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4화 (5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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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행정관

남자는 비닐 끈으로 팔과 다리를 묶어두고 여자는 팔만 묶여있다.

정말 이렇게 허술하게 묶어놓고도 잘도 술을 처먹고 자네. 얘들은 이렇게 허술한데 도망도 안 가고.

하긴…. 공포로 머리가 마비되면 정상적인 사고는 할 수 없긴 하지.

"니들을 잡은 세 놈 중 두 명은 내가 죽였어."

손발이 자유로워지자 나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남매.

죽였다는 말을 아주 익숙하게 하는 나를 약간 경계한다.

"너. 니 동생이 이 새끼들한테 강간당했어."

내 모진 말에 소주의 표정이 험해진다.

"너. 그 강간 당한 게 너야. 저 더럽고 배 나온 아저씨들한테 강간당했다고."

"그만 하세요!"

그래. 이런 거 오랜만에 본다.

가족…. 혈연…. 그건 굉장히 진하다. 어떨 때는 자신의 목숨조차 포기할 정도로.

그게 가족 무리의 가장 큰 단점이지. 제일 약한 구성원을 노리면 제일 강한 구성원이 희생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자."

바닥에 마체테와 손도끼를 내려놓고 뒤로 두 걸음 정도 물러섰다.

"복수해. 단, 네 동생이 선공이야. 그리고 소주. 너는 지금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움직이지도 말고. 동생 보지도 마."

남매의 표정에 복잡함이 떠오른다.

정말 우스운 일이지만 이제는 살인과 강간, 폭행, 감금, 학대…. 이런 것들은 예전보다 자극적이지 않게 됐다.

세계가 이따위로 변하고 뇌는 맛이 갔다.

인류가 쌓아온 도덕과 규범, 문명과 상식은 단 4년 만에 무너졌으니까.

뇌는 새로운 자극을 원한다.

그리고 내가 찾은 자극은 이거다. 타인의 갈등과 선택. 거기에서 오는 감정.

마트에 사람을 밀어 넣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이해타산이 맞지 않는 인간들이 모이게 되면 어떻게 될지.

서로 싸우든, 협력해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든, 남자 놈들이 다른 남자들을 다 처리하고 모든 여자를 모아서 할렘을 만들든지.

그걸 지켜보고 싶을 뿐이다.

아크릴로 만든 개미집에 새로운 개미를 넣는 것과 마찬가지.

동생은 갈등하고 있다.

분명 복수심이 없는 것은 아닐 텐데, 사람을 죽여본 일이 없는 걸까?

그렇다면 저 소주 녀석은 제법 괜찮은 인재다.

4년 동안 동생의 손에 피를 안 묻게 하고 지켰다면 대단한 거지. 비록 마지막은 실패했지만.

내심 나를 공격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럼 나는 그들을 내 마음대로 가지고 놀 텐데. 하고 싶은 일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정말 죽여도 되나요?"

"현정아!"

"소주. 말하지 말라고 했다. 동생? 당연하지. 그러라고 그것들을 내려놓은 거야."

동생은 앞으로 걸어 나와 손도끼를 집었고 소주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안돼요! 죽이면 안 돼요! 살려줘요! 안 죽인다고 했잖아!"

"내가 안 죽인다고 했지. 이들도 죽이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는 안 했잖아?"

염력남한테 차갑게 한마디 하자 고래고래 쌍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정하게 동생에게 말했다.

"시끄러우면 입을 막아줄 수 있고, 반항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자는 것처럼 만들어 줄 수 있어. 어떻게 할래?"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나를 동생은 어떻게 바라볼까?

복수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천사? 아니면 달콤한 말로 잔혹한 짓을 저지르게 하는 악마?

...니미 씨벌. 내가 컨셉놀이에 너무 몰입해서 지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네.

천사랑 악마는 무슨…. 그냥 정신병자로 보이겠지.

"그냥…. 할게요."

나는 여자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래도 아는 것은 있다.

여자들은 자신이 책임지고 싶지 않아 한다.

자기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건지, 아니면 모든 비난이 자기에게 오는 것이 싫은지는 잘 모르겠다.

언제나 한발 뒤로 물러나 있고, 책임을 회피한다.

하지만, 그런 여자들이 결심하게 되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더러워질 것을 감수하고, 모든 책임을 질 것을 각오하면 남자들보다 치밀해지고 집요해지며 과격해진다.

동생은 손도끼를 들고 염력남에게 다가갔다.

"안돼! 오지 마! 미안해! 잘못했어! 살려줘…. 제발…."

소리 지르고 발버둥 치다가 흐느끼며 애원하는 염력남.

하지만 동생은 망설임이 없어졌다.

처음 잡는지 어색한 손도끼를 치켜들었고, 남자의 목 부분을 내리쳤다.

퍽!

"커헉."

아무리 손도끼를 들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자의 힘으로 한방에 즉사에 이르는 공격을 하기는 힘들다.

힘이 더 있거나, 기술이 있거나, 급소를 정확하게 찍거나…. 뭐 그런 게 있어야 하지만 동생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각오하고 내리쳤지만, 자신이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은 동생은 손도끼를 놓쳤다.

뭐…. 여기까진가. 그래도 저 정도 한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낸 거지.

물론 실전이었으면 실수하는 순간 끝이지만.

"소주."

의외로 소주는 동생의 행동을 차분하게 보고 있었다.

저 녀석은 정말 이 세상을 살아갈 만한 녀석 같다.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없어.

아마 이놈들한테 잡힌 것도 동생 때문이지 본인 탓은 아니었을 거다.

