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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4화 (1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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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일

다른 불면증 환자들도 나 같은지는 모르지만, 나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불면증에 고통받았었다.

세상이 망하기 전에는 이 빌어먹을 불면증 때문에 일상생활이 상당히 힘들었을 정도였으니까.

다른 누구에게 이야기해봐야 제대로 된 공감을 받기 힘들었다.

'잠이 안 와? 운동을 해봐.'

'하루를 열심히 안 살았나 보지.'

'잘 때 스마트폰을 하지 마.'

이딴 개소리들만 나불거리는 놈들이 태반이었기에 생각 없이 그런 소리를 삑삑 해대는 놈들은 그 이후로 말도 섞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이 망하고 스킬을 고르라는 그 병신같은 창이 눈앞에 떴을 때, 나는 그 안에서 구원을 찾았다.

수면 스킬.

보기만 해도 설렜던 글자다.

재운다고? 원할 때 재울 수 있다고? 그거…. 자신도 가능한 거지?

다른 수많은 스킬들이 있었지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주저 없이 수면 스킬을 골랐다.

이거, 진짜 써지는 거 맞겠지? 나도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거지?

"수면."

망설임 없이 나 자신에게 스킬을 썼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안한 기운이 배꼽 밑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설마, 이런 판타지 같은 스킬로도 못 자는 거야?

"수면! 수면! 수면!"

연달아 썼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의심과 절망이 서서히 나를 사로잡는다.

잠도 못 자고 스킬도 이상한 걸 고르게 된 나는 망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거 제대로 쓰고 있는 거야? 혼자 헛짓거리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스킬에 대한 정보를 보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현실에 이런 짓을 해놓은 놈들은 대체 뭘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걸까?

그리고 이런 짓을 할 정도면 신이나 전지전능한 존재일 텐데, 왜 이딴 식으로 불편하고 불친절하게 만들어 놓은 걸까?

"스테이터스! 상태창! 개인화면! 목록! 개인정보!"

있을 법한 명령어를 아무리 외쳐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씨발. 매번 게임 같은 거 하면서 튜토리얼 좇같이 만드는 놈들을 그렇게나 혐오했는데, 이 짓을 한 놈들은 왜 그런 좇같은 튜토리얼도 하나 안 만들어 놓은 거야? 아니면 메뉴얼이라도 볼 수 있게 하던가.

"설정 창! 설정! 옵션! 설정 변경! 옵션 창! 메뉴! 환경 설정! 야이 씨발!"

옵션 창 같은 거라도 뜨면 단축키 확인이나 설정 창이라도 있을 테니 거기서 확인하려는데 그런 것도 안 뜬다.

"스킬!"

깜짝이야.

내 눈앞에 무언가가 떴다.

씨발 내가 병신이었네. 스킬 정보를 보고 싶으면 스킬 창을 열어야지, 엉뚱한 걸 시도하고 있었어.

문제는 스킬 창이 열렸어도 뭐 나와 있는 게 없었다.

스킬 이름과 숙련도만 딸랑 쓰여 있을 뿐 설명이나 그 어떤 정보도 없다.

하. 진짜로 이거 만든 새끼 얼굴 좀 보고 싶네.

죽으면 이거 만든 놈 볼 수 있을까? 내가 죽게 되면 잊지 않고 꼭 이거 만든 놈 꼭 보러 간다.

스킬 창에서 유일하게 알 수 있는 정보는 숙련도.

숙련도가 0.4로 되어있는 거 보면 스킬 사용은 됐다는 말이다.

그래, 스킬이 안 나가는 건 아니라는 소리잖아? 단지 숙련이 낮아서 실패했을 뿐인 거지?

나는 다시 자리를 잡고 누워 스킬을 사용했다.

"수면. 수면. 수면. 수면. 수면. 수면. 수면. 수면."

숙련도는 오른다.

이러면 둘 중 하나지, 내 스킬이 밥 버러지만도 못한 쓰레기 같은 성공확률을 가지고 있거나 내 불면증이 그만큼 지독하다는 것.

계속 스킬을 쓰려니 다른 궁금증이 들었다.

