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7 항구 도시 니아마드
환인이 성역탑에 관심을 준 이유는 하나다.
성역탑을 지으면서 형성된 부정부패가 영주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
사실 성역탑에 관심을 주었다는 표현도 맞지 않는다.
성역탑을 방치해 니아마드가 인구 자연 소멸로 멸망하든, 파사의 빛에 자극받은 미궁이 폭발해 이형종을 전부 쏟아내서 멸망하든 환인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으니까.
그럼에도 신경을 쓴 이유는 니아마드에서 배를 구하려다 보니 리체 남작가 - 람다 부상단주 - 바나인 - 슈헤일로 준남작이 호박 덩굴처럼 엮여 나왔고 준남작을 위시로 리체 남작가를 무너트리려 한 자들이 성역탑에도 한 발 걸고 있었기 때문.
외부인이 성역탑과 관련된 바나인을 건드린 데서 귀족들이 의심의 눈길을 살 게 뻔하여 겸사겸사 한 번에 정리하기 위해 책자에 성역탑까지 이야기를 끼워 넣은 거다.
사실 가장 편한 방식은 다른 곳으로 가버리거나 다른 배를 구해서 조용히 출항한다는 방안이다.
하지만 그건 도망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치는 것은 환인의 성미와 맞지 않는 일.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환인은 성역탑을 언급할 생각이 없었는데, 영주 본인이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 이상 모르쇠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칼스번 영주는 자신의 평판에 성역탑의 부작용과 책자의 내용, 바나인을 같이 보낸 데서 성역탑의 일로도 적잖이 화가 났다고 여기고 있나 본데.
‘적어도 지구로 돌아가기 전까지 위선이라 해도 선한 평판을 유지하는 게 활동에 도움이 되니까.’
하여튼 이 시간에 몰래 찾아와 담판을 지으려는 것을 보면 칼스번 영주는 시류를 읽고 분수를 파악하는 능력이 제법 뛰어난 사람이다.
상급 백작이라는 니오네브레스 천룡인의 신분으로 자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것을 보면 틀림없겠지.
적당히 대응만 해줘도 알아서 재해석해 편한 상황으로 만들어줄테니 골치 아플 일은 없을 것이다.
환인은 대답 없이 유리알 같은 시선으로 칼스번 영주를 응시했고, 환인의 강함 수치에 쫄아버린 영주는 제발 지려 스스로 정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성역탑은 하루에 한 번, 정오에 파사의 빛을 보호막처럼 뿌려 니아마드를 감쌉니다. 그 효과는 부정한 존재를 물리치는 것. 400년간 이어져 온 정화의 효과에 성역탑의 영역 안에는 마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만…….=
“마물이 영역 밖에 몰려있다는 이야기군요.”
=예. 맞습니다.=
나가족과 갖가지 해양 마수, 마물들의 습격에 수백 년간 몸살을 앓은 니아마드의 선조는 파사의 빛이 가진 효과에 착안, 성역탑의 원리를 수립하고 탑을 세우기까지 했다.
과정에 이런저런 진통이 있었지만 어쨌든 원리는 맞아떨어져 니아마드는 더 이상 마물의 습격에 골치를 썩이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시일이 흘러 꺼림칙한 느낌에 재조사를 하여보았더니, 두 가지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출산율의 저하, 다른 하나는 밀려나 보호막 너머에 몰린 위상력을 노리고 모여든 마물.입니다.=
현재 성역탑의 보호막 경계에는 족히 30여 개의 마물 둥지가 형성되어있고 마물의 숫자는 1만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는게 칼스번 영주의 주장이었다.
마물이 둥지를 만들고 숫자를 불려 나가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을 땐 손을 쓰기 늦어버린 상황이었다고.
마물의 둥지를 공격했다간 수천, 수만 마리가 동시에 도시로 밀려온다.
성역탑의 기능은 어디까지나 마물에게 싫은 느낌을 주는 것이지, 들어오지 못하게 물리적으로 막는 기능은 없기 때문이다.
