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86화 (786/813)

786 항구 도시 니아마드

마차를 타고 영주성으로 복귀한 아스칼은 상기된 얼굴로 영주실을 향해 달렸다.

들어올 때 본 아버님의 집무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말은 아직 집무를 보고 계시다는 이야기.

=꺅?! 아가씨, 달리시면 위험해요…!=

=미안해!=

몇 번 하녀와 부딪칠 뻔한 아스칼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영주실의 문을 앞에 두고 후우 후우, 숨을 골랐다.

뒤를 돌아보자 호위 기사인 슈나는 발키리 헬름을 옆구리에 끼고 창백한 얼굴로 경직되어있었으며 바나인도 비슷한 상태.

=바나인 씨는 안에서 부를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슈나는 그를 지켜봐줘.=

=예에.=

=예, 아가씨.=

그리고 각오를 다진 아스칼은 영주실의 문을 똑똑똑 두드렸다.

[들어와라.]

약간 굳은 아버지의 목소리.

딸칵,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아스칼의 눈에 슈헤일로 준남작과 지툰다 상급 남작이 돌아보는 모습과 그의 앞 책상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아버지가 보였다.

=으응? 허허허. 언제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던 녀석이 노크를 다 하다니, 이제 정말 시집갈 때가 되었나보구나.=

칼스번=에스=니아마드, 니아마드의 영주가 다소곳이 문을 닫고 들어오는 둘째 딸의 모습에 푸근한 웃음을 짓자 지툰다 상급 남작과 슈헤일로 준남작도 부드럽게 웃었다.

=아스칼 아가씨라면 지금도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 줄을 서겠지요.=

=크흠.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가씨를 얼마나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는지가 아니겠습니까?=

평소였다면 자신을 두고 하는 저 이야기에 부끄러워서 어쩔줄 몰랐겠지만, 아스칼은 망막에 떠오르는 문자를 주시했다.

//슈헤일로 라스무스

집사장. 메리아놀 준남작. 플뢰.

36.2//

//지툰다 무리니

파란 기사단장. 메리아놀 상급 남작. 핀겔 프라우드.

19,659//

//칼스번 에스 니아마드

니아마드 영주. 메리아놀 상급 백작. 셀핀 프라우드.

24.9//

몇 년째 거의 변하지 않은 세 명의 강함이 수치화된 것이 그녀의 눈에 크게 들어온다.

저것을 보니 조금 전 확인했던 성제님의 강함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새삼 강하게 다가왔다.

영지에서 가장 강한 기사단장, 7급 전사의 강함이 19,659다. 어렸을 적 주도에서 한 번 뵌 하얀 나뭇잎 투사님의 강함은 놀랍게도 8만이셨다.

그런 투사님도 성제님의 곁에 있던 검희님과 정령 기사님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검희님의 강함은 22만. 정령 기사님의 강함은 21만. 아마도 그 두분의 강함이 현 인류 중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닐까.

그런데…….

//환 인

성제. 아신.

26,109,523—//

아스칼은 말도 안 되는 강함의 수치를 재차 상기한 순간 애써 유지하고 있던 평정이 깨지며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2600만이라니. 대체 어떤 능력을 지녀야 그런 수치가 나올 수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아신님이셔서 그런 걸까?

그리고 수치 뒤의 이음표는 무슨 뜻일까? 계속해서 강해진다는 말? 아니면 감정안으로도 알아내지 못해서 임시로 표기한 것?

=아키? 왜 그러느냐. 그러고 보니 얼굴이 창백하구나. 손도 떨고 있고.=

허허 웃던 칼스번 영주는 딸의 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일어나 그녀를 살폈다.

언제나 상냥하고 약간 말괄량이 같던 둘째 딸이다. 그런 아이가 이렇게 떨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금 심각한 얼굴로 딸아이를 살피던 칼스번 영주는 무언가 두려워하는 듯한 딸을 안아주며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품에 안고 보니 아기 새처럼 떠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져 다시 물으려는 순간.

…….

딸아이의 자그마한 귓속말에 칼스번은 멈칫하고 굳었다. 그러는도 잠시, 평범한 표정으로 돌아간 칼스번 영주는 두 가신에게 지시했다.

