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83화 (783/813)

783 항구 도시 니아마드

리체 상단 건물에 도착하자 환연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상황을 전달해준다.

「아직 아무도 안 나갔고 누구도 방문하지 않았어. 그 인간이 상단을 쥐락펴락한 뒤부터 주변 평판도 나락으로 떨어졌고 상행도 다 내팽개쳤나 보더라.」

“상행하는데도 비용이 들 테니까. 푼돈을 벌어들이기보단 건물을 차지한 채 시간만 죽였던 거군.”

「얼른 망하라고 말이야.」

“망하길 기다리는 쪽보다 망하게 만들려는 쪽이겠지.”

리체 상단의 건물은 환인의 눈에도 훌륭한 수준이었다.

4층에 석벽으로 축조한데다 대형 창고와 중형 플랫폼까지 갖춘, 시설만 보면 대형 상단에 버금갈 정도다.

하지만 의뢰인을 맞이하기 위해 깨끗하고 단정해야 할 출입구는 몇 달간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은 것처럼 지저분하고 쓰레기가 굴러다닌다.

비싼 유리로 만든 창문은 흙먼지로 엉망진창이어서 불결한데다 깨진 유리창도 곳곳에 보인다.

=아…….=

환인을 따라왔던 이샤는 이 광경에 숨넘어가는 탄식을 작게 흘렸다.

호위이자 감시역으로 옆에 붙어있던 안느가 그녀를 힐끔 보고 물었다.

=남작님은 이런 상태인 줄도 몰랐어?=

=보, 보고는 부상단주 아저씨…… 부상단주가 매번 하러 와서, 잘하고 있다고 해서…….=

=하, 진짜. 남작님은 바보야? 주인이면 중요한 사업체는 매일같이 직접 확인해야지!=

=몰랐어요…….=

흐느끼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이샤를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던 안느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사업 교육을 받지 않거나 특출난 능력이 없는 귀족 영애는 대체로 저런 느낌이긴 하지.

시집가서 대를 이을 아이를 낳아주고 가문과 가문 사이를 이어줄 남자의 트로피 말이다.

저택에서 상단 건물로 걸어오며 람다 부상단주의 영혼을 억압해 이중장부와 숨겨둔 비자금의 위치 등 정보를 낱낱이 긁어내던 환인은 여자친구들을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이실리테는 건물 옆의 대형 창고와 플랫폼을 지키고, 안느 너는 건물 옆을 돌아가면 뒷문이 있을 거다. 거기서 기다리다가 접근하거나 찾아오는 놈이 있으면 전부 때려눕혀라. 아이라고 해도 예외 없다.”

=애들까지 이용한 거야……? 일단 알았어.=

=네, 주인님.=

“이샤 리체 남작은 날 따라오도록.”

=…….=

죄인처럼 축 처져 따라오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녀는 이른바 ‘살아있는 면책권’이다.

저런 인간이라도 남작은 남작. 귀족이기에 서민과 평민을 향한 즉결심판권을 가지고 있다.

지금부터 눈에 띄는 놈들은 전부 죽일텐데 그녀가 있어야 정당한 살인의 명분이 생긴다.

“…….”

문을 열려다가 손잡이에 정체불명의 더러운 무언가가 묻어있는 것을 발견한 환인은 망설임 없이 문을 힘껏 걷어찼다.

콰아앙!

=끄악!=

문이 열리는 게 아니라 경첩과 자물쇠가 부서지며 문짝이 날아가 입구 근처에 주저앉아 술판을 벌이던 조무래기를 덮친다.

=뭐, 뭐야 시발!=

=웬 놈이냐!=

한 놈이 문짝에 치여 날아가자 후줄근한 근육 돼지 두 놈이 벌떡 일어나면서 위협하듯 소리쳤다.

무직자인 쓰레기는 무시한 환인의 시선이 먼지 바닥에 탁자도 없이 벌인 술자리의 모습을 한차례 훑고 내부 로비를 전체적으로 눈에 담는다.