성역탑의 기능을 끄면 마물이 몰려들 것이고 기능을 유지하면 인구수 감소로 도시가 자연 소멸하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환인은 칼스번 영주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다가 턱을 쓰다듬었다.
이종족의 수태에는 위상력이 필요한 건가? 아니면 파사의 빛에 모종의 생육 성장을 방해하는 효과가 있어서?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군.’
니아마드에서는 사람의 출산율뿐만 아니라 뭍 짐승의 숫자도 유의미하게 줄어가고 있다.
생명체가 파사의 빛을 오래도록 지속해서 쬐면 생식 능력에 문제가 발생하는 거겠지.
‘그보다 미궁의 문제까진 파악하지 못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미궁의 상태가 정상이 아닌데 출산율과 앞바다의 마물 둥지 때문에 미궁쪽에는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어쨌든, 환인은 영주의 속셈을 읽고 기분 나쁘다는 분위기를 풍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히 기분이 좋지 않군요.”
=예……?=
“그렇게 인정으로 호소하면 제가 소매 걷고 나서서 대신 싸워주리라 생각한 겁니까.”
흠칫.
=그, 그런 것은.=
『……정말 조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영혼을 진동시키고 압착하는 듯한 목소리, 주도에서 딱 한 번 경험해본 신언에 짧고 격한 숨을 토해낸 칼스번 영주는 머리를 팍 숙이며 소리쳤다.
=송구합니다!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는 못하나, 어디까지고 희미한 기대감 정도만……!=
이쪽이 아신이며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딸에게 들은 것이 있겠지.
그러니 성역탑 이야기를 슬쩍 꺼내며 현 상황의 어려움을 어필하면 ‘서민 친화적인 성제’니까 잘하면 도와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을게 뻔하다.
일어선 채로 가만히 있은 지 1분쯤 지나자 칼스번 영주의 머리카락이 보기에도 축축해진다.
머리가 저 정도라면 옷 안은 진땀으로 목욕한 꼴이 되어있겠지.
기선 제압은 이 정도면 될듯해 조용히 자리에 앉은 환인은 평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칼스번 영주께 제가 드릴 말씀은 ‘도와줄 수 없다.’는 겁니다.”
=……!=
“그렇지 않습니까? 주도의 군사 지원을 받고 군을 동원해야 할 계제를 개인에 불과한 영혼사에게 부탁하는 것부터가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씀대로입니다…….=
히스론드에서 홀로 1만 이블팩션 대군을 일격에 날려버린 것, 메리아놀 극서 지역에서 암흑 숲의 이블팩션 마을 하나를 통으로 지워버린 ‘아신’이 그런 말을 하니 중의적인 의미로 칼스번은 감히 대꾸할 수 없었다.
애써 평정을 가장하는 칼스번 영주의 정수리를 보며 작게 웃음 지은 환인은 이실리테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실리테. 그녀를 불러다오.”
=네, 주인님.=
손가락 한 뼘을 보여주자 눈치 빠르게 비몽사몽인 환연을 데려와 환인의 품 안에 넣어준다.
「뭔데에…….」
“니아마드 앞바다에 마물 둥지가 잔뜩 꾸려져 있다고 하는데 살펴봐 주지 않겠나.”
「씨이……. 꼭 지금 해야 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칼스번 영주는 성제가 누구와 대화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저 대화 내용은 뭐지? 앞바다를 보고 오라니, 안 들키고 정탐하라는 이야기 같은데 그게 가능한가?
=영주님? 고개가 점점 올라오는 거 같은데 그러면 곤란해요.=
=……! 오, 오해이십니다……!=
정령 기사의 주의에 흠칫한 영주는 더더욱 고개를 숙인다.
그사이 환인에게 잠투정하며 상급 물정령으로 앞바다를 확인하던 환연은 잠이 확 깨는 걸 느꼈다.
우와, 이게 대체 몇 마리야? 종류도 엄청 다양하네.
