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 주도 패시지
일부러 표층 의식을 읽으라고 생각한 덕에 환인의 힐난은 여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 죄송합니다…….
이건…… 텔레파시 같은 건가. 환인은 여휘에게서 전달된 사죄의 사고에서 그 방식을 감각적으로 이해했다.
어째서 그걸 감각적으로 이해했는지도 이유를 간파했다.
자애신의 세례 같은 것을 받으며 세계의 이치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지식의 결정체로서 자신의 무의식에 새겨졌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이런 텔레파시 같은 것은 한 번 체험하자마자 원리와 용법을 이해하는 거고.
- 대충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당신은 보호와 방어 및 예지를 제외하면 정말 글러 먹은 존재군요.
가차 없이 그녀를 힐난하는 환인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이럴 거라고 예상하였기에 화는 내지 않았다.
미래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개입할 수도 있다지만 물경 30년을 소비해 고작 몇 차례의 간섭으로 지금 이 상황을 간신히 만들어낸 여휘다.
저 성격과 실행력을 보면 타르반시올이 여길 찾아오는 중인 작금의 상황은 그녀가 판단을 내리기에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상태인 거겠지.
환인은 시무룩한 기운을 드러내는 석상 상태의 여휘에게 상황을 물었다.
- 그래서. 당신이 본 미래에서 타르반시올은 왜 당신을 찾는 겁니까. 당신을 죽이고 신의 분노를 초래하여서 저와 패시지를 쓸어버리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당신에게 지금 이 정국을 따져 묻기 위해서입니까.
- 후, 후자인……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어요.
- …….
잠시 생각을 정리한 환인은 타르반시올의 행위에서 타당성을 짚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패시지의 국왕으로 취임한 이후 투르시온 가문의 가주이면서 성제 옹호파로 활동하며 어떻게든 자신과 가문 사이에 가교를 놓으려 했다고 조금 전, 하얀 늑대들에게 들었다.
물론 그전에도 같은 내용의 보고를 엘미느에게 받았었다.
타르반시올은 투르시온의 전대 가주인 볼레보스의 성제 제거파에 맞서 옹호파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다고.
그러니 여휘에게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묻기 위해 오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헤뷜트의 대족장도 벨티칼의 사도와 단독으로 만나는 듯했었다. 그도 명색이 현 국왕이니 여휘와 만날 자격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어째서 그러한 결심과 입장을 지니게 되었는지 환인은 그의 속 내 따위 알 바 아니었다.
이쪽의 진정한 저력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화평 무드를 조성하려 했는지, 아니면 뒤늦게 투르시온의 어둠을 목도하곤 어떻게든 폭주하려는 가문을 멈춰 세우고 투르시온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손을 쓰기 시작하였는지 정말 1g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환인에게 투르시온의 인간이란 출가하여 투르시온과 완전히 연을 끊은 장모, 슈아나데를 제외하곤 전부 죽어야 하는 존재일 뿐.
- …….
-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을 권해드리겠습니다.
- 하지만…….
-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아야 합니다. 술을 빚어 완성 직전에 괴물이 입을 대 버린 술을 사람이 마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 ………….
- 내키지 않는다면, 알겠습니다. 모든 전말을 신께 소상이 알려야겠군요.
- 그것은 아니 됩니다……!
안 되겠지. 신에게 알리면 그 즉시 월드 리셋이 시작될 테니까.
환인은 분노가 살짝 드러나는 어조로 비난했다.
- 저에게 전권을 위임해놓고는 이제 와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 어쩌라는 겁니까.
- 당신이라면 사태를 억누르고 국면을 최소화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전부 죽이는 것밖에…….
=아아……!=
여휘의 석상이 또륵— 눈물 한 방울을 흘리자 그걸 목격한 엘레델이 억누른 탄식을 내뱉는다.
환인은 그런 엘레델에게 현재 타르반시올의 위치를 물었다.
=환령계는 기본적으로 현실의 반면 세계, 이동은 현실의 위치를 따르지만 의지가 얼마나 순수하고 뚜렷하냐에 따라 속도가 차이 나기에 타르반시올 국왕이라면…… 10분 후에 알현의 방에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환연, 넌 숨어있다가 타르반시올이 가까이 오면 바로 물질계로 추방해다오. 김철수와 김영수 너희 둘은 형님과 저 구석에 가 있어라. 혹시 타르반시올이 미쳐 참살검을 휘두를 것 같다면 즉시 도망가도록.”