진흙 발자국으로 엉망진창인 대리석 로비. 흙먼지가 구석에 쌓여있는 데다 천장에 거미줄까지 쳐져있다.

한쪽 벽에는 소변이라도 봤는지 누런 물자국이 고여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고 그 근처에 펼쳐진 음식 찌꺼기와 술병, 술잔들. 바닥에는 먹다 뱉은 음식과 가래침까지.

상종하기 싫은 불결함에 환인의 짜증이 급격히 치솟는다.

필요에 의한 오염은 환인도 감내한다. 미궁을 탐사하며 오물이 묻어 더러워진다던가 오랜 급속 행군으로 땀 먼지에 지저분해진다던가.

하지만 이건 아니다. 진짜 아니다.

“짐승을 교육하는데는 몽둥이가 약이지. 하지만 네놈들은 인간의 탈을 쓰고서 짐승보다 못한 행동을 하니…….”

품에서 오랜만에 천칭을 꺼낸 환인은 천칭을 콱 움켜쥐고 주춤거리는 근육 돼지들을 향해 섬전처럼 내질렀다.

으직, 우둑.

천칭의 끝이 정확히 근육 돼지 두 마리의 목젖을 찌르니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볏단처럼 풀썩하고 쓰러진다.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에게 자비와 교육은 사치 아니겠나.”

「환인. 2층하고 3층에 인간들이 다 모여있어. 상단주 사무실은 4층에 있구.」

목뼈가 부러져 죽은 돼지 두 마리를 지나치며 더러운 걸 털어내듯 웅— 천칭을 한차례 돌린 환인은 로비를 가로질러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위에서 저벅저벅 발소리와 투덜거리는 소리가 어수선하게 내려왔다.

=아래쪽에 무슨 소리가 났다는 거야 씨발 귀찮게…….=

=아 진짜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고!=

=아무 일 없으면 니가 부서질 줄 알아라 새끼야.=

=저 새끼 저번에도 바람 소리를 비명으로 착각하지 않았었냐?=

=어. 다 깨워놓고 아무 일 없어서 켁스 형님한테 존나 밟혔잖아.=

발자국과 남자 목소리. 목소리는 넷인데 투박한 나무 신발 소리는 둘 뿐이다. 루크랑족은 최소 둘인가. 목소리의 두께를 보면 남은 둘은 프라우드족?

환인은 중급 정령을 강령한 저벅저벅 계단을 계속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중간 계단참을 돌자 =어?= 루크랑과 프라우드족 남자 넷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끔뻑인다.

저게 누군지, 왜 저기 있는지 이해하지 못해 한순간 뇌 정지가 온 모습.

흉기를 들고 있다면 적이라고 간주했을 텐데 손에 든 것은 2m에 가까운 곧고 튼튼해 보이는 스틱 뿐이다.

=이보쇼. 댁이 눈데 여길 함부로…… 끄릙.=

가장 앞서있던 흑갈색 모피의 인랑족 남자가 말하다 환인의 천칭에 목젖을 찍혀 기이한 소릴 내며 뒤로 넘어간다.

=혀, 형님!=

=이새끼가?!=

동료가 눈을 까뒤집고 넘어가는 모습에 인묘족 검은색 점박이 남자가 손톱을 길게 뽑으며 달려들고 그 뒤로 프라우드족 둘이 한손용 해머를 쥐고 따른다.

그러나 비좁은 계단 특성상 1열로밖에 못 내려오는데 거구의 인랑족이 자빠져있어 통행에 방해되는 상태.

인묘족 남자가 잇소리를 내며 점프하려 했지만, 그 순간을 노린 환인의 천칭이 인묘족의 발목을 찌르자 균형을 잃고 인랑족의 위로 엎어진다.

=어억!?=

환인은 쓰러지는 인묘족의 눈에 천칭을 찔러넣어 안와의 틈으로 뇌를 휘저었다.

그 즉시 사지 발작을 일으키는 인묘족의 등을 밟고 뛰어오른 환인은 아스펜드에서 스팀펑크 단검 두 자루를 투척, =끄헉!=, =어악!?=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프라우드족 남자의 목덜미를 자르는 동시에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켜 발차기로 둘의 관자놀이를 목을 후려쳤다.

