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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9화 (19/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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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학교

일상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냥 한여름 밤의 꿈을 꾼 거 같다. 그냥 분수에 맞지 않는 꿈을 꿨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이 빌어먹을 세상, 병신같은 세상에서 달달한 무언가를 바랐던 내가 잘못한 거였지.

두 달 정도를 벙커에서 나가지 않고 있었다.

나간 거라곤 며칠에 한 번씩 가끔 벙커문을 열고 입구에 앉아 한두 시간씩 햇볕을 쬔 정도.

식료품도 널널하고 코인도 남아도니 밖에 안 나간다고 죽을 일은 없으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날마다 몇 명이 죽어가는지 같은 것은 관심이 없었다.

유일한 관심사는 세상을 이렇게 만든 녀석들이 노리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하는 거였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장난질할 수 있는 녀석들이라면 멸망시키는 것 따위는 한순간에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첫날 보였던 메시지. 70살 넘는 사람을 한 번에 세상에서 증발시킨 그 메시지.

그 정도 능력이 있는 놈들이면 숫자 조금 바꾸는 것만으로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은 일도 아닐 텐데.

새로운 생명도 태어나지 않게 하고 나이 많은 인간들을 한 번에 죽이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거리낌 없이 만들어 놓은 녀석들.

처음 내린 결론은 그놈들은 재미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전지전능해 보이는 그 능력으로 우리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상황을 만들어 놓으면 개미 같은 인간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인지 지켜보는 관찰 예능 같은 것.

악취미 중의 악취미라고 볼 수 있지. 쓰레기 같은 새끼들.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런 개새끼들에게 반발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생각을 할수록 조금 이상했다.

단순하게 재미만을 원한다면 이렇게 심심하게 세상을 만들기가 없을 텐데.

인간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을 원한다면 좀 더 긴박한 제한 같은 것을 걸어놔야 한다.

지금 같은 조건이라면 나 같은 놈들처럼 안전한 곳에 짱박혀서 꼼짝도 안 하는 인간이 제법 될 테니까.

취향이 변태 새끼들인가?

자극적인 것을 보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냥 관음증이야?

모르겠다. 일단은 정보가 너무 없다.

그리고 그 정보라는걸 어디서 더 얻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두 달 만에 바깥을 나가보기로 했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산책 같은 게 하고 싶었을 뿐.

따로 섹스가 땡기는 것도 아니고 음식이 모자란 것도 아니며 보고 싶은 것이나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세상이 궁금했다.

그리고 어쩌면 실수로 죽을 수 있을지도?

세상을 이런 식으로 만든 놈들이 있다면 죽음 후가 완전히 무의 세상일 리도 없을 것 같다.

사후세계랍시고 만들어 놓고 거기서도 서로 싸우고 죽이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무서움이 없어졌다.

그렇기에 외출=위험이라는 공식이 깨져버렸다.

오히려 죽음 이후가 뭐가 있는지 약간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러다가 정말 아무것도 없으면 좇망하는 건데 말야.

어디로 갈까?

오피스텔 쪽은 가고 싶지 않다.

원룸 쪽도 가고 싶지 않다.

연주, 그 성녀 같은 창녀는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으니까.

지하상가나 지하철역도 가고 싶지 않다.

지금은 달빛 아래를 걷고 싶다. 지하로 내려가고 싶진 않아.

마트 쪽으로 가볼까?

목적지가 정해졌지만 뭐 급한 것도 아니니 느긋하게 걸었다.

아무도 없는 거리.

집집마다 불은 켜있다.

세상이 망했지만, 물도 전기도 중지되지 않고 잘 돌아가는 통에 세상은 아직 환하다.

가로등도 네온사인도 해가 지면 그대로 켜지는 아이러니한 세상.

전기와 물은 왜 살려놨을까? 석기시대로 돌아가서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는 건가?

인기척이 없는 거리는 을씨년스럽다.

