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8 항구 도시 니아마드
환연이 바닷속 마물을 쓸어버린 다음 날.
니아마드의 영주는 소속 귀족 가문 두 곳을 아예 멸문시키려 작정한 듯 병력을 운용했다.
7급에 다다른 기사단장이 직접 완전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움직이는가 하면 귀족으로 보이는 자들이 포박되어 압송되고 와중에 저항하는 귀족가의 인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다.
끔찍하고 심각한 죄를 저질렀기에 응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지만 주민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다.
어제는 니아마드 토종 불량 조직의 백수십 명이 정체불명의 한 명에게 몰살당했고 지난 밤에는 괴현상이 앞바다에 일어났다.
오늘 정오에는 성역탑이 발동하지 않은데다 수백 년간 멀쩡했던 귀족 가문까지 털리고 있다.
수백 년간 평화롭던 니아마드에 연이어 일어난 대사건은 주민들을 충분히 불안에 떨게 하는 수준이었던 것.
도시 주민들의 불안이 극에 달했을 무렵 포고꾼이 도시를 돌아다니며 목청이 터져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두 가문으으은! 금전적인 이득에 눈이 멀어어어! 니아마드의 젖줄이자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성역탑에! 부정을 저질렀쏘오오!! 새 생명이 잘 태어나지 못하는 이유가아아!! 성역탑에 있었으니이이……!!=
포고꾼이 악을 쓰며 귀족가의 범죄 행각을 까발리고 있을 때 교단도 영주 측 병력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명과 포용은 땅신 교단의 기치와도 같은 것.
그걸 한낱 인간이 거슬렀으니 교단의 성직자들이 눈이 벌게져서 이단자를 잡듯 성역탑과 관련된 귀족을 털기 시작한 거다.
이샤=리체 남작과 함께 마차를 타고 항구로 향하며 병사들과 교단 성직자들이 몰려다니는 걸 본 아영이 말했다.
=교단이 붙었으니 영주는 더욱 기세등등하게 움직이겠네요.=
=도령, 저것도 영주의 작품일까?=
“그래.”
아무리 도시의 영주 가문이라지만 휘하 귀족을 함부로 벌하거나 내칠 수 없다.
팽 당할 분위기를 감지한 휘하 가신들이 담합하면 영주도 긴장해야 하니까.
솥에 들어가야 하는 사냥개가 다음에는 자신이 될지 모른다고 하면 귀족들도 궁지에 몰린 쥐처럼 영주를 물어버릴 게 뻔하지 않은가.
귀족님들의 일은 그렇다 치고, 도시의 주민들은 막막함에 한숨을 토로했다.
=그럼 이제 성역탑은 가동을 안 하는 건가? 못 살겠구먼…….=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야 하나?=
=이 사람아. 다른 도시라고 여기랑 다를 거 같나?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아.=
=맞아. 성역탑 덕분에 지금까지 살기 좋았던 거지, 다른 곳도 괴물의 위협은 매한가지야.=
=그래도 미궁이 폭발했다간 다 죽는 거 아녀?=
=폭발할 뻔 했다는 거지 폭발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잖나.=
=그런가…….=
어디 도망갈 곳도 없다. 그나마 이곳은 도시라서 방어 기능이 있는 거지, 마을이나 촌락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게 일반인들의 인식이니까.
촌락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험한 상황인지 모른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촌락의 삶이 얼마나 나쁜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도시 사람의 눈에는 마을이나 촌락이나 거기서 거기다.
둘 다 사람 살 데가 못 된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나저나 귀족님들도 너무하시는구먼. 금방이라도 마물이 공격해올 거 같은데 대책 좀 마련해주시지…….=
=하! 어디 귀족님들이 우리 서민들 생각이나 해주겠어?=
=맞아. 어제 불주먹파 새끼들 쓸어버린 분도 귀족님이 아니라 정체를 숨긴 영웅님이라는 말이 있더만.=
=영웅님? 혹시 성제님 아냐? 엘위드리스 시에 나타나셨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성제님이 오셨으면 이미 도시에 소문이 쫙 퍼졌을 텐데 그건 아니것지.=
=하긴 그래……. 시발, 성제님 반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허이, 입 조심해,=
=주어 없으니까 괜찮아.=
항구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 어젯밤의 여파 때문인지 어업을 나가지 않은 어부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게 들린다.
