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93화 (793/813)

793 수중도시 워르나

=리엘라, 네이반. 당신들은 그만 돌아가도 좋아요. 샤르아는 호명원으로 가서…….=

얼핏 계곡처럼 보이기도 하는 소라 성의 갈라진 틈, 거기서 흘러나와 저수지처럼 고인 물속에서 시드네가 세 인어에게 말을 건넨다.

그 틈에 환인은 본격적으로 워르나에 대해서 분석하기 시작했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수천 미터 높이의 난원추형 소라성.

나선상의 늑肋이 소라성의 외벽을 멋지게 장식 중인 데다 빌딩 규모의 관돌기管突起가 무수하게 뻗어나와 그 멋을 더한다.

나층螺層이 흡사 원반처럼 넓게 퍼져 층을 나누고 나탑螺塔도 천장을 찌를 듯이 뾰족하게 솟은 데다 외벽은 아리도록 푸른색.

각구殼口 안쪽에서부터 바깥으로 펼쳐진 면은 흠 없는 진주 광택이 번들거려 인세의 건축물이라는 느낌이 조금도 없다.

우연히 발견한 거대 소라를 성으로 삼은 모양새라고 할까.

곳곳의 갈라진 틈과 홈에서는 어지간한 강물만큼이나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나와 허공을 따라 흐르고, 그런 공중수로 수십 개를 해린족들이 길 삼아 헤엄치며 오가고 있다.

수로에 붙은 판에는 인어들의 집이 있었는데 집도 흔한 소라를 이리저리 쌓아놓은 듯한 특이한 형태다.

소라성, 공중수로, 그리고 수로와 연결된 집 다음에는 정령이다.

불의 정령은 아예 없고 최하급에서 상급까지 물의 정령이 80%를 차지하는 수준, 빛정령도 백에 하나 수준으로 적다.

그 때문일까. 소라성의 외벽색처럼 분위기에서부터 색조까지 온통 푸른색이라 눈이 찡할 지경.

환인은 자신을 신기한 듯 흘겨보며 지나가는 상급 물정령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시야의 끝에는 안과 바깥을 나누는 저 거대한 막이 있었는데 스노 글로브처럼 완벽한 원형의 구체 너머를 옅은 청색이 감도는 흑색이 까맣게 채우고 있다.

‘저 막은…….’

신식 영혼의 눈으로 흐름을 확인하자 시드네가 걸어주었던 공기 방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 보인다.

그렇다면 저 바깥은 바다고 막을 통해서 물에 포함된 산소만 걸러 안으로 유입시키는 건가.

환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런 대규모를 넘어 초월 규모의 술법이라니.’

지름만 6km의 구체다. 술법의 효과는 둘째치고 이만한 영역을 전개하는 것부터가 초월급 난이도일텐데.

여기에 만약 저 막 바깥이 바다라면 이만한 넓이의 보호막이 받는 하중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저 막의 바깥에서 괴물이 공격하는 것에 대한 대비는?

막의 효과, 막의 강도, 막의 방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사람이 펼칠 수 있는 역량을 아득히 초월했다. 초월급을 넘어 신화급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

이런 걸 펼치고 유지할 수 있는 존재라면…….

‘아신 정도겠지. 나와 같은 반쪽짜리가 아닌 온전한 아신.’

그것도 저런 영역 술법 계통으로 극에 다다른 존재가 아닐까.

하지만 아신은 지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들었는데.

=굉장히 신비한 장소네……. 안느, 넌 워르나에 대해서 들어본 거 있어?=

=아니. 우리 가문도 그렇고 다른 왕가 사람도 여기까지 온 사람은 아마 없지 않을까…….=

“…….”

이실리테와 안느의 속삭임을 들으며 잠시 생각하던 환인은 운동장을 만들어도 될 만큼 넓은 진주 광택의 날개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 끝에서 수백 미터 아래를 내려다보자 땅과 물이 반반씩 보이는데, 물속에는 수초와 닮은 풀이 밭처럼 빼곡히 자라고 있었고 흑갈색의 땅에는 나무 크기의 산호가 흡사 과수원처럼 모여 형성되어있다.