"네가 마무리해라."

나를 쳐다본 소주는 동생에게 다가갔다.

피가 벌컥벌컥 나며 이제는 말도 못 하는 염력남.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동생을 한번 안아주더니 떨어져 있는 손도끼를 집었고 동생이 내놓은 상처를 망설임 없이 찍어버렸다.

피가 튀었지만, 소주는 묵묵히 목을 내리찍는다.

아는 거다. 사람을 죽이면 피도 전부 사라진다는 것을.

결국 염력남은 빛이 되어 죽었고 코인은 소주에게 빨려 들어갔다.

"둘 다 이리와."

피가 사라져 말끔해진 소주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동생.

음…. 동생은 확실히 이쁘네. 약간 아쉬움이 들 정도로.

아직 안 늦었는데…. 음…. 됐다. 그 정도 여자는 아니니까.

소주가 나에게 손도끼를 뒤집어서 내밀었다.

캬…. 이래서 나는 예의 바른 친구들이 좋아.

"따라와."

염력남이 죽었지만, 토사물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 방에 더 있다간 머리가 쪼개질 것 같다.

술 냄새와 담배 냄새, 그리고 토사물 냄새. 씨발스러운 냄새 3관왕이네.

마체테를 주운 나는 방 밖으로 나갔고, 남매는 나를 따라왔다.

아까 첫 번째 남자를 죽였던 총장실의 고급스러운 소파가 생각나서 그쪽으로 향했다.

당당하게 중정에 있는 계단을 뚜벅뚜벅 걸어 내려가서 총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앉아."

남매는 순순히 내 말을 듣는다. 가혹한 주문을 했다 하더라도 내가 그들의 생명의 은인인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

"어디서 왔냐."

"그냥 떠돌아다니고 있어요."

"여긴 뭐하러 왔어."

"그냥 돌아다니다가 사람이 없어 보여서 왔어요."

"여길 선택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왜 이 건물로 온 거야."

"여기 대학교에서 건물이 제일 깔끔해 보여서요."

"그럴 거면 기숙사로 갔어야지."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일 먼 곳으로 온 거예요."

아…. 내가 쳐죽인 애들 말하는 건가.

"그럼 그냥 떠났어야지."

"잠시 쉬었다가 떠나려고 했는데…. 그놈들이 왔어요."

"알았다. 뭐, 지난 일이니 더 말해봐야 의미 없지."

모르겠다. 일단 이 소주 녀석은 왠지 죽이기 아까웠다.

동생을 지키며 산다는 것 자체가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보기 힘들어진 모습 아닌가?

그런 부분에 가산점을 줄 수밖에 없다. 멋진 일이니까.

"상점."

나는 상점에서 적당히 통조림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구매해서 탁자 위에 올려놨다.

아까 남자 놈들한테 얻은 8천 코인어치 정도.

"아까 두 놈. 죽인 코인만큼의 음식이다."

"이걸 왜 저희를 주시죠?"

"내 맘이야. 이유는 없어."

"...주는 거니 받을게요."

"갈 곳이 없지?"

"...네."

"동생도 지켜야 하고."

"네."

“여기서 하동으로 가는 길에 대형 마트가 있어. X마트. 거기에 가면 사람들이 있을 거다. 마체테 들고 다니던 사람이 보냈다고 하면 받아줄 거야. 거기로 가라."

"네?"

"가고 안가고는 너희 자유야. 가서 거기에서 머물지 떠날지 정하는 것도 자유고.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너희가 마트 밖에 있을 때 다시 나를 만나면 나는 너를 죽이고 네 동생을 강간할 거야."

아무 말이 없는 소주. 뭐 이런 미친놈이 있나 싶겠지.

"내 할 말은 다 했어. 떠날 거면 중동 근처는 오지 마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오를 잡거나 그러고 싶은 것은 없었다. 그냥 약간 불편해졌다.

내게 안 어울리는 짓을 하고 있어서 그러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정말 궁금하기는 했다. 과연 마트의 상황은 어떻게 돌아갈까?

밖으로 나오면서 탐색을 돌렸다.

행정관 안쪽을 움직이고 있는 두 명의 기척. 떠날 준비를 하는 거겠지?

이제 대학교는 탐색 끝이다. 저 두 명이 떠나면 대학교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나도 모르게 학교 앞 원룸촌을 다시 지나가면서 연주의 집 앞을 지나갔다.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없는 동네.

그 많던 인간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마 비어있는 동네를 볼 때마다 생각하겠지.

그리고 나는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알 수 있을까?

마트….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남자에 대한 신뢰를 잃은 내가 남자 놈들을 살려두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본능에 새겨져 있는 투쟁심. 쓸만한 여자를 얻고 밑에 두고 싶어 하는 소유욕.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이러고 있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에휴. 쫄보 병신 변태 새끼 주제에 어려운 생각 하고 있네.

그냥 재미로 사는 거지.

그런 거로 아파하고 상처 입을 시기는 지났다.

지난 4년간 굳어진 마음은 엔간해서는 생채기도 나지 않는다.

예지나 민지…. 그녀들의 일도 다 잊어가고 있으니까.

에휴. 멍청한 놈. 멍청한 년들.

벙커가 다 와 가기에 마지막 탐지를 돌렸다. 뻐근한 가슴의 통증.

보통 같아서는 회복 포션을 먹겠지만, 그러지 않는다.

들어가서 씻고 잘 거다. 많이.

지치도록 자고 나서 승희와 섹스하자.

개처럼 박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헐떡여야지.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할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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