퍼벅

우드득찌직—

중급 정령을 강령해 대폭 상승한 각력이 두 프라우드족의 목뼈를 부수고 살을 찢는다.

지지대를 잃고 덜렁이던 머리가 뒤로 사라진 프라우드족이 뻣뻣해진 고깃덩어리처럼 층계참으로 굴러떨어졌다.

=……!=

뒤따라오며 그걸 목격한 이샤는 힉, 새된 비명을 지르며 자기 옷깃을 움켜쥐었다.

숨 한 번 쉴 동안 4명을 죽이다니. 그것도 아까 빛으로 이뤄진 유물 같은 무기가 아니라 평범한 지팡이로……!

환인이 계단을 올라 문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에 이샤는 쌓인 네 명의 시체를 밟고 허우적거리며 다급히 쫓아갔다.

[끄아악!]

[마, 막아 씨발!]

[어떻게 막으라…… 으아악?!]

[꺄아학! 사, 살려줘…… 끼아악!]

쿵, 콰광. 쩍! 촤악— 뻐버벅!

그리고 2층의 문을 열려던 이샤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날것의 비명과 타격음에 흠칫 떨었다.

조심조심 문을 열고 틈새로 들여다본 안에는 살육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주황색 머리카락의 플뢰 남자가 창고나 다름없는 사무실의 책상을 밟고 날아다니며 그를 잡으려는 후줄근한 건달들의 머리를 걷어차 목을 부러트려 죽이고 지팡이로 눈을 찔러 뇌를 휘저어 죽이고 검을 들고 달려드는 건달의 검을 뺏어 심장에 박아 죽이고 창을 들고 달려드는 여자의 창을 뺏어 꼬챙이impale로 만들어 죽인다.

문틈으로 삽시간에 7명이 죽어 널브러지는 것을 보고 얼었던 이샤는 피 한방울 묻지 않은 환인이 들어오라 손짓하는 걸 보자마자 후다닥 안으로 뛰어들었다.

=네, 네?=

“아공간 주머니는 있나.”

=여기, 여기 있어…… 히익!?=

허리춤에 차고 있던 우르거 가죽 아공간 주머니를 내밀려던 이샤는 바로 옆에 입에서부터 음부까지 창에 꿰여 움찔움찔, 떠는 여자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창, 창에 꿰인채 살아있어……!

콰직!

=게윽.=

그 여자가 환인의 발에 밟혀 목뼈가 분질러져 죽는 장면에 이샤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얼음장 같은 환인의 목소리에 눈을 부릅뜨고 허둥지둥 주머니를 연다.

“혹시 나중에라도 증거가 필요할지 모르니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장부를 챙겨라.”

=네, 넵!=

“이것도. 그리고 이것도.”

이샤는 황급히 아공간 주머니를 벌려 사체의 품을 뒤져 쪽지와 수첩 같은 걸 던지는 환인 쪽으로 내밀어 그것들을 받아낸다.

3층에서도 2층에서 일어난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거기에는 15명이나 있었던데다 1급에서 3급 사이의 직업자들도 있었는데, 죽이는 데 걸리는 시간과 죽는 모습은 2층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그중 세 명은 죽지 않고 커틀러스에 양팔이 잘린 뒤 걷어차여 내동댕이쳐졌다.

=끄아아…! 흐아, 아아아-!!=

=으그윽! 왜, 왜!! 뭐 때문에……!=

=내 팔, 내 파아아알!=

팔이 잘린 단면에 피를 철철 흘리며 괴성을 지르는 남자들의 모습은 이샤에게 한 번도 보지 못한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이었다.

코가 떨어질 것 같은 피 냄새에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는데…….

“여기서 기다려라.”

=네, 네? 아. 네!=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니 위기감에 정신이 번쩍 든다.

남자는 금방 4층으로 올라갔고 이샤는 왠지 오줌이 마려운 기분에 안짱다리로 엉거주춤, 문 근처에서 기다렸다.

