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0화 (10/703)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거래

세상이 망하고 난 후 해가 떠 있는 시간은 위험한 시간이 됐다.

사람들이 법과 도덕으로 포장하고 있던 폭력성은 자신을 가리고 있던 것들이 사라지자 마음껏 본성을 드러냈고, 그러한 흉포함은 대낮의 태양으로는 가릴 수 없게 됐다.

오히려 폭력성을 키워주는 기폭제가 됐다고 할까?

사람에게 사람은 그저 코인 지갑일 뿐이다.

게임에서 나오는 몬스터와 다름이 없다.

그저 죽이면 돈이 나오는 몬스터.

평소에 원한을 샀던 이웃은 죽인 지 오래고 일면식 하나 없는 사람은 좋은 먹잇감이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도 한방만 제대로 내리치면 더는 볼일이 없어진다.

가족? 평소에 애틋했던 가족이라면 어찌어찌 힘을 합쳐 살아가겠지.

가족의 정이란 생각보다 강하니까.

하지만 오히려 세상이 망한 것을 새 출발의 기회로 삼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런 망해버린 세상에서 해가 있는 동안은 움직이기 불편한 시간이다.

어디선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불쾌한 일이니까.

총이 없는 한국이지만, 스킬은 있다.

원거리에서 사람을 순식간에 죽일 수 있는 스킬들은 무척 많았다.

내가 본 것만 해도 수십, 수백 가지는 넘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인적이 드문 골목 위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연주와의 만남은 나에게 많은 것을 불어 넣어주었다.

병신 졸보 새끼인 나를 그나마 사람처럼 만들어준 여자.

그녀가 창녀라고? 아니다. 나에겐 그 누구보다 고귀하고 사랑스러운 여자다.

다시 그녀를 볼 수 있을까? 부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 보고 그녀의 웃음을 보고 그녀와 섹스하고 싶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가면 안을 수 있을 텐데...아니, 안을 수 있을까? 그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까?

모르겠다.

그녀는 나보다 어리지만 나보다 똑똑하고 현명하며 어른스러웠다.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발 이 병신 같은 세상에서 아무 탈 없이 살아남아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다 보니 오피스텔이 보였다.

김예지, 연예인 뺨치는 여자.

그녀에게 확인할 것이 있다.

일단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오피스텔까지는 왔고 조용히 계단을 올라가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 방 안에 있을까? 밖에 나갔을까?

잡생각이 많아져 머리가 혼란스럽지만, 발걸음은 꿋꿋하게 예지가 있는 방으로 향한다.

드디어 도착한 층,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그녀의 집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내가 붙여놓은 청테이프 조각을 확인하기 위해 조용히 복도를 걸어가 확인했다.

있다. 붙어있다.

믿기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이 여자는 내 말을 듣고 지난 일주일 동안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벨을 누르려다가 손이 멈췄다.

그런데…. 내가 누군지 모르잖아? 벨을 누른다고 그녀가 내가 그때의 나란걸 알려줄 수 없잖아?

멍청한 새끼. 이런 걸 생각을 안 해놨네.

한참을 문 앞에서 고민하다가 결국은 벨을 눌렀다. 에라 될 대로 되라지.

창녀 연주는 내게 많은 것을 알려줬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 그것이야말로 그녀에게 배운 것 중 가장 좋은 것이다.

쫄보 병신새끼인 나는 누구에게도 흠이 잡힐 짓을 하지 않기 위해 많은 것을 조심스럽게 굴었고 쓸데없이 완벽함을 추구하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쫄보 짓도 적당하게 해야겠지.

벨을 눌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게 불안했지만, 내가 그러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반응이 없는 게 정상인 건데…. 그렇다면 어떻게 문을 열게 할 것인가.

쿵쿵

"김예지. '우리'다."

이걸로 그녀가 나올까? 그때의 나라는 걸 알까?

철컥 철컥

잠금장치를 여는 소리가 들리자 내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병신같은 말이 통하다니, 정말 다행이네.

끼익

문이 완전히 열리진 않았다. 문에 달린 보조 잠금장치 때분에 한 뼘만 열렸다.

조금 수척해졌나? 불안한 표정을 한 예지의 모습이 보인다.

"약속을 잘 지켰으니 보상을 해주러 왔다."

문이 닫히고 보조 잠금장치가 젖혀지는 소리가 났다.

다시 문이 열리고 예지는 그대로 방 안쪽으로 들어가 돌아섰다.

나를 보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

그녀는 이제야 나를 처음 봤다.

검은 정장이라도 입고 단체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남자들을 생각했을까?

면티에 청바지를 입고 작은 배낭과 마체테를 차고 다니는 남자를 보고 실망했을까?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잠갔다.

흰색 면티에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있는 예지는 나의 행동을 바라보며 두려운 표정을 지었고 그 두려움에는 의문도 섞여 있었다.

내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예지는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았고, 자신이 침대에 앉았다는 것을 깨닫자 나를 흘낏 바라본다.

"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내 말에 안도하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안감을 모두 지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반응이 부드러워진 게 느껴진다.

나는 방 가운데까지 가서 그대로 앉아 바로 말을 했다.

"먼저 사과할게, 내가 마음대로 굴었던 것에 대해서."

갑자기 바뀐 나의 말투에 예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너를 찾아온 남자 넷을 죽였고 너를 강간했고 네게 거짓말을 했으며 네게 일주일 동안이나 이상한 것을 시켰어."

뜻밖의 내 고해에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너에게 용서를 바라고 하는 말은 아냐. 그냥 내가 편해지고 싶어서 하는 말이지. 네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던 건 다 잊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살아. 대신 약속을 지킨 것에 대해서는 보상을 할게."

