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 주도 패시지
패시지 긴급상황대처 땅신교단임시지휘본부.
줄여서 환인이 임시 지휘소라 부르는 곳은 다른 곳과 다른 의미로 침묵과 충격에 휩싸였다.
《흑흑…….》
『시끄러우니 입 다무시죠.』
《…….》
『절 이딴 더러운 짓에 이용해놓고 혼자 고고한 척하니 기분 좋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고고한 척이라니요…….》
『아끼던 착하고 선한 아이가 죽어 그 슬픔을 드러내면, 그 아이를 죽이는데 이용당한 제 입장과 기분은 어떨지 상상도 해보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긴 그런 판단력이 있다면 30년 넘게 사건을 묵혀 이 사달을 만들어내진 않았을 테지요.』
《읏…….》
환인이 이토록 여휘를 조롱하고 맹비난하는 것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지만, 진짜는 패시지에서 북서쪽으로 천여 킬로미터 지점의 투르시온 가문 대도시에서 보고 있는 것 때문이다.
타르반시올을 죽인 직후 초시공을 펼쳐 분신체 3을 투르시온 권역 도시로 보낸 환인은 그의 짜증을 더욱 북돋는 광경을 목격했다.
글론드 섬 서남쪽 해안가에 자리 잡은 투르시온의 권역 도시는 인구가 족히 수십만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대도시였는데, 그곳에서 대량의 증거 인멸 정황을 포착한 것.
화르르르르—
『…….』
8급 화염의 술법이 펼쳐졌는지 미사일이 떨어진 것처럼 폭발한 정황과 함께 활활 불타고 있는 투르시온 성 인근 숲.
명백히 건축물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 폭심지에 족히 300명에 가까운 영혼이 근처를 멍하니 부유하고 있다.
자신이 왜 죽었는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도 몰라 죽었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의 영혼들.
영혼 감응으로 그들의 기억을 살짝 들여다본 환인은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미국인, 러시아인, 인도인, 영국인, 독일인, 핀란드인, 호주인…… 전원 방랑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매우 화가 났다.
저들의 구출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선정한 우선순위는 투르시온 가문 핵심 인원 확보 및 처단, 천년성의 여휘의 안전 확보에 이번 사건의 주동자, 연루자, 용의자를 찾고 마킹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놓친다면 놈들은 공간 이동 술법진을 써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잠적을 시도하려 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리되면 현 사태가 마무리되긴커녕 더욱 확장되어 자신은 지구에서 투르시온 일파와 다시 싸우게 되었을 것이며 니오네브레스에는 신의 분노가 떨어져 세계가 초기화될 가능성이 대폭 상승하였을 거다.
그 결과, 자신이 타르반시올을 찾고 있을 때 투르시온의 대도시 카타슈트의 귀족과 현장 책임자들은 어처구니없는 책임 모면용 증거 인멸을 시도하였다.
「여긴…… 어디지…?」
「친구들… 내 몸이 이상해….」
「엄마…… 아빠…….」
여러 지구인의 영혼이 모국어로 중얼거리며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바라보던 환인은 주먹을 꾹 쥐었다가 그들 전부를 영혼 구슬로 변화시켜 영혼고에 받아들였다.
만약 지구에도 윤회 환생이 있다면…… 적어도 이들은 지구에서 환생을 하여야 할 테니까.
시야가 바뀌어 우울해하는 여휘의 얼굴을 재인식한 환인은 짜증이 재차 크게 치솟는 걸 느끼고 비아냥거렸다.
『천년성을 지우게 된 이유도 알만한 분이 슬픔을 다스리지 못해 필멸자들 앞에서 찡찡거리는 것도 정상이 아닙니다. 대체 그 커다란 머릿속에 든 뇌로 뭘 하시는 겁니까. 역장과 예지를 펼치는 데 모든 자원을 활용하기라도 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느끼는 괴로움과 슬픔만 중요해 다른 것 따윈 신경도 안 쓰이는 겁니까?』
《죄송해요, 죄송해요…….》
환인이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는 것을 느낀 여휘는 무조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였다.