사방이 피바다라서 주위를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주 가끔 와본 적이 있는 3층이었는데, 기억 속의 그 모습과 피바다가 된 지금의 모습은 도저히 같은 장소로 보이지 않는다.

=크윽, 끄으윽!=

=으으으……!=

안절부절못하며 환인이 내려오길 기다리던 이샤는 상처를 입은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에 흠칫하면서 그쪽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얼어버렸다.

양팔이 잘린 인랑족과 인서족 남자가 핏발이 선 눈으로 비틀비틀 일어나 휘청이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씨이…발…… 비……켜!=

=……!=

환인의 살기가 정제된 살기였다면 속이 울렁일 정도로 짙은 피 냄새를 풍기며 온통 피투성이가 된 두 남자의 살기는 진득하게 들러붙어 오는 난폭한 살기다.

언제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그녀가 언제 이런 살기를 경험해봤을까.

핏발 선 눈으로 고함을 지르는 루크랑 남자들은 그녀의 눈에 괴물처럼 보였다. 그 때문에 이샤는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버려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비키라고!!=

=……!!=

성난 남자의 고함과 함께 짓쳐드는 모습에 이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닥쳐올 고통을 그렸지만.

퍼벅, 털썩풀썩.

그녀에게 다가온 것은 고통 대신 둔탁한 소리였다.

그 소리에 흠칫흠칫거렸던 이샤는 조심스럽게 실눈을 떴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는 창문 밖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휘광처럼 몸에 감은, 마치 신님처럼 거룩한 검은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서 있었다.

=…….=

이샤의 머릿속에서 생각이라는 게 깡그리 사라졌다.

남자의 거룩한 모습이 화인火印처럼 그녀의 망막에, 마음속에 찍힌다.

그저 무념무상으로 빛의 휘광을 몸에 감은 남자를 바라보던 이샤는 귀에 파고든 목소리에 화들짝하고 작게 뛰어올랐다.

“뭐 하는 거지.”

=네, 네넷?=

“정신줄 챙기고 받아라. 람다 부상단주가 만들어놓은 복식부기와 이중장부다. 이걸 조사 나올 기사에게 내면 람다 부상단주의 부정이 적발될 거다.”

=아, 네!=

다시 남자를 본 이샤는 어라?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까는 검은색 머리였는데 지금은 주황색 머리다. 어떻게 된 거지?

겁에 질렸던 것도 잊고 환인이 내민 장부를 받은 이샤는 장부를 펼쳐보았다.

수많은 숫자와 글자가 장부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자신은 이걸 볼 지식이 없지만, 저… 분의 말씀대로 기사에게 넘겨주면 되겠지.

환인은 주머니에서 치유 물약을 꺼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반쯤 죽어가는 셋의 상처에 부었다.

=끄아아……!=

=끄으으으……!!=

“이 세 놈도 증거가 될테니 장부를 제출할 때 함께 보내도록. 그리고 이건 상단주 사무실 비밀 금고에 숨겨져 있던 아공간 주머니다. 안에 600금화가량의 위상석과 금화, 보석이 들어있다.”

=앗, 아, 앗.=

허둥거리며 주먹만한 아공간 주머니를 받아드는 이샤를 지나친 환인은 반쯤 혼절한 세 놈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면서 1층으로 끌고 내려갔다.

상단의 문을 나서자 때마침 리체 가문 저택 쪽에서 2급 직업자인 기사 둘과 병사 일곱이 리체 가문의 하녀장과 함께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하길 기다린 환인은 자신에게 부리부리한 시선을 보내는 플뢰족 여기사에게 혼절한 건달패 세 놈을 인계했다.

“리체 남작님의 의뢰 계약으로 포획한 배신자 람다 일당입니다. 남작님의 호의를 이용해 상단을 장악한 뒤 부정 횡령과 청탁으로 남작가의 재산을 빼돌리던 자들입니다.”

