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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오피스텔
벙커로 돌아와서 이틀을 잤다.
연속으로 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틀을 잤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자고 싶었다.
이틀 정도를 자니 그제야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생각이라는 게 조금 굴러가는 기분.
손에 집히는 대로 음식을 들고 와 모니터 룸에서 카메라를 돌리며 밥을 먹었다.
그제야 이틀 전 일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짱개, 다빈, 세희, 물류센터, 씹새끼들, 거래.
갑자기 생각할 게 많아지니 도피하고 싶어졌나?
하나하나 정리해봐야겠다. 자꾸 머릿속에서 엉키는 느낌.
짱개.
일단 주변에 짱개 무리가 있다는 것은 알겠다. 열하나였나? 열둘이였나? 암튼 병신같은 새끼들.
죽은 놈들은 생각보다 병신들이었다. 왜 제압한 상대를 묶지 않는 거야? 스킬이 안 무섭나? 그 족같은 가오가 밥 먹여 줘?
결과는 뭐야? 전멸이었잖아. 하여간 죽은 놈들은 죽을만 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두 손으로 비빔.
새로 온 무리도 뭐 비슷할 거라 생각한다. 아무래도 그게 그놈들 특성인 거 같으니까.
아니다. 물리과 실험실에서 본 짱개 셋은 다빈이를 묶었잖아. 걔들은 뭐야. 걔들은 가오충이 아닌가? 그냥 다른 무린가?
확실히…. 같은 일당처럼 보이진 않았어. 그럼 뭐지? 그냥 짱개 아웃사이더들이었나?
다음에 다빈이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보게 된다면 물어봐야겠다. 어떻게 잡혔는지.
그래 다빈이…. 안 죽었겠지?
기껏 살려놨는데 안 죽었으면 좋겠다. 그 고등학교의 여자애도. 이름이 뭐였더라. 암튼 간.
세희…. 그 씨발년. 점점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지는 거 같다.
언젠간 그 썅년을 꼭 알몸으로 빌게 만들어야 하는데.
물류센터라고. 하. 거긴 좀 아니지.
가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는 들었다. 물류창고에 대해.
이 근방의 모든 택배가 모이는 엄청나게 커다란 곳. 세상이 이 꼴이 나고 멈춰버린 그곳에는 온갖 것들이 다 있다고 한다.
택배로 뭐든지 시키던 시절이었으니까. 뒤져보면 총이라도 나올지도 모르겠다. 진짜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거기는 다들 잘 접근을 안 하는 곳이다. 거긴 약간 야구로 치면 메이저리그 같은 곳이니까.
한가락 하는 무리가 서로 먹으려 드는 곳.
하나의 성이자 요새 같은 곳인데…. 거기에 갔다고? 그게 되나?
하긴, 세희 년의 스킬이 사기라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남자라면 바로 매혹해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럼 그 매혹된 남자는 조금 전까지 같은 편이었던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신나게 뒤통수를 칠 수 있다.
게다가 죽어도 상관없다. 죽으면, 살아있는 다른 놈을 매혹하면 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개사기 스킬이다. 아마 여자가 고를 수 있는 스킬중에 가장 사기 스킬 아닐까?
왜 다른 여자들은 그 스킬을 안 골랐을까? 정말 궁금하다.
하긴, 나도 수면을 고르긴 했구나. 사실 그때는 잠에 대한 열망이 더 컸으니까….
그리고 남자가 매혹을 고르면…. 별로 쓸모가 없다.
남자가 남자를 매혹해봐야 그게 무슨 의미야. 오히려 무섭지.
여자를 매혹해봐야 할렘밖에 더 되겠어? 음…. 좋네?
뭐…. 분명히 어딘가 있긴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녀석들이 없진 않았을 테니까.
만약 그런 걸 골라서 무리를 꾸린다면 이런 시시한 곳에 있진 않을 테고.
카메라에 씹새끼들이랑 정종찬이 거래하는 모습이 나왔다.
잠시만, 카메라를 뒤로 돌렸다.
거래를 하기 20분 전쯤에 씹새끼들이 오는 장면.
저게…. 뭐지?
뭔가 번쩍였다? 스킬인가? 분명 에코백에 뭔가를 했는데?
카메라를 다시 확인했다. 음…. 화질이 조금만 더 괜찮았으면 좋았었을 텐데.
그래도 내 벙커 근처에서 거래했으니 이렇게 다시 볼 수 있고…. 좋네.
뭘 줬을까…. 대체 뭔데 정종찬 그 기생오라비 새끼가 여기까지 왔지?
어지간해서 세희년 근처에서 안 떨어지려고 할 텐데.
임신도 안 되는데 존나게 서로 박아대고 있어야 할 거 아니냐고.
뭣 때문에 물류센터에서 여기까지 씹새끼들을 만나러 왔을까….
씹새끼들을 잡아서 족쳐야 하나?
와…. 나 방금 조금 상남자 같았네.
족치기는 시벌…. 만나지 않게 도망 다녀야 하는구만.
머리가 좋은 놈들이다. 스킬도 잘 숨기고, 잘 쓴다.
두 명이 왜 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일단은…. 카메라를 다 봤으니 다시 자볼까?
코인도 잔뜩 있으니 모든 게 귀찮아진다. 여자만 있으면 딱일텐데.
아…. 괜히 생각했어. 또 생각나잖아.
씨발…. 딸이나 치고 자야지. 이대로 자겠나.
