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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밤거리를 여자와 걷는 건 제법 괜찮은 기분이다.
물론 그 여자가 입과 몸이 테이프 칠이 돼 있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빨리 좀 가자. 왜 이리 느려터졌니?"
찰싹!
지연의 엉덩이를 찰싹 때린다.
패딩 안쪽에 팔이 묶여있는 지연은 내 공격을 막을 수 없다.
게다가 입도 막혀서 뭐라고 말도 못 한다.
발은 풀려있기에 발로 나를 차보려고 했지만 저런 느려터진 발차기야 맞아도 안 아프다.
오히려 지가 차 놓고 균형을 잃어서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는다.
"어휴. 조심해야지. 이런 날 엉덩방아 잘못 찧으면 엉덩뼈에 금 가."
쓰러진 채로 나를 노려보는 지연.
눈길이 고분고분하진 않지만 이쁘니까 봐준다.
언제쯤 저 독기어린 눈빛이 바뀌게 될까? 궁금하네.
손이 묶여있기에 아등바등하며 일어난 지연이 다시 걸어간다.
이번엔 바짝 붙어서 엉덩이를 슬슬 만졌다.
노려보기도 지쳤는지 그저 앞만 보고 가는 지연.
놀리는 게 너무 재밌다. 초딩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야.
"빨리 가서 또 딜도 맛을 보고 싶은 거야?"
내가 귓가에 속삭이자 제자리에 멈추더니 눈을 감는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갑자기 머리를 들이박았다.
"읍!"
지가 박아놓고 지만 아파하네. 나는 하나도 안 아픈데.
그렇게 아파하던 지연은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으으으으음."
그래. 답답하겠지. 억울하고. 원통하고. 뭐 암튼 그럴 거다.
사실 얘가 나한테 잘못한 건 없는데. 그저 운이 더럽게 나빴을 뿐이지.
탐지를 돌려서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울든지 말든지 가만 놔뒀다.
음, 거의 다 오긴 했는데…. 어차피 재워야 하니 그냥 지금 해야겠다.
나는 지연을 안았다.
갑자기 자신을 안자 몸부림쳤지만 내가 재웠기에 바로 잠이 들었다.
"어우. 무거워."
짐짝처럼 어깨에 둘러맸다.
탐지를 돌리며 벙커까지 도착한 나는 우여곡절 끝에 민지가 있던 방에 지연을 내려놨다.
"아오. 힘들다. 되게 힘드네."
일단 수면을 초기화시키고 옷을 벗었다.
더워서 안 되겠다. 샤워 좀 해야지. 땀이 흥건하네.
개운하게 씻고 나와서 지연의 몸에 붙은 테이프를 다 떼주고 음식을 방안에 넣어놓은 뒤 문을 잠갔다.
본격적으로 놀기 전에 쟤도 먹고 씻고 싸고 해야지.
자물쇠를 하나 더 달아야 할까? 좀 더 튼튼하게?
아무래도 쟤는 좀 성깔이 있어 보여. 더 달아야겠다. 콘크리트에 기리질 하기는 존나 싫지만 안전이 최고지.
자물쇠를 하나 더 달 때쯤 지연이가 일어났다.
"이 씨발 새끼야! 여긴 또 뭐야!"
와 걸걸하네. 성깔 봐라.
"힘 빼지 말고 거기 준 거 먹고 씻고 똥도 좀 싸라. 이따 하다가 똥 마려우면 어떻게 해?"
"이 쌍 놈아! 조루새끼야! 뒤져 이 새끼야! 번개!"
방안에서 파즈즈 하고 번개 파동 쓰는 소리가 들린다.
문짝이 금속이었으면 전기가 통했으려나? 어우 무섭네.
"헛짓거리 하지 말고 하란 대로 해라."
쾅!
지연이가 문을 발로 쳤지만, 문은 꼼짝도 안 했다.
나름 방공호로 지어진 벙커다. 어설프게 발로 찬다고 문짝이 부서질 리는 없다.
"발 아프겠다. 근데 그렇게 해서 문 부서지겠냐?"
쾅!
"더 세게!"
"야이…. 아오!!!!"
아. 너무 재밌어. 중독될 거 같아.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저 스킬들은 상당히 귀찮단 말이야.
생각해보니 그때 기숙사에서 돼지의 일행이 아니었으면 내가 뒤졌을 뻔했잖아?
오싹하네. 앞으로는 주의해야겠어. 무서워서 살겠나.
"허튼짓 하지 말고 쉬고 있어라. 안 그러면 묶어 놓고 개처럼 입으로 먹으라고 할 테니까."
지연이에게 신경을 끄고 모니터 룸에서 간단하게 카메라를 확인했다.
자리를 오래 비운 게 아니라 확인은 금방 끝났다. 이제 한숨 자볼까.
자고 일어나면 내가 꽁꽁 묶여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정말 레전드이긴 한데.
수면 쓰고 자면 어지간해서는 안 깨니까…. 정말 불편하다.
뭐 그렇다고 해도 내 방까지 문 두 개를 다 작살내고 들어올 수는 없겠지만.
나는 나에게 수면을 썼고, 금방 잠들었다.
12시간 정도 잤다.
오랜만에 꿈을 꿨다. 예지랑 민지가 나오는 꿈.
하…. 그 쌍년들은 왜 잊히지도 않는 거야. 언제까지 나를 괴롭히려고?
문제는 꿈에서는 셋이서 사이좋게 3P를 했다.