=지툰다, 슈헤일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불주먹파와 물귀신파의 소멸 건에 대하여 교단에게 적극 협조하여서 도시의 혼란을 빠르게 가라앉히도록 하게.=

=영주님의 뜻대로.=

=영주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두 가신이 영주실을 빠져나가길 기다린 영주는 조금 심각한 얼굴로 딸에게 물었다.

=딸아. 영지의 소멸 위기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한 것이냐.=

=물론이어요, 아버님. 제가 이때까지 이러한 장난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믿고말고. 다른 녀석들이 온갖 고약한 장난을 칠 때도 너만은 이 아비를 늘 웃음 짓게 해주었지.=

칼스번 영주의 믿음에 고개를 작게 끄덕인 아스칼은 품에서 환인에게 건네받은 책자 두 권을 건네준 뒤 문밖의 두 사람을 들여도 될지 허락을 구했다.

딸에게 허락한 영주는 제법 손때가 탔지만 고급 재질의 가죽 표지와 속지를 확인하고 빠르게 내용을 훑어보았다.

성역탑의 문제점. 그로 인해 영지에 닥친 현상과 그로 인해 귀족을 표적으로 발생한 귀족의 범죄.

=이건…….=

성역탑 문제는 자신도 알게 된 지 몇 년 되지 않은 사실이며 최측근 몇몇만 인지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 성역탑부터 시작해 영지 내부의 치부를 이토록 간단히 알아차리다니, 대체 누가 이것을 썼기에?

영지 기밀 유지에 생긴 구멍을 슬퍼해야 할까 아니면 이 정보를 수집한 자들의 유능함을 갈망해야 할까.

치밀어오르는 탄식을 억누른 영주는 딸의 뒤에 엉거주춤 선 셀핀족 남자를 보곤 영주의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바나인이군. 성역탑의 문제점을 도시민들에게 폭로하려다 큰 사고를 당하였다고 들었는데.=

=그, 그렇습니다, 영주님!=

=딸아. 이 책자와 저자는 어떻게 알았느냐?=

=아버님. 영지에 성제님이 계십니다…….=

=성…제님이? 혹시…….=

=네…… 그 책자의 내용은 성제님께서 간추리고 요약하신 것입니다…….=

=…….=

칼스번 영주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며칠 전, 두르데인의 영주에게서 기밀 통신이 들어왔었다.

성제님이 암행으로 두르데인을 다녀가셨고 다음 목적지는 여기 니아마드 아니면 북쪽의 리칼리사일 거라는 이야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흑철의 드로거스 왕가가 성제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는 극비 소식이었다.

니아마드의 라인은 주도 천렵의 알콰닌 왕가다.

원래대로라면 이 소식을 받지 못해야 마땅하지만, 그의 고모님이 두르데인으로 시집을 가셨기에 인척 관계가 되어 얻게 된 정보.

알고 있는 자도 드로거스 왕가의 다루그 왕자, 알세이시스 왕가의 가주, 두르데인 영주 뿐.

그 사실을 전달하며 두르데인의 영주가 신신당부했다.

‘다루그 왕자님께서는 성제를 명실상부한 아신이라고 판단 내리셨네. 혹여 그와 연관될 일이 생긴다면 절대 적대하지 말고 최대한 친분을 쌓으라는 것이 왕자님의 뜻일세. 그리고 이 이야기는 자네만 알고 있게. 소문이 퍼져나가면 그대의 입에서 흘러나갔다고 여길 것이네.’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칼스번 영주는 알 수 있었다. 성제는 알려진 것처럼 마냥 선인이 아니다는 것을 말이다.

잠깐 며칠 전의 일을 회상했던 칼스번 영주는 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혹시 눈으로 그분을 보았느냐.=

끄덕…….

=어떠하였지?=

자신의 질문에 겁먹은 듯한 딸은 미리 적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작은 쪽지를 들었다.

[환 인]

[성제. 아신.]

[26,109,523—]

2, 2600만…….

숨이 턱 막히는 수치에 칼스번 영주가 굳었을 때, 아스칼은 눈을 부릅뜨고 굳어버린 아버지의 귀에 속삭였다.