하지만 나는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여자의 따듯한 보지 속을 생각하면 손으로 만족이 될 리가 없다.
아니…. 뭐 손이 더 간편할 때도 있지만, 단순한 사정의 문제가 아니다.
덮칠 때의 마약과 같은 쾌감. 자극. 그걸 무시할 수 없다.
핑계라고 볼 수도 있지만 결국은 나약한 인간의 변명이겠지.
밤. 그리고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
정해진 곳도 없으면서 밖으로 뛰쳐나온 짐승 한 마리.
기왕이면 호랑이 같은 멋진 짐승이었으면 좋겠지만, 그냥 하이에나다.
어디로 가면 썩은 고기를 주워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하이에나.
갑자기 오피스텔이 가고 싶어졌다.
예지를 죽이고 나서 한 번도 그쪽으로 안 갔었지.
이제 그쪽도 가봐야 뭐 있는 것도 없긴 한데…. 그래도 가본다.
오피스텔이 보이는 곳까지 온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뭐가 이상하지.
알았다.
오피스텔의 모든 불이 꺼져있다.
그럴 리가 없는 곳이다. 저 많은 세대의 불이 전부 꺼져있을 리가 없다.
전기가 무제한으로 돌고 있는 세상이라 한번 켜놓은 불은 어지간해선 꺼지지 않는다.
LED 램프의 수명이 다 달면 꺼지겠지만, LED 램프는 생각보다 오래간다.
둘 중에 하나같다.
오피스텔의 건물에 들어오는 전기를 통째로 껐거나, 누가 일부러 돌아다니면서 다 껐거나.
후자는…. 불가능 하다.
집마다 문이 다 열려있는 것은 아니니까.
결론은 누군가 통째로 전기를 다 죽였다는 건데.
이유가 뭐지? 뻔하지. 하나밖에 없다.
사는 사람들을 다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아무리 전기가 무제한이라도 건물의 전기를 내려버리면 오피스텔에 사는 사람들은 전기를 못 쓰니까.
가만히 서서 생각하니 굉장히 똑똑한 방법이었다.
한자리에서 건물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인질로 삼을 수 있는 좋은 방법.
입구를 막고 전기를 끊으면 결국은 안에서 살 수가 없다. 아니 살수야 있지만 불편하다.
결국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고 먹잇감이 된다는 거다.
전기에 대해서 잘 알고…. 아니 잘 몰라도 저 시스템에 대해서만 알고 있으면 되겠지, 그리고 변압기를 내릴 줄만 알면 되고.
그리고 입구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혼자서 될까? 스킬이 개쩔어서 누가 나오든 즉사시킬 수 있으면 되려나?
모르겠다. 일단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혼자서 이렇게 화려한 짓을 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호기심이 생겼기에 일단은 가본다.
어떤 상황인지, 어떤 놈들인지 궁금해졌다.
평소에 들어가던 루트로 가기 전에 오피스텔 입구를 살펴봤다.
딱히 막혀있거나 하진 않았다.
오피스텔의 입구는 1층에 두 개. 그리고 지하주차장 루트와 지하주차장 계단. 총 네 개.
입구를 막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나? 하긴…. 지하주차장 차 나오는 통로는 막을 수 없지.
내 생각은 틀렸다.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트럭 두 대로 막혀있었다.
어떻게 사람 하나 못 나오게 저렇게 막아놨지? 저것도 능력이네.
지하주차장 계단 문은 피스와 철쪼가리로 아예 막아버렸다.
전동드릴이나 드라이버가 있으면 열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이런 짓을 했다는 건 내 가설이 맞는다는 거다.
어떤 놈 혹은 놈들이 입구에서 대기하고 나오는 놈들을 다 죽였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지금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겠지? 다 죽인 오피스텔에서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일단은 변압기를 살펴봐야겠다. 내 생각이 맞나 확인해 보자고.
그런데 막상 1층 앞으로 가니 들어가기가 꺼림칙했다.
하지 말까? 고민되네.
누군가 지켜보고 있으면 어쩌지? 아…. 또 나오네 쫄보 근성.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어디 보자…. 입구가 잘 보이는 건물. 여기가 좋겠네.
오피스텔 맞은편 햄버거 패스트푸드점 2층으로 올라왔다.
난장판이 되어있는 내부가 오히려 마음에 놓인다. 적어도 여기를 아지트로 삼는 놈은 없다는 거니까.
창가 구석에 적당히 자리 잡고 오피스텔 입구 쪽을 바라봤다.
만약 안에 사람이 있다면, 지들이 지하 입구를 쳐 막아놨으니 1층으로 나다닐 수밖에 없겠지.
이틀이나 자고 와서 그런가? 몸은 쌩쌩하다. 기다리는 게 지루하긴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하루.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죽을 만큼 죽은 건가? 이렇게 나다니는 사람이 없다니?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온몸이 쑤신다.
갑자기 이렇게 있는 게 굉장히 비효율적인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카메라 같은 거라도 하나 설치해놓는 게 훨씬 낫겠네.
스마트폰만 터졌어도 무선 감시 체계를 꾸릴 수 있는데…. 아까워 아까워.
살며시 일어나 구석에서 조용히 스트레칭을 했다.
그대로 가만히 있자니 몸이 쑤셔서 안 되겠어.
하루. 딱 하루만 더 지켜보고 들어가야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도 없는 빈 오피스텔 앞에서 뻘짓하고 있다는 생각 밖에 안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