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803화 (803/813)

803 슈브론 해저 미궁

803 슈브론 해저 미궁

환인은 초시공으로 공중에 고정된 자신을 백안으로 노려보며 그르렁거리는 용을 무심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거대한 공동의 1/4를 채우는 거체. 신이 빚은 조각상 같던 아름다운 백청색 비늘은 어디 가고 온통 긁힌 자국에 색도 허여멀겋게 변해 백태가 낀 듯하다.

용의 지느러미는 극심한 전투를 벌인 것처럼 너덜너덜한데다 꿈틀거리는 몸 일부에는 거대한 갈퀴에 긁힌 상처 자국까지 나 있다.

그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아 피가 뭉글거리며 흘러내리는 중.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환인이 못마땅한 심정에 조롱을 담아 입을 열었다.

『어처구니없는 꼴이군요. 그 당당하고 오연한 백청룡은 온데간데없이 한심한 지렁이 한 마리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크아아아아아—!!!》

이성을 잃었다지만 한때 바다처럼 넓은 대호수를 지배하던 신수여서일까. 환인의 신언에도 굴하지 않고 포효를 지르며 무지갯빛의 위광을 쏟아낸다.

물리력을 가미한 포효에 대공동이 진동하고 천장에서 흙먼지가 쏟아질 정도였지만, 환인은 눈썹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정신 나갈 것 같은 웅장한 위광은 느껴지지 않고 버릇없는 강아지가 왕왕 짓는듯한 감상뿐.

『…….』

그 영락한 모습에 측은함을 느낀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환인은 그녀와 얽혀 경험했던 불합리한 처사와 버릇없는 태도, 그녀의 욕심으로 겪었던 스트레스를 떠올렸고.

『……쯧.』

그러한 기억의 되새김질은 자연스럽게 그의 짜증 수치를 잔뜩 드높였다.

주먹에 꾸욱- 힘이 들어간다.

저 용 때문에 느낀 짜증이 어느 정도였던가.

그나마 이쪽에게 도움이 될법한 것들을 선물로 주었고 버릇없던 행동에 대해 사과도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마주치자마자 옥토 크로커스를 지워버렸던 신식 영혼 폭발 세례를 쏟아부었을 것이다.

그런걸 참작해도 여기까지 오며 고생한 것, 니아마드에서 심력을 썼던 것 하며 예정대로만 진행됐으면 자애신과 면담도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니 살기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예정대로였다면 현실로 넘어가 본격적인 능력 탐구를 즐기면서 신위를 재확인, 아무런 간섭도, 개입도 없이 홀로 진정한 아신위에 올랐을 테니까.

움찔, 움찔.

아신의 진심 살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니 이지를 잃은 백청룡이 움찔 흠칫거리며 슬그머니 주둥이를 닫는다.

상처 입어 흉포한 본능만 남았어도 본능적인 상위 존재의 분노를 인지했기 때문.

그러나 용이 어떤 존재인가.

기본적으로 오만하고 오연하며 제멋대로에 자기만족 지향형 이기주의의 극치인 주제에 그 강함은 하늘이 내린 수준이라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생물 그 자체다.

요약하면 이런 상황에 얌전히 있을 생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콰아아아아—!!》

살아오며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백청룡은 결국 흉포한 본능을 이기지 못해 환인을 한입에 물어 삼킬 것처럼 쇄도했다.

환인도 당연히 얌전하게 있을 거라 생각 안 했다.

이성이 사라지면 본능에 따라 움직일 텐데 환인이 본 그녀의 성격은 한마디로 개차반이었기 때문.

이 때문에 환인은 번개처럼 쇄도해오는 백청룡의 공격을 일찍이 간파해 초시공을 시전, 백청룡의 머리 위로 이동해 신력에서 심핵력만 따로 뽑아내어 오른손에 응축했다.

그리고 눈에 확 들어오는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쩌엉!!!

쾍!