수초와 산호 같은 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도의 기록서에도 없는 덩굴식물 같은 것을 수경재배 중인 인어도 있고 바다사자와 하마를 섞은 듯한 돼지 크기의 동물을 키우는 장소도 있다.

그리고 환인의 시선이 그 흑갈색의 토양에 닿았을 때, 그는 이 불가사의한 장소에 대해 완벽히 이해했다.

“미궁이군.”

「……여기가 미궁이라고?」

그의 뒤를 따라왔던 환연이 환인의 혼잣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래. 조금 전 통과했던 그 술법진은 미궁의 입구였을 거다. 어쩐지 심핵력이 희미하게 느껴지더라니.”

전혀 짐작도 못 했다는 표정을 짓던 환연이 저수지에서 공중수로로 빠져나가는 리엘라, 샤르아를 힐끔 보며 물었다.

「저 애들은 이형종으로 안 보이는데.」

“언제고 이런 말을 했었지. 심핵을 조종할 수 있다면 미궁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거나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아……. 해린족이 미궁을 하나 차지해서 이렇게 변화시켰다는 이야기네. 그건 어떻게 알았어?」

“저 아래의 땅에서 미궁의 경락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미궁의 경락은 미궁의 바닥이나 벽을 타고 혈관처럼 흐른다. 색도 적색을 띠며 간간이 고동치듯 붉은빛을 뿌린다.

하지만 저 아래 땅에 보이던 것은 똑같은 경락이지만 색이 달랐다.

“은은한 푸른빛을 내더군. 이 공간의 청색 기조는 경락의 색으로 인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점이 환인의 의구심을 부추기고 있었다. 미궁을 해린족의 여왕이라는 사람이 정복하여서 도시로 만든 게 아닐까, 하고.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소라성이 미궁의 일부라고 하면 많은 의문점이 해소되지 않는가.

=여행자님?=

시드네가 부르는 소리에 환인은 표정을 온화하게 바꾸고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도시가 놀랍군요. 니오네브레스의 4개 국가 도시를 다녀봤지만, 이곳만큼 독특하고 신비로운 곳은 처음입니다. 다른 종족은 결코 이런 장소를 구현할 수 없겠지요.”

=…다, 당연하죠! 워르나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운 도시는 세상에 또 없을 거예요!=

환인의 적나라한 극찬에 짧게 당황하다가 어색하게 으스대는 모습은 고혹적인 외모와 갭을 만들어 귀여움을 드러낸다.

환인이 부드럽게 미소를 짓자 살짝 붉어진 얼굴로 으흠, 헛기침을 한 시드네는 저수지에 잠수해 휘파람을 한차례 불었다.

그리고 다시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을 때 소라성쪽으로 이어진 수로 저편에서 해마를 닮은 생물이 쏜살같이 수로를 헤엄치며 다가왔다.

뀨~!

뀨뀨!

크기가 말보다 조금 작은 생물 네 마리가 순식간에 다가오더니 시드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장난치듯 길고 뭉툭한 주둥이로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꾹꾹 눌러댄다.

=아하하. 그만, 그만해!=

웃으며 해마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진정시킨 시드네는 환인 일행에게 파랗고 노란 해마들을 가리켰다.

=다들 매하의 등에 타세요. 장로님은 각청궁 하층에 계셔서 매하를 타고 가는 것이 빨라요.=

“알겠습니다.”

환인이 먼저 수영장처럼 각진 저수지 가장자리에 서자 매하들이 서로 환인을 먼저 태우려 몸싸움을 벌인다.

뀨! 뀻!

뀨우? 뀨~

뀨잇.

돌돌 말린 꼬리를 휙휙 휘둘러서 다른 매하를 때리고 주둥이로 다른 매하의 몸을 쿡쿡 찌르고.

환인이 보기에 몸싸움이라기보단 서로 장난치는 느낌이다.

그러다 넷 중 덩치가 조금 더 크고 힘이 세 보이는 매하가 당당하게 환인에게 등을 내밀었다.

“잘 부탁한다.”

환인이 매하의 등에 올라타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꼬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기분 좋은 듯이 저수지를 빙글빙글 도는 매하.

