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5 항구 도시 니아마드
영주성의 마차 안에는 환연의 추측대로 영주의 차녀가 타고 있었다.
차녀는 하녀 둘과 함께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중 나온 이샤를 향해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겨들었다.
=아, 아스칼 님?=
=이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올려다보며 걱정을 한껏 드러내는, 크림색 머리카락에 회색 눈동자의 자그마한 소녀.
셀핀족인지 지구인처럼 동그란 귀에 키가 환인의 가슴께에 겨우 닿는 수준의 소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말했다.
=슈나에게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파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찾아왔어요. 설마 부상단주가 그런 짓을…….=
소녀의 걱정에 이샤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주며 웃었다.
=아스칼 님,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이번 일이 저에게 큰 교훈이 되어주었는걸요.=
=하지만,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말씀하셨어요. 여행자님이 정말 큰 도움을 주셔서, 그 덕분에 제가 나가야 할 길을 알게 되었어요. 지금 제 마음은 단단한 바위와도 같아요.=
환인을 가리키는 이샤의 이야기에 소녀는 그제야 환인을 돌아보더니 살짝 얼굴을 붉혔다가 흐트러진 자태를 정리하고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바깥에서 오신 손님께 추태를 보여드렸네요. 니아마드 영주님의 둘째 딸, 아스칼 게다 니아마드가 여행자님께 인사 드립니다.=
“…정중한 인사에 감사드립니다. 인이라는 보잘것없는 여행자입니다.”
=인, 님……?=
환인의 이름을 듣자마자 아스칼의 회색 눈동자가 한순간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반짝이더니, 환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아스칼의 얼굴에 놀람이 크게 번져갔다.
=성제님……!=
“…….”
=네?=
=예?=
어떻게 알아차렸지. 방금 눈동자가 빛난 것과 관계있는 건가. 하지만 직업자는 아닌데.
하녀와 발키리 헬름의 기사, 이샤 등 전부가 놀라는 가운데 환인도 속으로 적잖이 놀랐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며 작게 웃었다.
“제 이름이 성제님과 같다고들 하더군요.”
완벽한 타이밍으로 꾸며낸, 진실의 주시자 능력을 가진 플뢰족마저도 속여내는 변명이었지만 그런 변명이 무색하게 이샤와 발키리 헬름의 여기사는 크게 굳은 얼굴로 주위를 확인했다.
이어 남작 저택의 하녀장과 영애의 하녀들을 붙잡고 이 일은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다그치며 확답을 받아낸다.
=만에 하나라도 이 사실이 새어나갔다간 그 목숨으로 죗값을 치를 것이다!=
=히익. 네, 네엣!=
=저,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자신을 성제라고 확신하지 않는 이상 나오지 않을 반응이다.
하녀들을 다그치는 모습을 응시하던 환인은 안느에게 조용히 물었다.
“프라우드족 선천 능력은 광물 탐지와 광물 감정이라고 하지 않았나.”
=응. 핀겔족은 광물 탐지, 셀핀족은 광물 감정이 맞아. 그런데 저 아가씬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희귀 직업자도 아닌데.=
“날 볼 때 눈동자에서 변화가 나타났었다. 광물 감정 능력이 대상 감정으로 변화하기라도 했나 보군.”
=아. 선천 능력도 강약이 나뉘니까…… 광물 감정이 강화되어서 전체 감정으로 변한다 해도 이상하진 않은데, 감정이 어디까지 통하기에…….=
하녀들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시킨 이샤와 아스칼, 발키리 헬름의 여기사는 극히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환인 일행을 저택 안의 귀빈용 응접실로 안내했다.
동이 저무는 저녁의 한순간. 강한 오렌지빛의 노을이 창문을 통해 쏟아지며 아스칼의 등 뒤를 물들인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아스칼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아있는 환인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암행 중이신 성제님의 의중을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언급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그녀의 옆에서 이샤도 덩달아 허리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성제님께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할지……!=
아스칼은 단지 환인의 정체를 알아보고 언급했을 뿐이지만 그녀는 감히 성제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으니까.
