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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일단 남자부터 깨웠다.
수면 시간이 끝나고 그저 몇 번 건드렸을 뿐인데 화들짝 놀라면서 깬다.
"뭐야! 이거!"
"조용. 아저씨 조용히 해요. 애 깨요."
애라는 말을 듣자 바로 입을 다문다.
의외로 침착한 모습. 나쁘지 않네.
"소란 일으키기 싫어서 거칠게 다뤘어요. 그러니 조용히 협조해주세요. 가족들을 위해서."
내 말은 이해한 거 같지만, 가족들을 위험해 빠트렸다는 생각이 드는지 표정이 별로 안 좋다.
신선한 반응이야.
"아저씨. 스킬 뭐에요."
대답이 없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소하고 싶겠지. 이런 타입은 좀 대화하기 힘든데.
"아저씨. 나 아저씨랑 아저씨 가족들 죽일 생각 없어요. 내 안전 때문에 이러고 물어보는 거라고요. 죽일 거면 아까 죽였지."
"...감전."
감전? 30만짜리 공격 스킬? 오.
"설명 좀요."
"눈에 보이는 것을 감전시킬 수 있어."
"거리는요."
"20m."
20m라…. 수면보다 짧네? 근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블러핑이라도 해야 하나…. 그런 거 싫은데.
"부디 솔직하게 말해줘요. 내가 아는 내용이랑 다르면 마음이 바뀔지도 몰라요."
"내 자식이랑 와이프를 옆에 두고 멍청한 짓은 안 해."
"좋아요. 서로 간에 신뢰는 없지만 만들어 보자고요. 아이는 스킬 못 쓰죠?"
"그래."
"스킬 창은 떠요?"
"아직 어려서 확인 안 돼. 그런 발음도 안 되고."
"그래요. 감전에 대해서 더 설명해줄래요? 한 번에 몇 명까지 쓸 수 있어요?"
"무슨 소리야?"
"동시에 쓸 수 있는 사람요."
"한 명."
아…. 감전은 수면처럼 지속이 아닌가?
"그럼 여러 명 있으면 한 명한테 쓰고 또 다른 사람 쓰고 이렇게 연속으로는 돼요?"
"그래."
좋네. 역시 30만짜리답다.
"감전 맞으면 죽어요?"
"아니."
"안 죽어요?"
"감전당한 것처럼 꼼짝 못 할 뿐이야. 한번엔 못 죽여."
음…. 뭐지. 번개 같은 건 한 방 맞고 그냥 픽 하고 죽던데. 페널티가 없는 대신 출력이 약한가?
"숙련은요?"
"고급."
"많이 쓰셨네. 고급 몇 퍼센트에요?"
"몰라. 봐야 알지."
음…. 애매하네? 30만짜리 스킬치고는 애매하다. 다수를 한 번에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은 좋긴 한데…. 거리가 짧네.
아니지. 20m면 나름 긴가? 하긴 한 번에 무력화시키는데 20m면 충분하려나.
병신같은 무슨 펀치 이딴 것보다는 몇 배는 낫긴 하지.
"아내분 스킬은요?"
"질병 치료."
"끙…. 왜요?"
"왜라니?"
"스킬 엄청 많았잖아요? 왜 질병 치료를 골랐냐고요."
"아이가 없으면 그건 이해 못할 거다."
"애가 아파요?"
"아니. 지금은 안 아프지."
"근데 왜요?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세상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데 아이를 키우고 있으면 아이 생각 밖에 안 나. 힐이랑 질병 치료 중에 힘들게 골랐지. 물론 지금은 만족하고."
나는 모르겠다.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나처럼 혼자 사는 놈한테는 필요 없는 스킬이지.
승희가 힐을 마스터 하면 질병 치료 선택하라고 하면 딱이겠는데.
근데 이거 뭐 확인할 방법이 없네.
내가 맞아줄 수도 없고.