=남작님, 이자의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네. 맞아요. 여기 배신자가 작성한 이중장부와 복식부기도 있어요.=

=…남작님께서는 지금 떨고 계신듯한데, 혹시 이자가 남작님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고 있다면…….=

발키리 헬름을 쓴 여기사의 의심에 이샤는 펄쩍 뛰며 절대 아니라고 소리쳤다.

=이분이 아니었으면 리체 남작가는 배신자로 인해 몰락하였을 거예요! 리체 가문의 은인이니 의심은 거두세요!=

=그렇습니까…….=

이샤의 옹호에도 기사는 의혹 어린 시선을 모두 거두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 후, 건물 안에 배신자 일당의 시체가 있다는 이샤의 말을 듣고 병사들을 안으로 들여보낸다.

환인은 병사들이 우르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다 이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면 남작님. 나머지 계약 이행을 위해 자리를 뜨겠습니다.”

=무슨 계약 말인가.=

“아무리 당신이 영주님의 기사라지만 귀족님의 앞에 끼어들어 대화를 방해해도 되는 겁니까. 그게 니아마드 기사의 기사도라면 실망할 것 같군요.”

=……!=

기사는 눈매를 꿈틀거리면서도 속으로 눈앞의 남자에 대한 판단을 상향 조정했다.

영지의 기사 앞에서 저렇게 당당한 자가 일반 평민일 리 없다. 그렇다면 방랑 기사, 아니면 타 영지의 준귀족인가?

=네. 무사히 다녀오시기 바래요. 저는, 저택에서 기다릴까요?=

“예. 마저 정리하고 돌아갈 테니 남작님의 리지나 호는 그 뒤에 인계받겠습니다.”

가슴에 손을 올려 살짝 인사한 환인은 슬그머니 나타난 이실리테, 안느를 대동해 도시의 하급 거리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사가 뒤에서 계속 쳐다보네.=

“신경 쓰지 마라.”

안느의 말대로 여기사의 시선이 계속 꽂히고 있었지만 환인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처음 정체를 의심하던 시선이 아니라 이쪽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시선으로 바뀐 지다.

계속 의심하고 불신하는 시선을 보냈다면 다른 수단을 마련했겠지만, 저 시선이라면 문제 될 일은 없다.

이샤 리체 남작도 어째서인지 갑자기 호의 어린 반응을 보여주기 시작했으니 트러블이 발생할 확률은 낮겠지.

“……아니, 좀 어벙하던데 말실수라도 할지 모르겠군.”

하지만 리체 남작은 이쪽의 이름도 그렇고 정체도 모른다.

그점을 두고 자신을 불순분자로 의심하려 해도 람다의 배신 증거와 자신이 남작을 돕고 있단 증거가 너무 명확하며 남작은 자신에게 우호적이다.

귀족의 거만함 정도로 포장하면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것도 문제는 안 된다. 기사는 자신을 상급 정령사의 오만함 정도로 오해하겠지.

환인은 때마침 지나가는 승용 마차를 불러세워 하급 거리로 향했다.

「이, 이쪽입니다요…….」

람다 부상단주는 머리를 잘 쓰는 셀핀 프라우드이면서 그리 용의주도하지 못했다.

리체 남작이 가문의 보물과 마도구, 마도기를 팔아 확보한 금화는 전부 위상석과 보석으로 바꾸었고, 그간 횡령한 상단의 재산을 합해 1/3은 상단주 사무실의 비밀 금고에 숨겨놓았고 1/3는 적당히 나누어 도시의 하급 거리 곳곳에 파묻었으며 나머지 1/3은 몇몇 인물을 통해 명의를 바꾼 뒤 알짜배기 땅에 투자해놓았다.

=범죄자 주제에 무슨 간담인지 모르겠네. 귀족의 뒤통수를 후려쳐놓고 안 들키고 끝까지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나?=

환인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안느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람다 부상단주 영혼은 환인의 강제력에 붙잡힌 채 끌려가며 설명했다.

「그게, 리지나 호를 두 번 정도 팔면 모두 수거해서 메리아놀을 뜨려 했었습니다요……. 그러면 2000금화가 넘어가니까…….」

2000금화라면 귀족이 아닌 일반 서민에게는 새 삶을 살아도 몇 번은 살 수 있는 돈이다.

