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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
불면증이 있다고 잠에 무적인 것은 아니다. 자야 할 때 못 자는 거지 피로가 안 쌓이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몸의 안전장치가 없기에 급속도로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다른 불면증 환자는 잘 몰라도 나는 그렇다.
피로가 얼마나 쌓여있다고 수치처럼 뜨는 게 아니기에 피로를 전부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자야 한다.
웃긴 게, 마냥 잔다고 피로가 풀리지도 않는다. 자면서 더 피곤해질 수도 있는 족같은 병.
사흘 정도를 자고 일어나서 조금 있다가 또 자고 하는 식으로 반복해서 몸 상태를 확인한다.
먹고 수분 보충하고 쌀꺼 싸고 다시 자고…. 그렇게 한 뒤 거울을 보니 이제야 조금 사람다워졌다.
후우….
오피스텔에 다녀온 건 잘한 짓이긴 했다. 일단 얻은 게 잔뜩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원하는 것은 못 얻었다.
여자.
씨발…. 정말 귀찮아 죽겠네. 무슨 방법 없나.
민지가 있었던 방을 봤다.
조교라…. 조교는 꿈이다. 그딴 생각은 하지 말자. 그건 만화에서나 나오는 남자의 판타지일 뿐이다.
그 뭐였지? 스톡홀름 증후군?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지. 근데 나는 아냐.
납치, 감금…. 사육. 차라리 그게 현실성 있지.
음탕한 생각이 잔뜩 들기 시작했다.
한번 실패하고 와서 그런지 더 심해졌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나갈 시간은 아니다.
끓어오는 음심을 꾹꾹 눌러 담으며 시간을 보낼 거리를 찾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석궁.
정말 멋지게 생긴 석궁이다. 남자라면 당연히 쏴보고 싶은 디자인.
어떻게 쏘는 거지? 음…. 그리 어렵진 않네.
줄을 당겨 걸고 볼트를 올린다. 하긴. 이게 석궁의 장점이지. 활에 비해 간단한 사용법.
챙겨온 볼트 열한 발. 그중 하나를 올려놓고 석궁을 겨눴다.
보자…. 뭘 쏴보지?
테이블 위에 있는 통조림 껍질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투칵! 하는 꽤 큰 소리와 함께 통조림 껍질이 관통됐다. 와…. 씨발. 이거 뭐야?
생각보다 위력이 대단하다. 이거 맞으면 사람이고 뭐고 디지겠는데?
그렇게 석궁을 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이 녀석 테스트도 해볼 겸 나가봐야겠어.
9시쯤 되니 더는 기다리기가 힘들어 밖으로 나섰다.
평소에 들고 다니는 짐에 석궁이 추가되자 왠지 진짜 사냥꾼처럼 보였다.
한 손엔 석궁, 한 손엔 마체테. 음…. 왜 이리 웃기지.
석궁은 들고 다니자니 번거롭고 짐에 매달고 다니자니 절그럭거린다.
묘하게 귀찮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들고 다녀 본다. 뭐든 익숙해지는 게 중요하지.
어디로 갈까? 오늘도 고민한다.
주변은 인구가 확실히 줄어든 게 느껴졌다. 하긴 이런 주택가에 아직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스킬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 인간 탐지 뭐 그런 거로.
어? 그런 스킬이 없을까? 있으면 굉장히 사기 스킬이 될것 같은데.
한 10만 코인 정도로 스킬 하나 더 못 구하나. 코인도 많은데. 상점에서 스킬을 팔면 좋을 텐데.
세상을 이 꼴로 만든 놈들은 왜 상점을 열어준 걸까? 코인을 얻기 위한 동기부여가 가장 그럴듯하긴 한데, 잘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번거로운 방법이란 말야. 무슨 의도로 이렇게 만들었는지 확실하게 이해가 가진 않는다.
지하철역으로 가볼까 했지만, 지하는 왠지 들어가기가 싫다. 안 가본 지 꽤 되긴 했는데…. 그래도 거긴 좀 그렇다.
그냥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기로 했다.
사람이 있을 만한 곳으로. 기왕이면 이쁜 여자가 있으면 더 좋고.
무리랑 무리끼리 싸우는 거 뒤통수 치는 게 가장 신나는 일이긴 한데. 어디 싸움 안 벌어지나?
새벽 내내 돌아다녔지만, 딱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무작정 돌아다니는 것은 안 돼. 머리를 굴려보자.
벙커랑 너무 멀어지는 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니다. 만약 여자를 잡았다고 해도 끌고 돌아가는 데 오래 걸린다면 의미가 없잖아.
아. 좋은 생각이 났다. 그간 귀찮아서 미뤄뒀던 일.
안전해 보이는 원룸 하나로 들어가 문이 열린 집을 찾았다.
안쪽을 돌아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밝은 전등 아래서 배낭 안쪽에 잘 접어두었던 A4용지를 꺼냈다.
세상이 이 꼴이 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짓은 인터넷에 벙커 만드는 회사를 검색한 것이었다.
회사들을 검색해 나와 가장 가까운 곳의 회사들 주소를 따놨었다. 그리고 나는 그 회사들로 찾아갔다.
막 무차별적인 살인이 벌어질 때라 굉장히 흉흉하던 시점이었다. 세상이 미쳐 날뛰던 시절.
