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4 항구 도시 니아마드
=너, 너! 왜… 왜 내 집까지 찾아온 거야?! 씨……!=
씨발을 소리치려던 셀핀족 남자는 훅— 하고 묵빛 장검이 목에 들이밀어지는 것에 눈을 부릅떴다.
=이, 이건 두르데인의 더브릴! 이걸 어떻게 무직자인 네놈들이?=
=알 것 없어요. 한 번만 더 주인님께 건방진 소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유념하고 혓바닥을 놀리세요.=
=…….=
미궁 앞 광장에서부터 가뜩이나 주인님께 틱틱거리는 게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일반인이라 생각해서 꾹 참았는데 알고 보니 범죄자와 엮여있던 인간?
이실리테는 살기를 셀핀족에게만 살짝 투사해 압박을 주고 목젖의 가죽을 아주 살짝 콕 찌른 뒤 검을 회수했다.
=……콜록.=
그야말로 피부만 아주 살짝 찔러 핏방울이 느릿하게 맺힐 정도의 힘조절.
셀핀족 남자는 목을 주무르다 그걸 깨닫고 어깨를 떨었다.
무직자면서 이 무슨 신체 제어력인가. 기사들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인데 뭘 목적으로…….
환인은 주저앉은 남자의 앞에 서서 담담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저는 당신의 과거 같은 건 궁금하지 않습니다. 손이 그렇게 된 연유도 알고 싶지 않고 셀핀족이 어째서 자작한 종이로 지도를 만들어 미궁 앞에서 사람들을 등치는지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 그런데 왜?=
왜 자신을 찾아왔냐는 질문에 안느가 환인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리체 상단의 람다 부상단주가 당신한테 집문서와 땅문서를 맡겨놨다며? 내놔.=
=……그 새끼, 죽었군? 그래, 드디어 죽었어! 씨발놈! 잘 뒈졌다아!!=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것처럼 으아아—!! 천장을 향해 포효를 내지른 남자는 한동안 정신이 나간 것처럼 쿵쾅거리면서 환희의 춤……인지 난동인지 모를 것을 추었다.
=미쳤나 봐요.=
그 장면에 환인의 뒤에 있던 아영이 작게 중얼거렸고 환인은 골치가 더욱 치미는 걸 느꼈다.
저 남자의 행동이, 반응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맞아떨어져서다.
설마 했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 그대로이지 않은가.
성역탑의 부정적인 효과로 인한 물밑의 파장이 리체 남작가의 사건과 관련이 있겠나 싶었는데, 람다 상단주 그리고 오른손 병신인 셀핀족이 두 요소의 사이에 끼어들자 놀랍게도 연관성이 나타난다.
만약 성역탑과 리체 남작가에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면 그저 남작에게 리지나 호를 강탈한 뒤 니아마드에서 출항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남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성역탑의 일이 남작가와 직결되어있다면 자신이 리체 남작가의 일에 개입한 것으로 별로 끌기 싫은 니아마드 귀족 사회의 이목이 발목을 잡으려 들 거다.
환인은 얼굴을 한차례 쓸어내리며 한숨과 함께 조용히 인정했다.
“실수했군.”
=어?=
=네?=
“아영이 조사 자료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린 뒤에 움직였어야 했는데. 짜증 때문에 너무 건성으로 움직였다.”
가진 힘이 강해져서 사소한 디테일을 챙기지 않게 된 영향도 있을 거다.
=도령, 건성이라니? 그……거랑 관련된 거 말이야?=
“그래.”
딱!
=켁.=
눈을 까뒤집고 광란의 춤을 추는 셀핀족의 머리통을 천칭으로 내려쳐 기절시킨 환인은 실수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었다.
성역탑의 폭로를 좋지 않게 본 니아마드 사회 귀족들, 성역탑에 연관된 저 셀핀족, 셀핀족과 연이 닿아있는 람다 부상단주와 그런 부상단주가 작업하고 있던 리체 상단, 그리고 거기서 이어지는 리체 남작 가문.
“남작 가문의 상단이 대규모 상행에 실패한 것에 조작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게 그렇게 연결될 수도 있는 거네…….=
작은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아 작게 한숨을 흘린 환인은 집 한구석에서 눈치 보듯 소심하게 선 람다 부상단주 영혼에게 원기를 밀어 넣고 실체화시킨 뒤에 물었다.
