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802화 (802/813)

802 슈브론 해저 미궁

슈브론 해저 미궁에는 본격적인 해구라고 할만한 장소가 10곳이 있다.

해구에는 각각의 주인이 존재하며 큰 해구일수록 주인 또한 강해진다. 그리고 해구의 주인이 강해지는 이유는 미궁에게 힘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미궁의 힘, 심핵력을 말이다.

그건 해구와 해구 근처에 사는 이형종에게도 통용된다.

해구의 주인 근처에서 어물쩍거리며 주인이 받아들이고 남은 찌꺼기 같은 심핵력을 받아들여 강해진 이형종들.

크기는 작지만 하나하나가 4~5급을 오가는 각양각색의 이형종을 응시하던 환인은 혼령주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나직이 말했다.

『빛이 되어라.』

투우웅—

신언과 함께 신식 혼령주에서 거대한 빛기둥이 치솟는다.

여파를 우려해 위력과 성능을 억누른 혼령주가 아닌, 영적 신성을 가득 머금은 온전한 혼령주.

해구 위에 떠오른 무수한 이형종의 숫자에 마악 전투에 임하려던 여자들은 갑자기 치솟아 오른 따스한 빛기둥에 움찔했다.

뭘까, 이건. 신식 혼령주 같은데 스프라울드나 콜라이도에서 봤던 혼령주하고는 좀…… 다르지 않나?

여자들은 저 앞의 이형종을 경계하면서도 삽시간에 해저 미궁을 뒤덮어가는 혼령주를 곁눈질했지만, 콜라이도 때와 달리 빛기둥은 해저 미궁을 뒤덮자마자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어?=

=아….=

=주, 죽었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흉흉한 기운을 풍기던 이형종이 하나도 남김없이, 천천히 가라앉거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행도 볼 수 있었다. 이형종의 생전 모습이 뚜렷한 영혼이 하늘로 천천히 떠오르는 것을 말이다.

=…….=

=…….=

수백, 수천에 이르는 영혼의 빛이 위로 부상하는 것을 바라보던 여자들은 환인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에 흠칫하고 그에게 따라붙었다.

=도령, 도령! 방금 쓴 거 혼령주 맞지? 저 이형종들이 왜 갑자기 다 죽었어?=

“혼령주라는 명칭은 영성들이 만들어낸 단어다. 실제 이름은 ‘혼을 천상으로 인도하는 자애로운 빛의 길’이지.”

=그… 그러니까 죽어서 영혼이 저렇게 승천하는 게 아니라는 거야?=

“선후 관계가 다르다. 진정한 혼령주는 살아있는 대상의 육체에서 영혼을 강제로 뽑아 성불시키지. 그 예로 저 이형종들은 ‘아직’ 살아있다.”

=…지, 진짜다…….=

아영이 스쳐 떠오르는 허벅지만 한 은갈치 이형종 한 마리를 낚아채서 살펴보다 부르르 떨었다.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 않지만 아가미가 뻐끔거리고 지느러미가 꿈틀거리는 모습. 진짜 오빠의 말대로 ‘아직은’ 살아있다.

쿠르르르르르—

둥둥 떠다니는 ‘아직’ 안 죽은 이형종들의 사체 사이를 지나 마악 거대한 해구에 도달한 일행은 갑자기 해역 전체가 진동하는 느낌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어. 지진인가? 뭐지?=

=…안느 언니. 미궁이 방금 혼령주에 충격받은 거 아니에요…?=

사방에서 기포가 무수하게 떠오르고 산호 조각 등이 튀어나와 부유한다.

평범한 생선들, 어패류들이 깜짝 놀라 산호초에서 튀어나와 부산하게 헤엄치는데 그럼에도 이형종은 한 마리도 없다.

환인은 진동 때문에 해구 안쪽으로 하얀 모래가 쏟아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순간 눈을 날카롭게 뜨며 신격을 드러내었다.

『멈춰라.』

…르르르——…….

……날카로운 무언가가 영혼을 꿰뚫고 지나가나는 느낌, 그 후 거짓말같이 진동이 멈추는 모습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여자들은 뒤를 보곤 깜짝 놀라 몸을 날렸다.

인어들과 김철수, 김영수 둘이 눈을 까뒤집은채 기절해서 해류에 휩쓸려가고 있었던 것.