「응.」
“예, 옙.”
타르반시올을 맞이할 대강의 준비를 끝마친 환인은 재보의 관에서 그럭저럭 평범한 의자 하나를 꺼내 근처 촛대 아래에 놓고 앉았다.
어째서 전부 죽이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느냐고…….
투르시온의 차원 방랑자 연구는 현재 진척 상황만 보면 신이 되기에 아직 부족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의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약간의 자질과 극한의 운이 받쳐준다면 아신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륙의 1/4를 좌지우지하는 왕가라면 아마도 자신이 아신위에 오르는 것보다 더욱 수월히 인조 아신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지.
어째서 미궁의 소원력을 이용하지 않은 건지 이해가 안 가지만, 혹은 계획의 마지막 단계에서 소원력을 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시간을 주면 투르시온이 신위에 오르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라 본다.
그때가 오면 지금 죽어 나갈 예정인 수백 명은 참새 눈물도 못될 만큼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신들은 당연히 그 꼴을 지켜보지 않을 테고.
한없이 우울해하는 여휘의 석상을 올려다보던 환인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어느 순간 희미한 손짓과 함께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 띄지 않는 손짓을 읽은 사람은 환연 뿐.
『저도 인간입니다. …인간이었습니다. 자애신 그분의 세례를 받아 신격을 이루었다지만 이제 신 생활 2일차인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지요.』
《…….》
『마음에 드는 일에는 의욕이 치솟고 하기 싫은 일에는 의욕이 꺾입니다. 이용당한다는 것을 자각하면 당연히 의욕이 꺾이다 못해 바닥까지 떨어집니다. 여휘 당신이 사례라며 떠민 각종 재화가 제 마음을 어느 정도 움직이긴 하였지만, 솔직히 당신도 절 이용한 입장이 아닙니까.』
환인은 지금까지 자신을 나쁜 의도로 이용하려 든 자를 내버려 둔 적이 없다.
나사라트의 암살단이 몰살당한 것도, 구주의 독니가 전멸한 것도, 벨티칼의 주도에서 절찬 골육상쟁과 육참골단이 벌어지는 이유도, 콜라이도에서도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도.
모두 그러한 일의 연장선이다.
환인은 알현의 방 바깥, 문 너머에서 멈칫한 기색을 느끼며 계속 입을 열었다.
『저 역시 다섯 신께서 지상을 멸하는 것을 원치 않기에 일단은 나서고 있습니다만…… 예, 여휘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제가 전력을 쥐어짜 내면 최소한의 피해로 상처를 봉합하고 화합을 진행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막대한 설득을 바탕으로 한다면 이번 결명회 사건의 핵심 주동자 몇 명, 유제트와 볼레보스, 타비아누스 등만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왜 그리하지 않느냐는 의문에 환인은 역시 사도라고 생각하며 검지, 중지, 약지를 세웠다.
『이유를 꼽자면 세 가지입니다.』
그리고 검지를 굽혔다.
『첫 번째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당신도 미래를 보았으니 투르시온이 한 행동을 적나라하게 알고 있겠죠. 그런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면 죽어간 사람의 원한은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죽은 자는 어쨌든 산 자는 살아야 한다는 주의입니까?』
계급과 지위, 신분을 제외하면 왕족인 투르시온을 적당한 죄만 묻고 풀어주는 것이 이 세계에서는 타당한 이야기다.
반대로 말하면 이 세계의 신분 위계에 익숙한 여휘나 엘레델은 머리로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
여휘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계속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 중지도 굽혀진다.
『두 번째는 설득에 집중한다 하여도 제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기에 불가능합니다.』
《……시간, 인가요?》
환인은 커피와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아신이 되었다지만 인간 시절의 습관과 버릇은 여전한가.
본신으로 이실리테에게 진한 블랙 커피를 부탁하자 놀랍게도 30초 만에 뜨끈한 커피를 쟁반에 담아 가지고 오는 이실리테.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쓴 내에 환인은 작게 한숨을 쉬며 분신체 1로 입을 열었다.
『이 세계의 왕족이 가진 면죄부와 면책권은 지구인인 제 상식을 벗어난 수준입니다. 의식 또한 선민사상을 최대한으로 탑재하여 자신이 저지른 짓을 잘못이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 게 틀림없겠지요.』
《…….》
=…….=
『그런 자들을 설득하는 것에는 하루 이틀의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말로만은 부족할 테니 채찍질과 당근까지 곁들여 사상이 바뀔 정도의 충격을 주어야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게 될 겁니다. 그리 설득해야 할 인간이 하나둘입니까.』
미리아스툼과 알세이시스, 드로거스 세 왕가는 투르시온과 관계를 끊거나 거리를 두어 설득이 매우 간결할 것이다.