=아버지. 성제님은 지금 무척 화가 나신 상태로 리체 남작가에 머물고 계세요…….=

=……!=

=그분이 말씀하시길, 한시라도 빨리 이 사태를 강경하게 해결하여야 할 것이고 그리하지 않는다면…… 분노한 아신의 폭력에 니아마드가 고스란히 노출될 거라 하였어요.=

딸아이의 속삭임에 끼이이잉— 이명이 칼스번의 고막을 채운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은 덤이다.

하지만 강인한 정신력으로 정신적 충격을 몰아낸 칼스번 영주는 책자와 딸이 특별히 강조한 대목을 생각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건 성제의 최후통첩이다. 아니……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한 마지막 인내심인가.’

자기 손으로 이 사태를 정리할 기회를 준 걸 보면 확실하다. 이유라면…… 그거였나!

성제가 패시지로 가지 않고 굳이 땅끝 도시인 니아마드까지 온 이유, 리체 가문을 방문한 이유.

배를 구하기 위해서겠지. 왜? 주도에 비를 뿌리는 용을 찾기 위해서.

리체 상단의 부상단주를 죽이고 불주먹파, 물귀신파를 쓸어버리고 재산을 탈취한 인물도 성제일 거다.

배를 구하려다 위기에 빠진 리체 가문과 인연이 닿았고, 그런 남작가를 구하기 위해서.

대충 행보가 눈앞에 그려진다.

조용히 출항하기 위해서 정체를 밝히길 꺼린 성제는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끔 이 사건이 조용히 그리고 원만히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에 딸아이를 통해서 연락을 보낸 거지.

‘아키의 손에 책자를 보내고 증인이라 할 수 있는 바나인도 함께 보낸 걸 보면 확실해.’

중요한 부분은 맞추었지만 그외 디테일을 짚어내는 데는 헛손질한 칼스번 영주가 딸의 자그마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중요한 일을 해주었구나. 장하다, 아키.=

=아, 아버지…….=

=그 무서운 성제님이 지켜보신다니 허투루 움직일 수 없지……. 뒤는 이 아빠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그만 가서 맛있는 걸 먹고 뜨거운 물에 목욕한 뒤 푹 쉬거라.=

=…….=

정말 가도 괜찮은 건지 걱정이 한가득 묻어나는 얼굴의 딸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내준 영주는 딸을 따라 나가려는 슈나를 눈빛으로 멈춰 세웠다.

그리고 딸이 영주실을 나가자마자 얼굴을 굳히며 슈나의 옆에 선 셀핀족 남자를 불렀다.

=바나인.=

=예, 예. 영주님.=

=탑에 관한 것을 자네가 성제님께 알려주었나?=

=아닙니다. 성제님은 처음부터 전부 짚어내고 계셨습니다…….=

=……무서운 사람이군. 아니, 무서운 아신이신가.=

그 말은 성역탑의 발동을 고작 두 번 보고 탑의 문제점을 간파해냈을 만큼 관찰안이 뛰어나며, 2600만 수치에 달하는 힘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행동할 만큼 자기 제어와 자제력이 뛰어나단 뜻이다.

‘다루그 왕자님은 그걸 꿰뚫어 보셨기에 성제와 불가침 조약을 맺으신 거겠지.’

고개를 끄덕인 칼스번 영주는 슈나에게 영주실 안쪽에 난 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나인을 저 방으로 데려가서 직접 지켜봐라.=

=옛!=

업무 중 잠깐 쉴 때 쓰는 작은 쪽방이다. 바나인을 잠시 감금해두는 정도로는 충분할 터.

딸랑딸랑—

호출벨을 흔들어 하녀를 부른 칼스번 영주는 방금 나간 지툰다 기사대장을 다시 호출해놓고 최단 시간 내에 성제가 지목한 놈들을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마지노선은…… 오늘 밤.

‘내일 아침 날이 밝기 전까지 모든 것을 해치운다.’

달빛이 비치는 어두운 방 안의 침대 위.

열락에 젖은 땀투성이의 하얀 여체가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것도 잠시, 이내 고양이처럼 움직여 남자의 옆에 붙는다.

평소였다면 보들보들하고 부드러웠을 여인의 피부가 미열을 머금은 땀 탓에 찰싹 들러붙었지만, 땀에 젖은 것은 환인도 마찬가지였기에 만족한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리는 안느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환인의 왼쪽 옆구리에 젖가슴을 붙인 안느가 그의 쇄골이며 목라인을 어루만지다 말했다.