그렇게 말하고 나는 상점을 켜서 눈에 보이는 대로 음식을 눌렀다.

쌀, 통조림, 라면, 과자…. 이 미친 상점은 음식에 관해서는 오만 잡것들이 다 있었기에 한참을 눌러 잔뜩 구매했다.

내 앞에 수북이 쌓인 음식들.

그렇게 내 할 말만 다 하고 음식까지 잔뜩 쌓아둔 나는 그대로 일어섰다.

"저기."

방을 나서려는데 예지가 나를 불렀다.

"모자라?"

내 말에 예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거짓말을 한 게 뭐예요?"

의외로 또랑또랑한 목소리, 그녀에게서 두려움이 많이 가신 것이 느껴진다.

"우리라고 했던 거. 우리 따위는 없어. 나 혼자야."

"그거 말고 없어요?"

"죽인다고 했던 거? 솔직히 너는 별로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내 말을 다 들은 예지는 잠시 주저하더니 다시 말한다.

"그거…. 계속하면 안 돼요?"

"뭘?"

"제가 안 나가면 음식 주는 거요."

"엥?"

나는 저 여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쪽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그게 좋은데요."

"밖에 안 나가면 음식을 주는 게?"

"네."

"내가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는 알고?"

"나랑 섹스하려고 한 거 아니에요?"

하. 나는 기가 막혀서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 미쳐버린 세상에 살아남은 사람은 미쳐버린 사람이지.

김예지 저 여자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정상은 아닐 것이다. 아니, 정상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이 세상은 더 미쳤고, 그것엔 미친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과 만나지도 않아도 되며 주기적으로 음식을 주기만 하면 되고 섹스하는 것도 상관이 없다?"

"네."

에라이 병신같은 성철아. 왜 민지 같은 년을 조교 하려고 했던 거니? 이런 여자가 있는데?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입 다물고 있을 수는 없기에 예지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게 좋을 수 있지?"

"섹스한다고 죽지는 않잖아요. 임신할 리도 없고. 성병걸린 놈들은 다 죽었거나 포션으로 치료했을 테고. 근데 음식을 구하러 나가는 건 죽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그쪽은 나를 죽일 생각이 없는 거 같으니까."

예지의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특히나 예지 저 여자 같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스킬을 가지고 있다면 문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고 공포일 수 있으니까.

제 딴에는 음식을 구하려는 방법으로 캔맥주를 교환할 생각에 그런 스킬을 골랐을 테지만 교환이란 것은 결국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때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차라리 나 같은 놈이 정기적으로 음식을 구해준다면 그게 오히려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계속하자?"

"그쪽이 먹버만 안 한다면."

"나를 믿는 거야?"

"아뇨. 이건 거래에요."

"거래? 거래는 믿음이 생명인데?"

"이건 직거래잖아요? 눈앞에서 사기 치게요?"

나는 이 여자의 사고방식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똑똑한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정말 캔맥주 같은 스킬을 골랐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제정신이 아니거나 머리 어디가 맛이 간 게 분명해.

"미치겠네. 진짜 그게 좋다고?"

"그쪽이 여러 명이었다면 솔직히 내키진 않았을 테지만, 혼자라면서요. 게다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도 했고. 생각보다 잘생겼고. 당신 혹시 좋은 사람 아니에요?"

"좋은 사람이 강간해? 너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진 알아?"

"알아요. 안에다 그렇게 싸고 가 놓고 모를 리가 없죠."

"근데 무슨 좋은 사람이야?"

"몰랐어요? 지금 세상에선 안 죽이면 좋은 사람인 거?"

예지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정말, 말세다. 나도 세상이 이 꼴이 난 뒤로 막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무래도 이 막가는 세상의 트랜디에 뒤처졌나 봐.

"하.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이해가."

"그래서, 안 할 거예요?"

그러면서 자신의 츄리닝 바지를 벗는 예지.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면티도 벗는다.

브라에 가려진 D컵의 가슴과 잘록한 허리, 매력적인 골반과 매끈한 다리가 나를 유혹한다.

"너, 제정신 맞지?"

"무슨 상관이에요."

"하. 그래. 세상이 제정신이 아닌데 사람이 제정신인 게 무슨 소용이냐."

당장이라도 예지에게 가서 저 커다란 가슴을 빨고 주무르고 싶다.

그리고 자지를 박으며 신음을 듣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아야 할 것 같았다.

저 여자는 분명히 매력적이지만, 일단 지금은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안 드니까.

지난밤 연주에게 밤새도록 박아댄 덕분이겠지.

예지는…. 그녀가 말하는 거래만 지켜진다면 언제든지 와서 먹을 수 있는 여자가 되는 거다.

그러니 욕심 낼 필요 없지.

"주는 밥상도 못 떠먹는 병신이라고 욕해도 상관없어. 오늘은 아냐. 오늘 너와 섹스를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네 거래는 받아들일게. 일주일. 일주일 뒤에 다시 온다. 그때까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거래는 계속 유지 되는 거야."

예지는 다리를 꼬며 나를 바라봤다.

정말,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매력적인 여자다.

저런 여자와 두고두고 섹스할 수 있다고? 이것 참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네.

"알았어요."

"일주일 뒤 찾아와서 노크 다섯 번을 하면 나인 줄 알아."

"그래요."

그렇게 다리를 꼬고 이제는 두려움이 없어진 예지를 두고 나는 집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지만, 정말 저 여자도 정상은 아냐.

나는 테이프 조각을 다시 문 경첩 옆에 잘 붙이고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