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2 수중도시 워르나
공격해온 나가족을 몰살시켜버린 인어들은 죽인 나가족의 시체를 챙기기 시작했다.
「물속에 자욱이 퍼진 나가족의 피와 살점에 질색하는 표정을 보면 식량은 아닌가 봐.」
“인어들은 상반신에 비늘이 없었으니까. 나가족의 비늘로 비늘 갑옷을 만들어 입기라도 하는 거겠지.”
「비늘 색이 달랐는데? 아, 탈색이나 염색 방법이 있나 보네.」
산호창을 휘감은 소용돌이는 광역 폭발 효과 부여 같은 느낌이었기에 사지 멀쩡한 나가족은 백려강의 화살에 죽은 것들 뿐.
인어들, 해린족은 그나마 멀쩡한 나가족의 신체 일부와 백려강의 화살에 죽은 사체도 해초 밧줄로 묶어서 협만으로 돌아온다.
환인은 커다란 갑옷 도마뱀의 꼬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나가족의 하반신 여러 개를 묶어서 가져가는 인어를 바라보다 이쪽으로 빠르게 헤엄쳐오는 시드네에게 눈길을 주었다.
다른 해린족도 강했지만, 4급 전사의 아우라를 내뿜는 해린족은 그중에서도 특출난 강함을 자랑했다.
선명한 분홍색 산호창에 다른 해린족처럼 소용돌이를 감은 것까진 똑같았지만, 거기에 위상력을 더해 휘두르니 마치 용권풍처럼 바닷속을 휩쓸었던 것.
아우라의 농도는 4급에 불과한데 실제로 발휘하는 능력은 거의 6급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배에 가까이 다가온 시드네가 아까처럼 물기둥을 일으켜 환인과 눈높이를 맞추고 입을 열었다.
=여행자님. 나가족의 퇴치에 도움을 주어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우리가 돕지 않았어도 수월히 퇴치했을 실력과 강함을 지니셨더군요.”
=저 궁사님이 나가족을 한 차례 흔들어놓으신 덕분이지요. 어쨌든, 육지 사람이시니까 시체를 가져오기 곤란할 것 같아 챙겨왔는데 갑판 위로 올려드릴까요?=
그녀의 질문에 환인은 유르파를 돌아보았다.
=나가족의 시체는 딱히 필요 없어. 피랑 지느러미가 있으면 수중 호흡 비약을 만들 수 있지만 그건 버들 물풀하고 바다 버섯초가 있어도 만들 수 있거든. 그 외에 몇 가지 연금술의 재료가 되지만 대체 재료는 충분히 갖춰놨고.=
“…그렇다는군요. 우리에게는 필요 없으니 해린족 여러분들이 원하신다면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고마우셔라.=
시드네는 환인에게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주고 나가족 사체를 끌고 와 대기 중이던 동족들에게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인어들이 산호칼을 꺼내 나가족의 배와 가슴을 갈라 위상석을 찾아내더니 한데 모아서 환인에게 넘겨준다.
그것까지 거절할 생각이 없었던 환인은 9개의 1~2급 위상석을 건네받으며 생각했다.
‘중립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매너는 갖추고 있군.’
비비큐 파티를 시작하기 전, 해린족의 영혼을 통해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이들은 무관심에 가까운 중립을 육지 사람에게 표방한다고 하였다.
육지 사람을 돕지 않는다. 육지 사람에게 도움을 받지도 않는다.
이곳, 요르문센 섬에서 모여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종족. 그게 해린족이었던 것.
하지만 그들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협만에 배를 정박시키는 걸 보아넘겼고 도움을 주자 그에 대한 감사 인사도 해왔다.
정책은 절대적인 중립이지만 실상은 느슨한 중립인 느낌이다.
위상석을 받아 주머니에 넣는 찰나의 순간에 생각을 정리한 환인은 시드네의 시선이 선상의 비비큐 그릴로 향하는 걸 포착하고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같이 드시겠습니까? 점심시간이라 식사를 준비했는데 보시다시피 양이 많아서요.”
