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804화 (804/813)

804 슈브론 해저 미궁

환인의 여자들은 생각이 깊어 보이는 그를 대신해 넋이 나가버린 아드네빌라를 챙겼다.

고등급 성술을 펼치느라 조금 지친 머리를 식히던 아영은 대공동 중심부에 쌓인 수정 파편을 발견하곤 나가려는 언니들에게 물었다.

=언니님들. 저 심핵 파편은 안 챙겨요?=

=전에 율이 언니가 심핵 파편을 연구해봤는데 저 상태의 심핵은 평범한 수정 덩어리라고 하더라.=

수정이 심핵력을 가장 잘 갈무리해서 본체로 사용할 뿐, 핵심은 심핵에 깃든 심핵력이라는 말.

=흐응.=

아영은 집채만 한 파편 무더기를 바라보다가 재빨리 달려가 파편 중 사람만큼 큰 덩어리를 아공간 가방에 밀어 넣었다.

=윽.=

넣고 보니 굉장히 묵직하다.

유르파가 만들어준 가방은 시판 아공간 가방의 질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 가방의 용량은 충분해 수월히 들어갔지만 무게 감소 효과를 크게 적용받았음에도 팔에 무리가 갈 정도다.

아영이 수정 덩어리를 챙겨오는 모습에 안느가 물었다.

=수정은 왜 챙겼어?=

=가치는 둘째치고 이만큼 크고 흠 없는 수정은 구하기가 엄청 어렵잖아요. 가지고 가면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 거 같아서요.=

수정의 용도를 떠올려본 안느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그러네. 그런데 꽤 무거워 보이는데 헤엄칠 수 있겠어?=

아영도 그게 걱정이라 머뭇거렸다. 백려강이 끌어주기야 하겠지만 이만큼 무게가 나가면 그녀라고 해도 좀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그걸 눈치챈 안느는 말없이 수정이 든 가방을 건네받아 등에 멨다.

=……언니님!=

=가자. 도령하고는 벌써 저 앞이야.=

=네!=

둘은 일행을 따라잡으며 백려강에게 반쯤 매달리다시피 한 아드네빌라를 쳐다보았다.

=아드네빌라 님이 벨한테 굉장히 달라붙네요.=

아드네빌라는 옷을 입혀진 뒤에 멍하니 주저앉아있다가 백청룡의 부산물을 모두 수거한 백려강이 돌아오자마자 그녀에게 매달리다시피 엉겨 붙었다.

어찌나 들러붙는지 움직이는 것도 불편할 지경인데다 그녀의 뿔이 백려강의 팔이며 어깨나 머리를 찔러댔지만, 백려강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조금도 싫은 내색 없이 아드네빌라를 챙기고 있다.

=벨이 쓰는 육체는 아드네빌라 님의 몸을 기반으로 만든 거니까. 반쯤 가족처럼 느껴지는 게 아닐까?=

그도 그럴 게 저렇게 정신이 나간 상태임에도 이 해역을 지났다고 흔적을 쫓아 괴물을 보냈을 정도니까. 무의식중에 백려강에게서 무언가 느끼고 있는 거겠지.

아드네빌라의 뿔이 백려강의 젖가슴을 찌르는 걸 본 환연이 묻는다.

「안 거치적거려?」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요…. 그래도 아드네빌라 님은 제게 몸을 주신 또 한 분의 어머님 같은 분이시니까….=

그러면서 온화하게 웃는 백려강의 행동에 환연은 흐응, 작게 콧소리를 냈다.

아드네빌라한테 그 골탕을 먹어놓고 속도 좋지. 환인이었다면 머리를 쪼개놨을 텐데.

아니, 이미 자궁을 부셔서 골로 보냈던가?

여자들이 물에 뛰어들어 부상하기 시작하고, 그녀들이 뒤처지지 않도록 적당히 받쳐주며 해구로 올라가던 환연은 호기심 많은 정령이 이 안까지 내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미궁이 살아있으면 미궁의 속성과 밀접한 정령 외에는 활동하지 않는다.

