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 주도 패시지
타비아누스=아눌란=투르시온.
메리아놀의 명문 중에서도 명문. 여덟 왕실 가문 중 투르시온의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순혈의 증거를 전부 타고난 플뢰족이었다.
잡색이 스며들지 않은 순은의 머리카락에 진은색의 눈동자. 길게 뻗은 줄기 끝에 화려하게 핀 꽃처럼 날씬하고 여성스러운 몸매.
나이를 먹어 커갈수록 미모가 꽃망울이 피어나듯 매력을 꽃피우며 플뢰족을 대표하는 미녀가 되어갔다.
집안은 메리아놀의 왕가이며 외모는 남녀 모두에게 사랑받을 만큼 아름답다.
능력 또한 직업자로 각성은 못 하였지만 남들보다 뛰어난 정령 친화력을 바탕으로 젊은 나이에 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실력자.
본인의 지력과 지능 또한 범인을 능가하니, 시샘조차 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인생이란 그녀를 두고 말하는 거란 이야기가 공공연히 돌아다니는 수준.
그랬기에 타비아누스는 일찍이 조부의 인정을 받아 차원 방랑자 관리국 국장이라는 요직을 맡게 되었다.
그 후로 타비아누스는 승승장구했다.
뭍 사람들의 찬사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으며 다른 플뢰 왕실은 물론이고 대공과 공작 가문에서도 그녀와 연을 맺길 원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선물과 연서를 받았다.
그러는 중 미리아스툼 가문에서도 순혈의 증거를 강하게 타고난 공주가 탄생해 그녀를 살짝 긴장시켰지만…….
=미리아스툼의 여식은 새끼 우르거처럼 생겼다지?=
=1살이 채 되지 않았는데 5살 정도로 자라났다더군요.=
=마녀에게 저주받은 것은 아닐까요……?=
땅신의 저주인지, 플뢰족이 맞나 싶을 만큼 우락부락한 체격을 타고나 그녀의 긴장이 무색하게 플뢰족의 수치라는 딱지가 붙어버렸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플뢰족의 수치와 결혼하기 싫다며 남동생이 펄펄 뛰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었으니까.
그리고 20년이 지나 가문에서 쫓겨나다시피 플뢰족의 수치가 패시지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때, 타비아누스는 투르시온의 어둠과 패시지의 심연에 닿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고조부 때부터 장장 1000년 동안 이어져 온 대장정.
처음 가문의 어둠을 접했을 때 타비아누스는 흥미와 호기심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차원 방랑자를 규명하여 그 신체에 내려진 특혜를 연구, 분석하여 인위적으로 발현시키는 방법이라니.
그리고 조부에게서 대장정의 연구 예측 결과물과 목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마음속에서 악마가 눈을 떴다.
[1000년간 이어져 내려온 이 연구와 계획이 성공한다면 신에 가까운 에너지를 몸에 품을 수 있게 된다.]
[그리되면 투르시온은 영생과 젊음을 얻어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죽지 않고 영원불멸토록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다섯 신과 같은 신위계에 오를 수 있다는 이야기.
조부에게 연구 목적과 목표, 그리고 계획을 들은 타비아누스는 연구 쪽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명석한 머리를 십분 발휘하여 어둠을 더욱더 심연으로 끌어갔다.
세상 모두가 찬사를 보내는 이 미모를 영원토록 유지할 수 있다니. 거기에 신이 되어 무한의 권력과 힘을 쓸 수 있게 된다니!
그때부터 타비아누스에게 차원 방랑자는 ‘다른 세계에서 우연히 흘러들어온 안쓰러운 사람’이 아닌, 자신의 미모와 젊음을 영원토록 유지해줄 ‘연구 소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숫자가 부족하다.
까마득한 선조인 현조부의 악의 없는 선행 덕분에 니오네브레스로 흘러들어온 차원 방랑자는 대부분이 패시지로 모이게 되었다.
고조부는 거기서 더 나아가 차원 방랑자의 위험성을 조심스럽게 설파하여 차원 방랑자 관리국 창설을 이뤄내었으며 증조부는 관리국의 책임자에 투르시온 가문의 인간을 앉히는 것에 성공하였다.
즉, 차원 방랑자 관리국이라는 케이지 안의 소재가 전부라는 이야기.