서로를 정성껏 애무하고 사이좋게 절정에 가는 환상적인 섹스.
오죽하면 일어나서 몽정한 게 아닐까 걱정을 했겠어.
다행히 그런 추태는 부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깨고 나니 기분이 찝찝하다.
멍청한 새끼. 으휴. 병신 쪼다 새끼.
방에서 나가기 전에 탐지를 돌렸다.
이제는 지연방이 된 자신의 방에서 가만히 있는 지연.
문을 열고 나가서 문에 난 창으로 안을 바라봤다.
가만히 앉아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여자.
개구기를 끼우면 대화를 못 하기에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똥 쌌어?"
내 목소리에 내 쪽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저벅저벅 다가와 창을 사이에 두고 나를 바라본다.
독기 어린 눈이 아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무심한 눈.
"대화 좀 하자."
목소리도 왠지 비장하다. 왜 이렇게 심각한 거야?
"말해봐."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널 잡아 가두고 보지에 딜도를 꼽는 거?"
"장난치지 말고."
"뭐가 궁금한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한테 잘못한 거 없어. 그리고 기영이랑 창호한테도 잘못한 거 없고. 근데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기영이랑 창호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 투명화 쓰던 두 명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맞아."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그래. 너는 아무 잘못한 게 없어."
쾅!
"근데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깜짝이야. 문은 왜 치고 지랄이야.
"니가 이쁜 여자라서?"
"뭐?"
"남자는 거의 죽어. 세상이 이 꼴이 되고 나서 내가 재우고 나서 안 죽인 남자는 지금까지 넷밖에 없어. 그것도 최근 한두 달 사이에나 있던 일이야."
"갑자기 왜 뚱딴지같은 소리야!?"
"니가 이쁜 여자라서 살아 남은 거라고. 가슴이 달리고 보지가 달려있어서. 그리고 나름 이쁘장하고 몸매도 좋아서. 안 그랬으면 여자라도 죽었어. 물론 이쁘장해도 죽은 애가 더 많지만."
지연이의 얼굴이 혐오와 경멸로 물들어간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계속 말했다.
"그냥 내가 미친놈이라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해. 당연히 넌 아무 죄가 없어. 그러니 니 안에서 잘못을 찾으려고 하지마."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
"고마워. 이해해줘서."
"야…. 아니…. 저기요. 그럼 제가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뭐에요? 알려줘요."
웃기네. 말투는 왜 바꾸는 건데?
"존댓말 쓸 필요 없어. 못 나가니까. 나는 여자를 믿지 않고, 특히 너처럼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스킬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믿지 않아. 그러니 포기하는 게 좋아. 그렇다고 자살하거나 하진 말고."
혐오와 경멸이 절망으로 바뀌는 모습은 뭔가 드라마틱 했다.
연기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혹시 연예인인가? 아니면 배우? 아니면 지망생? 티비를 안 봤으니 잘 모르겠다.
"하…."
"궁금한 건 다 끝났어?"
"미친 새끼…."
"미안하지만 그건 나에게는 욕이 아니야. 강아지한테 개새끼라고 하는 거랑 비슷한 거니까."
"진짜…. 없어?"
"응. 아깝네. 뭔가 희망이라도 줄 수 있는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해줄 말이 아무것도 없네. 그래도 어떻게든 짜내서 말해본다면, 적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거고 날씨가 풀리면 산책도 할 수 있고….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야. 물론 입은 막아야 하지만."
"그래…. 그거 정말 뒤지게 고맙네."
"아. 한 가지 더 있네. 적어도 네가 선을 넘거나 자살만 하지 않는다면 죽지는 않을 거야."
지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재웠다.
방으로 들어간 나는 그녀의 옷을 벗겼고 아까 딜도가 튀어나온 것을 봤으니 팬티는 벗기지 않았다.
모든 세팅을 다 하고 딜도와 바이브레이터의 스위치를 켰다.
방안에 울리는 진동음.
쓸데없는 말을 해서 분위기가 약간 처졌지만, 조금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건전지로 동작하는 진동들이 몸을 자극해줄 테고 참기 힘든 쾌감이 몰려올 테니까.
"으으으."
지연이 깨는 걸 보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문을 잠그고 나와서 옷을 입었다.
멀티로 가야지. 가서 승희를 안아야지.
기분이 썩 좋지가 않다. 꿈에서부터 지연과의 대화까지.
내가 왜 이러냐고? 아무 이유가 없다.
핑계도 변명도 아무것도 없다. 그냥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거니까.
논리도 동기도 그럴듯한 명분도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됐는데? 그건 누가 대답해 줄 수 있나?
아. 쓸데없이 복잡한 생각 하고 싶지 않아.
그냥 빨리 가서 승희를 안아야겠다.
말랑한 가슴을 만지고 따듯한 보지 속에 자지를 집어넣고 부드러운 몸을 끌어안고 싶다.
그게 이 세상에서 남은 유일한 즐거움이고 구원이며 희망이니까.
멀티로 가는 길.
머리를 비우고 싶은데 자꾸 꿈과 지연이랑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귀찮아 죽겠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그렇게 머리를 비우려고 고생하고 있는데 탐지에 뭔가가 걸렸다.
사람 기척. 상당히 멀다.
거의 탐지 범위 끝에 걸린 느낌.
거리가 멀기에 아직 나는 발각되지 않았다.
씨발. 이런 대낮에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침착하게 몸을 숨겼다.
어차피 저쪽은 나를 인식하지 못했고, 나는 저들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내가 불리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