미궁에서 활동하는 정령도 미궁의 심핵 가까운 곳은 찾지 않는다. 폐쇄형이 아닌 개방형 미궁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하급 물정령이 이 근방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미궁이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작아진 채로 환인의 등에 매달려 부상하던 환연은 릴라이스와 합체하며 정령력에서 한층 나아간 힘, 환령력을 퍼트려 영역 안의 정령과 의식을 링크했다.

……? 저것들은 그것들인가?

해구 바깥, 철영수와 인어들이 군인 같은 자들 무리와 대치 중인 것이 시야에 보인다.

저쪽은 4~6급 직업자들이 다수에 숫자도 열다섯이나 되지만, 철영수 또한 전사처럼 당당한 기세인데다 바로 옆에 7급 희귀직업자이자 인어인 시자한이 붙어있어 인간들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모양새다.

환연은 그의 귀를 만지며 말했다.

「환인. 철영수가 인간들하고 대치 중이야.」

“……집행부대 인물들인가.”

「십중팔구는. 좀 더 속도를 낼까?」

“아니. 직업자라 잠수병에 강하다 해도 급격한 상승은 피하고 싶다. 훈련받은 그 둘이라면 적어도 방어 면에서는…….”

……아귀곰치의 돌진 두 번에 산산이 깨지던 차원벽을 떠올린 환인은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라면 차원벽을 판板 형태가 아닌 허니콤 형태로 만들어 내성과 강도의 극대화를 시도해보았을 텐데, 김철수는 형태에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환인도 간섭이나 훈수를 주지 않았다.

차원 단절은 판타지적인 능력이라 현실의 물질 구조 형태가 차원벽의 강도에 영향을 줄지 확신을 못 하였고, 남자라면 자존심이 있어 자기 능력에 대해 간섭하고 훈수 놓는 걸 기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형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사람이더라도 마찬가지.

오히려 그런 관계이기에 훈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를 생각해 적당히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넌 이실리테 애들한테 막 지시하고 지도하고 그랬잖아.」

“그녀들은 일행이자 동료이며 연인들이다. 그녀들도 귀와 마음을 열고 훈수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지.”

하지만 김철수와 김영수는 어디까지나 임시동행, 계약 관계로서 도움을 주고받는 입장일 뿐이다.

「…….」

철영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하고 환연은 생각했다.

둘이 환인을 보는 태도라면 환인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무조건 믿지 않을까?

관계성을 판단하는 방식이 너무 건조하지 않나 싶지만 뭐, 그게 환인이 대하는 자기 사람과 타인의 경계인 거겠지.

“……아무튼, 둘이라면 괜찮을 테니 천천히 올라간다.”

그리 말하는 환인의 네 번째 시야에는 태산만큼 거대한 인형 병기를 배경으로 지하율이 잔뜩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게 비치고 있었다.

달빛을 등진 천암산맥.

밤안개가 거대한 여성형 인형을 휘감는 장면을 뒤로한 지하율이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꾹꾹 누르며 요약했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마누라 덕분에 진정한 아신이 됐고, 메리아놀을 쳐서 여휘를 때려잡거나 하는 건 곤란한 상태인데다, 땅신 교단은 왕족을 족치려고 중앙성을 포위한 상태라는 거지? 아저씨가 완전한 아신이 된 걸 알고 아저씨 심기를 안 거스르려고.”

“요약하면 그렇다.”

환인이 긍정하자 지하율의 표정에 지울 수 없는 허무와 피로가 스며든다.

“나도 아신위를 노릴 걸 그랬나? 아저씨처럼 아신만 됐으면 복잡하고 어렵게 안 돌아가고 바로 밟아 죽여버릴 수 있었을 텐데.”

“글쎄. 네가 진정한 아신이 되면 신은 널 즉시 지상에서 거두어 들였을 거다. 그리되면 복수는 물건너 가는 것과 다를바 없겠지. 네가 200년간 니오네브레스에서 활동하며 아신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나.”

“……없지.”

“인간일 적의 복수는 인간 상태에서 끝내라는 거겠지.”