자신의 예지 능력은 그리 편리한 것이 아니지만, 여휘는 그의 분노가 전부 타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환인은 그녀의 이마를 콱 잡고 무의식적으로 카타슈트에서 본 것을 그녀의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
『진심으로 이 사태에 미안함을 느낀다면, 입 다물고 머리를 숙이고만 있어.』
《……….》
모로 앉은 키가 평범한 사람의 선 키 정도 되는 여휘가 눈물을 짜내는 모습과 그런 여휘를 매몰차게 비난하며 화난 기색을 마구마구 뿌리는 성제…… 아니, 영제.
하늘을 찌르던 검붉은 빛기둥, 그리고 천년성의 소멸이라는 충격에 사도를 크게 질타하는 아신의 모습까지. 연이어 벌어진 정신적 충격에 굳어있던 와이아리 추기경과 르아웬 추기경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자 조금 전 자신들처럼 멍하니 아신과 사도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보인다.
=뭣들 하는가…! 당장 해야 할 일로 돌아가게…!=
=지금 뭘 보고 있는 건가요…!? 물러들 나세요…!=
두 추기경의 소리 죽인 엄포에 화들짝 놀라 아신에게 갈굼당하는 자신들의 사도를 외면하며 하던 일을 재개하는 사람들.
몹시도 어수선하고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엘레델은 두근거리는 심장 탓에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환인에게 다가갔다.
르아웬도 죄지은 여인처럼 그의 곁을 따른다.
=저…… 영제님.=
얼음불처럼 여휘를 노려보던 환인은 주춤거리며 다가온 엘레델을 조금 누그러진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그의 분신체 3이 보는 시야로 카타슈트 곳곳에서 신식 혼령주의 빛기둥이 두두두둥— 치솟는다.
혼령주의 범위에 들어선 모든 인간이 넋을 놓거나 혼절해 쓰러지는 것을 인식하며 환인은 엘레델과 르아웬에게 말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르아웬 추기경에게도 부탁드릴 일이 있었는데 같이 오셨군요.』
=예, 예.=
그가 가져온 커다란 옷가지, 몸에 걸치는 망토를 본 환인은 말없이 그걸 받아 여휘에게 집어던졌다.
《…….》
주섬주섬 망토를 둘러 알몸을 가리며 훌쩍이는 여휘의 모습에 생각이 멈췄던 엘레델은 퍼뜩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혹시 카타슈트와 관련된 시키실 일이십니까?=
『……투르시온 성의 인간들이 증거 인멸을 시도했습니다. 소환소는 대파되었고 강제 소환된 차원 방랑자는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
=그런…….=
『김철수와 김영수가 패시지의 차원 방랑자를 찾아 확보하고 있습니다. 형님께는 그들과 카타슈트의 생존자를 받아들여 잠시 보호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씀대로 별관을 마련하여 그분들을 성심성의껏 보호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르아웬 추기경은…….』
환인이 뭘 원하는지 빠르게 눈치챈 르아웬이 나서서 말했다.
=즉시 카타슈트 교단 지부에 연락을 넣어 병력을 동원하여 카타슈트의 귀족을 체포하겠습니다. 물론 다른 세 교단과 연합하여 안 좋은 이야기가 절대 나오지 않도록 조치도 함께 진행합니다.=
『……그 외에도 해주실 일이 있습니다. 물신, 짐승신, 하늘신 교단의 추기경분들도 도착하여 지휘소에 계신 듯한데 모두를 불러주시겠습니까.』
=즉시 이행하겠습니다.=
환인이 어째서 여휘에게 그토록 분노했는지 이유를 알게 된 르아웬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척, 경례를 올리고 즉시 어디론가 뛰어갔다.
환인은 무감정한 시선으로 훌쩍이는 여휘를 보다 임시 회의실로 가 빙의 당해 육체 제어권을 상실한 타비아누스와 볼레보스, 유제트를 응시했다.
『…….』
「…환인.」
『더 폭넓은 시야로 대국적인 계획을 세웠어야 했는데…… 차원 방랑자들이 죽은 건 내 실수가 초래한 참극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아?」
그가 신이 되고 막 한두 달 지나서 적응한 상태였다면 몰라도, 환인이 세례를 받아 아신이 되고 나서 한숨도 안 자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정보가 홍수처럼 흘러넘쳐 정리하지 못하여 더 큰 실수를 저지르고도 남았겠지.
「아니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을 걸? 거기다 여휘한테 이용당한 시점에서 짜증 부리면서 다 때려치웠을 거야」
환연이 창문 밖으로 김철수와 김영수가 파바박, 사람들을 구출해오는 걸 보며 말한다.