「많다……. 2만 마리는 족히 되겠어. 등급도 평균 3급은 되어 보이는데?」
“흠. 릴라이스에게 부탁하면 얼마나 정리할 수 있지.”
「……나도 같이 가면 둘이서 될 거 같아. 하지만 수가 많아서 다 잡는 건 어려워. 놓치는 게 좀 나올 거 같아.」
합체를 한다는 건가.
“내가 돕고 영령군을 붙여준다면?”
「그 정도면 피라미를 제외하고 다 정리할 수 있지. 너랑 달리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이게 반 초월급 물정령의 힘인가. 아니, 홈 어드벤티지까지 포함된 위력이라고 봐야겠지.
칼스번 영주는 환인과 환연의 대화에 온몸으로 신경 쓰인다는 걸 표현하고 있었다. 그걸보며 후, 웃은 환인은 환연에게 돌아가서 자도 된다고 했지만…….
「깨워놓고 다시 가서 자라니 그거 사람이 할 짓 아닌 거 알지? 아신위님이라서 했다는 말 금지야.」
속으로 큭큭 웃으며 환연이 들어가 있는 안주머니 쪽을 토닥거려준 환인은 아신위의 휘광과 성제의 아우라를 함께 드러내며 영주에게 말했다.
“고개를 드십시오.”
=…….=
“아시겠습니까. 저는 일개 영혼사일 뿐이며 조용히 지나가고픈 여행자입니다. 영주님을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다.”
=……?=
잠깐 어리둥절해하던 칼스번 영주의 머릿속에 번개가 튀었다.
「저 인간, 제법 눈치가 빠르네.」
“그래.”
무언가를 해주려 해도 눈치 없이 캐묻고 질문하면서 귀찮고 성가시게 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쏙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칼스번 영주는 눈치가 남달랐다.
성제 ‘입장에서는’ 도와줄 수 없다는 선언의 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영주는 =암중행 중이신 고귀한 분께 불경한 요청을 드린 것을 사죄드리며 어떻게든 도시의 안전을 위해 힘을 쓰겠습니다.=고 거듭 사죄를 올리며 물러났다.
도시에서 악행을 일삼던 귀족의 자격도 없는 자들은 내일 해가 성역탑을 지나기 전에 모두 정리될 것이며, 리체 남작가는 이제껏 입은 피해의 보전은 물론 응당한 배상 또한 받게 될 거라는 말은 덤이었다.
「그럼.」
창가에 서서 영주의 마차가 떠나가는 것을 지켜본 환연은 후읍—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며 신체를 키웠다.
삽시간에 환인과 비슷한 키가 되더니 이번에는 릴라이스와 신체 제어권을 두고 옥신각신하기 시작한다.
「……이번엔 내가 할게. 응? 저번에는 네가 하기도 했고 도시에 피해 안 오게 힘 조절 해야하잖아. 내가 신경 쓰는 게 좋으니까. ……너도 할 수 있어? 조용히 해야 하는데? ……아까 환인이 말하는 거 들었잖아. 몰래 해야 해, 몰래.」
신체 제어권이 오락가락하는지 그녀의 머리카락 색이 물색과 검은색을 오가고 길이도 짧아졌다 길어지길 반복한다.
그러다 고정된 것은 검은색 긴 생머리의 환연이었다. 조곤조곤한 말투의 설득이 먹힌 모양.
모델처럼 긴 생머리를 두 손으로 한차례 쓸어올렸다가 풀자 검은 머리가 폭포처럼 흘러내리며 동시에 물로 이루어진 얇은 옷가지가 생겨나며 그녀의 나신을 뒤덮어간다.
“나가지.”
그걸 곁에서 지켜본 환인이 인식 저해 후드망토를 두르자 이실리테와 안느도 같은 망토를 챙겨 걸친다.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온 환인과 여자들은 환연의 안내에 따라 사람의 시선을 피해 을씨년스러운 밤의 항만으로 나왔다.
시커먼 어둠 속에 물결이 이는 소리. 정박한 배에서 들려오는 나무판이 뒤틀리는 소리.