=얘들 왜 이래. 야, 정신 차려. 도령! 얘들 의식 잃었어!=

안느의 외침에 그쪽을 돌아본 환인은 잠깐 눈썹을 찡그렸다.

신경 쓸 게 많다 보니 저들을 잊고 있었군. 아신 비슷한 것의 신언과 신격을 이룬 아신의 신언이 같을 수 없다지만…….

“신언에 의식이 날아간 거다. 좀 더 신경 써야 했는데 실수했어.”

=우린 괜찮은데?=

“너희는 내 신성 부여를 받았으니까. 내가 신성 개입을 일으켜도 너희들은 아무렇지 않을 거다.”

=아.=

평온의 파동을 그들에게 쏘자 파동을 쬔 여섯은 즉시 정신을 차렸지만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끙끙 앓는다.

“김철수, 김영수.”

“끙… 넵, 형님…….”

“안쪽까지 같이 가는 건 무리겠지. 너희는 인어들과 밖에서 기다려라.”

“아, 알겠슴다…….”

시자한을 포함해 인어 셋과 김씨 둘을 밖에 남겨놓은 환인은 연인들만 챙겨 칠흑처럼 새까만 해구로 내려갔다.

안쪽에도 숨만 붙은 살아있는 시체가 둥둥 떠다니니 여자들은 그 기괴하고 기이한 광경에 소리 없이 긴장을 끌어올렸다.

아영과 팔짱을 끼고 해구 깊은 곳으로 환인을 따라 내려가던 백려강이 그녀에게 속삭인다.

=아까 지진…… 미궁이 한 거 같은데 조금 걱정돼….=

=걱정? 무슨 걱정? 오빠가 말 한마디로 멈춰 세우셨잖아. 이야, 그걸 보니 오빠가 진짜 신님이 된 게 실감이 나.=

지금까지 믿어온 짐승신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제는 오빠에게 기도와 믿음을 드려야 할 거 같다.

자신의 믿음과 기도가 오빠의 힘이 된다니, 그거야말로 기쁘고 황홀한 일이지 않은가.

‘그러면 나는 오빠교의 초대 여교황이 되는 건가?’

안느 언니가 있지만 언니는 성직자라기보단 기사에 가깝고? 성술은 내가 더 실력이 뛰어나니까 오빠의 교황이 되어서…… 교리를 내가 편찬하고…….

‘……꺄아~! 내가 교황이라니~!’

망상이 폭발해 속으로 꺆꺆거리는 아영의 귀에 긴장감이 가득한 백려강의 목소리가 닿았다.

=나, 난 미궁이 폭발하지 않을지 걱정이야…….=

=……미궁이 폭발해? 왜?=

=알소프의 미궁 있잖아. 그건 아드네빌라 님의 선력을 받아들이다 터졌거든…. 그런데 오라버니는 신님이 되셨고 아까 진동은 미궁이 오라버니의 혼령주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뜻이니까….=

=아.=

전에 들은 이야기가 한발 늦게 기억난 아영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심해 해구의 암흑을 쓱 둘러보다가 대답했다.

=괜찮을 거야. 오빠가 멈추라고 명령하니까 멈췄잖아?=

=그, 그럴까……?=

오빠의 파티에 들어오기 전에는 미궁이 살아있다는 말 따위, 허풍이나 사람을 현혹하는 소리로만 여겼는데 지금은 다르다.

미궁은 신님들이 만든 생명이다. 오빠도 신님이 되었으니까 미궁은 오빠의 힘에 놀라 떨어서 지진이 났던 걸 거야.

‘그러니까 오빠의 말 한마디에 진정하는 거지.’

논리가 조금 파탄 나 있는 추측이지만 아영은 이상하게 자신의 추측이 틀리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벨도 그렇구나 납득한 걸 보면 더 그렇지.

그렇게 잠수를 이어가다 해구의 입구가 달걀만큼이나 작게 보일 무렵, 안느가 약간 답답함을 토로했다.