비유는 아마 저들을 두고 한 거겠지.
『…….』
환연의 위로에 환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주범 셋을 끌고 임시 회의실을 나왔다.
마침 문 앞에 르아웬의 호출에 4대 교단의 추기경들이 모여있었고, 그들의 긴장된 모습을 본 환인은 영적 신성의 신격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
=……!=
=으, 으음……!=
그의 몸을 중심으로 주변이 왜곡되어 일렁이는듯한 위광이 펼쳐지자 추기경들은 경외를 담은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어 환인에게 예를 올린다.
르아웬은…… 카타슈트의 교단과 연락 중인가.
『여러분들은 저와 함께 가주실 곳이 있습니다.』
낮게 울려 퍼지는 신언에 추기경들은 한 마디 의문도 내지 못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임시 지휘소 인근 광장을 차출해 만든 대기소.
그곳에는 메리아놀의 일곱 왕가 중 미리아스툼과 드로거스 왕가를 제외한 투르시온의 일부 생존자, 포르미살드, 알세이시스, 옴바드, 알콰닌의 왕족들이 모여있었다.
=대체 우리를 이렇게 대우하는 법이 어디 있답니까! 아무리 땅신 교단이 그분을 추종하며 뜻을 퍼트린다 하여도 우리 역시 그분께 기도를 바치며 뜻을 받들어 섬기는 이들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마치 범죄자처럼 강제로 연행해와 이런 길바닥에서 방치하다니, 교단에 엄중한 항의를 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길바닥이라지만 주도 패시지에서 시민들의 쉼터로 쓰는 광장이다.
현대의 화원이나 동산, 식물원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장소라는 이야기.
그곳에 모인 백수십 명의 왕실 직계들은 적잖은 귀족적인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불만이 향하는 방향은 땅신 교단 뿐, 그 누구도 환인의 이름 한 글자 입에 담지 않았다.
그들도 지금 흘러가는 상황이 자신들에게 극히 좋지 못함을 알고 있으며, 아신이 선보인 기적에 적잖이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던 것이다.
특히 천년성과 신목이 사라지고 성제의 엄포가 흘러나왔을 때 일부는 하반신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까지 했었다.
=이럴 게 아니라 각 가문에서 대표로 한 분씩 나와 교단 본단으로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교황께 불만족스러운 이 처사를 진언하면…….=
=진언해서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천렵의 알콰닌 왕가 소속 프라우드 왕족의 선동에 지모의 옴바드 왕족이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딴지를 걸었다.
=땅신 교단은 이미 성제…… 아니, 영혼사로써 신위에 도달하셨으니 영제시겠군. 영제님의 지시에 따르고 있는 것일 텐데, 영제님께 항의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러면 이대로 계속 범죄자처럼 취급받겠다는 거요!=
버럭 소리 지르는 알콰닌 왕족의 고성에 옴바드의 왕족 프라우드는 콧방귀를 꼈다.
=범죄자 맞지 않습니까? 여기서 유제트 그 인간의 꾀임에 안 넘어간 분 있으면 손 좀 들어보십쇼.=
=…….=
=…….=
다들 곁눈질하는 모습에 옴바드 왕족이 비웃는다.
=지금 보이는 면면을 보면 딱 각이 나오지 않습니까?=
=무, 무슨 각이란 말씀인가요……?=
포르미살드의 여자 플뢰 왕족이 불안해하며 묻는 말에 옴바드 왕족은 순진하시구먼, 하고 흐 웃으며 대꾸했다.
=미리아스툼 가문은 한 명도 없습니다. 드로거스 가문도 한 명 없군요. 알세이시스는 몇 분 계시긴 한데 크샤나리 님과 더불어 그분 계파는 안 계십니다. 대충 각 나오죠?=
옴바드 왕족의 이야기에 다른 왕족들도 그제야 눈치채고 몸을 떨었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크든 작든 결명회와 연관된 인간들이다. 그 말은…….
그 순간 왕족들은 숨이 턱 막히는 존재감이 쏟아지는 걸 느끼고 식은땀을 비 오는 것처럼 줄줄 흘렸다.
=이, 이건.=
=윽…….=
이곳에 있는 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사도 여휘의 위광을 경험해보았지만, 일부는 신수의 위광도 경험해봤지만 지금 밀어닥치는 위광은 그런 위광을 아득하게 능가하는 것이었다.