지모를 담당하는 알콰닌 왕가는 시류를 읽고 투르시온에게 협력한듯하니 앞선 세 왕가보다는 덜하겠지만 그래도 어렵지 않겠지.
『하지만 투르시온과 밀접하게 관계 맺은 플뢰 왕가인 포르미살드, 그리고 옴바드 왕가는 답이 없습니다. 여기에 결명회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의 입단속과 저지른 행위에 대한 조사 및 처벌 수위의 결정에는 적게 잡아도 년 단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는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군요.』
환인은 알현의 방문 너머에서 귀를 기울이는 인기척을 의식하며 마지막 이유를 입에 담았다.
『마지막은 신이 용서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다른 두 가지와 달리 부연 설명이 없었지만, 두 김씨를 제외하곤 듣는 이들은 앞선 두 가지 이유보다 더 뼈저리게 다가왔다.
환인도 그 이유로 죽은 투르시온의 인간들 영혼은 전부 쥐고 있다.
왜? 영혼이 신의 권역으로 흘러 들어가 결명회가 저지른 사건이 신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런다고 해서 신이 결명회의 신위 찬탈 사건을 모를까 싶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물론 이후에 자신이 죽일 인간들의 영혼도 모두 포획한 뒤 지구로 데려가 소멸시키든 죽이든 할 것이다.
말을 끝마친 환인은 여전히 문 바깥의 인기척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알현의 방 문으로 걸어가 벌컥 열었다.
문 앞에는 귀공자 같은 느낌의 엘레델과 결은 다르지만 비슷한 미남인 은발의 플뢰가 우는지 화난지 모를 얼굴로 굳어있었다.
순백색에 은실과 금실로 거대한 거북이를 수놓은 찬란하면서도 우아하기 그지없는 곤복. 그리고 허리에 찬 흑색 검 한 자루.
흡사 암흑을 빚어 만든 듯한 칠흑의 검을 인지하며 환인은 남자와 시선을 마주한 채 말했다.
『타르반시올, 당신의 궁금증에 대한 답이 되었습니까.』
=……성제는, 아니… 영제는 정녕 우리 가문에 원한이 없었단 말씀입니까?=
은발의 남자는 술렁이는 심정을 억누르는 듯,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질문에 환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을 들려주었다.
『멀쩡히 살다 이 세계로 끌려들어 왔는데 어찌 없겠습니까.』
=…….=
『하지만 니오네브레스의 기행이 마냥 힘들고 괴로웠냐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덕분에 소중한 연인들을 만났으며 인간다움을 찾았으니까요. 가능하다면 유제트, 볼레보스, 타비아누스 셋 정도만 지엄한 벌을 받게 한 다음 본래 살던 세상으로 귀환할 생각이었습니다.』
꾸욱, 주먹을 움켜쥔 타르반시올은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본인은…… 영제, 그대가 본인을 미워한다고 생각하였소. 그래서 이러한 짓을 저질렀다고 여겼었소.=
『어째서입니까.』
이유를 알고 있지만 분위기 흐름에 따라 묻자 억울함과 분노, 체념이 섞인 듯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그대의 연인인 안실라가 본인의 실수로 인하여 패시지에서 추방당했으니…… 당연히 증오할 거라고 생각하였소.=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녀와 만나게 된 계기에 일말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안느를 내놔라 이런 식으로 나왔다면 당연히 머리를 쪼개놨을 테지만.
『나아가 절 옹호한다는 이야기에 의문과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한 번쯤은 이야기를 나누어보아도 되지 않을까 싶을만큼 말입니다.』
흐, 흐흐흑. 크흐흐…….
작게 어깨를 흔들며 웃는지 우는지 모를 소릴 내는 타르반시올에게 환인이 담담하지만 자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결정적인 실수는 제 존재를 인지하고 나서도 미온적으로 대처하여 부친과 조부의 행위를 막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어쩔 수 없었어……. 당신과 달리, 나를 포함해 우리 가문원들은 날아가는 용의 등에 올라탄… 평범히 욕심 많은 인간이었으니까…….=
위엄을 살리기 위한 어조가 아닌 평범한 어조로 변한 타르반시올에게 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도 신의 장난질에 휩쓸린 평범한 인간입니다.』
=……인간이었겠지.=
고개를 든 타르반시올의 은빛 두 눈에서는 회한을 담은 눈물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허리춤의 검은 검을 뽑아 환인을 겨눈다.