=확실히 깊이 내려오니까 숨쉬기가 조금 답답하네.=

=이게 수압이지? 투명한 이불을 수십 장 덮은 느낌이야.=

=응. 벨하고 아영이는 괜찮아?=

=저는 괜찮아요. 물의 힘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거든요.=

=저도 괜찮슴다. 성투술로 몸을 강화하고 있어서 이 정도는 문제없어요.=

연인들의 상태 보고를 들은 환인은 안주머니 쪽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속에서 「지금 물정령을 걱정하는 거야?」하는 환연의 웃음기 섞인 질문이 날아든다.

환인도 살짝 웃었다가 금방 얼굴을 굳혔다.

분신체로 지켜보는 패시지의 풍경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

어느 독일의 고성 같은 패시지의 중앙성 성벽을 수만에 가까운 신전 병력이 둘러싼 광경. 그중 교단 지휘부라고 판단 되는 곳에 파발마 여럿이 부산스레 드나들고 있다.

하늘신, 바다신, 짐승신 교단의 상징과 색의 망토를 두른 파발들을 보면 영도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다.

신안으로 성벽 너머를 꿰뚫어 보면 성안에 시종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혼란과 공황에 빠져있는 모습, 왕족과 귀족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격렬한 토의가 흐릿하게 보인다.

‘조금은 시간이 확보되었겠군.’

초시공으로 현현시킨 분신체가 영혼처럼 비가시화가 가능하다면 정보 수집이 더욱 편할 텐데.

정신을 집중하거나 의식을 투사해봐도 그러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율력을 쓰면 될 것 같지만 현재로서는 율력을 쓰는 게 불가능하다.

상위 신이 허락하는 것은 아신의 기본 권능 세 가지, 신격화와 초시공 그리고 고의식 뿐인 것 같으니까.

신안은 그저 육체가 온전한 아신이 되어 붙은 부가 효과 같은…….

=어?!=

=아?=

여자들은 앞서 내려가던 환인의 신체가 한순간 영혼……처럼 반쯤 투명해졌다가 돌아오는 모습에 눈을 부릅떴다.

환인도 그것을 깨닫고 연인들을 진정시킨다.

“능력을 인지해서 잠깐 아스트랄 바디가 됐던 거다. 걱정하지 마라.”

=그……것도 아신의 능력이야?=

“그래. 신안을 의식했기 때문인 듯한데 아무래도 몸이 완전한 아신체로 변한 것 같군.”

안느의 질문에 대답해주자 아영이 백려강을 재촉해 환연의 곁으로 다가가며 묻는다.

여기서부터 보고 들은 전부를 정리해서 교리서로 만들어야 하니까!

=그냥 보면 그다지 바뀐 점이 안 느껴지는데요? 필멸자의 육체랑은 어떻게 다른 거예요?=

“모든 독과 질병에 면역이고 노화하지 않는다. 불로가 진정한 의미에서 실현되었고 불사도 일부분 가능해졌지.”

=부, 불사도?=

“신체를 상실하더라도 의지가 남아있다면 방금 너희가 보았던 아스트랄 바디 형태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율력이 충만해진다면 그에 걸맞은 신체를 다시 재구성할 수도 있겠지.”

=…….=

=…….=

환인은 연인들이 생각에 잠기는 것을 보고 슬쩍 웃으며 의식 일부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환인은 현재 세 가지 시점을 보고 있었다. 어떤 느낌이냐면 다중 모니터를 보는 감각이라 할까.

중앙에는 가장 큰 메인 모니터가 있고(본신) 시선을 위로 올리면 서브 모니터(패시지의 분신체)의 시야가 눈에 들어온다.

메인 모니터의 왼쪽으로는 요르문센 섬의 유르파와 노른, 이모렐에게 자신의 현 상황을 알려주는 서브 모니터가 돌아가고 있고, 어느 모니터를 보든 다른 쪽의 상황이 곁눈질하듯 어느 정도 보이는 느낌.

고의식 능력 덕분일까. 본체를 포함해 분신체를 최대 넷까지 동시 운용할 수 있을 듯하다.

율력과 신력만 충만하다면 분신체를 동원해 동시에 능력을 쏟아부을 수도 있겠지.

‘전염 특성으로 4체가 동시에 혼령주를 던지고 주변의 영혼을 무작정 끌어당기면…….’

……그다지 좋은 생각 같진 않다. 그랬다간 뭔가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거란 예감만 든다.