대충 사건의 타임라인이 짐작 가지만 확인은 해야 한다.
니아마드 영주가 뒤를 쫓게 되는 성가시고 귀찮은 상황은 차단해야 하지 않겠나.
“너, 어떤 귀족의 후원을 받고 있었는지 말해라. 지원해준 귀족이 있다면 그 귀족의 이름도.”
「슈, 슈헤일로 준남작…의, 지시…를 받고 있었습니다요.」
저 인간을 영혼 구슬로 회수할 때 숨기고 있던 비밀을 전부 말하라고 했었는데 듣지 못한 이야기다.
이건 딱히 숨기고 있던 비밀이 아니어서 말을 안 했던 건가.
“어떤 지시였지.”
「리, 리체 남작가를 쓰, 쓰러트리라고…….」
“……전대 리체 남작 내외의 사망과 해양 물류 운송의 실패에 네놈과 슈헤일로 준남작의 조작이 있었나.”
「예?! 아, 아닙니다요! 절대 아닙니다! 제가 준남작에게 받은 명령은 주인을 잃은 상단을 적당히 치우라는 지시였습니다요!」
……그 슈헤일로 준남작이라는 자가 음모를 꾸며 두 가지 사건을 별개의 건으로 진행했을 가능성도 있다.
“전대 리체 남작이 성역탑과 관련된 게 있나.”
「……?」
갑자기 성역탑 이야기가 왜 나온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에 환인은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슈헤일로 준남작은 영주에서 어떤 업무를 맡고 있지. 집사인가”
「예, 옙. 집사장입니다요…….」
“…….”
어째서 ‘아니었으면’하는 일은 대부분 맞아 떨어지는 걸까.
조금 일을 빠르게 진행하려다가 감당해야 할 귀찮음이 대폭 늘어나 버린 것에 환인은 치미는 한숨을 억누르며 질문을 준비했다.
이것까지 맞아떨어진다면 차라리…….
“슈헤일로 준남작이 영주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었나.”
「그건… 모르겠습니다요. 지, 진짜입니다요! 며, 명령은 언제나 슈헤일로 준남작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과정에 다른 귀족은 전혀 언급이 안 됐어요! 누구한테 명령받은 것으로도 안 보였고요!!」
모르겠다는 대답에 환인이 살기를 끌어올리자 람다 부상단주는 히익, 영혼이 불타는 것 같은 기분에 퍼드득거리며 아는 것을 전부 토해냈다.
“성역탑에 관해서 아는 것을 전부 말해라.”
「네……? 그, 마물이나 마수가 못 다가오게 하고, 미궁 초입에 이형종이 출현하지 않도록 억누르는 효과가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요…….」
벌떡, 의자가 뒤로 튕겨나가 나뒹굴 정도로 환인이 사납게 일어서자 람다 부상단주 영혼은 겁 먹고 히이이—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환인은 거실을 서성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
아무리 정리해도 ‘정체를 밝히지 않고’, ‘시선을 끌지 않으며’, ‘조용히 니아마드를 떠난다’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가 없다.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이쪽이 도시를 떠난 이후 추적이 들어올 가능성은 80%이며 이샤 리체 남작이 살해당할 확률은 100%다.
시선을 안 끌려 한다는 것은 이미 실패한 상황이다. 아는 자를 전부 죽여 완벽한 암살을 달성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데다 이대로 떠나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 행적이 패시지로 전달될 수 있다.
그로 인해 벌어질 나비의 날갯짓이 어디까지 퍼질지 모르는 일.
앞선 두 가지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조용히 니아마드를 떠나더라도 추적과 추격이 따라붙을 수 있다.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쉰 환인은 환연에게 조치를 부탁했다.
“환연, 이샤 리체 남작 주변에 정령을 배치해놔라. 누가 그녀를 죽이려 한다면 막고 내게 알려라.”
「엄청 성가신 일에 엮여버렸네.」
“이쪽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하다 보니 핸디캡 매치가 되어버렸군.”
「해놨어.」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적의 범주를 좀 더 좁히기 위해 아직도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람다 부상단주를 불러 질문했다.
“니아마드에 이샤 리체 남작을 노리는 놈이 있나. 몸뚱이든 재산이든 지위든.”