“……그리 말하는 아저씨는 어떻게 거기에 있는 건데?”

“자애신께서 변덕을 부리셨는지 아니면 그 이명대로 자애를 내리셨는지, 30일가량의 유예를 받았다.”

“30일 안에 지구로 돌아가야 하는 거구나.”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지하율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몇 달이라는 시간이 있었지만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정하지 못한 모양새다.

지구로 귀환할지, 니오네브레스에 남아 스승의 유지를 이을지.

‘거신을 깨우고 기동하는데 몰두하며 결정을 미룬 건가.’

다시 결정을 미루는지 표정이 약간 풀린다.

“……아신위라는 거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네. 공간의 제약에서 완벽히 해방되기도 하고.”

“아신에 대해서 알아보지 않았던 건가.”

“알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대단한지 정확한 이유는 몰랐어. 전지의 눈으로 자세히 알아보려 했더니 목숨이 위험할 거란 예감이 들었거든. 그래도 대강은 느꼈어. 대충 지구인이 알몸으로 아프리카 코끼리나 하마, 기린이랑 1:1로 싸우는 거랑 비슷한 감각?”

곰이나 사자라면…… 종에 따라 만에 하나의 확률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육상 생물로는 최강 반열에 드는 것들이 코끼리, 하마, 기린이다. 이 셋의 성체는 사자도 1:1은 커녕 프라이드가 굶어 죽을 상황 같을 때나 목숨 걸고 사냥하는 부류니까.

지하율은 단정하게 빗은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질 만큼 벅벅 긁다가 말했다.

“알았어. 바로 기동시킬게. 30분 정도면 패시지로 이동할 수 있을 거야.”

“역장을 바로 덮치지 말고. 근처에 내 분신체가 있으니 이동하면 찾아와라.”

“응.”

“그리고 일이 끝나면 나와 같이 지구로 돌아가는 거다.”

“응. ……으으으응?”

“그러겠다고 대답했으니 이제 거부는 받지 않는다.”

“어!? 잠깐, 아저ㅆ……!”

놀라 자신을 부르는 지하율을 두고 분신체를 회수했다. 그러자 금방 그녀와 이어진 통신 수정구가 빛을 발했지만, 아스펜드에 집어넣어버린다.

지하율은 니오네브레스에 있어선 안 될 타입이다.

김철수나 김영수 같은 인물은 호의호식할 수 있고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판타지 같은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하율은 그런 물질적인 쾌락보다 정신적인 교감을 더 중요시한다.

비록 니오네브레스에서 200년가량을 살았다지만 그녀의 정신 상태가 10대 여고생 그대로라는 점이 그걸 증명한다.

이곳에 남아있어봤자 외로움과 괴로움에 사무쳐 결국 혼재가 되는 파국밖에 보이질 않으니 차라리 강제로라도 현실에 데리고 가는 게 그녀의 입장에서도, 니오네브레스 입장에서도 낫겠지.

그즈음 본신이 해구 바깥으로 나왔기에 환인은 두 김씨와 대치 중인 메리아놀의 인사들을 향해 신격을 일부 내비쳤다.

『메리아놀 협의회의 개들이 죽고 싶어 찾아왔나 보군.』

=흐컥……!?=

=끅…!=

=컥…….=

우르르릉— 신위의 파동이 물결을 일으키며 집행부대를 뒤덮으니 그것만으로 집행부대원들에게 걸린 수중 호흡 비술이 깨어지고 심적 타격을 막대하게 받은 모습으로 발버둥 친다.

멀쩡한 정신이었다면 다시 비술을 걸거나 수중 호흡 마도구를 썼겠지만, 정신력에 크나큰 피해를 입은 상태.

숨을 쉬지 못하고 꼬르르륵, 익사할 듯이 버둥거리는 집행부대를 바라보던 환인은 환연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동그란 수막이 펼쳐지며 집행부대원들이 털썩쿵쿵철푸덕, 뾰족뾰족한 산호 위에 떨어져 코로 들이켠 물을 우엑거리며 토해낸다.