살짝 쓰고 비린 항구 특유의 냄새.
주위를 잠시 살핀 환인은 저 멀리 섬처럼 둥둥 떠있는 방파제를 가리켰다.
“저기서 하는게 좋겠군.”
「응. 여기 올라타.」
그의 뜻에 따라 환연이 작게 손짓하자 발치의 수면이 굳으며 발판이 형성된다.
세 명이 그 발판에 올라타자 소리 없이 움직여 일행을 항만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방파제로 날라다 주었다.
=이야, 항해중에 물에 빠져도 걱정 없겠네.=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어? 괜한 걱정이야.」
지구의 시멘트와 테트라포드로 형성해놓은 방파제가 아니라 땅 정령으로 해저에서 땅을 솟구치게 해 만들어놓은 자연스러운 방파제.
그곳에 도착한 환인은 보유한 청령 중 가장 전투력이 높은 혼들로 20명을 소환해 영령화 시켰다.
차례대로 실체화하는 영령에게 물속 전투에서 쓸 수 있는 작살 형태의 창을 하나씩 들려주자 옆에서 지켜보던 환연이 팔짱을 끼고 가슴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환인, 본격적으로 초월 물정령의 힘을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주변에 어떤 여파를 끼칠지 몰라.」
“부두와 항만이 망가져도 좋다. 이쪽의 안전은 신경 쓰지 말고 만족할 때까지 힘을 써봐라.”
「진짜? 너랑 쟤들이 해일에 휩쓸릴 수도 있는데.」
“그정도는 문제 없다.”
중급 물정령을 강령하면 약간이지만 물을 조작할 수 있으니 문제가 발생하면 수면을 달려 부두로 돌아가면 된다.
이실리테도 다중 검기를 밟고 날아오를 수 있고 안느도 강인한 각력으로 수면을 박차 200m 정도는 가뿐히 뛰어넘는 게 가능하다.
환연은 자기가 조금 신경쓰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알았어. 다녀올게.」
“잠깐.”
「응? 읍!」
몸을 돌리려는 환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을 잡고 입술에 키스해주는 환인.
물론 그냥 키스가 아니라 심핵력을 넘겨주는 조치다.
몸 안에 힘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과 입 안으로 혀가 침입하는 키스에 환연의 눈이 크게 떠졌을 때, 환인이 떨어지며 슬쩍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신력을 일부 주입해주고 싶지만, 너도 처음이고 나도 처음이니 여기서는 심핵력이 좋겠지.”
「…….」
환연은 얼굴을 살짝 붉힌 채 그를 흘겨보다가 바닷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너희도 가라.”
「「예, 성제님.」」
미리 말을 맞춘 대로 넓게 흩어져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영령들.
환인은 팔짱을 끼고 신식 영혼의 눈을 열어 넓은 시야에 바다를 담았다.
‘역시 물속 깊은 곳까지는 안 보이는군.’
그건 투시의 영역이니 당연하면 당연하다고 할까. 눈에 신력을 주입하면 어떨까 싶지만 그 여파를 생각하면 신력을 쓰고 싶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꺼려진다는 말이 좀 더 알맞을 거다.
신력이라는 강대한 힘의 원천을 얻어놓고도 코가 꿰일 것을 우려해 쓰지를 못하다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건 지금 상황을 두고 말하는 거겠지.”
쏴아아— 철썩— 처얼썩—— 바다가 차츰 거칠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환인이 중얼거리자 안느가 흐음, 하고 허리에 한손을 올리며 대꾸했다.
=하율 현자님한테 연락해서 신력의 안전한 활용법 같은 걸 물어보는 건 어때? 그 허공 단말 같은 걸로 아카샤의 기록에 접속하면 뭔가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
“어렵다고 본다. 신력을 얻으며 느낀 것은 힘을 쓰려면 그에 마땅한 대가가 필요하다는 거다. 아니면 그 힘에 걸맞은 자격을 얻던가.”