=그, 그건…….=
환인의 권유에 시드네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리엘라 덕분에 맛본 닭고기꼬치가 그녀의 머릿속에 떠다니고 지금도 그릴에서 구워지고 있는 꼬치구이의 냄새가 그녀의 위장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중이다.
여기에 권유까지 더해지니 더 이상 참기 힘들 지경.
극심한 유혹에 시드네가 우물쭈물하는 것을 환인은 못 본 척, 비비큐 그릴을 바라보며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다른 분들도 드실 만큼 있으니 다들 올라오셔서…… 아, 갑판으로 올라오기 힘드실 텐데 저걸 어쩌지.”
그의 곤란해하는 모습에 눈을 질끈 감은 시드네는 유혹에 굴한 모습으로 배시시 웃음 지었다.
=식사에 초대해주셔서 고마워요. 자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그러더니 물기둥의 물 일부와 함께 갑판으로 폴짝 뛰어내리는 시드네.
놀랍게도 물은 물풍선처럼 그녀의 하반신을 감싼 채 쏟아지거나 터지지 않고 유지된다.
=여행자님이 점심 식사에 초대해주셨어요. 다들 여기로 올라오세요.=
=정말요?=
=와!=
그렇지 않아도 저 배 위에서 아까부터 호기심을 무진장 자극하는 냄새가 풍겨와서 참기 어려웠는데 초대라니!
여인들은 시드네의 이야기에 나가족 사체를 다 내팽개치고 재빨리 하얀 산호처럼 깨끗한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시드네처럼 물기둥을 만들어 올라오는가 하면 30m 가까이 돌고래처럼 솟구쳐올라 갑판에 착지하거나 둥실 떠오르는 커다란 물방울을 만들어 그 위에 엎드려서 올라오기도 한다.
그렇게 총천연색 머리카락의 인어들이 갑판 위로 올라오자 김철수와 김영수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으헤헤,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인어들이 하나같이 절세 미녀였기도 했지만, 무겁다며 비늘 갑옷을 벗으니 그 아래에 속옷을 걸치지 않은 젖가슴이 젖꼭지와 함께 그대로 드러났던 것.
뜻밖의 횡재에 두 김씨가 기뻐하는 사이 갑판 한쪽에 비늘 갑옷과 산호창을 내려놓은 인어들이 물 구슬을 타고 능숙하게 비비큐 그릴로 다가가며 재잘거린다.
=흠흠…… 하아아!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요.=
=와, 와아. 와아아!=
=이게 육지 사람들이 먹는 음식인가요……?=
그런 동족들에게 짝짝, 손뼉을 쳐서 시선을 모은 시드네는 환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행자님께서 식사에 초대해주셨어요. 다들 감사 인사를 하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여행자님~.=
=식사 초대 고마워요….=
=감사히 잘 먹을게요~!=
인어들이 합창하듯 한마음 한뜻으로 목소리를 높이니 흡사 청소년 성가대처럼 깔끔하고 아름답게 들린다.
그렇게 연장된 식사 시간.
환인의 여자들은 그의 마음을 읽고 12명의 인어들을 위해서 꼬치를 굽는 시범을 보여주고 요청을 받아 꼬치를 만들어 주는 등 해린족과 친분을 쌓아나갔다.
고기를 굽는 건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 백려강, 아영과 이모렐 여섯뿐이지만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인어들은 의외로 소식을 하는지 꼬치구이 서너 개로 배불러 했기 때문.
체구는 140~160cm를 오가는 편이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먹는 양이 적다.
=더 안 먹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너무너무 맛있지만…… 맛이 너무 진해서 많이 먹기 힘들어요!=
=더 먹고 싶은데 더 먹었다간 배가 아플 거 같아요…….=
조미료도, 향신료도 거의 없는 삶을 살던 인어에게 각종 조미료가 들어간 꼬치구이는 자극 그 자체.
여자들은 그 사실을 깨닫고 비교적 담백한 맛, 소금만 살짝 뿌린 기본적인 꼬치구이를 만들기 시작했고 인어들은 크게 기뻐했다.
그녀들의 주식은 생선과 해초 같은 해산물이다. 정확히는 해산물 밖에 먹을 게 없다.