표현하자면 자비 없는 신의 능위.
덜덜 떨면서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린 왕족들은 흡사 죽음이 모습을 갖춘 듯한 존재를 보게 되었다.
=…….=
=…….=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하나둘 무릎을 꿇기 시작한다.
왕족들은 직업자라면 최소 4급. 7급인 자들도 적지 않았으며 최상급 정령과 계약까지 맺은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환인에게 말을 걸기는커녕 똑바로 바라보지조차 못한다.
지금 아신이 저기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간다면 자신들은 길 가다 마차 바퀴에 깔린 개미처럼 의미 없이 짜부라져 죽을 거라고. 신을 섬기는 종족 특유의 본능이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신이 영혼을 진동시키는 입을 열었다.
『여기서 자신은 결명회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람은 일어나십시오.』
예의고 예식이고 없는 단순 명료하며 직선적인 명령.
왕족들은 희미한 불안과 함께 지금 일어난다면 살 수 있다는 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다. 일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몸이 그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걸 거부한다.
『여기서 자신은 결명회가 어떤 일을 했는지 모른다는 사람은 일어나십시오.』
이번에는 모여있는 인원 중 20%가 주춤거리면서 일어났다.
비교적 힘이 약하거나 세가 없는 왕족들. 그들은 환인이 오른쪽을 가리키는 손짓에 토할 것처럼 울렁이는 가슴을 쥐고 그쪽으로 움직인다.
『여기서 자신은 결명회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있지만 협조는 하지 않았다. 일어나십시오.』
80%중 10%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어나 환인이 가리키는 뒤쪽으로 움직인다.
『나머지는 결명회가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으며 협조까지 했다는 거겠지. 항변하겠다면 마지막 발언의 기회를 주겠다. 해봐라.』
=오, 오해이십…….=
『이 쓰레기들과 정령으로 교차 검증까지 한 내게 오해라고.』
죽기 싫어 어떻게든 변명하려던 왕족은 환인의 살기에 목에 칼이 들어온 것처럼 말문이 콱 막혔다.
그제야 아신의 위광에 가려져 있던 세 인간이 보인다.
어째서인지 알몸으로 멍하니 서 있는 타비아누스, 뭔가에 홀린 듯 멍한 표정의 전대 가주 볼레보스와 전전대 가주 유제트.
왕족들은 그제야 목덜미에 겨누어진 사신의 낫을 인지하고 벌떼 같이 아우성치려는 순간.
『네놈들에게는 올바른 죽음조차 자비다.』
죽음의 선고가 떨어졌다.
그의 선언과 동시에 70에 이르는 왕족들의 눈이 동시에 뒤집히며 정수리로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그 상태에 빠진 왕족은 하나도 빠짐없이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푸들거리다 털썩 풀썩 쓰러져 미약한 경련을 일으켰다.
교단의 추기경들은 그것을 목격하자마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거친 숨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저, 저건……!’
오직 영도에서만 내리는 최고 극형.
너무나 비인도적인 극형이기에 이름조차 명명되지 않는 그것은, 살아있는 죄인에게서 영혼을 강제로 뽑아 육신은 숨 쉬는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리고 영혼은 이승과 강제로 결별시켜 나락으로 떠민다는 형이다.
펼치는데 최소 4명의 영성이 필요하기에 영도에서밖에 펼칠 수 없는 극형이며, 마지막으로 펼쳐진 것이 몇백 년 전인데 그걸……!
……아, 저분은 영제이시니까.
마치 지옥도처럼 육신에서 강제로 분리당한 영혼들이 절규를 지르며 허공을 맴도는 것을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보던 추기경들은 환인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와이아리 추기경께서는 저 오른편의 죄인들을 붙잡아 죄상을 낱낱이 밝혀 그에 걸맞은 형벌을 받도록 해주십시오. 건성으로, 귀족의 권리로 죄상을 두루뭉술 넘겨 처벌을 가벼이 하면, 그 대가는 교단이 지게 될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읏…… 예!=
지목받은 와이아리 추기경은 급히 성투사와 성기사들을 소환해 약 20명가량의 왕족을 포박한다.
눈앞에서 영혼들이 울부짖는 광경에 저항할 생각도 못 하고 순순히 올가미에 걸리는 왕족들.
환인은 칠십에 가까운 영혼들의 절규를 응시하다 그자들을 전원 영혼 구슬화하여 회수했다.