그 숫자는 고작 20~30 남짓이었으니 부족한 소재에 골머리를 썩이던 타비아누스는 발상을 전환했다.
=모이는 소재가 부족하다면 대국적으로 모으면 될 일이잖아?=
수동적으로 소재가 케이지로 들어오길 기다리기보단 능동적으로 소재를 낚아 올리는 게 효율 면에서도, 능률 면에서도 더 좋지 않은가.
타비아누스는 푸른 나뭇잎의 탑 단장에게 시집간 고모를 통해 고모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협업을 요청하였다.
근 1000년에 가까운 연구 끝에 차원 이동 현상의 메커니즘은 어느 정도 규명했다.
소환과 역소환은 이를테면 물과 음료를 섞고 분리하는 일이다.
청정수는 대부분의 물질과 잘 섞이지만 그렇게 섞인 물질에서 물만 깔끔하게 분리해내는 것은 어려운 것처럼, 한 번 니오네브레스의 마력에 물든 방랑자는 지구로 돌려보내기 어렵다.
하지만 어려운 것도 살아있는 생물이며 크기가 클 수록 그러한 것. 반대로 작은데다 무생물이라면 난이도는 크게 떨어진다.
거기다 지구에서 니오네브레스로 끌고 오는 것은 약간의 운과 약간의 노력, 그리고 약간의 재료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이라는 점에 착안한 프로젝트는 금세 결실을 맺었다.
=완성했네요.=
=음. 생물도 아니고 형태도 고정에 경도와 강도 또한 적당하며 위상력까지 섞었으니 이만큼 적절한 물건은 없을 테지요.=
=유도 안정성은 그 이상 올리지 못한 게 아쉬워요.=
=주화 제작에 드는 특수 위상석 가루가 조금 아깝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네. 지구에 인간은 수십억이나 있다고 하니 열 마리중 일고여덟 마리가 차원의 회랑에 빠져 사라져도 별 흔적도 나지 않을 테고요.=
=그럼 당장 지구에 주화를 뿌리도록 하겠습니다. 주기는 어느 정도로?=
=글쎄요……. 드라데르스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은 해야 할 테니 일주일에 한 번, 500개 정도로 뿌려볼까요?=
=알겠습니다.=
=유인 주화 개발 수고하셨어요, 고모부.=
=구상은 공주님께서 다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저 곁에서 거들었을 뿐이니까요.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약 30년간 지구에 뿌린 유인 주화의 개수는 78만 개.
그중 80%는 바다나 물속에 떨어져 망실되었고, 나머지 20%는 육지에 떨어졌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분산되어 그대로 땅에 매몰된 것이 12%였다.
최종적으로 사람의 손에 들어간 것은 약 6.2만 개.
이중 유인 주화에 의해 니오네브레스로 넘어온 사람의 숫자는 1.5만 명에 못 미쳤으니 단순 계산으로 47,000명이 차원의 회랑에 빠져 죽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1.5만 명 중에서도 성공적으로 패시지에 나타나거나 도착한 숫자는 1만 명에 불과했다.
5천 명이 니오네브레스에 끌려와 가혹한 환경에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야기.
타비아누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재료가 1%만 손에 들어와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조금 더 많은 1.28%가 들어와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전까지는 1년에 15명이 수중에 들어오면 많이 들어오는 편이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연평균 333명이나 수중에 들어왔으니 프로젝트는 대성공이라 할 수 있었던 것.
조부도 그 결과에 흡족함을 드러내며 그녀를 칭찬하였고 지원 또한 한층 더 풍족하게 이루어졌다.
프로젝트의 성공에 타비아누스는 기고만장해졌으며 연구 소재가 대량으로 늘어난 덕에 인체 실험의 참혹함은 바닥이 없을 정도로 깊어져 갔다.
그와 비례해서 연구의 부차적인 성과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만약 과학자들이 양심과 도덕을 무시한다면 인류 과학 문명은 지금의 몇 배는 더 발전했을 거란 이야기가 있다.
타비아누스의 잔혹한 인체 실험을 통해 투르시온 가문의 인간들은 하나둘씩 희귀 직업자, 혹은 유일 직업자의 마이너 카피라 할 수 있는 힘을 얻어갔다.