그러다 보니 육지 고기의 맛이 궁금했는데 그걸 이렇게 해소해주다니!
육지의 음식뿐만 아니라 남자들의 모습도 인어들에게는 호기심 그 자체였다.
=와아, 육지의 남자!=
=정말 우리랑 비슷하게 생겼네?=
=신기해요. 진짜 비늘이 없어요.=
“으헤헤…….”
“아흥…….”
꼬치구이를 하나씩 든 미녀들의 스스럼없는 터치에 김철수와 김영수의 광대뼈가 끝없이 승천한다.
물 밖에 나와 있어 피부가 마르며 뽀송뽀송해지니 어쩐지 좋은 냄새까지 났고, 크고 작은 젖가슴이 바로 눈앞에서 출렁이며 시선을 빼앗으니 두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천국 같았던 것이다.
예쁜 여자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받아본 적이 있어야 내성이 생기던가 말든가 할게 아닌가.
여자들이 인어들을 맞이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고 있을 때, 환인은 시드네와 다른 인어 한 명에게 직접 꼬치를 구워주면서 이런저런 세상 흘러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각하거나 문제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나라는 현재 어떤 분위기인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는지.
=지금 소금을 뿌리는 건가요?=
=네. 굽기 전에 소금을 뿌리면 육즙이 흘러나올 수 있으니까요.=
=육즙……? 그게 흘러나오면 맛이 없는가요?=
=이것처럼 딱딱하거나 퍽퍽하게 변해서 맛이 약간 떨어지게 변해…… 앗, 그걸 드시면…….=
=으음! 정말 아까 먹었던 것과 달리 딱딱하네요. 하지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맛이 있어요!=
그러나 시드네는 바깥일에 관심이 없었다. 환인이 이야기를 하면 잠깐 들어주다가도 이실리테가 숯불에 고기를 구우면 거기로 시선을 돌리기 일쑤.
오히려 그녀의 곁에 있던 군청색 머리카락의 인어, 샤르아가 환인의 이야기에 더 관심을 내비쳤다.
=말씀대로면 바깥세상은 큰일이네요.=
“세상이 혼잡할수록 삶은 고단해져만 가니까요.”
물론 큰 사건 사고 소식만 들어 그렇게 느낄 뿐, 실제 큰일에 휘말리는 시민들은 니오네브레스 전체 인구로 보자면 극소수다.
대다수는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도 오늘과 같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간다.
=그래서 육지 인간들이 더는 이 근처를 지나지 않는 걸까요.=
“그렇습니까.”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40년 전까지만 해도 가끔 육지 인간들이 보였는데 지금은 아예 볼 수도 없게 되었다고 들었어요.=
리엘라와 다른 인어들이 호기심을 보였던 이유가 이건가.
“근래에 큰일이 생겨서 이쪽으로는 사람들이 더욱 잘 오지 않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구워졌으니 이걸 드시죠.”
=감사해요. 큰일이라면 저 하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따라 협만 입구 쪽을 돌아본 환인은 먹구름으로 가득한 서쪽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저 구름이 생겨난 이유를 아십니까.”
=아니요. 그걸 아는 분은 장로님이나 여왕님뿐이실 거예요. 저희 같은 전사들은 몇 개월째 계속 비를 뿌리는 하늘이 이상하다고만 생각할 따름이고요.=
환인이 내민 양고기꼬치를 한 입 먹은 샤르아가 눈을 반짝인다.
이어 후추, 소금, 고춧가루를 섞은 향신료에 찍어 먹어보곤 은색 꼬리지느러미를 살랑이며 기분 좋은 기색을 한가득 드러냈다.
‘신기하긴 하지만 크게 관심은 없는 모습이군. 아니면 인어 마을의 장로들이 관심을 가지지 말라고 경고했을 수도 있고.’
=사실 우리도 조금 힘든 상황이에요.=
“나가족의 습격이 오전에도 한 차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과 관계있나 봅니다.”
=네. 저 먹구름이 생겨난 뒤로 마물의 공격이 점차 빈번해지고 있어요. 얼마 전부터는 나가족들까지 대규모로 공격해오고 있죠. 곤란해요 정말.=
“…….”
