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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본진 주변은 별일이 없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어있는 거리만 비추고 있다.
평화로운 주변…. 평화롭다는 것은 좋은 거지. 죽을 염려가 없다는 거니까.
이대로 만족하고 살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식량은 언젠간 떨어진다. 세상에 뿌려져 있는 식량들은 이미 거의 못 쓰게 되었다.
그나마 유통기한이 넘어도 먹을 수 있는 통조림 정도만 식량의 구실을 할 뿐.
물론, 어디에선가는 농사도 짓고 동물도 키우고 있겠지.
시골이나 농촌, 아니면 전문적으로 그런 것들을 하고 있던 사람들.
전기도 무제한이고 물도 무제한인데 오히려 신나게 농사를 짓고 동물들을 키우고 있지 않을까?
농사를 짓고 곡식을 수확해서 동물의 사료로 주고 그렇게 동물을 키워서 거름으로 밭을 일구고….
분명 예전에 멀쩡했던 세상보다는 쉽지 않겠지만, 없는 건 아닐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누리기 힘들다. 나는 생산자가 아닌 약탈자.
아니지. 약탈자라는 말은 굉장히 높게 쳐주는 호칭이지. 기생충 정도가 되겠네.
아니면 빈대나 거머리.
그렇기에 여유는 부릴 수 있겠지만 나만의 생산 활동을 멈출 수는 없다.
세 번째 스킬을 얻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코인이 적게 들지는 않을 거다.
게다가 승희도 있고, 아파트에 있는 번개녀도 있고.
아…. 번개녀 이름도 안 물어봤네.
어쨌든, 코인을 벌어야 한다. 상점을 사용하려면 코인을 벌 수밖에 없다.
이대로 사람을 모아 상경해서 농사를 지을 게 아니라면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쳐 죽여서 코인을 모아야 한다.
준비를 완료하고 밖으로 나섰다.
어젯밤에 아파트에서 본진까지 왔던 길을 피해 이번엔 다른 길을 통해서 아파트로 간다.
주변 정리 겸 성인용품 가게를 찾기 위해서.
씨발 성인용품 가게는 꼭 이상한데 하나씩 붙어있더니 찾으면 또 없네.
사람이 없어진 도시는 서서히 그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가장 웃긴 건 아스팔트를 뚫고 나오는 식물이다.
식물이 싹을 틔우면서 아스팔트가 벌어지면 거기에 또다시 식물이 싹을 틔운다.
고작 4년, 상당히 많은 도로가 자연에 침범당했다.
그리고 벽돌로 된 인도는 이미 풀밭이 됐고.
물론 지금은 겨울이라 그런 식물들이 싹 죽어서 예전의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지만, 봄이 되고 여름이 되면 다시 빽빽하고 무성하게 자라나겠지.
반 정도 왔을까, 성인용품점을 찾았다.
유리창이 모두 깨진 복권방 옆에 있는 성인용품점. 보기만 해도 민망한 분홍색 시트지로 외부 유리창을 모두 가린 건물.
아무도 없는 것을 알기에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여러 명이 나 같은 생각을 했는지 물건들이 많이 없어져 있다.
하긴, 써본 바로는 고문용으로도 좋을 거 같다.
내가 당한다면 자살하고 싶을 거야.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성인용품 가게 안. 진짜로…. 인간의 상상력은 엄청나구나.
성인용품들은 정말 직관적이고 경악스럽게 생긴 게 많았다.
아…. 이건 여자의 보지 안쪽에 넣는 거구나…. 근데 이런 걸 넣는다고?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물건들.
어우 씹…. 크기가 큰 건 뭐 이해가 간다만…. 이 돌기들은 뭐야. 미치겠네.
이런 걸 넣으면 정말 좋아해? 느낌이 좋아? 죽었다 깨나도 이해를 못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나는 그래도 4년 동안 별 미친 짓을 다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성인용품을 보고 한없이 겸손해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성에 대해 굉장히 보수적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만지기도 애매하게 생긴 혐오스러운 물건들은 치우고 그나마 가장 정상적이고 깔끔하게 생긴 것들로 챙겼다.
전동 딜도. 와. 씨발. 괜찮은 거지? 이만한 걸 집어넣고 진동을 준다고?
바로 실습이다. 궁금하다 정말.
그리고 놀랍게도 다른 쓸만한 물건들이 있었다.
구속구와 안대, 개구개? 맞나? 입을 막는 거. 이게 있으면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주면서도 효과적으로 시야와 입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구속구도 의외로 튼튼하고 편리하다. 착용자의 신체에 상처를 주지 않게 안쪽이 부드러운 재질로 돼 있는 게 놀랍다.
이 얼마나 쓸데없는 배려인가…. 아니지. 쓸데없는 건 아니구나.
쾌적하고 안전한 속박플레이를 위해 머리 좋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만들어 놓은 걸 내가 폄하해서는 안 되겠지.
둘러보다 보니 약간 신이 난다. 무엇보다 이것들을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다.
음. 번개녀는 거친 성격에 걸맞게 조금 하드하게 가보고, 승희는 좀 부드러운 거로 해볼까?
그년은 요즘에 바이브레이터로 만족을 못하는 거 같단 말이지.
일단 눈에 보이는 괜찮은 것들은 다 쓸어 담았다.
어차피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배낭 안쪽에 숨겨 넣어놓는 내가 웃긴다.
씨발 이래서 조선의 유교가 문제라니까. 절대 내가 잘못한 게 아냐. 성리학이 잘못된 거야.