화려하고 기품 넘치는 붉은 의자에 앉아 두 명의 사과를 받은 환인은 잠시 그녀들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스칼 영애께서는 어떻게 절 알아보셨습니까? 넘겨짚으신 것도 아니고 이실리테와 안느도 아우라를 감추어 나름대로 변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이 눈 때문입니다. 이 눈으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이름과 직업, 그리고 강함 정도를 제 경험에 따른 주관적인 감각으로 알게 되기 때문에.=
이상한 이야기다. 경험에 의한 주관적인 감각이라면 아스칼은 이전에 성제를 본 적이 있다는 말이 되지 않은가.
그리고 성제라는 직업 명칭은 대성녀가 지어준 것이다. 평범하게는 그녀가 성제라는 직업명을 몰라야한다는 것.
그런데 어떻게 성제라는 걸 알아낸 거지? 이해되지 않아 아스칼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져보았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아스칼은 셀핀족의 돌연변이이며 저 눈은 대현자라 불리는 지하율이 가진 허공 지식 단말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제가 누군지 맞춰보실래요?=
=아영 영혼 기사님이시지요? 7급 성술사이면서 암살자이신…… 전투 성직자도 아니시면서 저희 파란 기사단의 기사단장보다 뛰어난 강함을 지니시다니, 대단하세요.=
=우와…….=
그게 아니고서야 소개도 안 해준 아영의 이름과 직업, 강함을 짚어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아영의 감탄과 이실리테, 안느의 관심에 아스칼이 순진하게도 자신의 선천 능력을 계속해서 자랑한다.
=이실리테 검희님은 가문의 파란 기사단 1군과 2군 전원을 상대해도 쉽게 이기실 정도시네요. 안느 정령 기사님도 마찬가지로 강하시구요. 두 분 다 대단하세요.=
=영애님. 혹시 이실리테 언니랑 안느 언니님 둘 중에 누가 더 강한지도 보이시나요?=
=강인한 바위를 상대로 검보다 철퇴가 우위에 있고 질긴 천을 상대로 철퇴보다 검이 앞서듯, 두 분의 강함은 다른 강함이셔서 비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아스칼의 현명한 대답에 안느가 눈을 흘기며 아영의 정수리에 꽁, 꿀밤을 먹인다.
=악!=
=야, 넌 뭘 물어보는 거야.=
=궁금하잖아요오. 언니님이랑 이실리테 언니가 진심으로 싸울 일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아스칼 영애도 약삭빠르네요. 언니들의 비위를 맞추는 대답이라니.=
자신이랑 벨이 붙는다고 무승부가 나온다는 대답이랑 같은 거잖아?
난처한 웃음을 짓는 아스칼을 힐끔거린 안느가 아영에게 물었다.
=그럼 넌 나랑 이슬이 중에 누가 더 세다고 보는데?=
=이실리테 언니요.=
=…….=
망설임 없는 대답에 안느의 3연속 꿀밤이 아영의 정수리를 두드린다.
=악악! 이실리테 언니의, 아콩! 언니의 다중 검기는 그만큼 사기라는 거죠! 아무리 안느 언니님이라고 해도 네 방향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무한히 막을 수는……!=
꿀밤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펼치던 아영은 급기야 장갑이 터질듯한 소리를 낼 정도로 쥐어진 안느의 주먹에 항복을 외친다.
아스칼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꽁트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쿡쿡 작게 웃음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서운 분들인데 실제로는 다정하시고 장난기도…….
하지만 이샤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살짝 울상을 지었다.
저런 사람들 앞에서 성제님을 어떻게 하려 했다니……. 생각만 해도 등에 식은땀이 흐르지만 그런 식은땀은 환인을 바라보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이쪽의 무례에도 불구하고 배신자를 찾아 처단하고 빼앗긴 재산을 찾아주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환인은 그녀에게 있어 꿈에도 그리던 백마 탄 왕자 그 자체.