환인은 이실리테가 구워준 소고기 스테이크를 음미하며 한껏 행복해하는 시드네에게 시선을 주었다.
고기에 아주 정신을 놓진 않았는지 그의 시선에 시드네가 살짝 창피해하면서 도톰한 입술을 가리고 오물거린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많이 먹죠?=
“아닙니다. 샤르아 양에게 들은 것이 조금 신경 쓰인 터라.”
=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의아해하는 그 몸짓, 표정 하나하나에 남자를 유혹하는데 천부적인 자질이 드러난다.
하지만 환인은 거기에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고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 구름이 생겨난 이유, 그리고 요르문센 섬에 나가족과 같은 마물들이 계속 몰려오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여행자님이요……?=
“예. 그리고 제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건 무엇인가요?=
언제 행복했었냐는 듯이 진지해진 그녀에게 환인도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아드네빌라, 알류겔 호수의 백청룡이자 신수인 그녀 때문입니다.”
=……!=
=…….=
시드네와 샤르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점심을 잘 대접받은 인어들이 감사 인사를 하며 돌아간 뒤, 환인은 유르파에게 수중 호흡의 비약을 여러 개 요청했다.
=바다로 나오면서 인어의 호흡을 30개 정도 만들어뒀는데 좀 더 만들까?=
“그건 전부 주시고 혹시 모르니 그만큼 더 만들어 주십시오.”
한동안 바다에서 활동해야 하니 인어의 호흡같이 물속에서 숨을 쉬게 해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리고 비비큐 파티의 흔적을 정리하며 어느 인어의 가슴이 컸는지, 누구 젖꼭지가 예뻤는지 토론하던 두 김씨를 불렀다.
“멀미는 이제 괜찮아졌나.”
그의 호출에 부리나케 달려간 둘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옙. 배 흔들림도 잦아들었고 잘 먹으니까 완전히 쌩쌩해졌어요! 철수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시킬 게 있으면 분부만 내려달라는 듯이 알통을 보이는 김영수에게 환인은 섬을 가리켰다.
“공간 지각으로 섬 곳곳을 살피고 와라. 찾아볼 것은 저곳의 해저 동굴처럼 섬 안으로 이어진 동굴 통로들이다.”
“해린족 마을을 살펴볼 필요는 없고요?”
“그래. 출입구만 확인하면 된다. 여기 섬의 지도에 등고선을 그려줄 테니…….”
슥슥, 섬의 높낮이를 알 수 있도록 일곱 층으로 등고선을 그린 환인은 그 쪽지를 김철수에게 건네주었다.
“……여기에 출입구 위치만 표시해와라.”
“옛. 야, 가자.”
“나 혼자 가도 되는데?”
“너 등고선 지형도는 볼 줄 아냐?”
“누굴 바보로 알아. 그리고 볼 줄 몰라도 동서남북 위치만 알면 지도에 표시하는 거 안 어렵잖아 임마.”
“올~ 근데 형님이 나까지 부른 이유는 왜 몰라.”
“…….”
“바보 인정?”
“노인정.”
지도를 들고 북쪽을 확인하며 시시덕거리던 둘의 모습이 훅, 하고 꺼지듯 사라진다.
환인은 만약을 대비해 영령들을 모두 회수하고 수중 전투에 큰 자질을 드러낸 영혼 다섯만 불러내 심핵력과 영기를 잔뜩 주입해주었다.
족히 12시간은 유지될 양에 이어 이모렐을 불러 여섯에게 배를 지키라고 지시를 내린다.
벼락활 유리텔을 가진 이모렐에 물속에서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전직 5급 전사 영혼 다섯, 그리고 김철수와 김영수 콤비면 수백 마리의 나가족이 몰려오더라도 배를 지키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협만의 좁은 입구가 있으니 디펜스는 더욱 쉽겠지.
비비큐 파티 뒷정리를 끝마친 안느가 주위를 날아다니는 물정령들을 잠시 바라보다 환인에게 물었다.
=도령. 해린족이 정말 지네들 마을에 초대해줄까?=
“지금 사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면 초대해주겠지.”
