보다 더 큰거 같네.
특유의 공장형 건물. 높이가…. 어휴. 5층이야? 높네.
게다가 한 개가 아니다. 옆에 또 2개가 더 있다.
메인 건물보단 조금 작지만 역시 만만치 않은 크기.
세희년이 여기를 먹었다고? 진짜로? 가능한가?
그 빨간 조끼 녀석들이 30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도 물류센터에 있다고 했다.
그럼 지금 여기를 먹고 있는 놈들은 누구야? 뭐 다들 자기네 거라 그래?
누구 말을 믿겠냐. 다들 씹새끼들인데.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지.
다시 탐지 숙련도 버닝이벤트다. 씨발.
일단은 천천히 외곽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은 정찰이니까.
75m의 반경의 탐지는 멀리에서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건물 안쪽까지는 못 봐도 외곽부터 도는 것은 안 들키고도 얼마든지 가능할 테니까…. 라고 생각했다.
힘드네.
큰길 가에 있는 입구에 사람은 없었지만, 큰길은 너무 노출이 많이 된다.
그리고 물류센터 옆은 아예 길이 없다. 축대로 쌓아 올려진 바닥. 그리고 그 위에 쳐져 있는 녹색 펜스. 주변을 빙 돌 수가 없다.
게다가 축대 밑은 논밭이라 가기가 애매했고 뒤쪽은 산이다.
하…. 씨발. 위치 정말 개 좇같네.
축대 밑쪽으로 돌면 돌 수는 있을 거 같은데…. 해볼까? 해보자.
어차피 침투하려는 것은 아니니까. 밑을 도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렇게 크게 물류센터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여기는 정말 거지 같은 곳이다.
출입구는 정문이 끝이다. 뒷길? 옆길? 없다. 그냥 다 축대 위에 펜스로 둘려 있다.
작정하고 넘으려면 넘겠는데 그러려면 맨몸으로는 힘들 거 같다.
내가 무슨 특수부대도 아니고…. 저걸 맨몸으로 어떻게 넘어.
게다가 기분 나쁘게 CCTV가 곳곳에 있다. 그리고 더 기분 나쁜 것은 CCTV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는 거다.
보고 있다. 분명히.
마트 처럼 어설픈 방어가 아니다. 분명 주변을 감시하고 있는 거다.
게다가 건물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문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두 명씩. 그마저 외곽에서 돌았기에 정확한 건물 파악도 안 됐다.
하아. 골고루 지랄이네 진짜.
날이 밝은 다음 지켜봐야 하나? 근데 여긴 또 높은 건물이 없네.
혹시나 해서 쌍안경을 가지고 오긴 했는데…. 보고 있을 곳이 없다.
안으로 들어가 봐?
아냐. 너무 위험하다. 무슨 방비를 어떻게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일단은 최대한 뭐라도 해봐야겠는데….
물류센터 맞은편에 있는 건물 중에서 그나마 가장 높은 건물을 찾았다.
3층짜리 건물. 옥상은 힘들겠지. 춥고 노출이 된다.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층에는 뼈 해장국 집인데 위에는 간판이 없다. 뭐 하는 곳이야?
아. 원룸이네. 원룸이면 좋지. 문만 열린다면.
역시 문이 열릴 리가 없다. 아 귀찮네. 어디 빠루라도 없나.
하나하나 문을 열어보는데 다행히 한 개가 열렸다. 나이쓰.
누군가 살았던 흔적을 보는 것은 썩 좋은 것은 아니다.
여기가 스무 살 아가씨의 향기 나는 방이었다면 뭐 나름 즐거웠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재떨이가 있고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데다가 방안에서 기분 나쁜 남자 냄새와 담배 찌든 내가 난다면 당연히 좋을 리가 없다.
전혀 나이쓰 하지 않은 상황.
게다가 여기 창문에선 물류센터가 잘 보이지 않는다.
나가야지. 머리가 살짝 아플 정도네.
301호라고 적혀있는 이방이 좋을 거 같은데…. 문 못 여나?
다른 건물로 갈까? 마땅하지가 않네.
아. 아까 옆 건물에 카센터가 있었던 거 같은데. 그런 거기 빠루가 있지 않을까? 일단 가보자.
카센터는 참 좋은 곳이다. 각종 공구가 가득한 곳. 기름때가 많이 묻어있긴 하지만 성능은 좋다.
아니면 샌드위치 판넬로 만들어진 공장들. 가보면 쓸만한 공구들이 제법 많다. 전동 드릴이라던가 그런 것들.
카센터에는 마침 빠루가 있었다.
묵직하고 서늘한 느낌.
빠루와 함께라면 뭐든지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빠루의 기운을 받은 나는 다시 원룸으로 와서 문에 빠루를 걸고 뜯었다.
싸구려 원룸의 싸구려 문짝이라 바로 문이 열린다. 역시 빠루는 신이고 무적이야!
방 안은 정말 휑했다.
