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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6화 (56/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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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잠에서 깬 순간은 너무나 기분이 좋다.

해냈다는 느낌이 든다. 성취감? 그래. 그런 거.

웃기는 일이지. 자고 일어난 거로 성취감을 느끼다니. 불면증이 없으면 이해 못 할 이야기지만.

씻고 먹고 싸고 알몸으로 서성인다.

이제 다른 걸 싸볼까? 좋은 생각이야. 생각난 김에 바로 한다.

승희는 자고 있었다. 이제 겨우 밤 아홉신데? 일찍도 자네.

자고 있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지. 적당히 주무르고 적셔서 집어넣고 흔든다.

"으응…. 잘 때는 좀…. 읏."

스킬로 재운 게 아니라 금방 깬다. 알게 뭐야. 신경 쓰지 않고 허리를 흔든다.

"이제…. 으응, 막, 잠들었는데. 하앙."

"걱정 마 재워주고 갈게."

승희의 배에다가 사정하고 휴지로 닦아줬다. 그리고 수면을 써서 재웠다.

참 이상적인 생활이야. 하고 싶은 것을 바로바로 할 수 있다는 건.

밖으로 나와 승희 방 문을 잠그고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오늘도 밖으로 나간다. 오늘의 목표는 지하철역.

워낙 거지 같은 구조에 숨은 곳이 너무 많아 함부로 가지 못했던 곳이다.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놈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지하철역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지하상가도 끝내자. 그럼 이 중동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거야.

하동은 마트 애들이 있으니 놔두고 그다음엔 상동에 가는 거지.

씹새끼들. 그 새끼들을 잡아 족치고 그때 정종찬 그 새끼한테 뭘 넘겼는지 알아내자.

어휴. 할 게 많네.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어.

한겨울 밤에 나서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다.

다른 건 몰라도 추위는 사람을 굉장히 둔하게 만든다.

하지만 더운 것보단 낫다고 본다. 더운데 배낭 메고 다니면 정말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니까.

습관이란 참 무섭다. 탐지가 있으니 낮에 다녀도 되는데 꼭 밤에 나가게 된다.

아무래도 어둠이라는 장막을 두르고 다니는 게 든든하지. 어둠은 자잘한 실수를 덮어주잖아?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개미굴 같은 곳이다. 개미지옥 같은 곳이기도 하고.

세 개의 노선이 환승 되는 여기 지하철역은 옆에 백화점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한 크기다.

그전에는 정말 가장자리만 돌면서 탐색하곤 했었는데…. 이제는 두려울 게 없네.

원래 들어가던 루트로 갈까? 아니면 당당하게 입구로 들어가 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정면은 위험하다. 괜히 개미지옥이 아니니까.

몰래 가자.

지하철 9번 출구 장애인 엘리베이터.

여기 엘리베이터는 바닥에 추락해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줄사다리가 있다.

어떤 놈이 설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하 4층까지 다이렉트로 이어져 있는 비밀 출구라고 볼 수 있다.

혹시라도 밑에 있는 놈들이 올라 올까 봐 걷어놨었는데…. 다시 내려가 있다.

누군가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인데….

예전에는 한참을 고민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 없지. 전지전능한 탐지가 있으니까.

"탐지."

기척이 없다. 의외네. 그래도 한 둘은 잡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척 잡히는 인간이 없다면 망설일 필요 없지. 내려가 보자.

줄사다리를 천천히 내려간다.

혹시나 끊어진 부분은 없는지, 장난질해놓은 부분은 없는지 확인하면서 아래로 내려간다.

이렇게 아등바등 살았는데 어이없게 낙사로 죽는 것만큼 허무한 게 없으니까.

줄사다리에 몸을 의존해서 지하 4층까지 내려가는 건 상당히 무섭다.

누군가의 스킬이 갑자기 날아오는 것만큼 무섭다. 손 한 번 삐끗하면 그대로 낙사니까.

그렇게 지하 4층까지 내려오자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있다. 몸이 허한가? 이 정도로 땀이 난다고?

내 몸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지하철역 내부가 엄청 덥다.

왜지? 왜 덥지? 뭐가 문제가 있나?

단순히 덥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불쾌한 냄새. 뭔가 썩어가는 냄새가 난다.

썩는다니…. 참 그리운 단어네.

식량의 양이 생존의 척도가 된 시점부터 음식물이 썩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목구멍으로 넘기기도 바쁜데 뭔가가 썩을 만큼 음식이 밖에 있기는 힘들었으니까.

게다가 인간의 시체가 사라지는 것도 큰 역할을 했다. 그래. 그게 아주 컸다.

인간의 시체가 남아있었다면, 아마 이 세상은 거대한 시체 밭이었을 거다.

길이건 바닥이건 그 어느 곳에서도 시체가 넘치고 그것들을 탐하는 곤충들이나 새들로 들끓었겠지.

그런데 썩는 냄새라. 그게 가능해?

"탐지."

인간의 기척은 걸리는 게 없다.

이상하다. 왜 아무도 없을까? 지하철에는 사람이 제법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이 있나?

느껴지는 기척이 없으니 걸음은 제법 대담해졌다.

그리고 심해지는 썩은 내. 나는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멧돼지 사체. 이건 분명히 멧돼지 사체다. 그리고 저 옆에는 개? 그리고 고양이?

지하철역 안에 듬성듬성 동물 사체가 놓여있었다.