아까 나가족이 몰려왔을 때 나가족 나팔수 한 마리가 멀찍이서 대기하는 것을 봤다.
나가족의 습격은 자신들이 도착하기 전에도 몇 차례 이루어졌으니 해린족의 마을 위치가 나가족에게 알려진 것은 기정사실.
빨리 저 앞바다를 원상복구 시켜 본격적인 토벌에 들어가지 않으면 해린족은 언제까지나 나가족의 공격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만약 심각하게 여기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해?=
“그때는 영혼사의 이름을 팔아야지.”
해린족에게도 영혼사의 명성이 알려져 있다. 이름을 팔면 적어도 문전박대까지는 당하지 않을 거다.
=주인님, 여기 커피예요.=
“음.”
이실리테가 타온 정수로 희석한 커피를 절반 정도 마셨을 때, 김영수와 김철수가 배로 돌아와 두 손으로 지도를 돌려주었다.
“형님. 출입구를 확인하면서 공간 지각으로 땅속 깊은 곳까지 살펴봤는데요, 섬 안에는 인어들 마을이 없는 거 같은데요?”
“……지각 능력을 방해하는 것은 없었나.”
“옙. 진짜 섬 아래에 인어 마을이 있으면 지하 깊은 곳에 있을 거 같아요.”
지도에 표시된 출입구는 총 여섯. 서쪽 해안가 바위틈과 절벽 위와 섬 동쪽 작게 난 개울가의 나무 아래 등지였다.
출입구가 많은 걸 보면 이곳에 무언가가 있는 건 틀림없을 텐데.
이유를 꼽자면 하나는 탐지를 막는 모종의 비술이 있거나 김영수의 공간 지각이 땅속을 보기 어려운 것.
다른 하나는 해린족의 마을이 산 밑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이다.
‘후자가 더 가능성이 크군.’
그 무렵 협만의 해저 동굴에서 시드네와 샤르아, 리엘라, 그리고 이름 모를 인어 하나가 빠르게 헤엄쳐 나왔다.
=여행자님, 장로님께서 도시에 들어오시는 것을 허락하셨어요.=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네. 하지만 여러분을 모두 초대하는 것은 사정상 안 되고 네 분까지만 가능해요.=
갑판 위로 올라온 시드네의 이야기에 환인은 함정을 떠올렸지만, 그건 안느의 질문에 오해로 끝을 맺었다.
=네 명으로 제한하는 이유가 있어?=
=우리들의 도시인 워르나는 해린족의 마지막 낙원이에요. 그래서 도시를 지키기 위한 시설이 존재하는데, 그 시설은 도시 출입도 맡고 있죠. 그게 또 무한한 것이 아니라서…….=
=일정 횟수 이상 쓰면 그 수단이 정지하는 거구나.=
=네……. 나가족이 또 습격해오면 요격을 해야 하고 요격 나간 전사들이 돌아올 횟수도 보관해야 하니까 하루에 외부인에게 개방하는 횟수는 네 번뿐이에요.=
“이해했습니다. 여러분의 도시에 방문하는 사람은 저와 이실리테, 안느, 환연, 이렇게 네 명으로 하겠습니다.”
네 명밖에 방문하지 못한다면 그 멤버는 정해져 있는 거나 다를 바 없다.
노른은 거기에 자신이 끼지 못한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여기서 떼를 쓸 만큼 정신이 미숙하진 않았기에 그저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만 내비치며 흥흥거렸다.
“다녀올 테니 리지나 호를 잘 지켜다오.”
「……알았어.」
불퉁하게 대답하는 노른의 머리를 다독여준 환인은 유르파와 백려강, 아영에 두 김씨에게도 배를 잘 지키라고 당부한 뒤 시드네와 함께 코발트블루의 협만에 뛰어내렸다.
조금 차가운 바닷물이 그의 몸을 휘감으니 시드네가 부드러운 유영으로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더듬듯 그의 얼굴을 한차례 어루만진다.
그러자 그녀의 손이 닿은 얼굴을 중심으로 공기방울이 생겨나며 환인의 머리를 덮어씌웠다.
“이건…… 숨을 쉴 수 있군요.”
