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807화 (807/813)

807 주도 패시지

『…….』

목소리 때문에 주먹에 힘이 들어간 것은 아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보나 마나 눈앞의 석상, 여휘일 테니까.

이유는 의미심장하다 못해 수많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내용 탓이다.

기다리고 있었다. 이계의 신이 될 자.

여휘가 이 모든 음모의 원흉이기에 기다렸다는 것인지, 아니면 지도력 부족에 무능하여 이 사태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해서 자신을 기다렸다는 것인지 모호하다.

환인은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처럼 계속해서 갈라져 나가는 생각을 멈추었다. 대신 흑옥과 적옥을 섞은 혼령주를 준비한다.

가설의 어느 쪽이든 환인 입장에서는 기분이 매우 나쁜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휘를 깨우고 그녀의 입장을 확인, 상황에 따라 결명회의 수색과 포획에 변주를 가할 생각이었는데 느닷없이 고백이라니.

…으오오어어어……어어어어어……!

무저갱의 마귀가 울부짖는듯한 귀곡성을 흘리는 적흑 혼령주를 쥔 환인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30년 묶은 악성 재고 떠넘기기 vs 30년을 기다린 함정.

후자라면 헛웃음이 날지언정 깔끔하게 정리하고 떠날 수 있어 기껍다.

사도를 죽일 수는 없다지만 광상녀의 행동을 보면 빈틈을 파고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러니 여휘를 무력화시킨 다음 어딘가에 처박아놓고 지하율에게 도움받아 봉인이라던가 수단을 강구하면 그만이다.

적으로 규명된 나머지 놈들은 목을 쳐버리면 끝날 일이고.

하지만 전자는 선의로 포장한 악의 떠넘기기이며 이 경우가 가장 골치 아픈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럴 확률이 9할 이상이다.

땅신의 사도인 여휘가 자신을 노릴 이유가 없으니까.

신들의 사이가 좋지 않다면 모르겠지만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니오네브레스를 순회하며 알게 된 지식은, 4대 신의 관계는 운명공동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자신을 공격한다는 것은 자애신을 공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함정을 파 자신을 노릴 리가 없는 거다.

더욱이 신의 눈으로 보이는 여휘 석상의 영혼색 또한 악惡 성향이 아니며 이곳에는 그 어떤 함정도 설치되어있지 않다.

결론을 내자면…….

‘결명회 사태는 무능한 땅신의 사도가 자신의 역량을 넘어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나에게 모든 짐을 떠넘기려는 상황.’

《…….》

표층 의식까지 읽을 수 있나.

자신의 가설에 맞춰 당황한 듯한 기색을 포착한 환인은 냉랭한 기색을 풀풀 풍기며 금방이라도 적흑 혼령주를 터트릴 것처럼 석상 상태의 여휘에게 말했다.

『더 할 말은 없습니까.』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말로 세상 모든 잘못이 해결된다면 니오네브레스 인류는 보다 나아간 초인류로서 꿈과 희망의 새 지평을 진작에 열었겠지요.』

살짝 울먹이는 듯한 사과를 신랄하게 비꼬자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기색이 석상에서 전해져온다.

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영혼의 색과 별달리 차이가 없는 성격과 반응이라 환인은 짜증이 한가득 났다.

미간을 강하게 찌푸리며 그런 여휘에게 따진다.

『최소 30년 이후의 일까지 짚어낼 수 있는 예지 능력과 이만한 대단위 방어 능력을 지니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땅신님의 사도라는 지위까지. 그런데 고작 결명회 사태 하나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거기다 외부 차원의 방랑자 출신의 하위신에게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하다니, 그분의 사도로써 제정신인가 묻고 싶군요. 저라면 수치스러워서 얼굴도 들지 못할텐데 여휘 당신은 다른가봅니다.』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죄송해요….》

『…….』

마음 같아서는 결명회고 나발이고 핵심 주동자 몇 명만 잡아 애초 예정했던 보복을 가한 뒤 나 몰라라 하고 떠나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결명회 생존자들의 손에 메리아놀이 몰락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고 말이다.

‘제길.’

그러자니 결명회와 맺은 원한이 너무나도 크다.