가장 가까운 회사에 몰래 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세상이 망해가고 있는데 회사에 출근한 사람은 없으니까.
거기서 발견한 자료. 자신들이 벙커를 만들어준 고객 명단.
그게 이 A4용지다. 전국에 있는 벙커 위치가 기록되어있는 소중한 종이.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다른 벙커의 위치를 확인해 봤다.
뭐…. 몇번을 확인했던 거니 대충 어딘지는 안다. 여기서 지하철 세 정거장 거리에 있는 주택 단지.
오늘의 목적지는 여기로 하자. 멀티를 확보할 때가 됐어.
가는 길에 여자를 구할 수 있으면 최고고, 안되면 멀티를 확보하는 거야.
다시 짐을 싼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스마트폰 지도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은 지도가 먹통이 된 이후 미아가 되었다.
정말 웃긴 일이다. 사람들은 지도가 없으면 바로 옆 동네 가는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나도 마찬가지였지…. 지금은 아니지만.
슬금슬금 새벽의 거리를 이동한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싹한 기분이 드는 밤거리.
그늘로 어둠으로 시야가 막힌 곳으로 움직이며 일부러 한 번씩 꺾는다.
지켜보는 이가 한 명도 없다면 뻘짓이라고 볼 수 있는 몸부림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짓을 하지 않고 다닐 만큼 대범하진 않다.
목숨은 하나니까. 원 코인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족같은 세상이니까.
지하철 세 정거장 거리를 세 시간에 걸쳐서 도착한 나는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처음 와본 곳이긴 한데 상당히 부유한 동네다.
집마다 차고가 있는 주택 단지라니…. 참 부럽네.
하지만 이런 집들은 일찍이 약탈의 대상이 되었기에 멀쩡한 집은 그리 많지 않다.
과연 벙커는 멀쩡하려나?
대문 옆에 있는 번지를 확인해보며 조심스럽게 벙커가 있을 집을 찾았다.
어디 보자…. 여기네.
필지 하나를 전부 다 쓰고 있는 집. 하긴, 이 정도는 돼야 벙커 만들겠다는 생각도 하지.
조용히 대문을 열어보는데 그대로 쓰윽 열렸다.
녹이 슬어 끼이이익하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린다.
깜짝 놀랐지만 이런 소리야 바람에 흔들리는 문에서 자주 나는 소리니 크게 걱정은 안 했다.
관리를 안 한 지 오래되어서 무성한 잡초밭이 된 마당. 저택 입구 문은 아예 열려있었다.
안에 불이 켜있긴 했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현관에 잔뜩 쌓인 먼지는 이곳에 사람이 드나든지 꽤 됐음을 알려줬으니까.
집안은 별게 없었다. 쓸만해 보이는 것은 전부 털린 것 같다.
서랍도 전부 열려있고 온갖 잡동사니가 잔뜩 바닥에 널브러져 잔뜩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좋아. 그럼 벙커를 찾아볼까.
같은 회사에서 만든 벙커니 비슷한 시스템일 것이다.
입구에 비밀번호가 있겠지만, 걱정은 없다.
시공회사에서 가져온 마스터 카드. 이걸 입력시키고 000000을 누르면 비밀번호 초기화가 되는 시스템.
왜 이런 걸 만들어 뒀는지는 모르지만 나야 고맙지. 이래서 사람은 설명서를 잘 읽어야 하는 거야.
어차피 비밀번호가 있어도 안에서 수동 잠금장치를 추가로 잠글 수 있기에 만들어 놓은 거 같긴 하다. 어차피 벙커란 그런 용도니까.
마당에 나가 입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벙커에 사는 나이기에 입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당에 있는 작은 창고에 교묘하게 숨겨진 입구. 아는 사람은 쉽게 발견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입구.
벙커 안에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창고에도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있는 거 보면.
아무리 위장을 한다고 해도 먼지까지는 위장할 수는 없다.
바닥을 살펴 벙커 입구를 찾아냈고, 옆의 비밀번호를 누를 수 있는 패널을 찾아 열었다.
아직 문제없이 작동하는 패널. 마스터키를 가져다 대고 000000을 입력했다.
작게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
설레는 마음으로 벙커의 입구를 열었다.
이만큼 했으면 다 된 밥이지. 벙커 만드는 회사가 기술력이 꽤 있어서 다행이다.
입구를 닫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자 내가 사는 곳과 똑같은 모습의 벙커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벙커. 밀폐된 곳이었어서 그런지 먼지도 거의 없다.
전기, 수도…. 비축 식량…. 전부 확인해 봤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벙커.
마치 시공만 해놓고 한 번도 안 쓴 것 같은 느낌이다. 뭐, 나야 좋지.
익숙하게 모니터 룸으로 가서 기기를 켰다.
카메라는 9분할로 떴지만 나오는 카메라가 4개 밖에 없었다.
흠…. 이건 별로 좋지 않네. 사각이 많아. 고칠 수 있을까? 아니면 각도를 조금 조절해야 할까?
어쨌든 새로 멀티가 생겼으니 기분이 좋았다.
벙커를 만든 회사에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을 정도로.
일단은 여기를 손보는 게 우선이야. 그런 다음 주변을 살펴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