그것도 잠시. 이쪽을 곁눈질하더니 대화가 멈추고 슬금슬금 흩어져 그물을 손질하거나 낚싯대를 손보거나 하며 딴청을 피우는 어부들.
그들의 반응에서 도시 주민들의 불안감이 머리끝까지 치솟은 게 느껴진다.
지구였다면 폭동이든 집회든 해서 시민들이 느끼는 불안을 전달하려 했겠지만, 니오네브레스의 도시는 전제군주제에 가깝다.
저들이 할 수 있는 건 저렇게 모여 수군거리는 것 뿐.
라드세아에서는 주민들이 가진 최후의 카드 같은 게 있어서 호족이 극심한 패악질을 부리면 들고 일어나 도시를 떠나든가 하는데, 메리아놀의 주민들은 그렇게까지 자유와 방랑 의식이 없는듯하다.
=환인 님? 이쪽입니다.=
이샤의 안내에 그녀를 따라가자 어부들이 모인 곳과는 바닥 포장부터 다른 깔끔한 부두가 나온다.
귀족들 전용 포구인지 정박하여있는 다양한 선박들은 오래 항해한 배 특유의 부식과 풍화 느낌이 전혀 없다.
염료 도색마저도 방금 한 것처럼 색이 선명한 것들 뿐.
빨주노초 그런 색색의 고급 선박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하얀색의 2마스트 캐러벨선이 이샤가 아끼는 리지나 호였다.
그걸 본 안느가 작게 감탄한다.
=배가 참 우아하게 생겼네.=
선수에서 선미까지 50m는 되어 보이는, 여자의 늘씬한 허벅지처럼 완벽한 곡선을 자랑하는 하얀 선체와 뿔 고래를 조각한 선수상에 돌돌 말린 두 개의 마스트까지.
도저히 수년간 타고 다녔다고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새것 같은 모습에 여자들이 소근거렸다.
=배 전체에 위상력이 느껴지는데? 보존과 유지 비술을 걸어놨나.=
=네. 침수 방지와 항마모, 부식 방지에 균형 유지 비술을 걸어놓았어요. 위상력만 충분히 충전해주면 폭풍이 불어도 배가 뒤집히지 않을 거예요.=
「진짜? 흔들어봐도 돼?」
이샤의 장담에 배를 살펴보던 노른이 바람을 일으키려다 이실리테에게 안겨져 제지당한다.
=흔들면 안 돼. 바로 옆에 다른 배가 있잖아.=
「알았어~.」
=발판은 배 안에 있나 보네. 잠깐 기다려.=
발판이 없어 먼저 배로 올라간 안느가 발판을 밀어 부두와 이어준다.
그걸 딛고 갑판에 오른 아영과 백려강이 배를 살피며 눈을 반짝였다.
=와, 이끼도 없고 소금기도 전혀 안 느껴지네.=
=진짜……. 우리 가문도 개인 선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배를 만들 생각은 못 했는데.=
여자들이 배를 살피는 사이 환인은 이샤와 함께 후미에 있는 선장실로 들어가 리지나 호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오브에 손을 올려 소유권을 이전받았다.
어린아이 머리만 한 투명한 수정구에 손을 올려서 비술 종류를 확인한 유르파가 감탄한다.
=마스트 재생, 침수 및 부식 방지, 항마모, 자동 균형 조절, 선박 강화, 도료 유지가 걸려있구나. 용적과 비술의 밸런스를 굉장히 잘 잡았네. 배가 작았으면 대양 항해가 어려웠을 거고 배가 컸으면 비술의 유지에 위상력이 어마어마하게 들었을 텐데.=
=2급 술법사 정도의 위상력만 있다면 한평생 배에서 생활할 수 있다고 비술사 조합장이 장담했어요.=
=조합장이 직접 부여했나 보네요.=
그것 말고도 배에는 마도구가 가득했다.
바닷물을 담아놓으면 식수로 자동 정화되는 통이라던가 파손된 부분을 조금씩 재생시키는 브러시라던가 문지른 자리에 물이끼나 소금기가 깨끗하게 지워지는 솔이라던가.