인간이 없어진 인간의 거주지는 생각보다 빠르게 낡아간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담벼락 근처에 뭔가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봉지와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

샴푸, 칫솔, 스타킹, 손톱깎이…. 뭐야 이건 어디 마트 생활코너라도 털어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게 대체 여기 왜 있지? 누가 여기에 이런 것을 놔뒀을까….

머리에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누군가 여기에 두고 간 게 아니다.

가지고 가다가 여기에 놓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들고 가던 이가 죽어서 사라지면 놓고 갈 수밖에 없는 거지.

머릿속에서 상황을 재연해보았다.

누군가가 이런 물건을 들고 가다가 공격을 받고 담벼락에 기댔고 들고 있던 봉지는 바닥에 떨어져 물건이 나뒹군다.

공격은 받은 이는 그 상태에서 죽고 사라져버린다.

공격한 이가 유유히 다가와 코인을 가져가고 떨어진 물건엔 관심도 두지 않고 떠난다….

그럴듯한 추리.

가장 큰 문제는 봉지가 너무 깨끗하다는 거다.

떨어진 물건들에도 먼지 하나 쌓이지 않았고, 비 맞거나 한 흔적도 없다.

떨어진 지 얼마 안 됐다는 이야기.

위기감이 느껴진 나는 일단 그늘로 몸을 숨겼고 조용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고요한 주변.

누군가 나를 지켜봤었으면 이미 몇 번은 공격했을 것이라 생각한 나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찾아봤다.

5층짜리 빌라 옥상에 물탱크가 있는 게 보였고 그쪽으로 빠르게 올라가 봤다.

다행히 열려있는 옥상 문.

높은 곳으로 올라오는 것은 퇴로를 막는 짓이라 쉽게 하면 안 되는 짓이지만, 내 능력을 생각하면 차라리 이게 낫다.

어쨌든 세 명 이하의 적이라면 시야만 확보되는 순간 내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뭔가 움직이는 게 있는지 살펴보았다.

야간 투시경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근처에는 전부 주택단지라 집밖에 없다.

유일하게 시야가 트인 곳은 학교. 체육관 같은 건물에 고등학교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런 고등학교 쪽으로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거리가 약간 있는 데다가 밤이라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정확하게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이 확실했다.

다급하게 뛰어가는 사람.

그리고 얼마 뒤에 그 사람을 쫓아가는 또 다른 사람.

뒷골이 쫙하고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쫓아가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저 쫓아가는 이는 쫓는 이와 잠시 대화만 하려고 저렇게 쫓는 것은 아닐 테지.

게다가 방금 보고 온 샴푸 등의 흔적이 생각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걸 어쩐다….

쓸데없이 남의 일에 끼고 싶진 않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최근 두 달 정도를 무미건조하게 살아서 그런가? 나도 잘 모르겠다.

엮이지 않는 게 가장 좋은 일인 것을 알면서도 어느새 빌라를 내려가 학교 쪽으로 향하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씨발.

뭘 깊게 생각하고 사냐. 그냥 하고 싶은 데로 사는 거지.

밤의 학교는 음산하고 오묘한 공포가 깃들어 있다.

불이 켜있음에도 불구하고 꺼려지는 감각, 학교를 다녀본 이라면 누구나 그런 기분이 들 테지.

쫓기던 이와 쫓던 이가 사라진 쪽으로 조심히 발걸음을 옮긴다.

최대한 몸을 숨기며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천천히 이동한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멀리서 비명소리가 건물벽에 울리는 소리가 났다.

여자의 비명인데.

학교 뒤편, 벽돌로 바닥이 되어있는 길을 걸어가 커다란 에어컨 냉각기 뒤에 숨었다.

윙윙거리는 에어컨 냉각기의 커다란 소리 때문에 소리가 잘 안 들렸지만, 그만큼 내가 숨기도 좋다.

한 남자가 서 있고, 한 남자아이가 바닥에 쓰러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쓰러져있는 남자아이를 흔들며 남자를 노려보는 여자아이 하나.

남자가 손을 뻗자 채찍 같은 게 나와서 여자아이 쪽을 내리친다.

그 기세가 흉흉해 당장이라도 여자아이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은 모습.