신위와 관련 없는 지하율이 신과 관련된 힘에 대한 정보를 함부로 알아보려 했다간 생명력을 다 빨려 미이라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확실히…… 지하율 현자님은 주인님께서 천원의 관리자로 내정되었다는 사실만 알아냈는데 수개월은 단식한 것처럼 마르셨었죠.=
=하율 현자님도 거의 인간의 극에 다다른 사람이었는데도 그 정도였지? 신과 직접적인 정보를 알아내려 했다간 진짜 살아있는 해골이 되겠네.=
자연스럽게 이해시키는 그의 반론에 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일행이 선 방파제에서 수 킬로미터 바깥의 바다가 마치 태풍이 부는 것처럼 격랑이 일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으으으으어엉——
정체불명의 괴성도 울려 퍼지고 초월 정령의 힘이 발현되는 여파인지 밤하늘에 갑작스레 먹구름이 끼며 습기 가득한 강풍이 몰아친다.
=우와, 분위기가 엄청 심상치 않네. 망망대해에서 이런 상황을 맞닥트리면 모골이 송연하겠는걸.=
혹시 모른다며 안느가 물리 충격 보호 성술과 물에 대한 저항의 성술을 모두에게 거는 사이, 사납게 일렁이는 바다를 응시하던 환인은 잠깐 생각하다가 눈을 감고 자신과 계약한 청령 중 하나에게 영혼 감응을 걸어보았다.
먼 과거를 읽을 필요는 없다. 현재만 볼 수 있으면 되니 영혼술과 강제력으로 감응 수준을 조절하면…….
‘……보인다.’
0.5초 정도 송신 지연처럼 딜레이가 느껴지지만 엘위드리스 기사가 보는 바닷속 이미지가 환인의 뇌리에도 전달되기 시작한다.
그런 바닷속은 엉망진창이었다.
방파제가 있는 쪽에서 수킬로 미터 떨어진 해저는 용권풍이 휩쓰는 것처럼 온통 뒤집히고 있었다.
해저에서 흙탕물이 뿌옇게 피어오르고 생선들이 떼죽임당해 떠오르다 선박 따위는 단숨에 으스러트려버릴 정도의 와류에 휘말려 갈려나간다.
쿠구궁—…….
=지진이네.=
=안느. 네 정령 감지에 뭐 느껴지는 거 없어?=
=환연이 하는 거 같은데 내 수준으로는 감지가 어려워. 그냥 엄청 묵직한 힘이 모여들고 있구나! 이 정도?=
발밑을 스치고 지나가는 약한 진동에 이실리테, 안느는 바다 쪽으로 주의를 집중하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환인은 잘 안보이는 저 너머의 광경 때문에 감응을 링크한 영혼에게 의사를 보내봤다.
‘더는 앞으로 못 나가겠나.’
‘갈 수는 있지만 강력한 정령의 힘에 의해 산산이 조각날 거예요.’
그렇게 되더라도 죽지는 않지만 환연이 힘의 투사를 중단할 때까지 계속해서 산산조각이 나겠지.
환인은 가까이 가는 것은 포기하고 영령의 눈을 통해 바닷속을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영혼의 눈으로 보는 바닷속은 일반인의 눈으로 보는 밤의 풍경과 흡사했다. 윤곽만 흐릿하게 보이는 밤 풍경 속에서 살아있는 자의 기운이 희끄무연 불로 보이는 식.
제법 먼 곳에 희끄무레한 불이 해저를 가득 채운 게 보이는데, 그 불의 숫자가 실시간으로 줄어가고 있다.
새까만 도화지 위에 하얀 분필 가루를 쏟아놓은 뒤 붓으로 그 분필 가루를 툭툭 털어내는 느낌이라고 할까.
가루가 큼지막하게 쓸려나갈 때마다 쿠궁, 드드등— 딛고 선 땅이 흔들리거나 먼바다 쪽에서 괴성이 들려오는 식이다.