불온한 싹을 내버려 두고 떠나는 것도 환인의 성향과 맞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자신이 떠난 후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고난이 닥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그 선택지를 고를까.

환인은 석상에서 울먹이는 느낌이 피어나는 것에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자신의 성격, 성향, 상황, 능력, 처지까지 모든 부분을 고려한 함정이라 물러날 길이 없다.

물론 판을 깨고자 하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그것이 전후 관계의 손해 따위는 셈하지 않는 단순한 분풀이일 뿐이라는 거다.

이쪽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자존심 때문에라도 고를 수 없다.

이게 예지의 진짜 힘이겠지. 엘위드리스의 그 머저리 같은 예지가 아닌 진정한 예지.

『후우우…….』

환인이 분노의 한숨을 나지막이 내쉬었을 때 여휘가 재차 사과의 뜻을 전해왔다.

《저는 미련한 여자입니다. 제 머리로는 그분의 아이들과 분쟁, 충돌 없이 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 당신의 미래에 편승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

《저어…… 이것을…….》

웅—

석상 상태인 여휘의 명치를 장식 중인 황금 장신구의 원통형 구슬이 대지의 빛을 내뿜는다.

그러더니 자그마한 빛구슬이 빠져나와 천천히 환인에게 다가섰다.

『…….』

그걸 손바닥으로 받아낸 환인은 눈썹을 작게 찌푸렸다.

빛이 손에 닿는 순간 의식 한구석에 아공간 개념이 작게 자리를 잡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권능이군요.』

권능의 이전이다. 여휘가 지닌 권능이 자신에게 넘어온 것.

여휘가 설명한다.

《진인의 권능, 재보의 관입니다……. 관의 재보 또한 당신께 헌납하겠으니, 세속적인 사례이지만 부디 받으시고 분을 푸시어 작당모의를 꾀한 배교자들을 처벌하여주세요…….》

진인珍人, 여휘의 종족명인가.

아공간을 의식하자 작은 공장 건물 정도의 용적이 머릿속에 펼쳐지며 내부에 각종 금은보화가 쌓여있는 것이 일목요연하게 느껴졌다.

시험 삼아 금은보화의 틈에 끼어있는 석장錫杖을 인식하자 즉시 허공에서 나타나며 그의 손에 쥐어진다.

석장의 기능은 소모 위상력의 30% 감소와 정신 집중 보조, 위상력 충전 및 방출의 네 가지뿐이지만 술사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옵션의 하급 유물이다.

이외에도 적은 수의 무기와 방어구, 장신구와 의복 등이 있는데 하나같이 유물이거나 유물급의 성능을 지닌 것들 뿐.

『…….』

무한의 지갑인 아스펜드를 아득히 초월하는 기능인 재보의 관, 그리고 환인으로서도 가치를 가늠하기 어려운 재화의 산에 그의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는다.

이쪽의 계획에 무단 편승하여 이득을 노린다면 민폐를 넘어서 갑질이지만, 그에 걸맞은 사례가 동봉된다면 그것은 요청이다.

사례의 가치에 따라 정중하다는 수식어가 붙기도 하니 이정도면 환인에게 그럭저럭 정중한 요청이 되는 수준.

초시공의 소지품 제약 문제가 단숨에 해결되었기에 잠시 침묵하던 환인은 한결 차분해진 눈으로 여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번 결명회와 연관된 자들은 신분과 성별, 노소 구분 없이 모두 처벌될 것입니다. 짐작하건대 패시지의 왕족, 귀족 및 협의회 소속 의원 대다수가 될 것이니 당신도 그에 걸맞은 각오를 다져야 할 겁니다.』

《밝고 깨끗한 메리아놀이 되기 위해서라면 저의 삶 또한 바칠 것이니…… 모든 처분은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좋습니다.』

《이 성의 방위 기능 해제 권한을 그대에게 드리겠습니다……. 그 외에 필요한 것은…….》

『역장을 강화해 내부에서 능력의 발현을 막은 것도 당신의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되었다 할 때까지 역장을 유지하십시오. 당신을 노린 테러가 벌어질 수 있으니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있다면 그것도 펼치기 바랍니다.』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전폭적인 협조 선언에 환인은 여휘의 석상을 잠시 눈에 담았다.