하지만 여자아이의 주변에 희뿌연 방어막이 생겨서 채찍을 막았다.

뭐야. 쟤도 방어막인가? 여자들은 참 방어막 좋아하네.

방어막은 제법 튼튼한지 채찍 남의 채찍을 계속해서 막아냈다.

한참 공격하던 채찍 남은 채찍으로는 안 되겠는지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손이고 발이고 그 어떤 것도 여자의 방어막을 어쩌진 못하는 게 보인다.

생각보다 튼튼하잖아? 방어막도 의외로 괜찮을 것 같네. 방어로만 본다면.

문제는 쓸모가 없다는 거지만.

여자는 보호막으로 보호받고 있긴 하지만 그리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초조해하는 모습, 아마도 그건 옆에 쓰러져있는 남자 때문이지 싶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방어막만 펼쳐놓고 우왕좌왕하는 여자.

그리고 채찍 남은 그런 여자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보호막의 최단점증에 하나.

결국은 지지 않는다는 거지 이길 수 있는 스킬이 아니다.

여자의 표정이 점점 혼란스러워 지는 게 보였다.

옆에 쓰러져 있던 남자아이가 입에서 피를 쿨럭 하는 것도 보였다.

보호막을 펼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남자아이를 살려보고 싶지만, 눈앞에 서 있는 채찍 남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는 여자.

결국, 남자아이의 머리가 옆으로 툭 쓰러지더니 사라져버렸다.

"정우야!!!!!!"

여자아이의 날카로운 비명.

남자아이가 죽고 그자리에 생긴 금색 주머니가 여자아이에게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채찍남을 바라보는 여자.

그리고 그런 여자의 앞에 아예 대놓고 앉아버린 채찍 남.

보호막은 얼마나 오래 쓸 수 있지? 지속시간이 있을 텐데? 연달아서 쓸 수 있나? 잘 모르겠다.

어쨌든 여자의 표정만 봐도 지금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알것같다.

방법이 있었다면 이미 했겠지, 이렇게 몇 분 동안이나 서로 눈싸움을 하고 있진 않았을 테지.

나는 채찍 남을 재웠다.

갑자기 채찍 남이 옆으로 픽 하고 쓰러지자 깜짝 놀라는 여자.

실외기 뒤에서 일어나 여자의 앞으로 나아가자 또 다른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란다.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주변에 있는 벽돌 하나를 주워 여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검은색 긴 머리, 앳된 얼굴, 헐렁한 체육복.

나름 이쁘장한 얼굴이다. 제대로 화장만 하면 더 이뻐지겠네.

나이는 아무리 봐도 스물이 안되어 보인다.

입고 있는 체육복이 학교 체육복이란 걸 감안한다면 고등학생, 혹은 이제 갓 스물.

새로 나타난 나를 잔뜩 경계하는 여자에게 다가가 보호막 앞에 벽돌을 툭 하고 내려놨다.

"복수할래?"

내 질문에 무슨 소리인지 몰라 당황해 하는 여자.

"이놈이 네 친구를 죽인 거 아냐?"

그제야 여자의 눈동자에 불꽃이 튄다.

"그걸로 이놈의 머리를 내리치면 바로 복수할 수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냐."

이 여자아이의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갑자기 나타나 달콤한 유혹을 하는 악마처럼 보일까?

하지만 여자아이는 망설이고 있다.

사람을 죽이기 싫은 건가? 아니면 나를 경계하는 건가?

"내가 껄끄럽다면 나는 가줄게. 대신 이놈은 꼭 죽여야 해. 얼마 뒤면 깨어날 테니까. 어설프게 도망가거나 이 자리를 피하려 하면 안 된다? 다음엔 나같이 도와주는 사람이 없을지도 몰라. 죽여도 시체나 피 같은 건 남지 않아. 네 옆에 있던 남자아이 봤지? 그냥 그렇게 사라지고 마는 거야.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꼭 내려쳐야 해. 한 번에 머리를 부순다는 느낌으로. 알겠지?"

망설이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나는 왠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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