=지성이 뛰어난 당신이라면 내 행동의 뜻을 알겠지.=
『…….』
슈슛— 김철수와 김영수가 엘레델을 붙잡고 공간 도약으로 빠져나간다. 타르반시올은 그걸 느끼고도 동요 없이 환인만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북서쪽, 글론드 섬의 서편에 투르시온의 권역 대도시가 있다. 거기에 소환된 차원 방랑자들이 있으니…… 만약 당신이 날 이긴다면 가서 결명회의 뿌리를 뽑기 바라. 반대가 되면, 결명회는 내가 뿌리 뽑겠어.=
『나는 니오네브레스로 넘어와 단 한 차례도 패배를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고작 6년 만에 신위를 획득할 수 있는 거겠지…….=
그 말과 동시에 부왘— 검신까지 온통 검은 검에서 예기를 형상화한 검은 아우라가 2m까지 치솟는다.
신의 눈으로 그것을 본 환인은 직감했다.
저 아우라에 조금이라도 닿는다면 자신도 제법 낭패를 겪을 거라고 말이다.
타르반시올이 한차례 흑색 검기를 휘두르자 끄아아아— 이제까지 참살당했던 영혼의 귀곡성 같은 것이 울려 퍼진다.
『…….』
=무기를 꺼내. 나와 싸우지 않겠다면, 여휘님을 해치고 당신이 말한 대로 신의 분노를 이 땅에 강림시키겠어…!=
환인은 말없이 재보의 관에서 광명창의 코어를 꺼내 활성화시켰다.
부우우우— 수백 마리의 벌떼가 비행하는 소리와 함께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아홉 날의 빛의 창이 형성된다.
=…….=
척, 양손으로 검을 잡고 금방이라도 돌진할 것 같은 기수식을 잡는 타르반시올.
환인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 기색을 읽고 자연체로 광명창을 늘어트린다.
그리고 0.1초 찰나의 순간, 타르반시올이 노도와 같은 기운을 뿌리며 한순간 일곱 방향으로 검기를 휘둘렀고.
스슷—
한 줄기 광명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해 알현의 방을 밝혔다.
눈을 깜박이는 것보다 빠르게 일곱 번 검격을 뿌린 뒤 검자루에 아무런 감각이 없어 회수하려는 찰나, 타르반시올은 헛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두 걸음을 물러섰다.
=…믿을 수, 없어. 어떻게……?=
『그 검기의 영역과 하얀 나뭇잎 투사의 검세를 보면 검로가 대부분 보이는 법입니다.』
=아…까, 겨우, 한 번 휘두른…… 걸로… 간극을, 읽었…… 다고……?=
시꺼먼 잉크 같은 아우라의 끄트머리가 바닥을 살짝 긁고 지나간 정도면 환인에게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정보를 전달해준다.
거기에 하얀 나뭇잎 투사인 크샤나리와 닮은 검세까지.
털컹, 텅—
흑색 검이 그의 손에서 떨어지고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옷자락이 베어 흘러내린다.
이어 실선이 이어지다 그의 우상반신이 실선을 따라 천천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하. 이게 천재라는 건가. 역시, 나는…….
회한과 탄식을 중얼거리던 타르반시올은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절단면을 찰나의 작열로 익혀버리는 광명창의 특성 덕에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다.
『…….』
환인은 뜻밖에 고지식하면서도 꽤나 선善 성향의 빛을 띠던 타르반시올의 사체를 잠시 응시했다.
그에게 조금만 더 강한 힘과 강한 의지가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까.
안느는 그를 못난이 망나니처럼 여기던 느낌이었는데, 무엇이 그를 변하게 한 걸까.
그의 영혼이 시체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영혼고에 수납한 환인은 고개를 돌려 여휘에게 말했다.
『여휘, 이제 역장은 풀어도 됩니다.』
《…네…….》
슬픔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함께 여휘의 몸 색이 짙은 회색에서 금색과 은색이 반짝이는 옅은 회색의 신체로 변해간다.
대리석 같던 질감의 육체가 점차 살아있는 그것처럼 바뀌는 걸 지켜보던 환인은 약간 눈썹을 찌푸렸다.