"좋아요. 스킬 확인이 안됐으니 이러고 계속 대화하죠. 물어보는 말에 대답해줘요."
"해봐."
"지하철역에 있던 인간들은 다 어디 갔어요?"
"내가 다 죽였어."
"와. 화끈하시네. 그럼 지하철역에 동물 사체 던져놓은 것도 그쪽이 한 거예요?"
"그래."
"왜요?"
"왜일 거 같냐?"
"오지 말라고 협박하는 거예요?"
"그런 셈이지."
"효과가 있어요? 나 같은 놈이 이렇게 들어왔는데?"
"나도 그게 궁금해. 어떻게 이 안쪽까지 들어왔지? 여긴 밖에 저런 게 없어도 찾아 들어오기 힘든 곳인데."
"어쩌다 보니. 근데 그쪽은 어떻게 알고 여기 와있는 건데요?"
"이 역에서 근무했으니까."
"아. 직장?"
"그래."
"왜 집에 안 있고 이런 곳으로?"
"여기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흠. 뭐 그렇다 치고. 저 동물은 뭐로 잡은 거예요?"
"스킬로."
"아. 감전? 감전은 동물도 돼요?"
"몸이 고무가 아니라면 당연하지."
생각해 보니 동물한테 수면을 써본 적이 없네. 나 여태까지 뭐 하고 살았지?
"좋아요. 알았어요. 이제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을 할게요. 나는 아저씨네 가족을 죽이지 않을 거예요."
"그거 고맙네."
여유가 좀 생겼나 보다. 말하는 게 좀 편해졌네.
"중동에서 하동으로 넘어가는 쪽에 대형 마트 하나 있어요. 알아요?"
"알아. 거기 조폭 같은 놈들 있는 곳."
"오. 알아요?"
"먼발치에서 본 적 있어."
"그놈들 다 죽였어요. 그리고 지금 거기엔 내가 구해준 사람들이 살고 있죠."
내 말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 남자. 하긴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
"내 제안이에요. 가족들을 데리고 마트로 가요. 적어도 여기보단 살만할 거에요."
"왜 그래야 하지?"
"다음번에 여기 와서 그대로 있으면 죽일 거니까."
"...대체 왜?"
"내 마음이에요. 난 중동에 있는 사람들을 다 정리하고 있어요. 그러니 여기서 어물쩍거리면 죽일 거예요. 여자건 아이건 다."
잠시 생각하는 남자.
"이해가 안 가네. 왜 그래야 하는 거지?"
"이 세상이 이 꼴 난건 이해가 가고요?"
남자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 하지 못한다. 하긴 그걸 누가 이해하겠어.
"알았어. 와이프랑 상의하고. 게다가 어차피 네가 다음에 오더라도 여기서 막으면 그만이잖아?"
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또 신선하네. 여러모로 신선함을 체험해주는 아저씨야. 아주 프레쉬해.
"뭐, 그러시던가요. 암튼 난 할 말은 다 했어요. 자고 일어나면 묶어 놓은 건 다 풀려있을 거예요. 부디 좋은 판단 하길 바라요. 아이를 위해서."
"그…."
뭔가 말하려 하는 거 같았지만 재워버렸다.
더 이야기하면 왠지 도와주고 싶을 거 같다. 여자가 매력적이었으면 몰래 한번 하고 도와줄 법도 하지만, 영 아니다.
쩝. 미시를 싫어하는 편은 아닌데 말이지.
뭐라고 해야 하나, 착한 사람? 착한 기운? 그런 게 느껴져서 좀 싫다.
되게 건강한 느낌? 생존의 이유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이고 그로 인해서 살인과 약탈도 불사하겠다는 느낌.
그냥 재미로, 성욕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강간하는 나한테는 맞지 않는 사람이다.
지금 내가 마트로 사람 모으는 짓도 자꾸 회의감이 드는데 이런 사람들을 보면 내가 초라해지는 느낌이 든다.