환인은 그사이 김철수에게 물었다.

“저들이 뭘 요구했지.”

“어… 이 해역에는 왜 왔냐, 방금 빛기둥의 정체는 뭐냐고 묻기에 알고 싶으면 기다리라고만 했는데요. 좀 강압적으로 말하길래 저하고 영수도 노려보느라 조금, 눈싸움을 했슴다.”

눈싸움만 하는 게 아니라 싸워야 했나?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그리 생각하는 김철수에게서 고개를 돌린 환인은 금회색 머리카락의 플뢰 여자가 눈물 콧물을 쏟으며 바닷물을 토하는 것을 잠시 말없이 지켜보았다.

=헋, 흐헠, 컥!=

=크뤠레레레…….=

폐에 들어찬 바닷물을 게워내던 여자는 눈물이 맺힌 얼굴로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 아닙니드학…!=

『뭐가 아니라는 거지.』

찌이잉— 또다시 뇌를 곤죽으로 만드는 듯한 고통에 아흑,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린 금회색 머리의 플뢰 여자, 집행부대장은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혀를 깨물었다.

짜릿한 고통에 곤죽이 된 것 같던 뇌가 자극받아 조금은 정신이 든다.

그 정신으로 뒤죽박죽된 머리를 진정시키고 이 해역에 수장되지 않기 위해서 변명을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저, 저희는! 가… 갑작스러운 빛기둥을 목, 목격하고…… 미궁에 이변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하여…! 차, 찾아온 것뿐입니다! 이, 인원을 꾸린 이유는… 주변에 강대한 이형종이 많기에…!=

『…….』

=이… 해역에 배치된 이유는, 도르와인 섬과 글론드 섬에 수백일 째 내리는 비를 멈추게 하려고……!=

미궁 공략도 아니고 백청룡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서도 아니다.

신수가 죽으면 그것만으로도 대재해가 벌어진다. 청룡이 바다에서 죽는다면 거대한 해일이 도시로 밀어닥칠 것이고 바다와 인접한 패시지는 그 해일에 쑥대밭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협의회와 집행부는 최대한 백청룡의 노여움을 달랠 길을 찾기 위해 집행대를 보낸 것이며 자신들은 백청룡을 수색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이것을 고작 30초 만에 설명해낸 부대장은…….

‘사, 살았다.’

성제, 아신의 눈빛에서 살기가 물러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저 목소리만으로 자신은 물론 부하들을 골로 보내버리는 남자가 아신 말고 더 있을 리 없다. 더욱이 이 해역의 백청룡은 성제와 친분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장소에, 단단히 준비하지 않으면 가까이 오지도 못하는 이곳에 멀쩡히 있는 사람이 성제 말고 또 있을까.

그랬는데 성제의 뒤에, 물빛 머리카락에 외뿔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 하얀 머리에 황금빛 뿔을 가진 여자를 말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흰머리 여자는 섬찟한 살기와 함께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성제의 신언으로 패닉에 빠졌을 땐 몰랐지만, 조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 여자의 살기도 무시 못 할 수준이다.

물빛 머리카락의 여자가 아니었다면 당장 이쪽을 공격했을 분위기.

눈치가 비상하게 빠른 편이라 평가받던 부대장은 하얀 머리 여자의 정체를 유추해내곤 소름이 돋는걸 느꼈다.

‘배, 백청룡…!’

생각해보면 백청룡이 있을 거라 짐작되던 해구에서 성제 일행이 빠져나왔다. 게다가 루크랑 같지도 않은데 황금색 뿔을 지닌 여자.

=하,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다, 다시는 이 해역에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환인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부하들까지 다그쳐 넙죽 엎드린 채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부대장을 응시하다가 딱 한 가지 물었다.

『결명회를 알고 있나.』

=겨, 결명회……라는 집단은 황송하오나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안으로 부대장을 응시하던 환인은 그 말을 듣고 몸을 돌렸다.