완전히 신체의 자유를 되찾은 여휘가 가슴을 출렁이며 단상에서 내려오더니 슬퍼하는 표정으로 타르반시올의 시체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그러며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감겨주는 여휘.
환인은 속에서 짜증이 크게 치솟는 걸 느꼈다. 좋아, 결정했다.
무표정으로 감정을 담아 벽에 영혼 폭발을 던져 부셔버린다.
콰아아아—
세계급 미술관 같은 알현의 방 한쪽 벽에 큰 구멍이 뻥 뚫리며 푸른 하늘과 도시 경광이 강풍과 함께 들이닥치고, 환인은 깜짝 놀라는 여휘에게 다가가 그녀를 어깨에 들쳐멨다.
《아?!》
그리고 구멍 밖으로 몸을 날렸다.
《꺄악……!》
새된 소녀 같은 비명을 지르며 움츠러드는 여휘.
눈을 질끈 감은 그녀의 알궁둥이를 철썩— 때려 눈을 뜨게 한 환인은 중앙성, 패시지의 건국 당시부터 존재해왔던 천년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지막 모습을 봐두는 게 좋을 겁니다.』
《마, 마지막이라니……? 아앗!》
『신벌의 증거는 필요할테니 말입니다.』
여휘의 묘안석 같은 눈동자가 한순간 황색으로 물들다 사라진 직후, 매우 놀란 그녀가 두 다리를 격하게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안 됩니다! 천년성은 패시지의 역사와 함께한……!》
『돼.』
남에게는 짜증 나고 더러운 일을 떠넘겨놓고 자신은 착한 척 고귀한 척 죽은 자에게 애도와 측은함을 보이다니.
주먹을 꾹 쥐며 들개 전사단의 흑령과 이름리아가 만들어준 양산형 적옥을 꺼낸다.
이것도 미래의 한 갈래일까. 환인은 이엘카타가 보았던 적흑령주는 구식도, 강화도 아닌 신식 적흑령주라고 확신했다.
그녀가 본 전견시의 미래에서 자신은 신언을 쓰고 있었다고 하였고, 실제 실험하지 않더라도 고의식 능력 덕분에 이렇게 능력을 펼치면 어떤 식의 효과가 벌어질지 가늠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게임처럼 한 자리 숫자의 데미지만큼 가늠해내는 것은 어렵지만 대강의 위력과 형태 영향 범위와 효과 등은 확실히 파악한 상태.
환인은 《그러면 안돼요……!》 애달프게 말리려는 여휘의 말을 무시하고 신식 적흑령주를 던졌다.
쿠궁—
적흑령주의 발동은 굉장히 박력 넘쳤다.
한순간 강화 흑령주를 터트렸을 때처럼 착탄 지점에 검은색 블랙홀이 발생하나 싶더니 섬뜩한 적색 기운을 품은 검은색 빛기둥이 하늘 끝까지 치솟고, 그 영역 내에 있던 모든 것이 모래와 먼지로 화하는 광경.
우우우우우우우——……!!!!
저주받은 영혼들의 합창 같은 울림과 적흑의 빛기둥 속에서 신목과 천년성이 사그라져간다.
땅신 교단의 승병들과 살아남은 왕실 직속 기사 병력들은 하던 일도 멈추고 얼어붙어 위압감을 도시 전체에 떨치는 적흑색 빛의 기둥을 올려보았다.
환인에게 들쳐메진 여휘도 망연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약 1분가량 지속되던 적흑령주는 우주로 빨려 올라가듯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것은 수백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침묵과 무저갱처럼 뻥 뚫린 지름 수백 미터의 싱크홀뿐.
미물들마저도 숨죽인 도시를 내려다보며 성과 함께 사라진 타르반시올을 떠올리던 환인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것으로 끝인가.’
남은 것은 타비아누스, 볼레보스, 유제트의 본보기 성 처벌과 관련자들의 목숨 수거, 그리고 투르시온 권역 도시에서의 차원 방랑자 확인 및 확보.
하늘에서 적흑령주가 남긴 광경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환인은 마지막으로 신격의 존재감을 담아 목소리를 도시 전체에 떨쳤다.
『신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환인은 길바닥에 오체투지하며 신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인간들을 지켜보다 넋이 나가버린 여휘를 짐짝처럼 들고 임시 지휘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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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주인공 앞에서 퍼포먼스만 안했어도 1초컷은 아니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