소유권을 이전받고 선창으로 내려가니 1자 복도를 중심으로 방 6개와 식당, 목욕탕, 화장실, 창고가 나왔다.
이샤는 환인을 후미의 계단 뒤 창고로 안내해서 안에 든 것을 보여주었다.
=여기 가장 큰 상자는 아공간 보관함이에요. 여기에 여분의 돛과 닻, 기타 수리용 자재가 가득 채워져 있어요. 저는 한 번도 쓰지 않았지만, 환인 님이라면 언젠가 쓰실지 모르겠네요……. 다, 다른 상자는 보존 비술이 걸려있어 음식이나 식재료를 보관하시면 돼요.=
화장실은 창고 옆에 있었으며 안에는 스림 두 마리가 반쯤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거기에 백려강이 물을 뿌려주자 금방 되살아나서 꾸물거리기 시작한다.
선수 쪽에는 1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U자형 테이블과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주방이 있었다.
선수와 선미 사이에는 7개의 방이 있었는데 6개는 원룸 사이즈 크기였지만 1개는 다른 방 두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컸다.
큰 방은 내부 디자인을 보니 이샤가 쓰던 방임을 알 수 있었다.
평범한 나무의 원색이 드러나는 다른 방과 달리 하얀색으로 도배된 그 방에는 여러모로 레이스라던가 커튼이라던가 여자 방이라는 느낌이 물씬 났던 것.
큰방과 이어진 옆방을 들여다본 아영이 동그랗게 뜬다.
=옆방은 욕실이네요. 그럼 방 다섯 개가 남는 건가?=
=큰 방은 도령이 쓰고 세 개는 우리가 셋씩 나눠서 쓰면 되겠네. 남은 두 개는 짐 놓아두는 방이랑 철영수가 쓰게 하고.=
=쿠에들은 어떻게 해요? 쿠르티랑 쿠핀, 쿠라, 젤프리, 실루까지 다섯이나 되는데.=
=내가 아이들 작게 만들어놓을게. 짐 넣어두는 방에 모아두면 될 거야.=
유르파의 이야기에 안느는 옆머리를 쓸어 넘기며 여자들을 향해 실실 웃었다.
=우리도 인원이 참 많이 늘었네. 도령에 이슬이에 나랑 율이 언니랑 환연이랑 벨하고 노른이, 아영이에 이모에 철영수에 쿠에들하고…….=
방을 배를 전체적으로 둘러보던 환인도 후, 하고 작게 웃었다.
“삼림 미궁에 떨어졌을 때는 당장 생존을 걱정했었는데 어느사이에 대인원이 되었군.”
=오빠가 생존을 걱정했다니……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데요?=
「상상 안 해도 돼. 환인은 그때랑 지금이랑 별로 달라진 거 없어.」
환인의 옆구리에 매달려있던 노른의 이야기에 여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5년이나 됐는데 너 그때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
「기억하고 있는데! 이실리테가 환인한테 정절 어쩌고 하면서 속살 맛…… 으읍! 읍!」
=너, 너어…! 그 이상 말하면 오늘 저녁 없을 줄 알아!=
=이슬이도 참. 말 안 해도 다들 아는 이야긴데 왜 그렇게 부끄러워해?=
=너도 근육 고릴라 때 일을 이야깃거리 삼으면 화낼 거잖아!=
=……아, 안 낼 거야!=
=말 더듬은 데서 믿음이 안 가거든?!=
“큭큭.”
오랜만에 보는 둘의 말씨름에 환인이 큭큭 웃자 서로를 흘겨보며 팔꿈치로 툭툭 치고 찌르는 이실리테와 안느다.
환인을 중심으로 여자들의 화목하고 사이좋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샤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눈썹 끝을 파르르 떨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아니…… 이유는 분명하다.
여행자님을 사모하게 되었는데 그 마음을 표현하기도 전에 자신과 격이 맞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더해서 그분께 하려 한 나쁜 짓도.
살짝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보이는 저곳은 따스하고 포근해 보이는 데 자신이 있는 이쪽은 회색빛에 차갑고 쓸쓸하다.
자신에게도 저렇게 따뜻한, 웃음이 넘치는 가족이 있었는데…… 이제 가족은 없고 자신 혼자뿐.