결명회와 관계없고 저렇게까지 눈치 빠르게 행동하면 그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봐주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본능만 남은 아드네빌라는 패시지의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죽이고 싶은 듯 백려강의 품 안에서 버둥거렸지만…….

=아드네빌라 님, 그러시면 안 돼요…! 아드네빌라 님…!=

『…….』

환인이 살벌한 눈으로 지긋하게 바라보자 금세 얌전해진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아드네빌라를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집행부대를 내버려 두고 일행과 함께 난파당한 리지나 호로 향했다.

중간에는 정찰대원에게 붙여놓은 혼재도 회수하고 눈에 띄는 정령들은 하급, 중급 가리지 않고 전부 다 모은다.

진정한 혼령주, 진령주를 운 좋게 피한 것으로 보이는 이형종도 전부 죽여 그 혼을 거두고…….

=저 은상어 용케 안 죽고 살아있네. 도령, 저것도 잡을까?=

“……내버려 둬라.”

가다 마주친 은상어가 뻣뻣하게 굳어 이쪽의 눈치를 보는 모습에 환인은 후, 작게 웃으며 보내주었다.

꼬리지느러미를 파다닥 흔들며 도망치는 은상어의 몸에서 느껴지는 저 씨앗은 운일까 필연일까.

‘이 바다에 또 다른 신수가 태어날지도 모르겠군.’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려 성공적으로 개화하고 수많은 운이 따라줬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저 짐승 같지 않은 처세술을 보면 제법 가능성은 높을 거다.

하지만…….

니오네브레스의 미래를 생각한 환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즈음 기울어진 리지나 호에 도착하자 환연이 상급 정령을 시켜 배 안의 물을 전부 밖으로 내보내 공기를 주입하고 중급 물정령으로 배의 좌우를 잡아준다.

「그럼 부상한다. 흔들릴 수 있으니까 아무거나 잡아.」

일행이 난간이나 마스트의 흔적, 마차 근처에서 몸을 고정하자 부력을 회복한 리지나 호가 천천히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환연. 저도 도와줄게요.=

「배 밑에서 부력만 채워주면 돼.」

=네.=

백려강이 리지나 호의 선박 가운데 서서 외뿔을 환히 빛내자 배의 떠오르는 속도가 더더욱 빨라진다.

환인은 온통 검은색이던 주변이 군청색에서 청색, 하늘색, 맑은 하늘색으로 점점 밝아지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신의 뜻에 따라 세상이 멸망한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니면 창세기의 방주처럼 더러워지고 타락한 인류를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현재 니오네브레스 인류의 행보를 보자면 후자의 가능성이 크겠지.

창세기의 또 다른 이야기인 바벨탑을 생각해본다면 사람의 지성이 늘어남에 따라 타락이 만연해 신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결명회의 실험과 행위는 말 그대로 인간의 오만이 아니고서야 벌어질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거기다 니오네브레스 인류의 탐욕을 생각해보면 신들의 분노를 실시간으로 적립하고 있다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

아신이 되어 알게 된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도 세계 자체를 완전히 재창조하는 것은 다섯 신의 힘이 있어도 불가능하다는 게 환인의 생각이다.

문명을 완전히 리셋시키지는 않을듯한데 그렇다면…….

‘한다면 아신과 천원, 오르빈치의 관리자들, 신수는 제외하겠지. 그들이 만들어내는 율력 또한 무시 못 할 테니까. 닌실도 무사할 것이다. 아드네빌라는…….’

……그녀가 알아서 할 일이고.

수면이 가까워졌는지 갑판에 빛의 물결무늬가 춤추기 시작한다.

환인은 그 눈부시고 아름다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과 인연이 닿은 여자들을 전부 챙기기는 불가능하다.

느낌이지만 자신과 함께 지구로 넘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지하율처럼 애초에 지구인이었던 사람, 그리고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자신의 색에 물든 여자들 뿐이다.

지구를 잠깐이지만 체험한데다 가장 근래에 들어온 아영이 아주 간당간당하게 그 범주에 들어가는 정도.

