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3화 (2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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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정세희?"

머리를 갸웃거리는 다빈.

"화학과고 주변에 항상 남자들을 달고 있을 거야. 내가 알기로는 적어도 열 명 정도는 있어. 그리고 마지막 봤을 때는 긴 머리였고…."

"그 썅년?"

"어? 알아?"

"알지. 그 썅년. 우리 그룹 망쳐놓은 년인데. 그 씨발년. 골빈년."

다빈의 격한 반응에 나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룹을 망쳐놨다고? 무슨 소리지?"

"어떻게 알아? 그룹을 망쳐놓았다는 게 뭐야?"

"너. 걔한테 볼일 있어?"

"뭐…. 있지."

"뭔데. 복수야?"

"그렇지."

"뭔가 뜨뜻미지근하다?"

"그래 보여?"

"왠지 의욕이 없어 보이는데?"

"그럴 리가."

"뭐…. 상관없지. 근데 혼자로 힘들 텐데? 걔 주변에는 항상 남자들이 지키고 있다고."

"당연하지. 걔 스킬이 매혹이니까."

"매혹? 꼬시는 거?"

"꼬시는 수준이 아니지. 노예처럼 만드는 건데."

영리하다 못해 영악한 년이지. 자신의 주변에 남자들을 두는 게 익숙한 년이라 아마 스킬 고를 수 있을 때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평소에도 숨 쉬듯이 하던 거였으니까.

"아…. 씨발. 어쩐지. 이제 이해가 가네."

"본 적 있어?"

"반년 전에."

"들려줘."

"아…. 씨. 별로 하기 싫은 이야긴데. 살려줬으니 어쩔 수 없나."

다빈은 자신의 배낭에서 물통을 하나 꺼내더니 실험실 수도를 틀어 물통을 씻었다.

그리고 물을 채워 넣고 한 모금 마시더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나는 정외과야. 그리고 세상이 이따위로 변한 다음에는 자취하던 정외과 동기들끼리 모여서 그룹을 만들었어."

익숙한 이야기다. 나도 화학과 애들끼리 뭉쳤으니까.

"우리는 학교를 벗어나서 근처 대형마트에 자리 잡았어. 일단 식량을 확보해야 했으니까."

"설마 처음부터 이야기 하는 거야? 세희 그년 이야기만 해주면 안 돼?"

내 말에 다빈이 빈정 상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속으로는 약간 움찔했지만, 태연하게 그녀의 시선을 받아낸다.

"너 여자한테 인기 없겠다."

"인기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딴 세상에서."

"왜? 임신도 안 되는데 마음껏 싸지를 수 있잖아? 남자들이 좋아하는 전개 아냐?"

"하…. 너 정말 여자 맞냐? 아무리 생각해도 너 알맹이는 남자 같아."

"어머, 얘가 여자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너는 정말 여자랑 사귀긴 글렀다."

"아, 됐고. 세희 이야기나 해보라니까?"

"에휴. 그래. 니가 여자랑 사귀든 만나든 무슨 상관이냐. 암튼 그래. 반년 전. 으…. 생각만 해도 짜증 나네. 우리는 식량이 떨어진 지 꽤 됐었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랑 비슷하게 연명하고 있었지."

"살인?"

"꼭 그렇게 하나하나 집고 가야겠니?"

"뭐 특이한 일이라고."

"너…. 생각보다 험하게 살았구나?"

"지금 살아있는 인간들은 다 비슷하겠지. 너는 아닌 것처럼 이야기한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죄책감을 읽을 수 있었다.

죄책감이라니…. 세상이 멸망하면서 가장 먼저 없어진 감정 아니었나.

"그래. 아무튼, 그렇게 살고 있었어. 근데 어느 날 우리 아지트로 그놈들이 쳐들어왔어."

"세희?"

"그래. 그 찢어 죽일 년."

"어떻게 살았냐? 투명화 덕분에?"

"그렇지. 이 능력이 크긴 했지."

"그래서."

"웃긴 건 우리 그룹에서 두 명이 그년을 따라갔다는 거야. 네 명이 죽고 민영이는 잡혀갔지. 결국, 온전하게 도망간 건 나 하나야. 성규랑 주민이가 배신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매혹이라고? 그거 그럼 계속 노예처럼 사는 거야?"

"내가 알기론 지속 시간이 있어. 근데 웃긴 건 세희 그년의 솜씨야. 니 친구들 두 명이 따라갔다고 했지? 여자 하나도 잡아갔다고 했고? 나는 왜 그런지 알 거 같아."

"뭔데."

증오로 눈을 이글거리는 다빈, 반년 만에 밝혀진 사실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 건가?

"그 친구 둘이 매혹에 걸려서 그 무리에 합류했지? 그리고 매혹이 풀리면 거기에서 분노로 깽판이라도 칠 거 같지? 안 그래. 나는 그걸 직접 봐서 알아. 잡혀간 그 여자는 네 친구한테 강간당하고 죽었을 거야."

충격받은 다빈의 표정.

"매혹에서 풀린 네 친구들한테 세희 그 썅년이 웃으면서 말하는거지. 니들 손으로 여자를 잡아 오고 강간하고 죽였다고. 자기가 시킨 게 아니라고. 그럼 니 친구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 거 같아?"

다빈은 손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화가 나 있는 게 보였다.

음…. 저정도 반응이라니. 사이가 좋은 그룹이었나? 그러기 쉽지 않은데.

"나는 그걸 직접 봤어. 그래서 알지. 세희년 주변에 있는 남자들 대부분이 그래. 화학과 출신 네 명 정도만 원래 있던 놈들이고 나머지는 다 그렇게 합류 된 거야. 자신이 매혹당했는지도 몰라. 어렴풋하게 알 수도 있겠지. 근데 정확한 메커니즘을 모르니 긴가민가 한 거야. 어디까지가 자기 의지고 어디까지가 매혹당한 것인지. 그래서 그렇게 그년 근처에서 살게 되는 거야. 그거 뭐라더라. 가스라이팅? 그래. 그렇게 당하면서 사는 거지."