인생 처음으로 반한 남자가 나타났지만 자신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란 걸 알게 되었더니 외로움과 쓸쓸함이 더욱 사무친다.
이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넘볼 수 없는 분을 사랑하게 된 죄로 자신은 남은 평생 혼자 살게 될 것이라고.
가문을 이어야 하니 씨를 받을 남자는 찾겠지만 진짜 사랑은 알지 못할 것이라고…….
이샤는 자신을 쳐다보는 백려강의 시선에 황급히 눈물을 훔치고 애써 웃음 짓는 얼굴로 환인에게 말했다.
=그, 그러면 안내는 끝났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환인 님의 정체는 무덤까지 가지고 갈 것을 약속드릴게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떠나고 2주 정도면 충분하겠군요. 그때 제 이야기를 조미료처럼 친다면 적어도 상단을 일으키는데 어느정도 도움이 되겠지요.”
눈가에 남은 눈물 자국을 본 환인은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가 따귀를 올려붙였던 자리다.
“그때 뺨을 때린 것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다지만 과한 손속이었습니다.”
따끔하던 그때와 달리 뺨에 느껴지는 자상한 온기에 이샤는 눈앞이 흔들렸다.
안돼, 안돼… 차라리 절 때리고 욕해주시지, 이렇게 자상하게 대해주시면 저는, 저는……!
=읏, 아…… 아니… 에요……. 죄송합니다!=
더듬거리며 울먹이던 이샤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도망치듯이 배를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자들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환인을 쳐다본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눈빛에 환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안느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또 홀렸네, 또 홀렸어. 진짜 나쁜 남자라니까.=
=맞아요. 오빠 자기 마음은 안주면서 마주치는 여자 마음은 다 뺏어가지.=
=그래도 오라버니… 사랑하시죠?=
“조용히들 해라. 이실리테, 항해 준비는 어디까지 했지.”
=식자재는 석 달 분을 확보했어요. 식수 정화통이 있을 줄은 몰라서 식수까지 준비해놓았는데, 식수를 절반으로 줄이면 넉 달 분까지 확보할 수 있어요.=
“그 정도면 됐다. 백려강과 환연이 있으니 매 끼니 해산물을 낚아 올려서 요리에 더하면 되겠지.”
=네.=
그 뒤로 일행은 출항을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유르파와 백려강은 쿠에들을 배에 올리고 소형화의 비술을 걸었고 안느와 이모렐은 마차의 바퀴를 빼고 배의 후미, 선장실 옆에 비워진 마차 칸에 끼워 넣고 파도에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킨다.
이실리테는 식당칸과 창고를 살피며 식재를 배분하고 김철수, 김영수는 열심히 짐가방을 선창의 방으로 날랐다.
모두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 때 환인은 갑판에서 플라비우스족 단쌍익의 여자 선원 영혼을 불러냈다.
“이 배를 쓸 겁니다. 배의 구조 파악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이건 귀족들의 유람용 캐러벨선이네요. 귀족에게 고용되어서 이런 유람선의 조타를 몇 번 잡아봤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출항할 수 있어요.」
“선원으로는 몇 명이 필요합니까.”
「이런 유람선은 돈을 처발라 적은 수의 선원을 요구하는 게 장점이죠. 조타 한 명, 돛을 맡을 두 명, 망루에서 감시할 한 명 해서 네 명이면 충분해요.」
그녀의 이야기에 환인은 기사 영혼 여덟을 영령화시켜 붙여주었다.
이틀 정도 배를 몰며 숙달시킨 뒤 교대 근무를 시키면 충분하겠지.
여자 선원 영혼이 기사 영혼들을 데리고 본격적인 출항 준비에 들어갈 때 노른은 중형견 사이즈로 줄어든 쿠에들과 갑판을 뛰어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정리를 끝마친 여자들도 갑판으로 올라와 서성이는데 움직임에 묘한 기대감이 감도는게 느껴진다.
몇 번 배를 탄 적은 있지만 자신들의 배를 구해 대양으로 나가는 경험은 처음인데서 오는 설렘과 흥분이다.
후미 쿼터 덱의 조타 근처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환인은 유르파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항구에서도 훤히 보이는 성역탑을 힐끔거리며 환인에게 말했다.