그런 새 삶의 대가로 죄 없는 어린 여자아이와 귀족 가문 하나를 무너트리려 했다는 게 안느는 용서할 수 없는지 드물게 분노한 모습으로 폭언을 쏘아붙였다.

=잘 죽었다, 개자식. 넌 죽어서도 신님의 정원에 편히 못 들 거야.=

환인은 계속해서 람다에게 자금의 은닉처와 은닉 방식을 물었다.

=제가, 제가 해 처먹은 돈은 2천 금화 정도인데, 1700금화 어치는 그런 식으로 나눠 보관하고 나머지 300금화는 뒷골목 조직 몇 군데에 뇌물로 뒷돈을 찔러주었습니다……. 특히 불주먹파와 물귀신파가 많이 먹었는데…….」

이야기를 들으며 환인은 하급 거리로 들어선 뒤 람다가 알려주는 곳을 찾아 파묻은 주머니를 찾아 회수해나갔다.

반쯤 부서진 돌집의 뒤쪽 공터의 나무 아래.

시간이 오래되어 삭고 헤진 나무집 안마당의 돌담 아래.

도시 외곽 해변가 집 뒤쪽 절벽 틈.

하급 거리의 봉안당 근처.

마지막으로 람다 부상단주의 집 지하실에서 두 개.

=다음은…… 중급 거리 외곽이랑 일곱 군데 점포랑 집의 땅문서네. 몇 개는 뒷골목 조직 소유인 거 같은데 어떻게 할 거야?=

“밤에 찾아가서 박살 낸 다음 회수한다.”

도중에 ‘약간의 추가적인 회수’가 발생할 테지만, 조직이나 리체 남작가는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첫 번째로 중급 거리와 하급 거리를 나누는 내성벽의 안쪽 그늘진 집.

하루에 1시간 정도밖에 햇빛을 받지 못하는 안 좋은 위치지만, 바로 근처에 내성벽 위병소가 있어 안전하기에 수십 금화는 하는 땅이다.

환인은 그 집의 집문서와 땅문서를 회수하러 갔다가 집 앞에서 의외의 사람과 마주쳤다.

=엥? 오빠랑 언니들이네. 와~ 일 끝내시고 일부러 저 보러 오신 거예요?=

=아니, 이쪽 일이 아직 안 끝나서…… 그보다 아영이 넌 여기 무슨 일이야?=

=아 뭐야앙~. 좋다가 말았네! 오빠가 조사해보라고 하신 성역탑 고발자가 여기 산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온 거예요.=

환인은 인식 저해 후드를 벗으며 히히 웃는 아영과 기묘한 우연이라며 실소를 흘리는 안느의 대화를 들으면서 조금 허름한 벽돌집을 응시했다.

하루에 1시간 정도밖에 햇빛을 못 받다 보니 집 주변에서 눅눅한 느낌이 든다.

어차피 저 집에서 살 것도 아닌데 그런 건 아무 상관 없다. 문제는 집 안에서 한 번 느껴봤던 기척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환인. 안에 있는 인간, 그 인간이야.」

“그래…….”

일이 또 이렇게 얽히나.

작게 한숨을 내쉰 환인은 문 안쪽에서 긴장한 사람의 기색을 느끼며 문을 벌컥 열었다.

=으악!=

그러자 문 바로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문에 떠밀려 안쪽으로 우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진다.

12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어린아이의 외모.

망치에 짓이겨졌다가 아문 듯한 망가진 오른손.

어제 미궁 앞 광장에서 마주쳤던 셀핀족 남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릉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환인은 귀찮은 시비가 더 늘어날 것을 예감하며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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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음... 하렘 소설에서 분양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나요 @_@?

하렘 태그 달고 서브 히로인들 분양했다간 소설 터질텐데....

글쟁이의 처녀작과 전작을 보신 독자님이면 아시겠지만 글쟁이는 NTR과 보추, 분양은 극혐합니당

니세 코이처럼 이빨 갈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 안심하고 즐겨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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