동족 남자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매력을 마주하고 있자니 머릿속으로 심심할 때 읽었던 로맨스 소설이 마구마구 떠오르는 것이다.
곤경에 빠진 비련의 여주인공과 그런 여주인공을 기적적으로 구해주는 멋진 왕자님.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며 서로 사랑을 키워가고 마지막에 가서는 결혼으로 맺어지며 땅신님의 자비 같은 보름달 아래에서 나누는 사랑, 그리고 이어지는 파과의 고통에…….
낯 뜨거운 19금 핑크빛 망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마악 전개되려는 순간, 환인의 목소리가 그녀를 망상 속에서 끄집어냈다.
“어쩐지 그랬군요. 영애께서 절 알아보셨을 때 적잖이 놀랐습니다. 설마 변장을 꿰뚫어 보는 분이 계실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지요.”
=그, 그것은 전부 감정안의 덕분인지라……. 혹시 소녀가 성제님의 암행을 누설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입을 꾹 다물고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이니까요.=
자신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미세하게 떨거나 흠칫거리는 영애의 반응에서 환인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여자친구들이 아드네빌라나 지오드와 만났을 때와 흡사한 반응, 항거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와 마주쳤을 때 보이던 반응이다.
감정안으로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강함을 알아차린 건가. 그렇다면 이용하지 않을 수 없지.
“마침 영주 일가분께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아스칼 영애께서 직접 찾아오셨으니 직접 여쭈어보고자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그리모암의 강력을 발동, 성제의 아우라와 아신위의 휘광을 동시에 전개하자 비좁지 않은 응접실 내부가 황금빛 광채에 잠겨 든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스칼, 이샤는 갑작스럽게 거대해진 환인의 존재감에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리체 가문의 하녀장과 아스칼을 따라온 하녀 둘은 반쯤 기절할 것 같은 모습으로 풀썩 털썩 주저앉는다.
터덩—
투구가 떨어지는 쇳소리에 발키리 헬름이 떨어진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식은땀으로 목욕 중인 여기사를 잠깐 본 환인은 아스칼을 돌아보며 질문했다.
“허락하신 것으로 알게 묻겠습니다. 아스칼 영애와 리체 남작은 제법 친밀한 사이인가 봅니다.”
=…네……엣. 이, 샤는…… 언니, 같은……!=
=네헷. 아…스칼 님하고는 어렸을 때부터,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 어요….=
“이상하군요.”
환인은 헐떡이는 두 여자를 보며 생각하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가 자신에게 오감을 집중한 아스칼에게 물었다.
“그러면 왜 리체 남작가를 몰락시켰습니까?”
=………네?=
=……??=
질문하고 몇 초 후, 질문의 뜻을 인지한 아스칼의 심장이 한순간 빠르게 뛰더니 차츰 진정을 되찾아간다.
눈동자의 흔들림도, 동공 반응과 신체 변화도 아스칼은 리체 가문의 몰락과 관련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리체 가문의 몰락에 관여하지 않았고 아는 것도 없다는 반증.
=아, 아스칼 님…….=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이샤가 배신감에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하자 아스칼은 오해받은 사람 특유의 반응처럼 침착한 태도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무고함을 피력했다.
=이샤. 저희는 아니에요.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아버님이 어째서 그렇게나 귀여워하는 이샤를, 총애하시던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해치시겠어요? 성제님께서 틀림없이 오해하고 계신 거예요!=
=저, 정말요……?=
=정말이에요! 성제님, 그……렇, 그렇……죠…?=
“…….”
의심받았을 때 발휘되는 특유의 용기는 금방 사라지고, 환인의 황금빛 눈동자 앞에서 두 여자는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신식 영혼의 눈으로 아스칼의 영혼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던 환인은 성제의 아우라와 아신위의 휘광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하녀 셋이 기절한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람다 부상단주는 슈헤일로 준남작의 지시로 리체 남작 가문을 쓰러트리기 위해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했습니다. 슈헤일로 준남작은 영주성의 집사장이라 들었습니다만, 틀립니까.”
