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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철이파
"너희에게 이 마트를 줄게."
내가 잘하는 짓인지는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이 좇같은 세상에서 정답이 어디 있을까? 그냥 꼴리는 대로 사는거지.
네 명의 팔을 묶은 테이프를 끊어줬다.
자신들을 완전히 풀어줄 거라 생각은 안 했는지 자유가 됐음에도 주저하는 모습이 보인다.
"난 너희를 믿지 않아. 내가 지금 이러는 건 단순한 변덕이야. 그러니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고 너희를 전부 죽일만한 짓은 안 했으면 좋겠어."
인간의 선함이나 신뢰, 믿음 그런 어쭙잖은 것들을 믿는 게 아니다.
생존 본능과 합리적인 계산. 이들이 똑똑하다면 나를 공격하는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
"여기를 점거하고 있던 조폭 같지도 않은 양아치 열네 명 중 열둘은 내가 죽였어. 그리고 남은 건 니들 앞에 있는 이 두 명이지."
남자고 여자고 조폭을 바라보는 눈이 증오로 불탄다. 폭력과 강간을 당한 이들이라면 당연한 반응.
"이 두 명과 여기 마트를 너희에게 넘길 거야.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너희 능력을 잘 사용해서 여기를 기점으로 살아 남는 것. 나는 생존자 중에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쪽으로 보낼 거야. 그들과 힘을 합쳐서 살아남아 봐."
이건 정말 내가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닌 짓이다.
어쩌면 내 스스로 분란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셈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살육과 상호 확증 파괴만 남은 이 세상에서 뭔가를 피워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그게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존엄성이 될 수도 있고 골칫덩이 악몽이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너희에게 무조건 사람을 죽이지 말고 모든 인간과 인류애를 나누며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라는 게 아냐. 맘에 안 들면 죽이고 꼴리는 여자가 있으면 강간을 해도 뭐라고 하지 않아. 내가 보내는 인간들을 먹이 삼아 살아도 되고 뭘 하든 자유야. 당장 너희 남자 둘 중 하나가 남은 하나를 죽이고 여자 둘을 다시 감금한 다음 성노예로 삼고 살다가 자살한다 해도 나는 간섭하지 않을 거야."
내 말이 자극적이었는지 다들 표정이 조금 찌푸려진다.
아직 물렁한 면이 있긴 하네.
"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하나야. 따라와 봐."
나는 몸을 돌려 창가로 향했다.
타인에게 등을 보이는 짓만큼 미련하고 멍청한 짓은 없지만, 지금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가에 모두 다가오자 나는 말을 계속 이었다.
"이 큰길 보여?"
"네."
"이 큰길 건너편은 내 땅이야. 너희들이 밖으로 나갈 땐 이쪽으로는 오지마. 일일이 확인하고 죽이기 귀찮으니까."
"네."
"따라와."
나는 묶여있던 조폭 둘에게 갔고 이들은 쭐레줄레 잘 따라온다.
"누가 죽일래?"
"저요! 제가 죽일 거예요!"
"저요!"
의외로 여자 둘이서 자기가 죽이겠다고 나선다.
그 기세가 얼마나 흉흉한지 남자들이 약간 주눅 드는 게 보인다. 하긴, 한을 품은 여자들이 무섭지.
"도끼 빌려줄까?"
죽인다고는 했지만, 마땅히 죽일 방법이 없어서 약간 당황스러워하는 성장녀에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자."
내 무기를 순순히 건네는 모습에 남자들 눈이 '진짜?'라는 표정이 됐다.
아마 그들 눈에는 내가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보이겠지? 속으로는 약간 쫄리긴 하지만.
"지금 죽여도 돼요?"
파볼녀가 나에게 물어본다.
"니들 맘이지."
"파이어 볼!"
불덩이가 만들어지고 남자의 몸에 작열했다. 역시 느리고 위력도 별로야.
그래도 가까운 거리에서 직격으로 맞았더니 남자의 몸이 지글지글 타오르며 역한 냄새를 낸다.
"으으으으으읍으으읍!"
파볼녀 자신은 이런 모습이 그래도 익숙한지 주저하지 않고 다시 파이어 볼을 썼다.
두어 번 정도 더 쓰니 남자는 결국 빛이 되어 사라졌다.
"코인…. 은요?"
"죽인 사람이 먹어야지."
조심스럽게 다가와 코인을 회수하는 여자. 약간 놀란 표정이 된다. 코인이 제법 되나?
"저도 할게요."
성장녀가 망설임 없이 도끼를 내리찍었다.
주저하는 기색 없이 단호하게 전력을 다해서 내리찍는 여자. 그 모습이 섬뜩할 정도.
힘이 부족한지 한 번에 죽지는 않는다. 하긴 가슴팍을 찍는데 한 번에 죽을 리가 없지.
목을 찍던가 가슴팍을 찍으려면 갈비뼈의 결은 보고 찍어야 할 거 아냐. 그렇게 갈비뼈랑 교차로 찍으면 한방에 안 죽지.
"으으으읍."
피가 튀고 남자의 몸이 난자당한다. 그렇게 예닐곱 번을 내리찍으니 남자도 결국 빛이 되어 사라졌다.
튄 피가 모두 사라지며 후련한 표정을 하는 성장녀만 남았다.
코인이 빨려 들어가고 성장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나에게 두 손으로 손도끼를 돌려줬다.
"여자들. 너네는 옷을 챙겨입고 와라. 밖에 나갈 거야. 남자들. 너넨 여자들 옷 입고 오는 동안 나랑 실험 하나만 하자."