여자들도 차례대로 매하의 등에 올라타면서 웃었다.

“애들이 귀엽네~.”

“쿠에들만큼 순한거 같아.”

쿠에들도 순하고 착하지만 장난기나 애교는 별로 없다.

하는 장난이래봐야 슬쩍 주인 뒤에 다가가 이마로 주인의 등을 툭툭 미는 정도에 애교도 주인이 길에 앉아 쉬고 있으면 슬그머니 다가와 옆에 앉는 수준.

하지만 매하는 사람을 등에 태우고 몸을 들썩이며 장난치는가 하면, 등에서 다른 곳을 보고 있으면 자길 보라며 꼬리로 물을 튕기기도 하고 노래 부르듯 뀨뀨~ 소리 내 울기도 한다.

=이런 애들이 밖에도 많으면 강이나 바다를 다니기 편할 거 같은데. 왜 밖에서는 못 봤지?=

=매하들은 무척 약해서 수온이 낮거나 자주 변하는 곳은 지내기 힘들어하고 싸움도 못 해서 자기 반의반도 안 되는 물고기한테 집을 빼앗기기도 하죠. 심할 때는 멸치 떼한테 쫓겨서 도망치기도 해요.=

시드네의 설명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멸치면 손가락 세 마디 정도 되는 다른 생선들의 먹이가 아닌가. 그 정도면 멸종 안 한 게 이상할 정도인데?

아무튼, 저수지를 나와 공중수로로 들어서자 매하들이 점차 속도를 내기 시작했는데, 여자들은 오금이 저려서 매하의 등에 납작하게 달라붙어야만 했다.

투명한 탓에 수로 아래로 수백 미터 거리의 땅이 훤히 보인다. 거기에 수로의 좌우 폭은 10m 정도인데 매하의 속도는 육상의 쿠에 전력 질주와 비슷한 수준.

공중수로는 롤러코스터처럼 이리저리 휘어있는데 매하가 코너를 돌 때마다 몸이 쏠려서 수로 바깥으로 튕겨 나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행하는 시드네를 따라 5분 정도 수로를 즐겁게 달린 매하들은 지상에서 그다지 높지 않은 수로로 내려와 소라성, 각청궁의 하부 출입로에 들어서며 뀨뀨— 울었다.

그즈음 여자들도 매하의 속도에 적응했기에 굉장히 신기한 느낌의 출입로를 이리저리 살피며 감탄사를 흘렸다.

수로가 아니라 뭔가, 생물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라고 할까.

=이슬아. 벽 좀 봐. 꼭 진주 같지 않아?=

=그러게. 물도 놀랄 만큼 깨끗한데 소금 내는 전혀 안 나고…… 이 많은 물이 어디서 흘러나오는 걸까?=

=음~. 땅속 지하수를 끌어올려서 각청궁을 순환시키는 거려나? 글론드 섬 북부의 한 도시에 엄청나게 커다란 분수가 있거든. 그 분수가 지하 수맥에서…….=

안느의 조곤조곤 듣기 좋은 목소리가 타원형으로 길쭉한 통로에 작게 울려 퍼진다.

앞서 헤엄쳐가던 시드네가 바로 뒤를 따라오는 환인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안으로 쭉 들어가다 보면 교차로가 나오는데 그곳이 장로님들이 모여 사시는 장로원이에요.=

“그렇군요. 하층에 장로님들이 계신다면 상층은 여왕께서 기거하는 장소입니까.”

=네. 앉은 자리에서 워르나 전체를 내다보시는 우리들의 위대한 여왕님이시지요!=

“…….”

정말 존경하는지 뽐내듯 콧대를 세우는 시드네에게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준 환인은 다시 오른쪽의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들의 눈에는 진주색 매끈한 통로지만 환인의 눈에는 푸른 경락이 다소 느슨하게 안쪽으로 이어지는 미궁의 통로다.

적색과 청색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적색은 혼재처럼 불길하거나 음침하고 위협적인 것이었다. 청색은 위상력과 밀접하며 순수나 청명과 감각이 흡사했다.