뭐 있는 게 없냐. 이불이 있는 거 보면 사람이 살긴 했던 거 같은데.
하나씩 뒤져보니 뭔가 나오기는 했다.
여자 속옷 몇 개. 쓰다 남은 생리대 봉지. 텀블러. 콘돔.
음…. 오피스텔 일이 생각나서 속옷을 펼쳐봤다.
생각보다 작다. 푸짐하신 분은 아니셨나 봐.
됐어. 이정도면 뭐 나쁘지 않아.
창문으로 물류센터를 바라보니 나무 때문에 시야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보일 건 보였다.
이 근처 어디에서도 여기만큼 시야를 확보할 만한 곳은 없을 테니 이정도로 만족해야지.
짬짬이 탐지를 돌려봤다.
물류센터 가장 큰 건물의 끄트머리는 탐지 범위에 걸리기에 입구 안에 있는 두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건물 안에 있어서 육안으로나 쌍안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게 흠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뭔가를 기다리는 것은 참 재미없다.
그건 아마 밤새 경비를 하는 저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래도 둘이니까 서로 이야기라도 하려나.
무슨 이야기를 할까?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의 이야기?
가족이라던가 연인, 재미있었던 일, 즐거웠던 일, 좇같았던 일...그런 것들?
아니면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
예를 들면 세희년에 대한 이야기나 그런 것들.
마녀라고? 대충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 것 같다.
매혹은 정말 사기 스킬이다.
이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귀신도 유령도 아니다. 당연히 사람이지.
근데 그런 사람을 조종한다. 아니 조종하는 것은 아니지. 자발적으로 하는 거니까.
내가 아는 바로는 매혹을 당하면 매혹을 건 사람에 대한 호감도가 최대치로 올라간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은 다 듣게 되는 거다.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 없이 즉시.
문제는 그 후유증이다.
사람의 정신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리고 매혹은 그 단순한 허점을 파고든다.
매혹에 걸리는 녀석은 매혹당한 시간 안에는 건 사람에게 완벽하게 호의적인 사람이 되지만 매혹이 풀리면 인지 부조화가 오게 된다.
그 누구보다 매력적이고 아껴야 하며 지키고 소중하게 대해야 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면 뇌가 삑싸리가 나는 거다. 뭐지? 하고.
그리고 그런 사람이 다시 매혹에 걸렸다가 풀리길 반복하면 뇌가 슬슬 고장 난다.
고장 난다기 보단 자기가 부하가 걸리니 알아서 조정한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매혹이 풀렸을 때도 없던 호감도를 만들어낸다.
증오가 있든 혐오하는 감정이 있든 뭐가 됐든 간에 그런 것들은 다 스스로 합리화해버리고 매혹에 걸렸던 시간의 느낌과 걸리지 않았던 때의 중간 점을 알아서 만든다는 거다.
결국, 그 중간 점은 점점 높아지게 되고 나중에는 매혹을 걸지 않아도 어느 정도 호의적으로 변한다.
병신같은 인간의 뇌는 그만큼 나약하다.
그래서 매혹이 가장 무서운 거다.
이성에 대해서는 일정 시간 내에서는 완벽한 통제권을 가지는 데다가 시간이 끝나도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니까.
그런 년이니…. 마녀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겠지.
그렇다면 또 의문이 든다.
빨간 조끼 놈들은 어떻게 아직 살아남았을까?
솔직히 세희년이 작정하고 덤비면 이딴 물류센터 먹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힘대 힘의 대결, 소모전이 아니다. 매혹은 말 그대로 상대방을 전향시킨다.
적이 바로 아군이 되어 즉각적인 전력으로 포함되는 개씹사기 스킬.
어째서일까, 왜 아직 이곳을 점령하지 못했을까?
그때, 정종찬 개새끼가 씹쌔끼들한테 얻어간건 뭐였을까? 대가로 준 것은?
그걸…. 먼저 알아봐야 할까? 그러면 뭔가 단서가 생기려나?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은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얻고 간다.
그렇게 사흘을 있었다.
불면증인 나도 이틀을 넘어가면 몸이 축나기 시작한다.
이런 곳에서 잠을 잘 수는 없으니 참았지만, 확실히 몸이 망가지는 게 느껴진다.
왕복 두 시간 거리가 귀찮아서 참았는데…. 안 되겠다.
물류센터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들어오는 놈도 나오는 놈도 없고 정해진 시간에 교대만 있을 뿐이었다.
8시간씩 3교대. 시간은 아침 8시 오후 4시 자정.
나름 안정적인 곳이다. 쉽게 뚫기는 힘들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힘들지도? 그만큼 방비가 허술하진 않다.
다른 무리를 저기에 처박아 봤으면 좋겠는데. 양패구상처럼 좋은 방법이 없으니까.
아…. 일단은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 더는 한계야.
한 시간 동안 집에 어떻게 걸어갈지 자신은 없지만 여기서 이럴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