내가 손도끼를 챙기며 말하자 아직 알몸에 롱코트만 입은 여자들은 바로 자신들의 옷을 찾으러 갔다.
남자들은 내 실험이라는 말에 약간 의심스러운 표정이 된다.
"죽거나 아프거나 하진 않아. 둘 다 스킬 써봐."
한 놈은 금속화를, 한 놈은 투명화를 썼다.
나는 금속남을 바라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자라."
스킬이 발동해 있어도 수면은 잘 걸렸다. 이걸 확인 하고 싶었다. 예전에도 해본 적은 있지만, 종류별로 차이가 있는지를 알고 싶었으니까. 역시 자가 버프 스킬은 쓰레기야.
"탐지."
보이지 않던 투명화 쓴 녀석이 탐지를 쓰니 기척이 잡힌다. 씨발. 탐지 개쩌네.
기척이 잡히는 투명남에게 수면을 써봤다. 과연?
쿵
와…. 써진거 같다.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으니까.
개사기네. 완전 말도 안 되는 스킬이야.
스킬들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투명화는 결국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존재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그럼 그 존재를 인식할 수만 있으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스킬을 쓸 수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내가 눈을 감거나 완전한 어둠으로 상대가 보이지 않더라도 탐지만으로 스킬을 쓸 수 있다는 소린데.
이건 천천히 실험해볼 가치가 있어.
얼마 뒤 여자애들이 옷을 입고 왔다. 마트라 그런지 옷은 넉넉했나 보다. 제법 사람답게 입고 왔다.
"민준이는 왜…. 쓰러져 있는 거예요?"
"곧 일어날 거야. 아무 문제 없어."
딱딱한 내 말에 아무 말 못 하는 성장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속남이 일어났고, 투명남도 일어났는지 부스럭거리다 모습을 보였다.
"너희도 옷 입어. 1층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 되면 그쪽으로 와."
남자들은 여자들의 손에 이끌려 옷을 입으러 갔고 나는 그런 넷을 보며 1층으로 걸어 내려갔다.
1층 입구 안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나를 끊임없이 몰아세우는 의심이 또 한 번 속삭인다.
이건 병신 짓이라고. 남자들은 바로 죽이고 여자는 강간하고 죽이면 되는데 왜 이리 일을 어렵게 만드냐고.
나도 안다. 나도 알지만, 그냥 해보는 거다.
살육과 섹스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이 세상에서 별난 짓 한번 해보는 거다.
이러다 배신당하고 죽어도 그건 내 운명이겠지. 기껏 살려줬는데 배신당할 리 없다고 착각하는 것도 내 자유고.
"탐지."
네 명이 뭉쳐서 이쪽으로 오는 게 느껴진다.
살짝 긴장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는다. 네 명이라면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손도 못 쓰고 즉사하지 않는 이상은.
저들의 스킬이 허접하니 이런 여유도 부릴 수 있는 거겠지.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내게 다가온 넷. 나는 그들에게 손짓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환한 밖이지만 날씨는 싸하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드는 추위.
난방을 풀로 틀어놔서 따듯한 마트 안에 있다가 나와서 더 추운 거 같다. 뭐…. 겨울이면 추운 게 당연한 거지.
"운전할 줄 아는 사람 있냐?"
다들 서로의 얼굴만 바라본다. 하긴 스물둘이라 그랬으니 운전면허를 딸 기회는 없었겠지.
내가 전기차와 벤X있는 곳까지 오니 이들은 내가 왜 운전 이야기를 했는지 알겠다는 표정이 됐다.
"전기차다. 액셀이랑 브레이크만 밟을 줄 알면 되고 도로도 넓어. 알아서 써라. 필요 없으면 말고. 난 간다."
있는 대로 무게를 잡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벤X에 탔다.
씨발. 나도 가오충이었네. 어휴.
다행히 시동이 안 걸리거나 차를 몰면서 어리버리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름 존나 멋있게 후진해서 부웅 하고 차를 몰고 그곳을 빠져나왔으니까.
이게 뭔 미친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웃음이 나왔다.
"크크크큭."
이제 벙커로 가야지. 가서 한숨 푹 자야지.
이 차는 어디다 놔야 하나. 그냥 밖에다가 세워놓아야 하나.
일단 모르겠다. 벙커 근처로 가자.
회복 포션을 빨면서 탐지를 돌리며 차를 몰고 벙커까지 왔다.
탐지가 없었으면 절대 못 했을 짓. 계속 웃음이 나왔다.
미친 걸까? 나는 뭐가 이렇게 좋은걸까?
차는 근처 주택의 비어있는 차고에 대충 넣고 벙커에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옷을 훌훌 벗었다.
씻고 몸을 대충 닦아내고 알몸으로 스마트 폰을 들고 승희 방으로 들어갔다.
사진을 띄워서 승희에게 던져주자 화면을 보더니 흑흑 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직접 복수했으면 더 좋았겠지. 하지만 누가 죽였든 죽였으면 끝이지 뭐.
한번 박고 잘라 그랬는데…. 그럴 상황은 아닌 거 같네.
그냥 기뻐하게 두자. 하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돌아 나오는데 승희가 달려와 나를 뒤에서 안았다.
"고마워요…. 흑. 고마워요."
자기를 잡아 가두고 성고문도 한데다가 시도 때도 없이 강간하는 남자한테 고맙다고 하는 여자.
모르겠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런 승희를 두고 방에서 나왔다.
방문을 잠그고 내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중에서도 제일 모르겠는 건 나 자신이다. 성철아. 너는 대체 무슨 병신 같은 생각을 하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