‘인류 친화적인 미궁은 이렇게 청색 경락을 가졌을지도 모르겠군.’

환인은 자기 손바닥을 보았다. 만약 자신이 미궁을 장악하면 그 미궁의 경락은 황금빛이 되는 걸까.

=도착했어요! 저 앞이에요!=

시드네의 작은 외침에 고개를 들자 흡사 근현대 유럽의 기차 플랫폼과 비슷한 느낌의 역사가 나타났다.

일행이 들어왔던 수로 외에 수로가 하나가 더 있는데 그곳은 성 안쪽에서 나오는 길인 듯, 인어 몇몇이 헤엄쳐 나와서 자신들이 들어온 방향으로 나가거나 짐을 잔뜩 실은 매하의 등에서 짐을 내리거나 한다.

끼이~ 끼끽.

끼?

그런데 매하의 등에서 짐을 내리는 자그마한 생물이 일행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가죽이 물색에 피부도 깔끔하고, 투박하지만 옷도 입은 데다 산타 모자 같은 걸 머리에 쓰고 있어 조금도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민머리에 추악한 외모의 육상 호브와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종처럼 느껴질 정도.

=시드네 씨. 저 생물은 뭐야?=

=네? 아, 시클링이에요. 우리 해린족의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고 해린족인 우리는 저 아이들을 지켜주죠.=

=상부상조한다는 거네. 생긴 건 호브랑 비슷한데, 성격은 어때? 대화는 통해?=

=복잡한 이야기는 잘 못 알아듣지만 손짓을 더하면 소통이 어렵지는 않아요. 그리고 호브라면 육지의 마물이죠? 저들은 바다의 아인종이예요.=

키는 100cm 정도밖에 안 되는데 힘은 강한지 자기 덩치 두 배나 되는 짐을 어떤 문 너머로 수월히 옮긴 시클링 둘은 인어의 칭찬에 헤헤 해맑게 웃더니 매하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린다.

확실히 성격은 좋아 보인다. 인어들도 시클링을 차별하지 않는듯하고.

환인과 여자들이 매하의 등에서 내려 여전히 진주처럼 광택 나는 바닥에 올라서자 시드네가 웃으며 벽에 난 문 하나를 가리켰다.

=아무튼, 여행자님. 저기 세모 문양이 여러 개 새겨진 문 보이시나요? 저곳으로 들어가시면 시자한 비아트 장로님이 계세요. 그분과 대화를 나눠보시면 궁금증을 해결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이야기를 전해주시고 이렇게 안내까지,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여러분이 대접해주신 음식 정말 맛있었어요.=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 시드네는 매하와 함께 수로 저편으로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녀가 안 보이게 되자 환연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손가락을 튕긴다.

그러자 오면서 물에 흠뻑 젖었던 환인과 두 여자의 몸에서 삽시간에 수분이 제거되어 뽀송뽀송해졌다.

「환인. 오면서 계속 주위를 살피던데, 어때? 여기가 정말 미궁이야?」

=응? 여기가 미궁이라고?=

“그래. 벽에 미궁의 경락과 같은 것이 보인다. 하지만 적색으로 고동치는 게 아니고 청색인데다 고동도 약하다. 경혈도 안보이고.”

=정신 침해 현상도 안 느껴지는데……?=

“아마도 해린족의 여왕이라는 사람이 지배하고 있어서겠지. 사람들 앞에서 티 내지 않도록 주의해라. 환연도 여기서는 엿보기를 멈추고.”

여자들에게 작게 경고해준 환인은 시드네가 가리켰던 문으로 다가가 턱턱턱, 문을 두드렸다.

잘 보니 나무나 철이 아니라 산호로 만든 문이다.

[들어들 오시게.]

“…….”

장로라는 것이 허명은 아닌지 목소리에서부터 강한 힘이 느껴진다.

위상력의 제어가 매우 능숙한데다 흘러넘치기까지 해 목소리에서 위상력이 희미하게 묻어나는 수준.

못해도 시하=사이지 8급 호족이나 프슈드 백작급이다.

그걸 이실리테와 안느도 눈치채고 살짝 긴장을 다잡는다.

“들어가겠습니다.”