「좀…… 많습니다요. 리체 상단이 가진 인맥과 상단 이동 루트에 판매망과 비결이 실질적인 자산이라고 보니까요……. 우선 영주님 가계의 둘째 공자님이 계시고…….」
영주의 둘째 아들 이후로 이름이 줄줄이 나오는데 단순히 리체 남작의 외모에 혹해 그 육체를 노리는 인간부터 상단의 그 노하우를 노리는 타 상단, 상회도 있고 재산을 노리는 인간까지 다양하다.
다 하면 10명이 넘어간다.
환인은 그 명단을 기억해두고 아영에게 기절한 셀핀족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셀핀족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조사했지.”
=음……. 우선 저 셀핀 프라우드의 이름은 바나인, 사고가 나기 전에는 제법 정의감도 있고 활달한 성격에 장래가 유망한 장신구 제작자였어요. 그랬는데…….=
의뢰받은 신체 상태 최적화 장신구를 제작하다 우연히 성역탑이 가진 문제를 발견했고, 바나인은 정의감에 그 사실을 가지고 영주성을 찾아가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다고 알렸다 한다.
하지만 영주성은 얼토당토않은 소리라며 일축, 바나인을 쫓아내었고 바나인은 쫓겨나면서도 성역탑에 관한 문제를 이렇게 묻어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공론화를 하려 했다고.
=하지만 귀족도, 하다못해 준귀족도 아닌 평민이 영주성을 상대로 공론화해봤자 돌아오는 건 보복뿐이죠.=
“…….”
=밤중에 약혼녀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약혼녀는 사망하고 바나인은 오른손이 뭉개지는 심각한 상처를 입었어요. 회복 성술을 받으면 적어도 손은 완치되었겠지만, 강도를 당한 뒤 실종된 바나인은 사흘이 지나 반송장 상태로 발견되었고…….=
바로 손을 회복시키기에는 체력과 원기가 바닥이라 성술을 견딜 수 없어 먼저 시간을 들여 원기부터 북돋웠는데, 그사이 상처가 고착되어버린데다 회복 성술의 기한이 넘어가 버려 회복 성술의 효과를 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전도유망하던 장신구 제작자 하나가 니아마드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성역탑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권력이 무서워 쉬쉬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어요.=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참…… 휴…….=
옆에서 이야기를 다 들은 안느가 회의감이 가득 드는 얼굴로 기절한 셀핀족, 바나인을 내려다본다.
메리아놀을 넘어 니오네브레스 자체에 정나미가 떨어져 가는 표정이다.
환인은 환인대로 팔짱을 낀 채 잠시 묵묵히 서 있었다.
저 이야기를 먼저 들었다면 이렇게 귀찮은 상황에 몰리지 않았을 텐데. 환인은 잠시 묵묵히 서 있다가 환연에게 말해 바나인에게 물을 끼얹었다.
=푸으허걱!? 어푸어푸!=
십수리터의 물에 얻어맞아 어푸거리며 정신을 차린 바나인은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환인에게 쌍심지를 세웠…….
=너이 ㅆ…… 헤헤. 뭘 원하십니까?=
……지만, 환인의 냉담한 시선에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눈앞의 저 인간이 누군지 모르지만, 람다 그 새끼를 조지고 집과 땅문서를 가지러 온 것만 봐도 뭔가 비밀을 가득 품은 강력한 모험자다.
바나인은 뻗어나가려는 생각을 강제로 끊어버리며 비굴한 웃음으로 싹싹 빌었다.
=선생님들께서는 람다 그 돼지 새끼가 제 명의로 돌려놨던 집문서를 받으러 오셨다고 하셨죠? 지금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넵!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과거 같잖은 정의감에 사로잡혀 불의를 참지 못하고 오지랖을 부렸었다.
그 대가는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 그리고 목숨이나 다름없는 오른손의 영구 장애.
밝게 빛나던 장래는 칙칙해졌고 미래로 가는 길은 끊어졌다. 남은 것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 바퀴벌레 같은 삶 뿐.
바나인은 2층 침실로 올라가서 비밀금고에 숨겨놓은 문서를 가져와 환인에게 공손히 바쳤다.
=여기 있습니다!=
집과 땅문서를 확인하고 아영에게 넘겨주자 아영도 문서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위임 날인까지 되어있어서 이걸 가지고 행정관을 방문하면 명의 이전이 될 거예요.=
“……바나인.”