사는 목적도 의미도 없어 보이잖아.
팔과 다리에 묶은 테이프를 다 잘라놓고 그냥 가려는데 아이에 시선이 간다.
엄마 아빠 사이에서 배를 내놓고 자는 아이.
남자애인 줄 알았는데 여자애인가보다. 옷이 파란색이라 헷갈렸네.
어린아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아이는 과연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나 같은 놈은 어디에도 있을 거다. 좀 더 악랄하고 미친놈들이 우글거리겠지.
모르겠다. 이 아이의 운명을 내가 왜 생각하고 있는 거야? 부모도 아닌데.
상점을 열었다.
상점을 보면서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과자다.
씨발. 싼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코인으로 통조림을 사는 이유도 가격대비 열량을 따졌을 때 가장 먹을만하고 보관하기 편해서이다.
과자 같은 것을 코인으로 사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이제 알게 됐다.
여기 있네. 호구 같은 새끼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골고루 샀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좋아할까? 무슨 산타클로스가 된 기분이다.
이 씨발 병신같은 세상에서는 이딴 과자 쪼가리만 봐도 좋아하겠지. 족같은 세상. 염병할 세상.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더 있다가는 마음이 약해질 것 같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부모와 아무런 죄가 없는 어린아이.
그 어떤 스킬을 들고 있는 사람들보다도 무섭다.
사람을 쳐 죽이고 번 코인으로 과자를 사놓고 오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흔들리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
독하게 살아야 하는데. 이 지랄 같은 세상에서는.
얕잡아 보여도 안 되고 허술하게 빈틈을 보여도 안 된다. 죽음은 늘 곁에 있으니까.
죽음으로부터 필사적으로 피하고 숨고 도망쳐야 한다.
방심하거나 안일한 마음을 가지는 순간 죽는다고 봐야지.
깨어있는 저 남자의 눈에 붙여놓은 테이프를 떼주는 순간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와이프가 질병 해제라고? 모르지. 그거 믿고 눈이랑 입이랑 풀어주는 순간 다른 공격 스킬에 당해서 쓰러질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방심하면 안 된다.
언제나 긴장하고 있어야 해.
두번째 스킬. 이게 골치 아프네. 일일이 확인하기도 힘들고. 두 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방법이 없다.
스킬 마스터 한 사람이 적지 않을 텐데.
그럼 그놈들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 될 거다. 두 가지 스킬의 조합이라니.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다.
두번째 스킬을 마스터하면 또 선택하는 창이 나올까? 나오겠지? 그래야 더욱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데.
매혹도 좋고…. 염력도 좋을 거 같다.
염력. 그 정도면 석궁을 장전해서 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복잡한 작업은 안 되려나.
아니 뭐 석궁이 아니더라도 손도끼만으로도 좋지. 아니면 잭나이프라던가 하다못해 유리 조각이라도 몸에 박으면 되잖아.
모르겠다. 일단 그건 나중에 고를 수 있을 때 생각해 보고.
이제 남은 곳은 지하상가인가.
어디서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숨어있던 인간들이 줄줄이 나타나는 곳이다.
이 동네를 한꺼번에 쓸어버리기엔 더없이 좋은 마지막 장소.
날짜가 내일이니 오늘은 이대로 들어가야겠네. 지하철역이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지는 생각을 못 했어.
들어가서, 한숨 또 자고 다시 저녁에 나가봐야지.
아…. 그전에 지하철역 한 번 더 훑어보고.
탐지를 돌리며 구석구석 확인을 해본다.
없어. 없다. 이제 안심이야.
나는 당당하게 지하철역 출입구로 걸어 나왔다.
지하철역은 이제 더는 무섭고 불안한 곳이 아니다.
개미지옥 같던 지하철역이었는데. 항상 찝찝했던 곳이 이렇게 쉽게 해결이 돼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