이런 사도가 있는데 결명회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차원 방랑자를 소환하고 인체 실험을 한 걸까.

연인들과 나누며 내놓았던 몇 가지 추측만으로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환인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여휘가 의념으로 건네준 완드를 쥐고 중앙성을 나왔다.

여휘와 강렬하지만 짧은 만남을 끝낸 환인은 초시공으로 성을 나와 르아웬이 주저앉아있는 분수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성제 예하…….=

=……!=

르아웬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곁에 서 있던 노년의 프라우드 추기경이 움찔한다.

환인은 손을 뻗어 기력이 다한 것처럼 난간에 반쯤 기대어있는 르아웬의 머리를 짚었다.

원기와 함께 국소적인 평온의 파동을 흘려 넣어주자 눈을 크게 뜬 르아웬이 급격히 기운을 차린다.

그녀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환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휘를 만나고 왔습니다.』

=그, 그분께서는 무슨 말씀을……?=

『패시지를 좀먹는 버러지들을 처분할 권한을 일임받았습니다. 이 건으로 르아웬, 당신에게 협조를 요청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쪽은…….』

말하던 환인이 노년의 추기경에게 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수염을 지녔지만 여전히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는 프라우드 노인이 척, 가슴에 손을 올린다.

=땅신 교단의 세 번째 지팡이이자 첫 번째 도끼, 와이아리 온타인이라 합니다. 위명이 자자한 성제 예하께 예를 올립니다.=

『예, 와이아리 추기경의 협조도 부탁드리고 싶군요.』

=저와 르아웬 추기경은 교황 성하께 천년궁의 왕족과 의원들을 포박하여 땅신님의 존귀하신 뜻 아래 교리 검증을 펼칠 것을 지시받았습니다. 예하의 목적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듯하니, 이 시간부로 승병의 지휘권을 예하께 양도하겠습니다. 좋으실 대로 사용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르아웬 추기경과 와이아리 추기경 두 분은 지금부터 동원할 수 있는 승병을 움직여 패시지의 모든 성문을 봉쇄하여 설령 국왕이라 하여도 나가지 못하도록 막으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지시에 의문을 품을 법도 한데 두 추기경은 한 마디 반문도 없이 손을 모아 환인에게 읍을 올린 뒤 즉각 흩어진다.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편제를 나눈 영령군의 2/3을 동원해 반반씩 중앙성의 동문과 서문에 배치하고 성벽을 뛰어넘어 빠져나가는 놈들이 없도록 나머지 1/3을 넓게 펼쳐 성을 포위한다.

뿌우우우———……!!

약 3천의 영령군이 배치되자 도시에 우렁찬 뿔나팔 소리가 몇 차례 울려 퍼졌다.

뿔나팔 소리로 신호 체계를 만들어놓은 듯 승병들은 즉시 진형과 대열을 갖춰 패시지 외성벽의 동서남북 성문으로 진군을 개시하였고 이내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틀어막는다.

르아웬은 천년서로千年西路의 중간 즈음, 지하율이 정신 집중 중인 곳에 간단한 지휘부를 마련했고 와이아리 추기경은 반대편 천년동로의 중간에 제2 지휘부를 마련한다.

‘그러면…….’

중앙성이 훤히 보이는 곳까지 올라온 환인은 여휘에게 받은 완드, 천년성의 방위 기능키를 꺼내고 숨어있던 환연을 불러들이는 한편 영혼고에서 이름리아를 불러냈다.

풀어놓으면 폭주해서 타락의 숨결을 마구 뿌릴 것 같았기에 그녀만은 풀어놓지 않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환되자마자 저주받은 불길의 아우라가 그녀의 영체를 휘감으며 더욱더 거세게 타오른다.

「아아아아. 성제님, 성제니임. 저는, 이르무는 더 이상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어요……. 하아아……!」

『참아라.』

점점 형태가 무너져 검붉은 불꽃이 되어가던 이름리아였지만 환인의 강제력이 깃든 신언에 즉시 사후 직전의 모습을 되찾는다.

그리고는 절정에 오른 듯 자기 가슴을 에로틱하게 주무르면서 달뜬 신음을 흘리는데 그 모습에서 고아한 대공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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