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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3화 (4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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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철이파

탐지 스킬은 정말 말도 안 되게 맘에 든다.

나를 중심으로 반경 50m를 다 훑을 수 있다는 말이니까.

이미 한번 싹 확인해 본 주택지구지만 탐지를 쓰면서 돌아봤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기척. 맘에 든다.

스킬이 보장해주는 완벽한 안전.

크게 소리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다.

주변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대형 마트로 이동할 차례다.

걸어서 20분 거리. 예전이었으면 한 시간은 걸렸겠지.

이제는 그럴 필요 없다.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으니까.

정말 장거리에서 망원경이나 그런 거로 보는 게 아니라면 발견할 방법이 없다.

있다면 나보다 탐지 스킬이 높은 사람이 내 탐지 밖에서 탐지로 나를 발견하는 거?

과연…. 그럴 확률이 얼마나 있을까?

골목을 이용해서 대형 마트까지 최대한 일직선으로 걸어간다.

텅 비어버린 집들. 이제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당당하게 걸어간다. 마치 이 세계가 이 꼴이 나기 전 편의점을 다녀오는 기분으로.

10분쯤 걸었을까, 탐지에 뭐가 걸렸다.

사람.

심장이 두근거린다. 밀려오는 흥분. 몸에 아드레날린이 솟는 게 느껴진다. 아드레날린 맞나? 도파민인가? 여튼.

지금 시각은 새벽 세시. 꼼짝 않고 있는 사람의 기척.

12초가 상당히 길게 느껴진다. 내가 움직일수록 기척이 가까워진다.

놀랍고 신비한 기분. 목표가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축복이다.

다시 한번 탐지. 제법 가까워진 기척.

발소리를 줄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상당히 낡은 연립 빌라 1층.

빌라…. 아무리 오래된 빌라라 하더라도 침투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놔둘 수는 없다.

고민.

옛날 같았으면 당연히 매복이다. 언젠간 나올 테니까. 문을 열고 나와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나의 승리니까.

어쩐다. 어쩌긴. 나오게 하면 되지. 아니, 나오게 할 필요도 없다. 모습만 보면 된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숨어있을 곳은…. 저쪽이 좋겠네. 문에서 나왔을 때 숨은 나는 안 보이지만 나는 문이 훤히 보이는 곳.

기다란 막대기를 찾아서 방충망 사이에다가 냅다 찔러 넣었다.

와장창!

아파트 샷시면 불가능하지만, 이런 오래된 빌라라면 유리창이 그리 튼튼하지 않다.

유리를 깨버리고 미리 봐둔 곳으로 가서 숨었다.

그리고 탐지 스킬. 기척이 움직인다. 문 앞. 탐지가 꺼졌지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썅…."

잠들었다. 상황 종료.

제법 몸이 좋은 남자다. 키도 크고. 왜 이런 데서 사는 거지? 더 좋은 데가 많을 텐데.

반팔에 반바지, 그 위에 파카 하나만 걸친 모습.

뭐지? 자신 있나? 굉장히 무방비한데?

어떻게 여태까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한심한 모습이다. 스킬이 좋은가? 머리가 나쁜가?

어쨌든 그런 방심이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

정보를 캐볼까? 아니다. 딱히 궁금한 것도 없다.

몸에 지니고 있는 게 없는 거 같으니 그냥 죽였다.

[32,878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캬. 많네. 이놈이 이 주변 일대는 다 먹었나 보다.

이 녀석도 괴물이라는 말이다. 이 정도 코인이면 어지간히 죽인 건데.

일단 집안을 둘러봤다. 더러운 집. 퀴퀴한 냄새와 남자 냄새.

나도 남자지만 남자 냄새가 뭔지는 안다. 내 냄새는 못 맡지만 다른 남자 냄새는 역하지.

한쪽에 쌓여있는 통조림과 냉장고에 가득한 식량. 항공 잠바. 손도끼. 손도끼? 와. 터프하네.