평범한 인지를 초월한 타격에 번개 같은 충격파가 뿜어져 나와 대공동을 뒤흔든다.

그 충격에 백청룡은 테니스 라켓에 얻어맞은 테니스공처럼 대가리가 땅에 내려꽂히고 말았다.

으직, 뚜둑… 뚜두둑.

용의 이빨은 절세 신검의 재료가 되며 용의 뼈와 비늘로 만든 갑주는 절세 보갑이 된다.

땅에 충돌하며 그 이빨 일부가 깨어져 나가고 두상의 비늘도 쪼개진데다 머리뼈가 살짝 내려앉는 데서 위력이 짐작되는 일격.

크으으… 끄그그그으……!

고작 한 대에 예절이 주입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환인은 백청룡의 백안이 혈안으로 변해가는 걸 보며 냉소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와 너의 서열을 재정립하도록 하지. 와라.』

콰아아아아악—!!!!

쿠구궁, 콰광— 꽈아앙!!

크와아아악—!!!

퍼퍼벙— 콰직, 우지지지직—

크, 케아아아아—!!

떠엉- 찌이이잉— 푸화화확……!!

켁컥켁. 끄, 끄웨에에엑—…!

대공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수중 동굴 통로 끄트머리.

거기서 머리만 살짝 내밀고 안쪽에서 벌어지는 아신vs진룡의 결투를 지켜보던 여자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펑펑 터져나가는 정체불명의 빛무리. 빛무리가 형성된다 싶다가도 수천만개의 빛바늘로 변해 사방을 꿰뚫고, 꿰뚫린다 싶더니 새하얀 광구로 변해 작열한다.

들들들 대공동이 떨리는 것만 봐도 위력이 짐작되는데 그것들은 전부 백청룡이 쓰는 기술이다.

환인은 그런 백청룡의 기술을 전부 피하며 오직 주먹 하나로만 백청룡을 다지고 있었다.

주먹이 휘둘러지면 백청룡의 거대한 머리가 홱홱 젖혀지거나 벽, 땅에 처박힌다. 몸통에 주먹이 박히면 등뼈가 부러진건 아닐까 싶을만큼 확 꺾인다.

=…….=

「…….」

=……죽인다.=

솔직히 부럽다거나 능력과 자질의 격차에 상실감과 박탈감을 느껴 자존감이 나락 박는 시기는 지났다.

한때 그의 성장을 부러워하며 손가락을 빨던 적도 있었지만, 자신들이 7급의 벽, 8급의 벽을 뚫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사이 그는 아신이 되었다.

이제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애정을 바탕으로 한 우상과 섬김의 대상이 된 것이다.

백청룡을 뒷집 똥개 잡듯이 두들겨 패는, 그것도 아신의 율력을 쓰지 않고서 쥐잡듯이 잡는 모습에 홀딱 반한 여자들이지만, 그러는 중에도 무인의 마음가짐이 그의 능력을 분석하게 만든다.

=안느. 주인님이 어떻게 싸우시는지 보여?=

=어…… 초시공으로 공격을 피하고 주먹에 힘을 넣어서 패는 것처럼 보이긴 한데…….=

=언니님들. 오빠가 공격에 율력 안 쓰고 있는 거 맞죠?=

「맞아. 환인이 아드네빌라를 때릴 때마다 주먹에 심핵력을 충전하고 있어. 위력의 99%는 거기서 나오는 중이야.」

=릴라이스 님이 그래?=

아영의 질문에 환연은 대답 없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투가 시작되고 3분. 백청룡의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눈부시게 하얬을 용의 수염과 갈기는 자기 피로 끈적하게 젖었고 사슴뿔처럼 멋지게 뻗어있던 뿔도 한쪽이 뽀각하고 부러진 상태.

비늘 곳곳은 쳐맞고 내동댕이쳐지고 벽에 밀쳐져 충돌하며 발생한 타격에 온통 찢어지고 깨진데다 이빨도 멀쩡한 게 얼마 없을 지경이다.