=맞…아요. 하지만 집사장님이 어째서……. 집사장님은 리체 남작님과 절친한 친우셨는데…….=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에게 환인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스칼 영애. 성역탑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성역탑이 마물을 쫓아내는 효과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의 몸에 조금씩 나쁜 기운을 흘려 넣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 사실을 밝히던 분께서 큰 사고를 당하셨다는 소식도…….=
“저는 그 사고를 니아마드 영주가 손을 쓴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성역탑의 부정적인 효과가 대중에게 알려지면 일어날 파장을 우려해 진실을 어둠 속으로 감추고, 리체 남작가가 그 어둠과 일부 연관이 있어 철저하게 망가트리는 것이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
=……!=
혼란을 넘어 영혼에까지 충격을 받은 것처럼 경악에 빠지는 두 여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있던 여기사는 연이어 폭로되는 사실에 어이가 탈출했는지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따름이다.
‘이 여자들은 거짓말도 못 하고 성역탑과도 관계가 없나.’
그렇다면 제삼자의 개입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하나의 가설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집사장이 성역탑으로 이득을 얻거나 성역탑의 문제가 발생하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일부 무리와 결탁해 리체 가문과 상단을 무너트리고 바나인을 뭉개버린다고?
“…….”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말이 안 된다.
남작가는 귀족 가문이다. 귀족 가문이 주저앉는 것은 준귀족이나 부호의 가문이 무너지는 것과 차원이 다른 여파를 가져온다.
국가의 울타리에 있다지만 폐쇄적인 도시 사회에서 귀족가가 망하는 것은 좁은 니아마드 사회에 얼마나 큰 이슈가 될까.
그만한 일을 아무리 영주성의 집사장이라해도 고작 준남작이 독단으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인가?
전대 리체 남작의 해상 물류 사고가 정말 우연히 벌어진 일이고, 슈헤일로 준남작은 남작가의 재산에 욕심이 나서 람다 부상단주를 조종해 가문을 무너트리려 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도 귀족 가문을 무너트리는 일이다. 누군가의 묵인이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환인은 아스칼 영애와 리체 남작에게 니아마드의 귀족이 몇이나 있고 작위가 어떻게 되는지 요청했다.
=아, 아버님은 주도 중앙 협의회 천렵 가문의 알콰닌 왕가에 충성을 맹세하고 작위를 내려받으신 상급 백작이세요. 하급 자작까지 자유 임명권을 가지고 계시는데…….=
상급 백작은 하급 자작을 1명, 상급 남작을 2명, 남작을 4명, 하급 남작을 8명에 준남작을 16명까지 임명할 권한을 지닌다.
이중 세습이 가능한 것은 하급 자작 1명, 상급 남작 2명 남작 4명까지. 이하 하급 남작과 준남작 24명은 단승이며 반쯤 기사 계급으로 취급 받는다.
한마디로 남작까지가 진정한 귀족인데 문제는 단승 귀족이 세습 귀족으로 올라가려면 7명의 귀족 중 한 명이 죽어 자리가 비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도의 기록실에서 사회 관련으로 얻었던 지식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니아마드의 흔한 정치권력 투쟁 구도가 말아놓은 양탄자를 펼치듯 머릿속에 쫙 펼쳐졌다.
=……리체 남작가는 마지막 네 번째 남작의 가문이에요.=
“그리고 리체 남작가는 이샤 리체 남작까지 해서 이제 3대 세습 귀족이군요.”
=네, 가장 어린 신흥 귀족 가문이에요. 그다음인 틸빌드 남작은 12대째 세습 중이시고 가장 오래된 가문이 33대 세습 중인…….=
아스칼 영애가 세습 귀족들의 몇 대 세습인지를 말하지만, 환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녀의 설명으로 그려놓은 니아마드 권력 파벌 구도에서 이 상황을 타개할 해법을 발견해 거기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
환인은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를 잡고 당기며 이샤에게 요구했다.