=도령. 밖이 시끄러운 거 같아.=

“기사들이 몰려다니는 것 같은데.”

=흐음……. 칼스번 영주가 움직인 걸까?=

“아니라면 달리기에도 절도가 느껴지는 기사들이 한밤중에 저리 뛰어다닐 리 없겠지.”

하얀 침대보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이는 그녀의 은발을 한 움큼 집어 달빛에 비추자 머리카락이 흡사 미스릴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인다.

최고급 실크 같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감촉을 느끼며 환인이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영주의 눈치가 기민한가 보군.”

=응. 제법이야. 아무리 영주라 해도 휘하 귀족의 파벌 구도 때문에 함부로 손을 못 쓸 텐데…… 결단력이 과감하다고 해야 하나?=

“전격전의 주요 골자는 신속한 전선 돌파 이후 후방 전력으로 전선을 확고히 하는 거지.”

=……처단할 가문 소속 기사들을 제외해놓고 빠르게 귀족 머리만 처단한다는 거야?=

어느새 가슴 위로 올라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안느의 모습에 그녀의 기다란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분은 영주의 손에 있다. 척살 명단에 오른 귀족들은 전원 성역탑의 건축 및 유지에 관련된 자들. 영지의 근간을 뒤흔든 범죄라는 표어로 머리만 빠르게 날려버린 뒤 그 가문과 관련된 기사들, 귀족들을 다독이고 작위의 보전을 약속한다면 내전 같은 큰 문제로 번지지 않을 거다.”

오히려 비어버린 작위를 계승하기 위해 귀족 가문 안에서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금 보여주는 영주의 눈치라면 그 점까지 노렸겠지. 그리고 그 틈에 귀족가의 힘을 약화할 수단도 동원할 테고.

성역탑 및 리체 남작가와 연관된 가문은 하나같이 20대 30대를 넘나드는 오랜 세습 가문이다.

그 정도면 쌓은 힘도 막대할 게 틀림없으니 이 기회에 영지 내 귀족 가문의 장악력을……?

안느가 자신의 위로 올라오며 침대가 출렁하고 흔들린다.

키가 190cm를 넘지만 9등신 모델처럼 늘씬하기에 크다기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여체.

자신의 눈앞에 중력을 받아 늘어진 한 쌍의 젖무덤이 시선을 현혹하고, 골짜기 사이로 보이는 안느의 둔덕에서 하얀 정액이 방울방울 맺히다 똑, 톡- 시트 위로 떨어지는 장면이 흥분을 유발한다.

시선을 위로 올리자 안느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도령…… 지금 표정 너무 섹시한 거 알아?=

“……?”

=도령이 생각에 잠기고, 상대의 계획을 짚어낼 때 보여주는 표정은 정말…….=

하아아, 달뜬 숨을 흘리며 환인의 목덜미를 핥기 시작하는 안느는 아기 고양이에서 어느새 암컷 호랑이가 되어있었다.

이대로 있다면 그녀에게 잡아먹히고 말겠지.

환인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잡고 입술에 쪽, 키스해준 뒤 말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에엥— 왜? 시간 끝나려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아쉬움이 뚝뚝 흐르는 얼굴로 눈꼬리를 늘어트린 안느는 그의 몸 위에 엎어지며 칭얼거린다.

“왠지 느낌이 그래. 칼스번 영주가 찾아올 것 같아서 말이다.”

=……안 찾아오면?=

“흠……. 영주가 안 찾아오면 날 잡고 네 엉덩이 구멍에 정액을 한가득 채워주지. 배가 불룩해질 정도로 말이다.”

=약속한 거다!?=

반색한 안느가 그의 위에서 몸을 일으키자 달라붙은 피부가 떨어지며 쩌어업— 음란한 소리가 난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벗어놓은 옷을 헤쳐 아공간 가방을 찾은 뒤 성수포를 가져와 그의 몸을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그렇게 정사의 흔적을 지우고 먼저 옷을 챙겨입은 환인은 안느가 하얀 젖가슴을 출렁출렁 흔들며 뒷정리하는 장면에 잠깐 생각하다 그녀를 덮쳤다.

=꺅?=

“힘을 좀 썼더니 허기가 져서 말이다. 영주가 오기 전까지 배를 좀 채워야겠는데, 내 도시락은 따뜻하게 잘 보관하고 있겠지?”