그 결과 가문의 전력은 막강해져 근래에 들었을 땐 다른 일곱 왕가 전체가 힘을 모아도 투르시온 하나를 어찌하지 못할 수준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투르시온의 어둠이 깊어져만 가고 있을 때 지구, 대한민국의 남자 한 명이 그 유인 주화를 줍고 니오네브레스에 끌려들어 왔으니…….
「그게 환인이었다는 말이네.」
「그렇습니다.」
타비아누스 국장에게 빙의시킨 영령은 그녀의 뇌를 헤집어 뽑아낸 기억을 읽고 환인에게 결명회의 설립 목적과 연구 내막, 차원 관리국의 존재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녀에게 빙의된 영령은 지금까지 환인과 줄곧 함께 해왔던 아르겐테아 정찰대 여자 영혼.
몇 번이나 환인의 명령에 산자의 기억을 읽은 경험이 있던 대원이었는데 환인이 아신위에 오르며 그와 계약한 그녀의 영적 능력도 덩달아 상승한 사례의 주인공이다.
덕분에 환인은 자신이 니오네브레스로 트립하게 된 내막을 소상히 들었지만, 분노한다거나 성내지 않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뭐 처음 트립했을 때도 성내기보단 덤덤히 어떻게 하면 살아갈 수 있을지에 더 집중했었으니까.
「그나저나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 어떻게 살아서 시…….」
『환연. 그 사실은 입 밖에 내지 마라. 아예 기억에서 지우는 게 좋겠군. 제오라, 너도 들여다본 기억은 잊어라.』
「예, 성제님.」
「왜? 이걸 널리 알리면 환인 네가…… 아.」
환연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으려다 그의 뜻을 한발 늦게 알아차리곤 입을 다물었다.
피조물들이 타차원의 인간을 연구해서 신이 되려 한 짓이다.
다섯 신이 그 사실을 눈치챈다면 ‘아 그래? 너희들 몰살 결☆정.’하고 그 즉시 지상을 쓸어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건 환인이 바라지 않는 결말이다. 그의 희망은 적어도 자신의 2대손까지는 평온한 삶을 지낸 이후 세상이 종말을 맞는 것.
환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타비아누스의 몸에 빙의되어 순혈 왕족 플뢰의 몸이 신기한 듯, 젖가슴을 주물럭거리고 보지를 만져보는 제오라에게 말했다.
『제오라, 타비아누스의 기억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의 대응 방침이 없는지 살펴봐라. 환연은 투르시온 왕가의 모든 인간 위치를 파악하고.』
「알았어.」
「네, 성제님.」
관리국까지 만들어 관리하면서 인체 실험을 하는 놈들이 이런 상황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다.
자신이 존재감을 드러낸지 40분, 성에 돌입한 지는 이제 10분.
타비아누스가 방이나 다른 곳이 아닌 이런 예배당에서 김철수, 김영수와 마주친 것은 우연이 아니겠지.
그리고 예상대로 타비아누스의 기억을 들여다보던 제오라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성제님. 이 미친년놈들이 성제님의 세상으로 도망치려는 것 같습니다. 계획이 신에게 발각되거나 사도에게 들통나면 긴급 규약으로 차원 이동을 펼치게 되어있습니다. 국장도 규약 발동 전에 회당으로 가려다 철영수에게 걸린 겁니다.」
여휘가 어째서 ‘이세계의 신’이라는 말을 언급했는지 환인도 알아차렸다.
투르시온은 애초에 니오네브레스가 아닌 지구에서 신이 되려 한 것이다.
환인은 약간 어이없는 기분에 이마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미 지구에 거점을 만들어놓은 거군.』
지구에 퍼져있던 위상력 소유의 흔적들. 필시 투르시온 가문의 실험 소행이겠지.
이럴 때가 아니다.
『회당의 위치는 어디지.』
「지하 비밀 통로를 통해 갈 수 있습니다. 위치는 도시 북서쪽의 미궁 근처인 듯 합니다.」
제오라에게 위치를 들은 환인은 환연을 성 바깥으로 내보낸 뒤 공간 도약 중인 김영수를 불러다 타비아누스의 몸뚱이도 성 밖으로 옮겼다.