근처 비어버린 편의점에서 건전지도 잔뜩 챙겼다.
전기 무제한인 세상이라 의외로 건전지는 인기 품목이 아니다.
재난 시에 가장 먼저 털리는 물품이라고 알고 있는데….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니까 그런가?
그렇게 준비를 마친 나는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입구가 보이자 탐지를 돌려봤다.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여자. 뭐, 탐지된다는 것 자체가 다행인 일이다.
습격당하거나 자살하거나 도망갔다면 탐지에 안 걸릴 테니까.
공동현관 입구를 열고 들어가 3층으로 올라갔다.
문 앞에서 강박적으로 탐지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뭐냐? 왜 문 앞에 있냐?
와…. 존나 무섭네.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친다.
뭘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테이프를 뜯었다고 봐야 할 거 같은데…. 문 앞에 있다는 건 그럼 문이 열리자마자 스킬을 쓰려 한 거고?
와씨…. 목숨하나 건졌네.
탐지 만세다 씨부랄!
어떻게 할까.
이 여자의 번개 파동은 주변으로 퍼지는 스킬. 당연히 장애물은 통과하지 못한다.
문을 열자마자 스킬을 쓰겠지? 그럼 스킬이 날아오는 걸 문 뒤에서 피하고 내가 바로 얼굴을 들이민 다음 여자를 보고 재우면 되는데….
스킬을 두번 쓰면? 여러 번 쓰면?
애매하네. 자칫 잘못했다가 타이밍이라도 안 맞으면 당하는 건 내가 될 테고.
머리를 굴리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다.
이 여자….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데?
하지만 이 여자와 나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
나는 탐지가 있고, 저쪽은 없다.
저 앞에서 종일 저러고 있을 수는 없을 거다.
게다가 내가 언제 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나올 수도 없다.
심리적으로 내가 우세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어울리는 것은 장기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
화장실이든 식사든 문 앞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내가 재울 수 있어.
그렇게 문 앞에 앉았다.
바닥이 차가워 배낭을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았다.
30분…. 한 시간…. 여자는 꼼짝도 안 한다.
대체 어떻게 저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지? 대단한데? 목숨이 달린 일이라서 그런가?
방법을 바꿔야겠다.
내가 추워서 안 되겠어.
뭐가 있을까.
3층…. 베란다가 있으니 베란다로 올라가서 안을 보고 재울까?
일단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다. 저 여자와는 달리 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방법.
좋아. 일단 그 방법 말고 다른 것은?
문을 열고 스킬 남발을 유도할까?
나쁘진 않지만, 위험도가 높다. 거지 같은 감전은 스치기만 해도 피해가 너무 커.
일단 가장 확실한 베란다 쪽을 공략해보자. 사다리만 하나 있으면 얼마든지 올라올 수 있을 테니까.
내 눈으로 저 여자만 볼 수 있으면 내가 이기니까…. 사다리만 구할 수 있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이려는데 뭔가 아닌 것 같다.
현관…. 베란다에서 현관이 보이던가?
안보였던 거 같다.
그래. 베란다에서 현관이 안 보여.
아….씨. 생각보다 골치 아프네.
그럼 배란다 문을 열고 넘어 들어올 수 있나? 아니…. 그러다 내가 공격당할 확률이 더 높은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쩌지? 그냥 기다려야 하나?
아파트 복도라 바람은 안 불지만, 한겨울이라 추위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이대로 버티자니 몸이 둔해지는 게 느껴진다.
이 썅년 들어가기만 해봐라. 진짜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다시 머리를 굴린다.
아…. 이상한데서 시간을 잡아먹네. 귀찮게.
그렇게 생각하다가 내 배낭을 봤다.
그리고 매달린 석궁도.
석궁. 오…. 석궁.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거면 아마 될것 같다.
진작 생각해낼걸. 으휴.
배낭을 문 앞쪽에 놓고 석궁을 들고 탐지를 켰다. 아직도 꼼짝 안 하는 여자.
카드키를 문에 가져다 댔다.
삐리릭 삑!
문을 조금 열어 배낭을 끼워 넣었다.
번쩍!
열린 문틈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번개 파동.
와씨. 정말 살 떨리네. 이래서 번개는 싫어.
아마 궁금하겠지? 내가 배낭을 왜 끼워 넣었는지.
여자가 문을 미는 게 느껴졌다.
후후. 네 힘으로는 문을 못 열 거다. 나도 밀고 있으니까.
나는 석궁을 장전하고 볼트를 올린 뒤 문틈 안에다가 그대로 쐈다.
실수로 여자를 맞추면 귀찮아지니까 천장 쪽에다가 쐈다.
투칵
퍽!
천장에 볼트가 박히는 소리.
"꺅!"
탐지를 돌리니 여자가 방 쪽으로 도망가는 게 느껴졌다.
바보 같은 여자. 거리를 주는 순간, 네 패배야.
바로 문을 열고 여자를 재웠다.
처음 봤을 때처럼 쓰러지는 여자.
"후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씨발. 힘들었다 정말.
석궁과 배낭을 챙겨서 안으로 들어왔다.
따듯한 집안. 몸이 녹는다.
"별거 아닌 거로 드럽게 고생했네. 하여간, 이래서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니까."
파카를 벗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이제 나를 고생시킨 벌을 받을 시간이야.
나는 배낭에서 아까 가져온 성인용품들과 테이프를 꺼내오면서 화사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