=자기, 내가 쉬면서 성역탑의 개선 방법을 생각해본 게 있거든? 설계도랑 도면대로라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최소한도로 줄일 수 있는데…….=
“……흠. 그걸 알려주는 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럴까?=
“땅신 교단이 성역탑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나선 상황입니다. 이런 때에 나서봤자 잘 되면 본전, 못되면 욕만 먹기 십상이지요.”
=하긴 그래. 알았어~.=
그가 말하려는 뜻을 이해한 유르파는 머릿속에서 성역탑에 관한 것을 미련 없이 지웠다.
환인도 그 뒤로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니아마드에 자신과 몸을 섞은 여자가 있다면 신경을 써주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괜히 나서서 욕먹을 짓은 안 하는게 좋지 않겠나.
출항 준비를 끝마쳤는지 여자 선원 영혼이 다가와 출항해도 되겠냐 묻기에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항하겠습니다! 닻을 올려라!!」
여자 선원 영혼의 외침에 기사 영혼 하나가 달려가 닻을 끌어올린다.
원래 이때쯤 항만 관리인이 보트를 타고 나와 배를 조금 끌어줘야 한다.
해류가 순환되는 포구나 바람이 잘 부는 곳이면 돛을 올리고 조타를 적당히 움직이며 기다리다 보면 알아서 빠져나가지만, 니아마드는 그렇지 않기 때문.
그러나 리지나 호는 환연의 수류 조작을 받아 수월하게 도크를 빠져나와 니아마드의 만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돛을 내려라!!」
촤르르르르륵—
본격적으로 해류를 타자 여자 선원 영혼이 소리쳤고 포어 마스트와 메인 마스트가 활짝 펼쳐진다.
환연이 불러낸 중급 바람 정령이 돛 근처에서 놀기 시작하니 돛이 크게 팽창하며 배가 앞뒤로 출렁였다.
“우효~! 멀미 꿀렁꿀렁 들어온다제! 으웨엑…….”
“멀미 그 만해……. 꾸어억.”
고작 몇 번 앞뒤로 출렁였을 뿐인데 김철수와 김영수가 허덕이며 난간에 매달려 오엑오엑 헛구역질을 시작한다.
이러는 사이에도 리지나 호는 꾸준히 바람을 타기 시작해 배의 속도가 삽시간에 최대에 가깝게 올랐다.
=도령. 뒤를 봐.=
쿼터 덱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환인은 안느의 이야기에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항구에 칼스번 영주와 아스칼 영애를 비롯해 몇 명의 귀족이 나와 있는 게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약간 허탈해하는 표정과 아쉬워하는 표정이 반반씩 버무려진 귀족들의 얼굴.
그들의 사정에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환인은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신경 쓸 것 없다.”
귀족을 처단하는 것을 빌미 삼아 어떻게든 인연을 엮어보려 한 듯한데, 이쪽이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빠르게 출항할 줄 몰랐던 거겠지.
하지만 이쪽의 정체가 드러날 일은 더 없다. 이쪽을 추적하려는 인간들도 없을 것이고 목적지는 이제 코앞인 상황.
더 이상의 인맥은 쓸모도 없고 필요도 없다.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니아마드의 만을 빠져나오자 여자 선원 영혼이 흥이 오르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목적지는 주도 패시지 동쪽 해상 200km 지점! 리지나 호, 출항합니다!!」
“…….”
철썩거리며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배 위에서 환인은 땅의 신수 지오드에게 받은 황색 브로치를 꺼내 들었다.
햇빛을 받아 마치 태양처럼 빛을 내는 브로치에는 지오드의 기운이 가득 담겨있는데 이게 어떤 식으로 아드네빌라를 정신 차리게 하는 걸까.
‘며칠 뒤 아드네빌라를 만나면 알게 되겠지.’
환인은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며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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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언럭키 아영이
요즘 스토리가 좀 늘어지는 것 같다는 독자님들의 피드백을 받고 있습니당
흑흑 너무 뼈아픈 지적이네용...
완결이 다가오면 발생하는 글쟁이의 고질적인 버릇도 있고 일일 라이브 연재에 쫓기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 글쟁이의 신상에 조금 안좋은 일이 벌어져서 ㅠㅠ;;
아무튼 최대한 휴재 없이 퀄리티 유지하면서 완결까지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당.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