또 환인이 집요하게 얼굴만 때려 용도 얼굴이 부을 수 있다는 걸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중.

꽈아앙!!

=와!=

=최후의 일격인가?=

=아프겠어요….=

결투의 시작을 장식했던 정수리 일권一拳이 또다시 같은 자리에 작렬하더니 눈을 까뒤집은 백청룡이 끝내 대지에 머리를 누인다.

끄허, 꺼흐…….

숨넘어가듯이 헐떡이며 피를 토해내는 백청룡.

온갖 신비한 선술을 펼치고 신체를 강화해 난동을 부려도 스치지도 못했다는 사실은 무의식과 본능만 남은 백청룡도 알 수 있었다.

저 위대한 존재, 자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지금까지 기본적인 능력으로만 자신을 패퇴시켰다고.

『…….』

《…….》

백청룡을 복날에 개 잡듯이 두들겨 팬것으로 스트레스를 제법 해소한 환인은 눈 주변이 팅팅 부어올라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는 아드네빌라를 응시했다.

예절이 주입되었는지 혈안은 사라지고 희여멀건 백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증발했던 본능도 돌아왔는지 백청룡도 눈치껏 입을 다물고 꿀꺽, 입 안에 고이는 피를 삼킨다.

『…….』

환인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백청룡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눈빛을 살벌하게 번뜩이며 주먹을 들었다.

그러자 흠칫하고 밟힌 지렁이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는 백청룡.

저 무서운 놈이 뭔가를 원하는 거 같은데 뭘 원하는 거지?

잘 안 돌아가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린 백청룡은 머릿속 한켠에 떠오르는 하나의 이미지를 인식.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프지만 본능적으로 용의 신체를 변화시켰다.

그게 정답이었을까. 쏟아지던 살기가 사라진다.

『…….』

환인은 인간형으로 변한 백청룡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귀 위쪽으로 난 용의 뿔 두 개는 금가고 부러진데다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붓고 심각하게 폭행당한 것처럼 온몸에 극심한 타박상이 가득하다.

한국 경찰이 저 모습을 봤다면 주변 남자를 두말없이 체포해 잡아들였을 모습.

심한 상처를 입은 알몸의 여자 모습에 환인은 아영을 손짓해 불렀다.

《크으으으……!》

백청룡이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들의 모습에 다시 살기를 뿜어낸 순간 환인도 신위의 살기를 뿜어내며 주먹을 다시 들었고, 백청룡은 흠칫하고 놀라면서 살기를 감추고 어깨를 움츠린다.

하지만 환인은 살기를 그대로 유지하며 찐빵 같은 얼굴의 백청룡에게 다가가 그 자그마한 머리통에 손을 올리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드네빌라.』

《…크, 크으으…….》

『너에게 할 말은 하나뿐이다. 앞으로 이 여자들에게 거역하면 내게 죽는다는 것. 알겠나.』

《…크, 으으…….》

자신의 말에 기운이 쭉 빠진 모습을 보며 환인은 아영에게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아영은 회복의 성술을 발휘해 백청룡의 상세를 원래대로 되돌려 나갔다.

=와, 7급 회복 성술 한 번에 다 회복 안되네. 안느 언니님, 옆에서 재생 강화 성술 좀 써주세요.=

=어어. 응.=

=려강. 저것들 챙기러 가요.=

=…앗! 요, 용의 이빨이랑 뿔…… 괜찮을까요? 혹시 아드네빌라 님이 나중에 화내시는 건…….=

=아드네빌라 님보다 주인님이 위에요.=

=아아…….=

『…….』

순순히 치유를 받는 아드네빌라의 뒤통수를 응시하던 환인이 분신체의 시야로 전환한다.

백청룡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고 1분쯤 지났을 때부터 비가 그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완전히 비가 멎었다.