안느가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도령. 도시 쪽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거 같은데. 난데없는 괴현상이라면서 해왕이 분노했다느니 뭐니 그런 소리가 들려.=
“…….”
=어, 배를 띄우려는 사람도 있다. 용감하네~.=
환인은 영령 다섯에게 복귀 지시를 내렸다. 생각보다 환연이 잘해주고 있어 바닷속의 마물이 이쪽으로 몰려올 일은 없는 듯하니…….
돌아온 영령에게 환인은 다시 지시를 내려 안쪽 만으로 들여보낸다.
“배를 타고 오려는 놈들이 있다면 그 배를 부숴버려라. 사람은 해치지 말고.”
그러는 사이 진짜로 보트를 띄운 일단의 인물들이 방파제 쪽으로 오려다 난데없이 배가 해체되며 풍덩풍덩 빠져서는 기겁한 모습으로 뭍을 향해 돌아간다.
유, 유령이다…! 바다귀신이야……!
그 뒤로 배를 띄우려는 사람은 없어졌지만 항만과 부두에는 더더욱 사람들이 몰려 웅성거렸다.
밤중이라 희미한 소란이 방파제까지 들려와 환인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가 되니 병사들이 달려와서는 사람들을 강제로 해산시킨다.
일부 병사는 항만과 부두에 배치되어 사람들의 접근을 강제로 막고 있으니 저게 누구의 지시인지 환인은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게 한동안 바다가 요동치고 하늘의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며 기이한 흔적을 남기는 걸 구경하고 있자니 어느순간 사납게 들끓던 정령력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끝났나보다.=
파도는 여전히 거칠지만 정령력이 잠잠해져가는 것을 느낀 안느가 중얼거리고, 방파제 근처 해수면으로 자그맣게 변한 환연이 솟아오른것은 그 무렵이었다.
천천히 군청색으로 물들어가는 동쪽하늘을 배경으로 나타난 환연이 중얼거린다.
「피곤해~…….」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군. 마물은 다 정리한 건가.”
「대충은.」
환인이 다가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그의 손바닥 위로 자리를 옮긴 환연이 한숨을 내쉬며 감상을 말했다.
「나도 자주 힘을 써야겠어.」
“익숙하지 않은 힘의 투사라서 지쳤나 보군.”
「응. 힘이랑 에너지는 충분한데 머리가 지쳐서……. 아무튼 바닷속 마물 둥지는 다 치웠고 마물은 20% 정도만 남겼어. 대충 3천 마리 정도 되는 거 같은데 마물이 되다만 것들이나 등급도 못 받을 것들이 대다수라서 한동안은 위협이 안 될 거야.」
=응? 일부러 남겨뒀어?=
「일부러는 아니고…… 겁먹고 사방으로 흩어져버려 모두 정리하려면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릴 것 같아서.」
그냥 돌아와 버렸다는 이야기다.
「필요하다면 나머지도 정리하고 올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정도는 영주가 알아서 할 일이지.”
둥지가 파괴되며 혼란에 빠진 마물들이 서로 싸우기도 할 테니까 당장은 숫자가 늘거나 둥지를 형성하지 않을 거다.
적어도 몇 개월은 유예를 번 셈이다.
환인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수고했다고 칭찬해주었다.
“돌아가자.”
환인이 굳이 니아마드 앞바다의 마물 둥지를 쓸어버린 것은 칼스번 영주가 눈치껏 굽히고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배를 타고 북상할 때의 위험 요소를 줄이기 위한 것이라던가 귀족의 시선을 안 끌고 조용히 출항할 수 있게 된 것이라던가.
뇌물이라던가.
=이, 이것은 아버지께서 성제님께 바치는 공물과 감사의 마음에서 드리는 선물과 기, 기부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와.=
=우왕.=
다음 날 정오, 성역탑이 작동하지 않은 것을 두고 도시 주민들이 불안해할 무렵 찾아온 아스칼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우아한 궤짝 세 개를 꺼내놓았다.
그녀가 들어가고도 넉넉한 크기의 궤짝은 각각 금괴, 각종 주괴, 그리고 금화와 위상석을 가득 담고 있었다.