스킬 발동은 어떻게 되지? 수면이라고 말해야만 발동이 되나?

"자라."

숙련도가 올랐다.

좋아 이게 더 빠르게 말할 수 있겠어.

"자라. 자라. 자라. 자라. 자라. 자라. 자라. 자라. 자라."

몇 번을 그렇게 스킬을 쓰다가 어느 순간 나는 잠이 들어버렸다.

잠에서 깬 나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저녁이다.

몇 시간을 잔 거지? 지하상가에서 나온 무리를 습격하고 난 뒤 집에 들어와 바로 잤으니까, 거의 열 몇 시간은 잤네.

그대로 일어나 벙커의 상황을 확인해본다.

민지가 있는 방의 자물쇠가 멀쩡한지부터 확인한 나는 방문에 나 있는 창 가리개를 열었다.

우두커니 앉아있는 민지.

살아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창을 다시 가렸다.

오늘은 저년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지.

늘 하던 대로 컵라면을 하나 챙겨 물을 붓고 모니터 룸으로 간다.

모니터를 확인하며 아무 일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컵라면 국물까지 싹싹 마셨다.

"후우."

드디어 예지를 만나러 가는 날.

왜 이렇게 설레하는지 모르겠다.

아니지, 설레는 게 맞지. 그 쌔끈한 몸뚱이를 안을 수 있는데 설레지 않을 수가 없지.

바로 옷을 벗고 목욕을 한다.

몸 구석구석을 깨끗이 닦고 있는 내가 웃기지만, 웃기면 웃는 거지 뭐.

씻고 말리고 옷을 입고 준비를 하고 벙커 바깥으로 나오는 일련의 행동에서 서두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당연하지, 예지를 생각하면 벌써 좇이 불끈거리는걸.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지나 오피스텔을 향해 나아간다.

두근거리는 마음, 설레는 마음. 마치 소풍 가는 아이의 모습.

그렇게 발걸음을 서두르는데 앞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 골목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앞쪽을 바라본다.

남자 넷,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면서 오느라 나를 눈치 못 챘다.

무리 지어 다니는 놈들은 왜 주변 경계를 잘 안 하는 걸까?

왜 남자들은 무리 지어 있으면 쓸데없이 용감해 지는 걸까?

이대로 있으면 저들이 나를 눈치채지는 못할 것 같은데 확신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숨죽이며 눈치채지 못하기를 기도할까?

아니다.

예전 같았으면 불필요한 접촉이나 충돌을 자제했기에 그렇게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남자 넷이면 무조건 피해야 할 대상이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들이 내게 가장 가까워진 순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를 제외한 나머지 셋을 바로 재우고 잠들지 않은 남자에게 조용히 달려갔다.

"야!? 뭐야!?

갑자기 자신의 일행이 모두 쓰러지자 깜짝 놀라는 남자의 목을 노리고 마체테를 휘둘렀다.

나이 많은 남자의 특징은 위기상황이 오면 반사적으로 자신의 스킬을 쓰는 게 아니라 자신이 가장 익숙한 방어를 한다는 거다.

뒤늦게 나의 마체테를 발견한 남자는 팔을 들어 마체테를 막았지만, 목이 반쯤 파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쓰러지는 남자가 나를 보고 뭐라고 중얼거리자 남자의 손가락 끝에서 레이저 같은 게 나와 내 쪽으로 쏘아졌다.

다행히 조준이 형편없어서 나를 맞추지는 못했지만, 속으로는 엄청 놀랐다.

뒤져가면서도 반격을 한다고? 그리고 저 스킬은 뭐야? 저런 스킬도 있어?

진짜 어떤 새끼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창의성은 인정해줘야겠다.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마지막 발악을 한 남자는 목에서 피를 콸콸 흘리다가 그대로 사라졌다.

흘러내린 피까지 사라져 버리는 신기한 현상.

그래, 이러니까 죄다 사람 죽이는 게 거리낌이 없어졌지.

[6,112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그렇게 쓰러진 남자의 코인을 획득하고 남은 남자들도 사이좋게 먼저 간 남자의 곁으로 보내줬다.

[605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594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819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뭐지 씨발? 먼저 죽은 남자 따까리들이야?