여닫이문이라 옆으로 문을 옆으로 밀고 들어가자 실내 수영장처럼 수심 1m 정도의 실내가 나타났다.

목소리의 주인은 사막의 유사와 같은 짙은 아우라의 중년 인어였다.

백황색 머리카락을 곱게 땋은 인어는 매끈하게 깎은 산호 의자에 앉아 비늘을 깁다가 환인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서 오시게, 여행자. 시드네에게 듣기로 매우 중한 일로 요르문센 섬을 방문하였다던데.=

“예. 백청룡 아드네빌라를 수소문하기 위해서입니다.”

눈가에 세월의 흔적이 희미하게 깃든 그녀는 놀랍게도 왼쪽 쇄골에서부터 오른쪽 골반까지, 젖가슴의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어마어마한 흉터가 몸에 새겨져 있었다.

그 외에도 젖가슴, 팔과 옆구리, 아랫배 등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남았다 아문 흔적이 가득했으며 얼굴에도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번개 같은 흉터가 있었는데, 그 눈은 백황색이 아니라 탁한 회색으로 잠겨있어 시력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물고기 하반신에도 깨지거나 금가고 색이 다른 상처가 가득하며 뒷지느러미도 너덜너덜해 그걸 본 안느가 살짝 놀라 중얼거렸다.

=흉터의 전사…….=

스카 워리어. 몸에 흉터, 자잘한 흉터가 아니라 목숨을 위협하는 흉터가 많을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희귀 직업으로 그 강력함과 억셈은 광전사를 능가한다고 알려져 있다.

저만한 흉터라면 동급 희귀 직업자 사이에서는 한 손에 꼽을 만큼 강력할 것이다.

환인은 장갑을 벗고 가슴에 손을 올리며 예의를 표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환인, 자애신님의 등불을 앞세워 길을 걷는 나그네입니다.”

=영혼사님이셨나? 이런 결례를…… 본인은 노아라트 부족의 무력 방면 장로, 시자한 비아트일세.=

꿰어서 갑주로 만들고 있던 비늘을 내려놓은 시자한도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무발현자라니, 워르나가 오늘 정말 드문 분을 손님으로 맞이한 것 같소.=

“저 역시, 비아트 장로님 같은 분을 이곳에서 뵐 줄 상상도 못 하였습니다.”

=하하. 흉터 전사는 요절하기 딱 좋으니 말이오. 이럴 게 아니라 안쪽으로 드시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오겠소.=

그녀가 부엌으로 이동하고, 집 안쪽으로 들어가던 환인은 이실리테가 시자한의 등에 계속 시선을 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등에도 상처가 있지만 몸의 전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다.

“적을 앞에 두고 절대 돌아서지 않는 용맹무비한 전사라는 뜻이겠지.”

=네.=

전사로서 당당함뿐만 아니라 여자로서 부드러움까지 지닌 시자한=비아트에게 인생의 롤모델을 발견한 듯한 모습이다.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어준 환인은 스툴 같은 적당한 의자로 가서 앉았다.

인어라고 해도 체형은 하반신만 물고기일 뿐이지 허리 높이 등은 사람과 흡사하다. 덕분에 가구 사이즈도 비슷해 앉는 것은 문제가 없다.

의자의 높이는 물에 잠기는 것을 고려해서인지 일반 의자보다 높지만, 다리 받침대가 있는 데다 허벅지 아래가 물에 잠기는 수준이라 앉기 불편하진 않다.

실내는 침실 하나, 응접실 하나, 거실에 부엌 하나 뿐이며 인테리어도 산호나 보석, 괴물의 뼈 등으로 장식한 몇 가지 뿐인 수수한 곳이다.

물과 가까운 생활을 하는 종족이다보니 부실한 인테리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인듯하다.

‘구석에 작은 수로가 있어 물이 계속 순환하는 거군.’

인어의 집을 둘러보며 잠시 기다리자 시자한이 동그란 사탕 같은 것과 산호 비슷한 수수깡 같은 것을 접시 두 개에 담아 내왔다.

그리고 환인의 맞은편에 앉은 시자한은 정중한 태도로 요청했다.