=옙.=
“람다 부상단주와는 어떻게 얽히게 된 겁니까. 이 집에서 사는 걸 보면 단순한 관계는 아닌듯한데요.”
=아…… 손을 치료하려고 여기저기 돈을 빌려다 썼는데 그게 뭐 빚이 되고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그렇게 된겁니다요. 선생님께서 가져가신 종이, 이 집에서 그걸 만들고 지도를 그려서 팔아 근근이 먹고 살고 있습죠.=
힘은 핀겔 프라우드보다 약하지만 손재주는 더 높은 셀핀이라 왼팔만으로도 종이 정도는 만들 수 있다는 게 바나인의 이야기였다.
실제로 지하에는 아주 원시적인 종이 생산 도구들이 흩어져있었다.
닥나무와 흡사한 나무의 껍질이 사방에 널려있고 두드리다 만 속, 속을 삶는 냄비와 가마.
2층에는 통기가 잘되는 곳에 말리고 있는 한지 같은 종이가 한가득이고 다른 한쪽에는 깔끔하게 제본한 종이가 켜켜이 쌓여있다.
그걸 보고 내려온 환인은 람다에게도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바나인과 대동소이했다.
“…….”
바나인을 안 죽이고 살려둔 것은 본보기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성역탑에 관심을 주는 다른 날벌래가 또 있지 않은지 확인을 위한 생체 트랩인가.
환인은 굽신거리는 비나인을 바라보다 말없이 집을 나왔다.
인식 저해 망토를 쓰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나머지 집을 돌며 집문서와 땅문서를 회수한 환인은 곧장 불주먹 조직에 쳐들어갔다.
불주먹파 아지트는 하급 거리의 뒷골목 판자촌 한복판에 있었는데 누가 프라우드족이 사는 도시 아니랄까봐 지하에 굴을 파서 레어를 만들어놓았다.
=뭐야 씨…… 끄억!=
=습격이다! 물귀신파 새끼들이…… 끄아악!=
「환인, 저쪽이랑 저기에 개구멍이 있는데?」
“이실리테, 안느. 가서 막고 있어라.”
=네, 주인님.=
=응.=
개구멍 두 곳을 틀어막아 놓고 아영과 함께 아지트로 내려간 환인은 지하 미궁처럼 다듬어진 내부를 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조직원을 무자비하게 때려눕혔다.
약 40명에 다다르는 조직원은 대부분이 무직자였으나 일부는 직업자였고 두목은 전사와 적술사의 혼합 직업자.
장비는 뒷골목 조직답게 형편없어 환인의 신들린 창술에 추풍낙엽처럼 팔다리가 부러져 우르르 넘어진다.
그에게 있어 이런 자들은 미궁의 호브나 콜브와 다름없는 놈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조직원들의 사지를 태연히 분질러나가다 마지막으로 두목까지 무력화시켰을 때, 아지트를 뒤지던 아영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그에게 달려가 장부를 보여주었다.
=오빠, 이 장부 좀 보세요. 도시 상단, 상회 대부분이랑 밀수품 거래 내역이 있는데요? 이야, 인신매매 흔적까지 있네.=
“밀수품이면, 죽은 모험가나 용병들의 장비품인가.”
=네. 대부분 소유자를 살해한 다음 회수한 장물이죠.=
“후.”
작게 웃음을 흘린 환인은 이실리테가 쓰던 오래된 기사검을 뽑아 사지가 부러진 채 버르적거리는 두목의 목을 쳤다.
그리고 이름리아의 영혼을 소환, 두목의 영혼을 선두로 내세워 누구 하나 죽인 경험이 있는 조직원은 전부 목을 쳐 죽이고 시체는 땅속에 매장, 영혼은 죄다 적옥으로 만들었다.
조직이 모아둔 보물과 재화는 환인이 전부 챙겼지만…….
“환연, 출입구에 작은 공기 구멍만 만들어놓고 출입구를 다 막아라. 그리고 상급 땅 정령에게 이 주머니와 쪽지를 들려서 땅신 교단으로 보내도록 해.”
「이건 여기 약도네. 이건 돈 주머니? 정리하기 귀찮으니까 땅신 교단을 이용하는 거야?」
“그래. 조무래기는 교단이 알아서 잡아 처리한 뒤 유세에 쓰겠지.”