내 말을 다 들은 다빈은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던 그녀는 나를 보고 말했다.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말했잖아. 화학과라고. 운 좋게 그년의 주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호구 17번."

"호구 17번은 뭐야."

"딱 들으면 모르겠냐."

"진짜 그런 뜻?"

"뭐, 호구가 다른 뜻이 있어?"

다시 말이 없어진 다빈.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걸 말 안 했어. 어디로 간지 알아?"

"몰라. 그런데 짐작 가는 곳은 있어."

"어딘데."

"투명화로 몸을 숨기고 어느 정도 그 새끼들을 쫓아갔을 때 들은 게 있어. 아무런 능력이 없어서 포기하고 떴지만, 마지막에 들었을 때 그년이 그랬어. 사람 많은 곳으로 가야겠다고."

"사람이 많은 곳?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먹고 살기 힘드니 본격적으로 사냥이나 하려고 그런가 보지."

"사람 많은 곳…."

나는 다빈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사람 많은 곳이라니…. 근처에 사람 많은 곳이 어디지? 지하상가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네.

"아무튼,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모든 것. 끝."

"별 소득은 없네. 위치를 아는 것도 아니고. 나랑 상관없는 네 이야기만 잔뜩 들었네."

"너 이 씨…. 진짜 말 드럽게 싸가지 없게 한다. 내 생각엔 넌 세상이 이 꼴 나기 전에도 친구 없었을 거 같아."

다빈의 말에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움찔하는 듯했지만 내 눈길을 피하지 않는 그녀.

살려줬더니 잔뜩 기어오르는 게 보기가 싫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 못 하는 건가?

"야."

"왜."

"죽을래?"

"안 죽인다며."

"날 믿어?"

그제야 조금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다빈의 표정이 약간 굳는다.

"왜…. 왜 그래?"

"넌 내 스킬이 뭔지 알고 내 얼굴도 봤어. 이름도 알고 나이도 알고…. 뭐 많은 걸 알지. 그리고 난 네 스킬이 뭔지도 알고 네가 나를 이길 수 없는 것도 알아. 그런데 내가 여기서 너를 순순히 보내줄 것 같아?"

"아니…. 왜 그래? 나 어디서 그런 거 말하고 다니진 않아."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거지."

"어…. 이러지 마. 우리 방금까지 분위기 좋았잖아?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이 정도면 굉장히 훈훈한 장면 아니었어?"

"그건 네 생각이고."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는 다빈, 그녀의 머릿속에 생각이 엉키는 게 느껴진다.

과연 어떻게 할까? 목숨을 구걸할까? 도망갈까?

"투명."

도망가는 것을 택한 그녀.

모습이 투명해졌고, 나는 그녀의 머리에 붙어있던 테이프 조각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재빨리 도망갔지만,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고 그녀와 가까운 실험실 문 쪽으로 갈 것을 예상했기에 바로 그녀의 테이프가 붙은 머리채를 잡을 수 있었다.

"놔! 놔! 씨발!"

"소리 지르면 죽인다."

마체테를 목에 겨눈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제야 자신이 꼼짝없이 잡혔다는 것을 깨달은 다빈이 입을 다문다.

"투명화 풀어."

"...해제."

다빈의 투명화가 풀렸고, 그녀는 나를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숨을 고른다.

"다빈아."

갑자기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며 마체테를 거두는 나를 보고 그녀의 표정의 황당하게 변한다.

"아무나 그렇게 믿으면 안 돼."

몸을 돌려 그녀의 배낭 쪽으로 가서 배낭을 들고 그녀의 앞에다가 놔준다.

"알아볼 게 있어서 테스트 한 거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고."

"너…. 너!"

"그리고 부디 어디 가서 내 이야기는 하지 말아줘. 내가 널 살려주는 건 너를 믿어서가 아니라 너를 잡아 죽일 방법이 있어서 그런 거야. 그러니 다른 사람 믿지 말고 내 이야기 하지 말고, 오늘처럼 병신 같은 짱개 새끼들한테 잡히지도 말고. 알았지?"

잡아 죽일 방법 따위는 없지만, 다빈은 그런 것은 절대 모를 테니, 이 정도면 훌륭한 블러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녀가 정말 입단속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헤프게 입을 열고 다니진 않겠지.

"너 진짜 또라이구나?"

"그걸 이제야 알았어?"

그녀는 긴장이 풀렸는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진다.

그 모습이 묘하게 섹시해서 그대로 덮쳐버리고 싶었지만, 관뒀다.

다소 심한 장난질을 하긴 했지만, 그녀는 나름 이 미친 세상을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아오. 정말. 나 너 한대만 후려쳐도 되냐?"

"능력 되면."

이게 무슨 병신같은 짓인지는 모르지만, 오늘 하루 자극적인 일을 많이 당한 다빈에겐 나름 특이하게 받아들여졌나 보다.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두려움이 생긴 것 같다.

무섭다거나 공포스럽다기 보단 마주치면 안 되는 미친놈 정도의 시선.

"그럼, 잘 가고. 다음엔 마주치지 말자."

내 말에 다빈은 자신의 배낭을 메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나는 그녀의 머리에 붙어있던 테이프가 조용히 실험실 문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웃었다.

"야. 머리에 있는 건 떼고 가라."

황급히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는 그녀는 테이프 조각이 만져졌는지 거칠게 바닥에 뿌린다.

보이진 않았지만, 떨어진 테이프 조각이 그녀가 그렇게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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