=리체 남작. 제가 낮에 건네주었던 책자를 넘겨주십시오. 그리고 선대 남작의 수기가 있다면 그것도 가져다주시겠습니까.=
=넷.=
발딱 일어난 이샤가 황급히 달려 나가고 안느가 호위로 따라붙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돌아온 그녀가 내민 수기에 더해 상단의 책자를 속독으로 삽시간에 파악하고 상황 정리를 끝마친 환인은…….
탁.
펜을 날카롭게 내려놓았다.
그 행동에 아스칼 영애가 움찔했다가 환인의 눈치를 살핀다.
“영특한 아스칼 영애라면 제 지난 행적을 알고 있으실 겁니다.”
=네, 넷.=
어찌 모를까. 지금 메리아놀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성제가 꼽힐 텐데.
아니, 가장 유명한 분은 여휘님이시지만 그분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제외한다. 그런데 성제님도 아신이신데…… 사람이 아니신데 유명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나……?
엉뚱한 생각을 하던 아스칼 영애는 환인의 이어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복잡하고 어려운 길은 싫어합니다. 이 일을 가장 빠르고 간단하게 해결할 방법은 니아마드 영주를 찾아 이번 일을 알리고 처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고 이렇게 먼 길을 돌아가는 이유는 그래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암중 성불행…….=
……그런 게 아니지만 환인은 아스칼 영애의 착각을 교정해주지 않았다. 실제로 도시의 영혼 태반을 성불시키기도 했으니까.
작은 쪽지에 [김영수를 여기로 오라고 전해라.]는 글을 적어 환연이 들어가 있는 안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참, 우연히도 인연이 닿았던 리체 남작 가문이 니아마드 귀족들의 더러운 개인사와 치부 감추기, 권력 다툼으로 몰락하기 직전인 장면을 목격했더니 기분이 무척 나쁩니다.”
=……!=
나쁜 이유는 귀찮음과 성가시게 굴어 짜증이 가득 났기 때문이지만, 리체 가문과 연관되어있기도 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파밧—
동시에 김영수가 공간 도약으로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환인 형님, 부르셨습니까!”
“이쪽으로 가면 바나인이라는 셀핀 프라우드 남자가 있을 거다. 키는 130cm 정도. 오른손이 해머로 찍힌 것처럼 불구를 입은 남자다. 찾아서 여기로 데려와라.”
“옙, 형님!”
파밧—!
환인이 직접 그린 지도를 가지고 다시 사라지는 김영수. 그리고 채 1분이 지나지 않아 짜리몽땅한 소년을 어깨에 들쳐멘 김영수가 응접실에 다시 나타났다.
“끌고 왔습니다, 형님!”
“수고했다.”
=어, 어떻게……?=
마치 제집 드나들듯 들어왔다 나갔다 다시 들어오는 남자의 모습에 이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고, 아스칼은 김영수의 직업을 보곤 입을 헤 벌린 채 다물지를 못한다.
=……선생님. 저, 저는 왜 또……?=
람다 그 돼지 새끼의 죽음을 자축하며 술집 한구석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 끌려온 바나인이 이제는 서러워죽겠다는 얼굴로 환인에게 묻는다.
딱—
그런 바나인을 무시하고 아스칼의 눈앞에 손가락을 튕겨 시선을 집중시킨 환인은 냉담한 기운을 뿌리며 그녀에게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의 당위성과 그래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성역탑의 문제점. 그로 인해 니아마드가 당면한 상황.
그에 관한 증거(바나인)에 일부 귀족 파벌이 진실을 파묻기 위해 밀약하였고 동시에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리체 남작 가문을 몰락시키려 했다는 진실.
마지막으로 거기에 분노하고 있는 성제.
환인은 가뜩이나 큰 눈을 더욱 크게 뜬 아스칼 영애에게 살기 어린 웃음을 지어주었다.
“알겠습니까? 저는 니아마드의 영주께서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것에 무척이나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딸꾹.=
=히끅….=
아신의 분노 선언에 그의 여자를 제외한 나머지가 겁먹고 딸꾹질을 시작한다.