「만약 교단이 돈만 챙기고 안 움직이면 어쩔건데?」
“내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나중에 르아웬 추기경에게 언질을 줄 기회 정도는 있겠지.”
물귀신파도 불주먹파와 똑같았다. 차이점이라면 중급 거리 뒷골목에 창녀촌까지 겸하고 있다는 걸까.
어떤 의미로는 물귀신파가 더욱더 악질이었다. 밖에서 잡아 온 여자의 혀와 엄지, 검지를 잘라 창녀로 쓰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환연이 찾아내고 아영이 회수한 물귀신파의 재물은 불주먹파의 족히 3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그곳의 두목과 간부들을 불주먹파와 똑같이 정리한 뒤 재물의 5할만 챙기고 나머지 5할은 주머니에 담아 땅신 교단으로 다시 보냈다.
=우와, 니아마드 땅신 교단 재정이 엄청 풍족해지겠네요.=
아영이 그리 말할 정도로 불주먹과 물귀신파에서 회수한 재물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이만한 기부금이 들어왔으니까 교단이 아무리 엉덩이가 무거워도 움직일 수밖에 없겠죠? 창녀 아가씨들도 잘 보듬어줘야 할 텐데.=
=니아마드의 대주교님은 청렴결백하고 인자하신 분으로 명망이 높아. 불주먹하고 물귀신의 조직원이 걸림돌이 되어서 못 움직이고 계셨을 텐데 도령이 이렇게나 청소해주었으니까 당장이라도 움직일 거야.=
그렇게 니아마드에서 가장 큰 조직 두 곳 조직을 박살 낸 환인이 중심가로 돌아왔을 땐 푸른 하늘이 점점 노을색으로 물들어가는 시간이었다.
대로를 따라 기사와 병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사이사이 사제와 신관들이 움직이니 안느가 저것 보라며 아영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저거 봐. 빨리 움직이지?=
=우음. 저러면 쪽지를 보낸 사람도 찾으려 할 거 같은데요.=
=상급 정령에게 심부름꾼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이쪽의 정체를 알리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어지간하면 안 그럴 거야.=
=그래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하면 리체 상단에서 일을 벌인 거랑 동일 인물 소행이라는 걸 눈치채지 않을까요?=
이야기를 나누며 저쪽의 소란과는 관계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리체 남작가로 걸어가고 있자니 중심가의 상단, 상회 거리 쪽도 술렁이는 느낌이다.
시력이 좋은 이실리테가 먼저 환인에게 알려준다.
=주인님. 병사들이 리체 상단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어요.=
=진짜네……. 어, 창문에 불빛이 비치는데?=
=기사하고 병사들이 안쪽을 수색 중인가 보네요. 근데 오빠가 중요한 건 다 빼돌렸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의미 없는 수색이지.”
지금은 임무를 마치고 적옥이 된 람다 부상단주의 정보대로 상단 업무에 필요한 장부, 거래처, 인맥, 연락 방법 등이 기록된 책자는 전부 회수했고 리체 남작에게 전달했다.
=아영아. 그 책에 적힌 내용은 비싸지?=
=비싸죠. 신입 상단이면 그것만 있으면 돈 되는 기초 물류 루트를 당장 완성할 수 있을 걸요?=
=어느 정도로 비싸?=
=모르긴 몰라도 수백 금화는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봐요.=
=흐음. 그러면 저들이 손에 넣을 것은 시체뿐이겠네.
“……남작가로 가지.”
환인은 도시 절반이 술렁이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대로를 가로질러 리체 남작 가문을 다시 방문했다.
정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까 낮의 발키리 헬름 여기사와 함께 왔던 병사들이 저택을 지키고 선 게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보내는 날카로운 시선에 기별을 부탁하려는 순간, 저택 출입문이 벌컥 열리더니 이샤가 날듯이 달려와 환인의 품에 뛰어들었다.
=여행자님!=
“……리체 남작님. 체통을 차리십시오.”
환인은 등 뒤에 느껴지는 여자친구들의 시선에 미세한 땀을 흘리며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그녀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그 행동에 진정을 되찾은 이샤는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훔친 이샤는 꾸벅, 환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여행자님께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여행자님이 찾아주신 책은 아버님과 할아버님의 지혜가 가득 담겨있어서……. 그걸 읽었더니 제가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했는지 깨달아서…….=
가산을 맥없이 탕진해버렸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우울해하긴 하지만 암울하진 않다.