어떤 것은 제법 오래되어서 무슨 동물인지 알기도 힘들었고, 어떤 것은 죽은 지 얼마 안 된 듯 그 형태가 거의 남아있다.

그리고 벌레.

더울 정도의 온도와 썩어가는 동물 사체 때문에 벌레가 엄청 많았다.

이곳에 있기가 싫어질 정도로.

이런 짓을 해놓은 사람에게 손뼉을 치고 싶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 의도가 확실히 전해진다.

경고.

오지 말라는 거다. 만약 여기까지 왔다면 돌아가라는 뜻.

불쾌감과 혐오감이 잔뜩 들었지만, 호기심이 더 컸다.

이런 짓을 하는 놈은 대체 누굴까? 그리고 이런 짐승들을 어떻게 이렇게 잡을까?

멧돼지, 들개, 길고양이…. 이것들은 잡아도 먹기 힘들어서 던져놓은 거 같은데.

뭐가 어찌 됐든 이런 거에 쫄아서 돌아갈 내가 아니다.

나에겐 탐지가 있다. 이 안을 오래 돌 필요도 없고 구석구석 돌 필요도 없다.

지하 4층을 끝에서 끝까지 한번 훑었다.

그리고 기척을 찾아냈다.

세 명. 내 바로 위층.

위치로 봐서는 역무원 사무실 같다. 하긴 거기 말고 지하철역에서 살만한 곳이 없겠지.

위로 올라가니 여전히 동물의 사체는 가득했다. 온도 역시 마찬가지.

접근을 막기 위해서 이렇게 해놓은 거라면 괜찮은 방법이긴 하나 새로운 사체가 계속 놓여있다는 것은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광고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좋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굳이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나? 세상이 텅 비어버린 지금 갈 수 있는 곳은 잔뜩 있을 텐데?

어째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고 있지?

역무원 사무실.

상당히 안쪽에 있는 것 같다.

일반인들이라면 저렇게 깊은 곳까지 뭐가 있어? 라고 생각 될 정도로 안쪽 깊은 곳.

중간중간 막아놓은 통로. 잠긴 문. 장애물들…. 마치 미로 같다.

한참을 돌아도 탐지에 걸리는 인간들 쪽으로 다가갈 수가 없다.

뭐지? 대체 길이 어디인 거야?

한참을 헤맨 끝에 길을 찾아냈다. 지하에 이런 게 있다고 말하면 누가 믿겠냐고.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다.

벽에 그려진 낙서, 바닥에 아이의 장난감 같은 것이 떨어져 있다.

낙서와 장난감이라니. 이런 곳에?

기자재 창고인듯한 가장 안쪽 깊은 곳, 기척은 거기에서 느껴졌다.

좁은 방 같은 곳인데 블라인드가 쳐져 있는 창문이 있어서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놀랐다.

이 꼴이 된 세상에서 보기 힘든 존재가 있었다.

어린이. 맙소사.

아빠와 엄마인듯한 이들은 이제 30 초중반 정도 되었을까? 그냥 흔한 애 아빠와 애 엄마였다.

아…. 이제는 흔하지 않지. 아무튼, 별 특색 없는 사람들.

근데 아이가 있었다. 이제 한 세 살? 네 살? 아. 세 살은 안 되겠구나. 4년 전부터 임신이 안 됐으니까.

신기한 생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나는 그들을 바라봤다.

아무리 메마르고 비틀어진 나지만, 이 좇같은 세상에서 이만큼 아이를 키워낸 저 부모에게 존경심이 생겼다.

그래. 아무리 내가 쓰레기에 씨발 새끼라고 하지만, 아직 인간이다.

이런 사람들을 그저 죽여야 할 대상으로 볼 정도로 막장은 아니라는 거다.

일단 블라인드 틈새로 보이는 그들을 재웠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는 아이.

아무리 그래도 할 건 해야지.

테이프로 아빠와 엄마의 손과 발을 묶었다. 그리고 눈을 막았다.

아이는…. 안해도 되겠지. 말이라도 제대로 할까? 스킬이란게 뭔지도 모를 텐데.

잠시 앉아서 기다렸다. 그리고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체 저 아이는 어떻게 클까?

나를 비롯해서 지금껏 내가 만났던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은 정상이었던 세상을 봐왔던 이들이다.

어느 게 정상이고 어느 게 비정상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저 아이는 그렇지 않다. 이 비정상인 세계만 보고 살아야 할 아이.

처음으로 세상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아이를 보며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각을 했다.

과연 나는 저 아이를 죽일 수 있을까?

남자건 여자건 마구잡이로 죽인 나다.

근데 아이는? 해본 적이 없다.

아이라고 뭔가 다른 건 없다. 그저 나이가 어릴 뿐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 주저하고 있다.

왜지? 이유가 뭘까?

인간이 가진 보호 본능 때문일까? 종의 번식을 위해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

아니면 여자와 아이는 보호해야 한다는 어렸을 때부터 들었었던 것들 때문에?

여자는 이미 많이 죽였는데? 왜 아이는?

수면 스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쯤, 나는 그럴듯한 답을 생각해 냈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

지금껏 살아남은 인간들은 뭐가 됐든 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확률이 거의 없다.

하지만 저 아이는 죄가 없을 것이다.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거지.

과연 그런 아이를 죽이는 것을 할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아마 나는 못할 것 같다.

아. 수면 스킬이 끝났네. 이제 그럼 이 부모들을 깨워봐야지.

대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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