마체테에 비해 짧지만, 무게감이 있다. 내려치기 좋겠네. 이건 가져가야지. 혹시 던질 수도 있으니까.

식량은 나중에 옮기고. 집을 더 둘러본다. 별거 없다. 노트북 같은 거는 없나? 메모리 봐야 하는데.

야한 잡지…. 웃긴다. 인터넷에서 편하게 야동을 보던 시절에서 야한 잡지를 보며 딸이나 쳐야 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씨발. 이런 세상이면 컴퓨터랑 야동 잔뜩 담겨있는 외장 하드면 진짜 보물 상자가 될 수 있을 텐데.

뭐. 나야 상관없지만. 야동 따위…. 의미가 있어? 승희가 있는데?

더는 볼 게 없다. 나가야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왜 이렇게 허접하게 나왔지? 스킬에 자신이 있나?

너무 허무하게 잡아서 내가 더 찝찝하다. 씨발. 이럴 거면 죽이지 말고 물어볼걸.

아…. 찝찝해. 진짜 찝찝해.

집을 나오는데도 찝찝함이 가시질 않는다.

존나 똥 싸고 안 닦은 기분. 아마 탐지 스킬 없이 이렇게 죽였으면 여기서 한 이삼일은 꼼짝도 안 했을 거다.

다른 일당이 있을 거라고 의심했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해가 안 가는 움직임이었을 정도. 으…. 뭐지?

그냥 죽은 새끼가 병신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탐지를 돌려도 아무것도 안 잡히니까. 정보가 주는 절대적인 지표를 믿어야 한다. 나는 그런 스킬을 얻었으니까.

탐지를 너무 돌렸나. 뻐근하네.

코인도 많이 벌었으니 시원하게 회복 포션 하나를 빨았다.

리플래쉬. 리플래쉬.

그냥 가다가 돈 주웠다고 생각해야지. 뭐. 찝찝한 거 빼고는 개이득인거니까.

다시 길을 걸었다.

죽은 병신은 뇌리에서 잊혔다. 찝찝함과 함께.

탐지는 그런 스킬이다. 정말 고른 게 조금도 아깝지 않다. 진심으로.

골목길이 끝났다.

그리고 보기 싫은 아파트 단지가 나왔다.

예전 같으면 정말 끔찍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웬만해서는 빙 돌아가는 것을 생각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 없다.

당당하게 걸어간다. 뭐…. 문제는 사람을 발견해도 잡을 방법은 없는 게 문제긴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파트를 가로질러가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세상은 그만큼 형편없이 변했다. 이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텅텅 빌 정도로.

4년.

고작 4년 만에 세상은 이 꼴로 변했다.

아니…. 4년이면 많이 버틴 건가?

지금 인구는 몇이나 될까? 100분의 1은 될까?

이 바글바글한 동네에 인구가 1퍼센트만 남았다면 지금 인구 밀도가 되려나?

이 꼴 나기 전에 이 동네 인구가 30만 명이 좀 넘는다고 알고 있는데…. 1퍼센트면 3천 명. 많다. 1퍼센트 안될 거 같아.

300명은 될까? 그럼 0.1퍼센트. 300명 정도는 되겠지. 이 넓은 땅덩이에 300명은 있겠지.

5천만 인구에서 0.1퍼면 5만 명. 이 대한민국에 5만 명밖에 없다고? 이야. 쾌적하네. 쾌적해. 씨발.

모르겠다. 일단 탐지가 있으니 주변부터 쭉 살펴보자. 적어도 이 주변 내에서는 사람은 못살게 만들어야겠어.

아파트 단지를 지났다. 눈앞에 대형 마트가 보인다.

그리고 0.1퍼는 너무 적은 거 같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불이 전부 켜져 있는 대형 마트. 마치 무슨 바다에 떠 있는 호화 크루즈 같은 느낌이다.

다른 주택이나 아파트에 켜져 있는 불빛들은 밤바다의 별빛, 대형 마트는 호화 크루즈.

전기가 무제한이라는 점이 좋은 건 이거다. 밤거리가 무섭지 않아.