“그러니 니아마드 영주께서는 한시라도 빨리 이 사태를 ‘강경하게’ 해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니아마드는 분노한 아신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될 테니까요. 장담하는데 엘위드리스의 거수목이 불타 부러진 것은 ‘따위’로 지칭할 일이 발생할 겁니다.”
환인은 멀쩡한 왼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 위를 뭉개진 오른손으로 누르며 필사적으로 딸꾹질을 가라앉히려는 바나인을 쳐다봤다.
이대로 보내면 바나인이 협조할 가능성은…… 흠.
혼고에서 람다 부상단주의 영혼을 꺼내 그의 앞에 구현화한 환인은 원기를 주입해 사람들 앞에 실체화시켰다.
갑자기 나타나 온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는 혼재의 모습에 아스칼과 이샤가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런 둘과 달리 바나인은 한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지 우는지 모를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흣큭흑흑크흐흐흑…….=
“바나인.”
=크흐흐흐. 알겠습니다요. 그러니까 둘째 아가씨를 따라가서 영주님께 제가 알고 있는 성역탑의 부정적인 면을 모두 말씀드리라는 것 아닙니까요.=
역시 눈치가 비상하다.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준다면 7급 성술사의 회복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주겠습니다. 잘하면 오른손이 불구가 되기 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요.”
=……!=
“그리고 아스칼 영애.”
=네, 넷.=
“노파심에 하는 말입니다만, 니아마드 가문은 바나인이 죽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할 겁니다. 그가 죽는다면 대강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제는 잘 아시겠지요?”
=넷……!=
“좋습니다. 그를 데리고 가보십시오. 그리고 이 책자는 영주님을 설득할 중요한 증거물이 될 겁니다.”
벌떡 일어난 아스칼 영애는 니아마드 영지의 존속이 자기 손에 달려있다는 결연한 표정으로 바나인을 끌고 응접실을 나갔다.
대화에 전혀 끼지 못한 발키리 헬름의 여기사도 기절한 두 하녀를 양어깨에 들쳐메고 다급히 그 뒤를 따라간다.
‘이걸로 됐다.’
환인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작은 한숨과 함께 부드러운 스툴에 다리를 올렸다.
한숨 돌리는 그의 모습에 조용히 시립 해있던 안느가 묻는다.
=도령. 니아마드 영주가 아스칼 영애의 이야기를 믿을까?=
“인물 감정 능력을 가진 딸이 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바깥의 저 일을 보면 믿을 수밖에 없겠지.”
해가 져서 어두워졌지만, 창밖으로 중급 거리와 하급 거리에서의 소동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횃불이나 랜턴, 조명 마도구를 들고 바삐 오가는 병사들과 땅신 교단의 신관과 전투 사제들.
눈치가 보통이거나 아스칼 영애 정도로 뛰어나다면 오늘 하루 벌어진 일과 아스칼 영애가 가져간 이야기의 연관성을 눈치채고 꼬리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날뛸 것이다.
하지만 영주가 멍청해 알아먹지 못한다면 빌어먹을 일이지만, 환인은 정체를 드러내고 손수 니아마드를 조져줄 생각이었다.
이후에 겪을 귀찮음과 성가심까지 미리 땡겨와서 분풀이 삼아 말이다.
영주가 기껏 ‘청렴결백할 수 있는’ 선물까지 주었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면 당연히 죽어야지.
아신의 심기를 최대치까지 불편하게 만든 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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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후기를 빌어 고백하겠읍니당..
글쟁이는 빡대가리에 유졸 산수취약생입니당
723편 라펩으로 가는 길에서 대성녀가 언급한 이엘카타의 아이 이름은 환세유가 아닌 환선이 맞습니당
세유는 다른 아이 이름인데 메모를 깜빡하는 바람에.... 흑흑
지적해주신 독자님 감사합니당....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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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칼 게다 니아마드
로리셀핀크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