요르문센 섬 앞바다를 뒤덮었던 먹구름도 조금씩 사라지며 유르파의 옆에 있는 분신체의 눈에 빛내림 현상이 수평선 끝까지 펼쳐지는 게 보인다.

패시지도 마찬가지다.

패시지 자체는 각 최상급 정령의 힘으로 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지만 패시지 주변은 비구름에 잠식되어있었는데, 그 비구름이 빠르게 물러가고 있는 것.

=으음. 에이, 나중에 유르파 언니한테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해야지.=

=어? 그거 입…혀드리게?=

=네. 아드네빌라 님한테 잘 어울릴 거 같지 않아요?=

=그건 그러네. 근데 치수가 좀 작은 거 같아.=

=저한테 맞춘 사이즈니까요……. 아드네빌라 님도 가슴 짱커 흑흑.=

뒤에서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릴 들으며 집채만 한 심핵에 다가가자 심핵이 요요롭지만 무언가 덧없고 초연한 느낌의 운무를 자그맣게 뿌린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아는 듯한 분위기.

환인은 잠시 영롱한 거대 수정을 눈에 담다가 손을 올렸고, 그의 손이 닿은 지점부터 심핵에 균열이 가더니 얼마 안 가 조각조각 부서져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8급 미궁이었나.

심핵을 부수며 흘러들어온 심핵력 덕분에 신력이 조금 오르긴 했지만 그야말로 조금이다. 호수에 물 한 바가지 더한 정도?

대신 율력이 약간 상승했다. 50 정도로.

‘존재감을 알리고 유명세를 얻는 것 외에도 다른 방법이 있었나…….’

현실로 돌아갈 차원을 열 때 율력을 소모하면 되겠군.

환인은 대공동을 뒤덮은 경락이 천천히 말라가는 걸 둘러보았다. 미궁 상태를 봐선 무너지거나 할 것 같지 않다.

개방형 미궁의 특성 같은데 그렇다해도 바깥의 신비로운 산호초 해역은 천천히 사라지겠지.

빛이 닿지 않는 심해에 그러한 생물이 자생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할테니까.

주위를 둘러보던 환인은 아드네빌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상처는 깨끗하게 사라졌고 얼굴도 깔끔해진데다 뿔도 재생되어 기묘한 문양을 발하고 있다.

심핵을 부쉈지만 아드네빌라에게는 영향이 없다. 그녀가 중핵이 된 것이 아니라 아마도 미궁의 원래 중핵은 그녀가 쓰러트린 거겠지.

‘그 후 지친 몸뚱아리로 심핵을 제어하려다 되려 심핵의 기운이 뇌로 역류해 저런 꼴이 되었을테고.’

《…….》

이지가 없는듯 흐리멍덩한 눈으로 이쪽을 보는 아드네빌라의 모습에 아영이 멋쩍게 웃었다.

=조금 보기 그렇죠? 돌아가면 유르파 언니한테 새 옷 부탁해서 갈아입혀 놓을게요.=

“상관없다. 알몸만 가리면 그만이니.”

그보다 저 상태는 언제 회복이 되는 걸까.

당초 계획은 아드네빌라를 정신차리게 한 다음 패시지 공략에 도움을 받는 거였는데 지금은 아무런 도움도 필요 없게 되었다.

딱히 정신을 회복시켜줄 이유는…….

아스펜드에서 지오드에게 받은 황색 토파즈 브로치를 꺼내 아드네빌라 앞에서 흔들어봤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

“…….”

일단 이상태로 데리고 다니다 나중에 풀어주거나 해야겠군.

한 치수 작은 옷을 입은 것 같은 아드네빌라의 몰골을 잠깐 눈에 담았던 환인은 연인들에게 조금 풀린 얼굴로 말했다.

“용무는 끝났으니 나가지.”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이지 상실 탁한 눈동자는 못참거든요(들썩들썩)

[작품 설정]

아드네빌라 인간ver

들썩들썩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