=평온의 파동을 한 번 견식 시켜주실 수 있겠소? 의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걸 이해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부탁드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주셨으면 하오.=

“물론입니다.”

외부와 왕래가 거의 없다고 하는 종족이다. 성제에 대한 소식도, 성제의 영혼 기사에 대한 소식도 듣지 못했으니 신분 확인차 당연한 요구라 할 수 있다.

환인은 오해하지 않도록 구식 평온의 파동을 먼저 펼쳤고, 시자한 장로의 표정이 더욱 호의적으로 변하였을 때 황금빛 광채를 조그맣게 퍼트리는 신식 평온의 파동을 썼다.

=아…… 아니, 방금 이것은 대체……?=

“시드네 씨를 통해 우리가 백청룡 아드네빌라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겁니다. 별 볼 일 없는 이들이 신수인 백청룡을 찾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의심을 살 수 있는 일이지요.”

=…혹시 환인 영혼사께서는…….=

“짐작하신 것이 맞을 겁니다.”

=…….=

시자한 장로가 영혼사 계통 희귀 직업으로 착각했음을 환인은 눈치챘지만, 딱히 생각을 정정시키지 않았다.

대신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드네빌라는 현재 도르와인 섬과 요르문센 섬 사이 해역에서 메리아놀의 주도에 연일 비를 퍼붓고 있습니다.”

해당 도시에만 내리는 게 아닌, 도시 주변과 그사이 해역에도 이미 반년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뿌리고 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생태계 문제와 삶의 터전에 문제가 발생한 나가족과 괴물이 대량으로 요르문센 섬에으로 향하고 있단 이야기까지.

심각한 얼굴로 환인의 이야기를 듣던 시자한 장로는 눈을 감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요르문센 방면에서 날아드는 공격 소식이 근래에 부쩍 늘어 어떤 이유인가 싶었더니…….

=……신수께서 이토록 긴 시간 비를 뿌리며 뭍 중생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신수의 영성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됩니다.”

=그렇……군요…….=

환인의 짧은 대답에 시자한 장로는 대강의 사유를 깨닫고 으음, 침음성을 흘렸다.

육지 인간은 바다에서 그 실력의 30%도 내기 어려워한다. 그마저도 수면에 있을 때의 이야기, 수중으로 들어가면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은 격감해 특정 직업은 제 실력의 10%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신수가 영성이 꺾였다면 찾아갔을 때 전투까지 각오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찾아왔다는 것은 그만한 실력이 있거나 상황을 타파할 비책이 있다는 뜻.

시자한 장로는 눈앞의 남자의 비범한 면목을 일부 들여다보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워르나의 안전을 무력 방면에서 보조하는 장로입니다. 영혼사님께서 바라시는 정보는 정수 방면 장로가 알지도 모르겠군요. 그녀에게 영혼사님을 안내해…….=

말하던 시자한 장로는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무언가 메시지를 수신한 것처럼 천장을 올려다본다.

10초 정도 그 상태로 굳어있던 장로는 당혹스럽다는 얼굴로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저, 정수 방면 장로에게 영혼사님을 안내해드리려 했습니다만……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여왕님께서…… 이런 경우는 정말 없었는데, 여왕님께서 영혼사님을 상층으로 모셔오라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엥. 왜지?=

안느가 의아해하다가 슬쩍 환연을 쳐다본다. 초월 물정령과 합체한 그녀의 기운을 여왕이 포착한 건가 싶었던 것.

그 시선에 환연은 작게 눈썹을 찡그리며 자신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장로마저도 못 알아차릴 정도로 기운을 완벽하게 감추고 있는데.

그럼 왜?

몰라. 아무튼 난 아냐.

‘……나 때문이군.’

환인은 금방 자신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아신위는 완벽히 감추었지만 시자한 장로에게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쏜 평온의 파동 에너지가 경락으로 흘러 들어가 여왕이 있는 곳까지 닿았겠지.

환인도 자리에서 일어나 당혹스러워하는 시자한 장로에게 부탁했다.

“여왕께서 계신 곳까지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저와 같이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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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뚜껑이 덜그럭덜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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