그리고 중앙성의 방위 기능키를 조작, 정령 방어를 다시 작동시킨 뒤 성을 포위 중인 영령군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성에 돌입시켰다.
『영적 신성위의 성제가 지시한다. 영령군은 즉시 천년성으로 돌입하라. 저항하는 자는 다섯 신의 적이다. 용서 없이 죽이고 투항하는 자는 제압해 땅신 교단 지휘부로 이송하라. 와이아리 추기경은 천년서로의 르아웬 추기경과 합류하십시오.』
신목의 나뭇가지가 흔들릴 정도의 신언을 퍼트린 환인은 신안을 발동, 초시공으로 도시를 빠르게 둘러보며 제오라가 알려준 위치를 찾았다.
‘저기군.’
땅속의 회당은 신안으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모를 때는 환인도 지나쳤지만 인식하고 보니 이상함이 느껴진다.
다른 곳은 땅속이라 해도 작은 곤충의 빛이 아주 은은하게 비쳤는데 회당이 있는 곳은 그 부분만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
‘중앙성을 탈출할 것을 염두에 두고 외성문을 틀어막았던 것인데.’
타비아누스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결명회는 지구로 긴급 탈출하여 2차전을 지구에서 벌일 뻔했다.
그보다 어처구니없는 놈들이 아닐 수 없다.
패시지의 세 곳 미궁 중 7급인 칠홍七虹의 대회랑 지척에 회당을 차려놓다니.
신의 눈을 피하는 능력까지 갖춰 간이 배 밖으로 나오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동 준비는 아직 멀었느냐!=
=타비아누스 공주님께서 아직 도착하시지 않아 발동 차례 정립에 시간이 걸립니다…!=
결명회의 회당으로 초시공을 펼쳐 들어가자 흡사 무도회장처럼 백열등의 따스한 색감이 환히 밝힌 공간이 나타났다.
왕실의 힘이 들어간 것을 증명하듯 화려하기 짝이 없다.
그런 회당은 300평에 이르는 대단위 공간이었는데 화려하고 우아한 복장의 스물넷 플뢰들이 모여 불안한 듯 좌우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고 높은 단처럼 만든 계단 좌우에서 무언가의 장치를 조작 중인 푸른 로브 차림의 플뢰 여섯.
푸른 바탕에 하얀 나무가 그려진 로브 차림의 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무언가에 열중할수록 계단 바로 위 황금의 문 같은 것의 중앙에 하얀빛이 모여들며 그 크기를 키워가는 중이다.
하지만 그 속도가 마음에 안 드는지 머리가 하얗게 셌지만 젊은 외형의 남자 플뢰가 언성을 높이며 그들을 질타한다.
=타비아누스를 기다리지 말고 얼른 차원 전이문을 여는 거다! 그자가 도착하였어! 늦으면 우리는 물론이고 너희들 또한 모두 죽는다! 편히 죽는다는 생각도 버려라! 신의 저주를 받아 정원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이블팩션으로 태어나 억겁토록 저주의 불에 타오를 것이야!=
‘저자가 타비아누스의 조부인 유제트인가. 그 옆은 부친인 전대 가주일 테고.’
환인은 난간에 기대고 서서 불안해하며 서성이는 남녀 플뢰들 면면을 쭉 훑었다.
타르반시올=톨마이어=투르시온이 안 보인다. 중앙성에도 보이지 않았는데 투르시온 왕실 대저택에 숨어있나.
이쪽은 눈치채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황금의 문만 힐끔거리는 자들의 영혼색을 낱낱이 살펴 위험도를 분류한다.
영혼색이 다양할수록, 빛이 강할수록 능력이 강하다.
그런 자들을 우선순위로 배정, 분류를 끝낸 환인은 초시공을 잔상 남기듯 연속 발동, 1초만에 투르시온의 인물들 전원의 목에 봉인구를 채웠다.
=……!?=
=……어?=
=앗?=
=이, 이거 뭐죠?!=
성격 급한 여자가 목에 채워진 봉인구를 억지로 벗으려다 봉인구의 방어 기능이 발동, 뇌를 태워버릴 듯한 전류의 방사에 당해 눈알을 까뒤집으며 게거품을 물고 넘어졌다.
간헐적으로 펄떡이는 그 여자의 허벅지 사이가 급격히 젖어가며 금방 물이 흥건해진다.