환인은 금 주괴가 가득 든 궤짝의 금괴 숫자를 어림잡아 셈해보고는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폭과 깊이를 봤을 때 안에 10kg짜리 순도 99.9%의 금괴가 300개 넘게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립 당시 금 시세를 생각해본다면 킬로당 8500만원 거기에 10kg짜리 금괴가 300개. 물경 2,500억이 넘어가는 돈이다.
‘단숨에 백만장자를 뛰어넘었군.’
현대에서는 출처가 불분명한 금괴를 처분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런 거야 조금만 머리를 쓰면 해결할 수 있는 일.
그나저나 확실히 이 세계에서는 금의 실물 가치가 낮다.
금화를 금으로 만든다지만 금화의 실제 가치는 금이 아니라 금에 섞는 위상석 가루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더욱이 금보다 더 아름다운 금속도 많고 금의 누런 색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 종족이 많다 보니 가치가 현대와 비교해 크게 떨어지는 것은 필연적.
=희귀 주괴가 이렇게 많아~! 이거면 별걸 다 만들 수 있겠네!=
그 증거로 유르파도 금괴보다 희귀 주괴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여자들도 휘황찬란한 금화와 위상석 상자를 힐끔거린다.
아무튼, 환인은 3톤에 이르는 금괴 상자를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니아마드에서 있었던 짜증 나고 성가신 일은 간단히 잊어줄 수 있지.
환인은 먹지도 않았는데 배가 부른 느낌에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살짝 떠는 아스칼 영애를 불렀다.
“어젯밤 소문 들으셨습니까?”
=네, 넷. 앞바다에 원인 불명의 파랑이 3시간 남짓 일다가 가라앉았다는 것 말씀이신가요……?=
“예. 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한밤중에, 앞바다의 해저에 둥지를 튼 마수 1만 2천 마리를 정리하였다고 하더군요.”
=…….=
“그렇다고 하여도 안심할 일은 아니며 성역탑이 계속 기동하다간 미궁이 폭발할 가능성도 있는 만큼 영주님의 현명한 판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는 것이 누군가의 의견이라 합니다.”
=그, 그…… 분의 의견은, 영주님께 일체의 가감 없이 전해질 것이라고 생, 생각합니다…….=
아비의 눈치는 딸에게도 이어졌는지 환인에게 살짝 떨며 인사를 올린 아스칼 영애는 왼손과 왼발이 같이 나가는 어색한 걸음걸이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금화와 위상석 상자를 살펴보던 아영이 작게 감탄하며 환인을 돌아보았다.
=금화는 대강 3천 닢에 위상석은 대부분 2~3급이네요. 그래도 수천 금화 어친데 여기다 희귀 금속 주괴랑 금괴까지…… 거의 1만 금화에 달하는 수준이에요. 니아마드 영주가 돈이 많다더니 정말인가 봐요.=
=돈이 없어도 긁어모아서 바쳐야지. 군대를 동원해 물속의 마물 1만 마리를 해치울 준비를 하려면 금화가 녹는 것도 녹는 거지만 도시의 병력도 무수하게 죽어 나갈 거 아냐.=
그들의 목숨값에 훈련비, 육성 비용, 소모품과 월급, 장구류 비용을 다하면 1만 닢은 큰돈도 아니라는 게 안느의 주장이었고, 그건 이실리테와 백려강도 동의했다.
“돈이라면 이번 성역탑 및 리체 남작가와 관련된 귀족 가문 두 곳만 털어도 1만 금화 정도는 가볍게 벌충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공물과 선물,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이런 것들을 바친 걸테지.”
하지만 안느의 말대로 직업자 병력은 아무리 돈이 있어도 찍어낼 수 없다.
궤짝을 집어넣자 아스펜드가 눈에띄게 묵직해진다. 3톤의 0.1%라고 해도 3kg이나 되니까.
한순간에 묵직해진 아스펜드를 만지는 환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늦었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