거기서 이유를 짚어낸 환인이 물었다.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이시군요.”
=많이 힘들겠지만 상단 건물과 창고랑 마차는 무사해요. 여행자님이 찾아주신 돈도 있으니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이걸 자본으로 반드시 리체 상단을 일으켜 세울 거에요.=
저런 의욕과 사전 지식, 그리고 자본이 존재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회수한 집과 땅문서에 불주먹파의 재물을 담은 주머니를 그녀의 손에 올려주었다.
문서를 다 합치면 약 450금화, 도시 곳곳에 숨겨둔 재물 주머니를 다 합치면 570금화, 람다가 상단 금고에 숨겨두었던 600금화, 불주먹파 재물 주머니 안에 약 610금화.
그녀에게 준 걸 다 합치면 2000금화가 넘는 거금이다.
=세, 세상에. 이걸 전부…….=
이샤의 눈에 감동과 감격과 감사가 일렁이다 눈물로 변해 흘러내렸다.
세상에 람다 같은 쓰레기 인간이 있는가 하면 여행자님 같은 분도 있구나.
상인에게 필요한 중요한 마음가짐 하나가 깨달음이 되어 그녀의 마음속에 새겨진다.
“리체 상단의 성세를 되찾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지만, 건물을 정리하고 상단 일꾼과 인력을 뽑고 물품을 마련해 상행을 시작하는 데는 적당한 수준일 겁니다. 전대 남작님께서 남긴 상행의 지혜를 습득하면 시간은 오래 걸려도 예전의 성세를 다시 이룩할 수 있겠지요.”
영주에게 살해당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환인이 감춘 뒷말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이샤는 환인을 영웅을 바라보는 처녀처럼 바라보다가 두 손을 맞잡으면서 물었다.
=여행자님은 어째서 저를 이렇게나 도와주시는 건가요? 저는, 저는 여행자님께 못된 짓을 하려 한 나쁜 여자인데…….=
0.1초. 이유를 생각한 환인은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을 자연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남작님과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아……!=
물론 진정한 속내는 아니다.
이샤가 당한 것과 비슷하게 부모님의 유산을 뺏으려던 친척이란 작자들이 있었지만, 환인은 그저 빗자루로 쓰레기를 쓸어내는 것처럼 그자들을 담담하게 치워버렸으니까.
‘……그러면 왜 이샤를 도와줬지?’
자신의 등을 찌르려한 여자다. 평소 자신의 성격을 생각하면 도와주는 게 아니라 람다를 해치우고 자신이 모든 재물을 가로채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이샤는 이제 자신을 은인처럼 여기며 말하는 건 뭐든지 듣겠지. 더해서 부수입으로 물귀신파에서 회수한 재물 주머니에는 1500금화에 달하는 각종 보물이 채워져있다.
1500금화와 아드네빌라를 찾으러 갈 성능 좋은 캐러벨선 한 척. 나쁘지 않다.
이제 리체 남작가와 슈헤일로 준남작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밝혀내고 자신에게 얽혀들 요소를 찾아 쳐내면 끝난다.
=여행자님? 오늘은 우리 집에서 쉬시는 게 어떠신가요? 당장은 성대한 대접을 해드리지 못하겠지만, 시간을 주시면…….=
리지나 호의 증서만 받고 돌아갈 생각이던 환인은 이샤의 초대를 거절하려다 안주머니에서 톡톡 찌르는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초대를 받아들이라는 건가.
“……그러면 염치 없지만, 신세 지겠습니다.”
초대를 받아들이자 기쁘게 저택 안으로 안내하는 이샤를 따라가고 있으니 안주머니에서 환연의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환인. 영주성에서 나온 마차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타고 있는 인간은 셀핀족 여자애랑 아까 낮의 발키리 헬름 여자 기사인데 복장을 보면 영주 딸이 아닐까 싶어.」
“…….”
이 시간에 영주성의 영애가 찾아온다니, 이샤와 무슨 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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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하렘 분양이 노예 거래라니 혹시 에라토호 아쉽니까..?
증말 갓겜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