자신과 인연이 닿은 여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도 살펴본다면 가능하겠지만, 그 아이들의 생김새는 인간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자신과 백치령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무지갯빛의 아름다운 날개 한 쌍을 지닌 남자 쌍둥이다. 플라비우스족처럼 짐승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에 날개를 가진 아이 말이다.

시하=사이지가 낳은 세 쌍둥이도 모친처럼 짐승귀에 짐승 꼬리를 가진 남녀 세쌍둥이.

무엇보다 이엘카타, 백치령, 시하=사이지가 자신들의 아이를 내놓을 리 무방한데다 그녀들 또한 자신보다 영지가, 가문이 더 중요하다.

사정을 알리며 가자고 하여도 ‘신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에 순응할 따름.’하며 거절할 게 분명하겠지.

=주인님.=

“…….”

환인은 자신의 표정이 안 좋아진 것을 느꼈는지 조금 걱정이 깃든 얼굴로 다가오는 이실리테를 옆에 안고 말없이 가까워진 수면을 올려다보았다.

상급 정령의 힘과 용인체의 권능으로 물을 다루는 백려강의 힘 덕분에 리지나 호는 40노트에 가까운 속도로 요르문센 섬을 향해 나아갔다.

환인 일행이 탄 배가 그렇게 나아가는 중에 종족 연합 국가 메리아놀의 주도, 패시지에는 심판의 시간이 도래 중이었다.

수 개월 만에 비구름이 걷혀 아침 해가 떠오르는 패시지.

정말 오랜만에 보는 태양의 일출에 시민들이 기뻐하며 밖으로 나와 구경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시민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잠재우려 집 밖으로는 고개도 내밀지 않는 중이다.

이유는 하나 뿐.

쿠콰아아아아앙——………!

주도를 보호하는 성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난데없이 높이만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아득한 크기의 거신巨身이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내려섰기 때문이었고.

=저, 저게 뭐야…….=

=…….=

중앙성을 포위 중이던 교단의 기사들과 주도의 병력마저도 저도 모르게 무기를 손에서 떨궜을만큼 막대한 숫자의 영혼이 한쪽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붉고 푸른 영혼, 검고 하얀 영혼, 사람의 영혼, 괴물의 영혼, 짐승의 영혼, 정령의 영혼.

구분할 것 없이 족히 1000에 가까운 숫자를 목격한 땅신 교단의 신실한 성투사가 멍한 얼굴로 새벽하늘의 영혼 군단을 보며 중얼거린다.

=추, 추기경님. 말세가…… 말세가 도래한 겁니까……?=

=……말세가 아니야. 저것은…… 영적 신성을 얻으신 성제님의 혼령진군일세…….=

신성을 받은 회령, 청령, 흑령, 적령과 환령의 기운을 머금은 정령 천여 명, 지금도 계속 늘어나는 저들이 지상으로 내려오면 패시지는 끝이다.

오직 영혼사만이 성불시키거나 퇴치할 수 있으며 아닌 자의 공격에는 죽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혼령의 진군進軍 앞에 문명은 모래성이나 다를 바 없다.

‘허허. 어쩐지 일 개월 전부터 영혼사님들의 방문이 중단되었다더니…….’

여러 영혼사님들이 도르와인 섬, 글론드 섬에 왔다가도 무언가 연락을 받은 것처럼 방향을 바꿔 도로 되돌아나가기 일쑤였다는 보고가 몇 번이나 들어왔었다.

이유를 이제야 눈치챈 와이아리 추기경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동쪽 하늘에 커다란 그림자를 도시 전체에 드리우는 거신 인형과 서쪽 하늘을 뒤덮은 혼령 대군.

‘패시지의 운명은 오늘 결정 나겠군. 땅신님이시여…….’

추기경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땅신님의 자비가 패시지에 있기를 속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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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은상어는 30년 뒤에 지나가던 어린 영웅과 이러쿵저러쿵☆

어제는 심한 두통 때문에 공지를 올릴 생각도 못하고 무단 휴재를 하고 말았습니당...

후기 자리를 빌어 사과드립니당!!

죄송합니당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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