=물속에서 숨을 못 쉬는 육지 사람을 위한 법술이에요. 그러면 도시까지 안내해드릴게요.=
그의 손을 잡은 시드네가 속도를 내자 순식간에 해저 동굴로 진입하더니 눈앞 풍경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바뀐다.
폐소 공포증이 있다면 견디기 힘들 좁은 통로를 헤엄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여행자님, 여기서 잠시 기다릴게요.=
그리고 도착한 곳은 복잡하고 어지러운 평면 술법진이 통로를 세로로 막고 있는 장소.
환인은 그 평면 술법진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이게 워르나로 통하는 관문이군요.”
=맞아요. 허락과 인정을 받지 못한 존재가 건드리면 이 세상 어딘가의 바다로 전이시켜버리는 기능도 있으니까 혹시라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꿍꿍이나 음모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설명에 환인은 아주 조금 마음을 놓으며 지름 4m짜리 술법진을 유르파에게 전해주기 위해 암기하기 시작한다.
잠시 후, 이실리테와 안느도 샤르아, 리엘라의 손을 잡고 도착했다. 환연은 릴과 합체해 어른이 된 모습으로 인어의 도움도 없이 자연스럽게 따라온 상황.
=준비해주세요.=
시드네의 말과 동시에 푸른색의 술법진에서 빛이 점점 강해져 간다.
그 빛에서 익숙한 기운을 느낀 환인의 눈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빛에서 미약하지만 심핵력의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온전한 심핵력도 아니고 술법진이 유물인 것도 아닌듯한데 심핵력이 희미하게 묻어나는 것은 어떤 연유인 걸까.
혹시 미궁의 심핵을 가공해서 술법진으로 만든 건가? 술법진에 대해 환인의 흥미가 강해졌을 무렵.
화아아악—
술법진이 강한 빛을 내뿜으며 주변을 하얗게 물들였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환인과 그의 여자들은 기이한 별천지의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환인의 눈이 별천지를 번개같이 훑었다.
지름 6km는 될법한 도시를 뒤덮은 커다란 공기 방울, 그리고 천장을 찌를듯 푸른색 소라를 빌딩 크기로 거대화시킨듯한 성.
소라 성은 공기 방울의 정중앙에 기둥처럼 세워져 있었는데 성에서 빠져나온 수십 개의 물의 길이 아무런 구조물도 없이 공기 방울 곳곳을 고가 도로처럼 수놓고 있었다.
그런 물의 길을 해린족이 헤엄쳐서 이동 중인가 하면 휴게소 같은 집들이 물의 길 곳곳에 붙어 기묘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고.
“…….”
족히 2km는 될법한 저 아래에는 농장인지 무엇인지 수백 명의 해린족이 산호처럼 생긴 무언가를 땅에 빼곡히 심고 가꾸는 중이다.
=어? 우왓!=
=주, 주인님!=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안느와 이실리테가 허우적거렸다.
일행이 모습을 드러낸 장소가 소라 성에서 뻗어나온 거대한 광장 같은 판, 거기서 높이 10m 정도 되는 지점이었기 때문.
깜짝 놀라는 여자들과 달리 환인은 발아래에 수영장처럼 물이 고여있는 것을 보았기에 놀라지 않고 추락하며 발생하는 부유감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환연이 바람 정령의 힘으로 일행을 소라고둥 안쪽 껍질처럼 매끈한 바닥에 사뿐히 내려준다.
=어후, 깜짝이야. 환연아 고마워. 그나저나 여긴…… 어디야?=
하늘이 군청색으로 어두운데, 하늘이라기보다 저건 천장?
게다가 주위는 기묘하게 밝다. 게다가 아까까지 물속에 있었는데 물기도 전혀 없고……
=우리 해린족의 마지막 안식처인 워르나에요. 어서 오세요, 여행자님들!=
리엘라의 두 팔 벌린 환영 인사에 안느와 이실리테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여긴 요르문센 섬의 지하가 아닌데, 어디로 이동해 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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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너무 늦었습니당... 흑흑ㅠㅠ
1시쯤에 지각한다고 공지 올릴걸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