장난기가 살짝 묻어나는 환인의 미소에 안느는 자기 가슴을 콕콕 찌르는 환인의 손길을 두팔로 막으며 웃는다.

=뭐야 그게! 내 가슴이 도령 도시락통이야?=

“베어 물면 언제나 맛있는 모유가 나오는 맘마통이지 않나.”

=모유 아니거든!=

“맘마통인건 인정하는 건가.”

=아니 진짜아, 도령이 아기도 아니고 맘마통은 무슨…….=

“남자는 여자의 가슴 앞에서 다들 아기가 되기 마련이지.=

할 말 없는 대답에 헛웃음을 지으면서 그를 안은 안느는 이윽고 젖꼭지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움에 슬쩍슬쩍 허벅지를 비비며 흐느꼈다.

=…아♡ 이, 이렇게 야하게 빠는 아기가 어딨어…….=

아랫배를 떨며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낸 안느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환인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환인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에 애정이 그득하다.

‘확실히 한 번 어려졌다가 자란 뒤로 장난을 자주 친단 말이야.’

그게 싫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쁘다.

오늘 낮처럼 평범한 사람 같이 짜증 내고 성가셔하고 한숨 쉬고 많은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 그가 점점 사람다워지는 것 같아서 좋다.

큰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아니라면 이 행복에 파묻혀 마음껏 허우적거릴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환인에게 정수를 잔뜩 급유해준 안느는 새로 갈아입은 팬티가 다시 젖은 걸 느끼고 또 갈아입은 뒤 재빨리 옷을 챙겨입었다.

이후 귀빈 응접실로 가서 환인과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받길 잠시.

슬슬 해가 뜨기 시작할 듯한 시각, 살짝 열어둔 창문 너머로 마차가 다가와 멈추는 소리가 났다.

창로 다가간 안느는 온통 검은 마차에서 자그마한 키의 사람이 내리는 걸 보고 입술을 삐죽였다.

=도령이랑 내기하면 안 됐어.=

내가 미쳤지. 이번에 못 한 만큼 다음에 더 찐하게 안아달라고 해야 했는데 괜히 유혹에 넘어가서는.

꽁알거리는 안느의 모습에 작게 웃던 환인은 가서 이실리테 데려오라고 한 뒤 엘위드리스 기사 영혼 하나를 소환해 영령화, 손님을 맞이하러 내보냈다.

찾아온 남자가 칼스번 영주가 아닐 가능성은 0%다.

딸을 통해 이쪽이 보낸 정보를 가지고 밤새 난리를 피운 영주가 성제에게 심부름꾼을 보낸다? 오히려 그게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실리테와 안느가 환인의 뒤에 섰을 때 영령의 안내를 받아 귀빈용 응접실로 들어온 사람은 아영이 이야기해주었던 칼스번 영주의 특징과 일치했다.

‘이 시간에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양해를 구할 게 있다는 뜻일 텐데.’

하룻밤 사이 귀족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은원을 말끔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결과를 보고하는 건 내일 오후나 되어야 할 터. 그런데도 지금 왔다는 것은 중간 보고를 겸해 무언가를 요청하거나 양해를 구할 게 있다는 뜻이다.

“어서 오십시오, 칼스번 영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놀랐습니다. 제가 올 것을 내다보고 계셨다니…….=

환인이 일어나 손을 내밀자 칼스번 영주는 적잖게 놀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마중 나온 영혼에게 향했다.

저건 영혼……이라기보다는 유령 계통 미궁의 심층에서 나온다는 유령 기사지 않나.

성제는 저런 것까지 다룰 수 있는 건가.

칼스번 영주는 애써 놀람을 다스리며 후드를 벗고 환인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아신이 되신 성제님께 니아마드의 영주, 칼스번 에스 니아마드가 인사 올립니다.=

“좋지 않은 일로 만나게 되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군요. 메리아놀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환인입니다.”

악명이라니…….

의미심장한 워딩에 고개를 들고 환인과 시선을 마주한 영주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잡스러운 이야기로 성제님의 귀를 더럽히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하여 거두절미하고 본심,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성역탑은 현시점에 작동을 정지시킬 수 없습니다. 아니, 정지시키지 못합니다.=

환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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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환인: 그건 딱히 상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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