탐지에는 아무것도 안 걸리니 슬슬 다가 가본다. 이 새끼들은 과연 어떻게 마트를 지키고 있을까?

죽이면 코인이 뚝딱 하고 나오는 세상에서 병신같이 가오 잡는다고 저렇게 대놓고 어서옵쇼를 하고 있는 놈들.

뭐. 쪽수가 많으니 자신이 있겠지. 그리고 저 정도는 먹어야 가오 있다고 생각할 테고.

깊이 생각하지 말자. 내가 할 것은 그냥 쳐 죽이고 코인을 모으기만 하면 된다.

승희 보여줄 사진만 찍어주면 되고.

굳이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사진 보여주고 앞으로 맘 편하게 박는다고 생각하면 괜찮지.

자…. 이게 입구가 보인다. 그리고 지하주차장 입구.

지하주차장을 막아놨을까? 적어도 저번에 오피스텔 털어먹은 새끼들은 똑똑하긴 했는데. 이놈들은 얼마나 똑똑할까?

오. 대가리는 있네. 지하주차장 입구가 막혀있다.

여긴 지하주차장 입구에도 셔터가 있네.

마트니까 지하주차장 들어가는 입구는 마트 안쪽으로 연결되겠지? 밖으로 오픈되는 출입구가 있을까?

일단 더 가까이 가볼까? 근데…. 왜 이리 탐지에 걸리는 게 없냐?

일단 보이는 놈들도 없고 탐지에도 걸리는 놈들이 없다.

카메라는…. 어딨지? 씨발 마트 카메라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를 모르니까 찾지를 못하겠네.

일단 마트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신 있다고 해도 이 정도로 보안을 안 할 리가 없어.

사내새끼가 열넷이나 있는데 불침번을 안 선다고? 씨발 군대 안 다녀온 나도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한 바퀴를 거의 다 돌았을 때, 드디어 한 놈을 발견했다.

롱패딩을 입고 담배를 피우는 놈. 하. 실내는 금연이야? 그래서 나온 거야?

마트 안에서 담배 피우면 스프링클러라도 터지나? 세상이 이 꼬라지가 됐는데도 담배는 밖에서 피는 거야? 대단하네.

숨어서 롱패딩을 지켜봤다.

담배를 다 피우고 유유히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

탐지거리보다 가시거리가 넓어서 탐지를 못 쓰는 게 아쉽네. 더 붙기에는 찝찝하고.

일단은 지켜본다.

지켜보고 공략해봐야겠어. 어차피 주변에 탐지로 걸리는 놈들도 없고 저놈들도 내가 습격할 거라는 건 모를 테니까.

정말 안되면 불 질러버리면 되고.

마트 입구는 크게 두 군 데다. 그리고 자잘한 문이 여러 개 있다. 화재나 비상시에 나갈 수 있는 문들도 있고.

웃긴 건 큰 입구 두 군데는 유리가 많이 깨져서 보안의 의미가 없다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들이 입구를 방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음…. 생각해보자. 마트가 어떻게 생겼었지?

입구…. 들어가면 바로 1층에도 매장이 있지…. 계산대가 있고…. 가로막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 마트라면 에스컬레이터지. 그리고 엘리베이터. 계단.

내가 마트에서 머문다면 어떻게 할까. 지상? 지하?

잠깐…. 여기는 주차장이 지상이잖아. 그럼 저 새끼는 왜 담배를 피러 내려왔지? 그냥 위에서 피는 게 낫지 않나?

그럼 저놈들은 지상에는 없다는 뜻인가? 으…. 모르겠네.

생각을 지우자. 정보도 좇도 없는데 머리 써봐야 뭐 나오는 것도 없지. 편하게 저놈들을 지켜볼 만한 곳이라도 찾아야겠다.

추워 뒤지겠네.

마침 마트 바로 길 건너에 페스트푸드점이 있었다. 페스트푸드점은 언제나 옳지.

나는 탐지 스킬을 돌리며 천천히 페스트푸드점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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