그리고 남은 열 명 남짓한 자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결명회의 행보를 알고도 막지 않고 방조한 네놈들 역시 저것들과 똑같이 처분해야 하지만, 최소한의 인간적 양심을 발휘한 점을 참작해 본인의 명예를 지킬 기회를 주겠다. 자진해라.』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선고에 10명 남짓한 자들은 눈물을 왈칵 흘리거나 이를 악물며 후회하거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허망한 눈으로 자신들의 무기를 들었다.
거부하면 자신들도 저렇게 강제로 영혼이 뽑히겠지. 그럴거면 차라리…….
=컥, 으르르륵…….=
=끄으허. 으그어어억……!=
=아…….=
스스로 목을 베거나 심장을 찌르거나 배를 갈라 죽음을 선택하는 왕족들을 향해 성기사들이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젓는다.
=최소한의 인간성은 지켰으니…….=
=쯧. 죽을 짓을 한 놈들이지만 말일세.=
=영제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도 하시지.=
스무 명을 포박하기 위해 차출된 성기사들은 들릴세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넋이 나간 스물가량의 왕족을 묶어 줄줄이 데리고 갔다.
『…….』
산채로 영혼이 뽑히는 것은 어마어마한 불명예 같은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걸 얼마 전에 안 환인이다.
그리고 환인에게 정말 자비로운 마음이 있어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자진을 권한 것이 아니다.
환인에게 있어 죽음이란 다 똑같은 것.
다만 신적인 존재의 위엄과 저들의 사고방식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처벌에 차등을 주는 것이 좋을 거라 판단되었기에 이러한 선고를 내린 것이다.
20명을 수송시킨 와이아리 추기경이 머뭇거리며 환인에게 다가가 조심히 여쭈었다.
=영제이시여. 저… 것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지시를 내려주시옵소서.=
껍질만 남은 육신을 가리키는 말에 환인은 담담히 생각해둔 것을 그대로 지시한다.
『벌거벗겨 배교와 배천의 낙인을 몸뚱이에 찍고 대광장 거리에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달아 놓으십시오. 그 후에도 시체에 파리와 구더기가 끓을 때까지 관리하며 모두의 본보기로 삼을 것을 지시하겠습니다.』
=며, 명에 따르겠사옵니다…….=
『다른 추기경분들도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엘레델 경, 추기경분들과 함께 이리로.』
환인의 호출에 흠칫한 엘레델이 물신, 하늘신, 짐승신 교단의 추기경들과 함께 그의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에게 연인들이 필사한 처벌자들 명단을 나누어주었다.
리지나 호를 타고 요르문센 섬으로 향하는 연인들이 기록 일지를 보고 하나하나 손으로 써서 옮긴 살생부.
『이 목록에 기재된 자들은 결명회가 어떤 집단인지는 몰랐지만 물심양면으로 협조한 인간들입니다. 신을 거스르려 한 죄는 무엇으로도 사할 수 없으니, 메리아놀을 벗어나 타국에까지 그 존재가 흩어져있을 가능성이 큰 만큼 여러분들은 이 자들을 포함, 본국의 귀족이 연루되어있는지 단단히 조사하여 그 죄상을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이해하셨습니까, 하는 얼음장 같은 신언에 엘레델과 추기경들은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온 평생 신은커녕 아신조차 본 적 없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환인의 존재는 신의 위엄을 약간이지만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 어떻게 감히 말을 덧붙이거나 의문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살생부를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고 혹시 떨어트릴세라 긴장하며 몰려가는 추기경들을 보던 환인은 작은 광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옷을 벗기고 하나씩 끌고 가는 승병, 스스로 자진해 목숨이 끊어진 왕족의 시체를 쓰레기처럼 모아 담는 승병, 바닥에 뿌려진 피를 지우는 승병.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정말로 남은 것은 하나 뿐이다.
결명회의 주범 셋을 처분하는 것. 그것마저도 계획을 다 짜놓았으니, 그때까지 약간의 여유가 생긴 환인은 조금 지친 마음에 휴식을 주기 위하여 임시 회의실로 향했…….
「성제니임~! 엘위드리스의 잡것들을 찾았어요오~!」
……향하려다 멀리서 기쁨의 적색 아우라를 줄기줄기 뿌리며 날아오는 이름리아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쉬려면 아직 멀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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