정말 오랜만에 보는 세 자리 숫자 코인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이미 전부 사라져버려서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남자 놈들은 내 관심사가 아니니까.

나만 이렇게 사람들을 쳐 죽이고 다니는 게 아닐 텐데 아직도 사람들이 제법 보이는 거 보면 생각보다 사람들의 공격성이 낮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런 경향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남미나 중국 같은 곳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진다.

치안 안 좋고 사람 해치는 것에 거리낌 없는 나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상이 이 꼬라지가 되어서 확인할 방법이 없네.

어쨌든 약간 무모하긴 했지만 네 명을 상대로 이기니 기분이 좋아졌다.

밑도 끝도 없이 생기는 자신감이 나를 취하게 만든다.

보통 이러다가 한순간에 골로가던데.

조심해야지. 조심조심.

오피스텔의 지하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계단으로 올라갔다.

예지의 방과 가까워질수록 두근거리는 심장.

오늘따라 계단을 올라가는 길이 길고 가파르다는 생각이 든다.

예지의 집이 있는 층에 가까워지자 뭔가가 쾅쾅거리는 소리가 났다.

신경 쓰지 않고 가려 하는데 그 소리는 예지가 있는 층에서 나는 소리였다.

거울을 꺼내 복도를 살펴보니 세 명의 남자가 어떤 집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그걸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씨발? 저긴 예지네 집이잖아?

"야! 없어!? 진짜 없어?"

"거봐. 그년 지금 안 보인지 꽤 됐다니까?"

"아 썅. 왜 없냐고! 이러면 씨발 우리 맥주는 어디서 구하냔 말야!"

"존나 아깝네. 그년 빨통도 죽여줬는데."

"뭐야. 너 그년이랑 했어?"

"썅놈아. 빨통이 죽여준다고. 누가 했데? 했으면 빨통 칭찬을 했겠냐? 떡감 미쳤다 그랬겠지?"

"하긴, 씨발 그년이 니놈 새끼랑 해줄리가 있냐. 킥킥."

"뭐 씨발놈아? 뒤질래?"

"아이고. 니가? 나를?"

"이 씹새끼가 은근히 사람을 디스하네? 하지 마라? 엉?"

"아휴. 예. 예. 그러세요. 예. 예."

사이가 좋은 것인지 싸우기 직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전자인 거 같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문을 두드리던 남자들.

일단 예지가 노출된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딴 새끼들이 계속 예지 집 문을 두드리면 안에 있는 예지가 무서워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와, 이거 뭐 누가 보면 내가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네.

암튼 저 새끼들은 둬봐야 이득 될 게 없어 보인다.

나도 누구보다 천박하고 소시오패스 같은 짓을 하고 다니긴 하지만, 천박하고 질 안 좋은 놈들을 보는 것은 맘에 안 든다.

마침 세 명이니 고민할 것 없이 그대로 재워버렸다.

문 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들 앞으로 걸어간 나는 발끝으로 문을 두드리던 남자의 볼을 툭툭 찼다.

"병신 같은 놈들."

마체테를 휘둘러 그대로 셋 다 그어버렸다.

햐. 오늘만 해도 대한민국의 인구를 일곱명이나 줄여버렸네.

[3.131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2.024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3.201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코인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다른 사람을 죽였을 때만 얻을 수 있다.

처음 상점을 열었을 때 기본적으로 주어졌던 코인은 500코인이었다.

결국, 코인이 500 이상 있다는 것은 어찌 되었든 사람들을 쳐 죽이고 다니는 새끼들이라는 것.

죽어도 할 말 없지.

그런 식으로 스스로 자기합리화를 하는 나를 스스로 돌아보며 웃긴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갈 데까지 가놓고 인제 와서 무슨.

이제 예지를 만날 모든 준비가 다 끝낸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노크를 했다.

똑 똑 똑 똑 똑

잠깐의 정적, 그리고는 거칠게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

벌컥

문이 열리고 예지가 보였고, 울고 있었는지 빨간 눈가 볼의 눈물 자국이 보인다.

그런 예지는 나인 것을 확인하더니 그대로 와락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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