무엇보다 니오네브레스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자애신은 몰라도 다른 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정원에서 난동을 피우며 땅을 파헤치고 잔디와 나무를 부수는 정원사를 내버려 둘 집주인은 없으니까.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세 번째 분신체를 영도의 대성녀 앞에 현현시켰다.

아신의 초시공 발현은 가보았던 곳에 한하지만, 하늘에서 시야를 내려다보면 현현의 반복으로 수백 킬로미터쯤은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

패시지에서 주도를 내려다보는 분신체도 그런 방식으로 현현시킨 것.

아무튼 대성녀실은 한차례 일감의 파도를 넘긴 듯 주변에 수많은 책과 서류가 가득 쌓여있었다.

신수 기린의 뿔과 기다란 황금빛 채찍 같은 꼬리의 소녀는 그사이에 앉아 우아하게 차를 들다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환인을 보곤 켈록거리며 격하게 기침을 시작한다.

《…하읏, 성제…… 아아니 위신님? 방금 그것은…… 초시공!?》

『평소처럼 성제라 불러도 됩니다. 신위에 올랐다지만 지금은 그런 신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는 상태이니까요.』

먹먹하고 가슴 두근거리는, 조금 저급하게 말해 암컷의 표정이 된 닌실=아나그에게 현상황을 설명해주며 이별을 준비하는 환인의 시야에 거대한 수중 터널이 나타났다.

빛 한점 보이지 않는 새카만 가운데 안쪽에서 흐릿하게 흘러나오는 푸른 빛이 기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지오드 지협 지하의 신비로운 빛의 베일과는 또다른 느낌. 보고 있자면 불안이 가슴 속에서 고개를 드는 빛의 파장이다.

환인은 시점을 본신으로 옮기고 그 수중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들어갈수록 미궁의 경락 형태가 뚜렷해지고 강해지며 백청색과 붉은색 푸른색의 삼색이 혈관처럼 고동친다.

광원이 단지 푸르기만 한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푸르지만 속에 백청색과 희미한 붉은색이 섞여있다.

‘백청색은 아드네빌라의 선력인가. 붉은색은 일반적인 미궁의 기력이고 푸른색은…….’

수중 도시 워르나에서 본 지배 받는 미궁의 색.

이것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한 환인은 환연을 품 안에서 꺼내 안느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환연은 릴라이스와 합체하며 신체를 키워 물의 옷을 입고 물었다.

「왜 그래?」

“아드네빌라가 정신줄을 놓은 상태인듯하다. 미쳐서 위광이라도 쏟아내면 위험하니 거리를 두고 멀리서 따라와라.”

「신성 부여를 해줬잖아? 그걸로 신수의 위광은 못 막아?」

“격이 너무 낮아 신성 개입과 달리 신체에 타격을 주는 것이 위광이다. 그 타격을 이겨내지 못하면 죽는 거고, 이겨낸다면 멀쩡하거나 피해를 입는 거고.”

「그래서 쟤들이랑 같이 있다가 혹시 모를 위광을 막으라는 거네.」

“그래.”

일행 중 무력이 가장 약한 아영도 7급 성술사로 반쯤 인간을 초월한 능력자다.

백려강은 아드네빌라의 용인체이니 그녀의 위광에 면역일 가능성이 크며 이실리테와 안느는 명실상부한 초인 수준.

하지만 상대는 비록 영락해 미궁에 사로잡힌 얼뜨기라지만 백청룡, 수천 년을 살아온 용이다. 어찌 될지 모른다.

그렇게 일행을 뒤로 물려서 따라오게 시킨 환인은 초시공의 응용으로 잔상을 남기는 것처럼 빠르게 수중 동굴 안쪽으로 나아갔다.

팟—

그렇게 수중 동굴 끝에 다다르자 공기가 가득한 거대 공동이 출현했다.

크기만 따지면 지오드가 있던 대공동을 상회하는 수준.

그런 거대 공동의 중심부에는 작은 집만한 투명한 수정체가 기묘한 백청적의 연기를 그 몸에 감싼채 은은한 빛을 흘리고 있었고…….

《크으으으르르르…….》

그런 수정체, 심핵을 길이만 킬로미터에 가까운 백회색의 용이 눈알을 까뒤집은 채 똬리를 틀어 지키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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