환인은 어처구니 없이 쉬워 콧방귀조차 끼지 못했다. 하나나 둘 정도는 반격을 예상했는데 봉인구를 다 채울 때까지 아무도 눈치를 못 채다니.
‘아무리 유일, 희귀 능력이라한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거겠지.’
=봉인구!=
=봉인, 봉인구? 이게 왜 갑자기 우리 목에…….=
=저기 보세요! 저사람!=
목에 채워진 것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차렸는지 놀라 웅성이고 고함지르는 자들을 뒤로하고 뚜벅뚜벅, 계단을 걸어 올라간 환인은 황금의 문을 차분히 살폈다.
구조는 유르파의 공간 이동 비술의 웜홀과 흡사하다. 하지만 운용에 드는 에너지는 위상력이나 마력이 아닌 심핵력이다.
‘이런 식인가.’
옆에 붙어있는 칠홍의 대평원 7급 미궁의 심핵 에너지를 갈취해와서 로브 차림 플뢰들이 조작 중인 패널에서 정제, 황금의 문으로 주입하는 거겠지.
=서, 성제?!=
=아신 성제예요…!=
=안돼…….=
=청목단은 에너지 정제를 멈추고 침입자를 제거해라!!=
결명회의 장인 유제트가 외치자 술법사들이 주춤거리며 일어나 지팡이를 겨누지만, 환인은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황금의 문을 분석한다.
대신 영령들이 그들의 정수리로 스며들어 빙의해 버리니 술법사들은 삽시간에 신체 제어권을 영령에게 헌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 안돼! 세피로트의 문을 함부로 건드리면 폭발해 일대가 날아가 버린다! 멈춰!!=
황금의 문으로 손을 뻗던 환인은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무시하고 분석을 바탕으로 집흡방출식을 변형, 황금의 문에 스며들어있는 변질된 심핵력을 모조리 해방했다.
쫘자자자자작—
흡사 혼의 승천처럼 옅은 빛의 색채가 황금의 문에서 퍼져나가며 작은 폭죽이 연달아 터지는 듯한 소리가 회당에 울려 퍼진다.
그 결과 황금의 문에 맺혀있던 백색 기운은 모두 사라지고, 순금으로 만든 듯한 문만 남아 매혹적인 금빛을 뿌렸다.
차원 전이문을 무력화시킨 환인은 몇 걸음 물러나 분신체 3이 모아둔 300여 개의 영혼 구슬을 해방, 신식 영혼 폭발을 펼친다.
무수한 황금색의 빛알갱이가 날아가 벽에 닿으니 빛의 꽃이 소리 없이 피어나며 차원 전이문과 조작 패널, 그리고 에너지 파이프를 남김없이 삼켜나간다.
————……!
10초간 이어진 신식의 세례가 끝난 자리에는 조각 미술품 같던 황금의 문과 아름다운 예배당 같던 기둥은 온데간데없이 흉물스러운 흑갈색의 토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 광경에 투르시온의 플뢰들이 넋이 나가 장탄식을 흘렸다.
=아아…….=
=끝이다, 모든 게 끝이야….=
=…….=
털썩털썩.
차원 전이문과 그 옆의 에너지 파이프 및 조작 패널을 문자 그대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멸시킨 환인은 말없이 돌아서서 이 사태의 원흉들을 응시했다.
물론 원흉 중 성격과 기개가 있는 자들도 분노와 원망이 가득한 얼굴로 환인을 노려본다.
환인은 그 시선을 받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강 5년 전, 니오네브레스의 6급 삼림형 미궁에 트립된 저는 그곳을 헤매며 한 가지를 다짐했습니다.』
=…….=
『절 이 세계에 강제로 소환시킨 자에게 응보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거였지요. 물론 사고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이게 있었으니까요.』
팅—
결명회가 뿌린 유인용 종족연합 주화를 튕겼다가 받아낸 환인은 재보의 관에서 개량형 방벽 마도구를 꺼내 팔에 착용하고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결착의 때가 왔습니다.』
=기, 기다려주세요, 성제님! 모든 것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 테니 부디 죄가 없는 어린아이들만큼은……!=
『왜 죄가 없습니까.』
아이들만큼은 살려달라는 어느 귀부인 차림의 여자 플뢰의 말을 차갑게 끊은 환인의 등 뒤로 부우웅— 백여 자루가 넘는 검의 패널이 떠오른다.
『투르시온의 가문에서 태어나 방랑자들의 피와 살을 먹고 자라며 받은 혜택, 그 자체가 죄입니다.』
=아, 아이들은 태어날 장소를 선택하지 못합니다……! 투르시온에서 태어난 것이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제발 아량을 베풀어 죗값은 저희에게만……!=
환인은 그 귀부인에게 작게 웃음 지어주었다.
『루크랑족도 아닌데 개소리를 잘하시는군요. 그러면 유인 주화에 걸려 이 세계로 넘어오다 죽은 죄 없는 5만 명의 지구인, 그리고 당신들 결명회의 생체 실험으로 죽어 나간 수만 명의 지구인의 억울함은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고작 당신들 몇 명의 목숨으로?』
=그 자들은 작위 없는 하층민이었소! 그런 자들이 얼마 죽어나간다한들 세상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다른 자의 외침에 환인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저 역시 그 세상의 작위 없는 하층민이었습니다만.』
=…….=
『그리고 신분제로 죄의 유무를 정한다면, 저는 아신이며 당신들은 필멸자이니 저의 결정이 절대적인 정의가 아니겠습니까. 더 할 말이 있으신지?』
모성애의 위대한 힘으로 신언에 간신히 대항하던 귀부인, 분노에 발작적으로 고함친 청년은 그것으로 침묵에 빠져 고개를 숙였고 다른 자들도 절망하거나 끝장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환인은 그런 그들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투르시온의 죄명을 만천하에 알리는데 24명이나 있을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니 두 명만 남기겠습니다. 죽으십시오.』
피피피핏—
=그…!=
=악!=
=끄아악!=
빛의 검 백여 자루가 허공에 하얀 실선을 남기며 총알보다 빨리 회당을 수놓으니,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2명을 제외한 나머지, 남녀노소 전부 대여섯 자루의 검이 몸에 박혀 숨이 넘어간다.
『죽음은 만인에게 평등하다지만 여러분들만큼은 예외입니다. 일어나십시오.』
그런 그들에게 영혼술을 펼쳐 강제로 영혼을 잡아뽑자 절규를 내지르며 몸을 비트는 22명의 영혼들.
「아, 아아아악…!」
「끄아아, 아아아……!」
「안……돼, 안돼…! 싫어, 이렇게는……!」
절규가 회당을 채우니 따스한 느낌의 전등이 내뿜는 빛마저 무색할 정도의 영적 냉기가 몰아치지만, 환인이 가볍게 손짓하자 스물둘의 영혼이 구슬로 변하며 그의 영혼고에 수납되고 영적 냉기 또한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빙의 당한 푸른 나뭇잎 술법사 여섯과 투르시온 가문의 전전대 가주, 유제트=그라초=투르시온과 전대 가주 둘 뿐.
식은땀과 진땀을 비 오듯이 흘리던 유제트=투르시온이 환인을 향해 씹어먹듯이 입을 열었다.
=너는…….=
『그쪽 목소리는 듣기 싫으니 입 좀 다물어주겠습니까? 물론 전대 가주인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끄……?!=
=커어어……!=
이제는 사라진 구주의 독니 일월급 암살자 둘의 영령을 둘에게 뒤집어 씌우자 유제트와 전대 가주가 눈알을 까뒤집고 벌벌 떤다.
그사이 재보의 관에 투르시온 왕실 인원들의 시체를 수납한 환인은 잊은 것은 없는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은 건 저 노인에게서 결명회의 연구 일지와 자료를 수거해 폐기하고 결명회와 투르시온하고 연관된 자들을 전부 죽이고…….’
타르반시올은 어디에 숨었을까. 타비아누스처럼 회당을 찾아오지 못해 어딘가를 헤메고 있는 건가.
‘일단 나가서 신언으로 저택에 걸린 정령 방범 대책을 전부 오프시키라고 한 다음…….’
정령을 동원해 전체적으로 수색하는 쪽이 편하겠어.
환인은 분신체4를 만들어 중앙성내의 일반인을 전부 교단 지휘소에 옮겨놓고 헐떡이는 두 김씨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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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오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