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2 항구 도시 니아마드
파리해진 안색의 남작을 본 안느가 황당함을 표시했다.
=뭐야 그게. 섭정……도 아니고 대행이라고 하는 것도 이상한데?=
비록 겉돌고 대접받지 못했어도 십수년간 왕족으로 살며 이것저것 보고 듣고 교육받은 게 있는 안느다.
그런 안느도 이샤=리체 남작 같은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귀족이 거느리는 기사가 아닌, 어디 뒷골목 불량배를 데려와 앉힌 듯한 저 셋은 리체 남작이 무뢰배 같은 놈과 손을 잡았다는 추측을 현실로 만들어준다.
귀족이면서 간신도 아니고 시정잡배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서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귀족의 명예를 시궁창에 처박는 행위다.
차라리 대놓고 착취와 약탈을 하면 했지 이게 니아마드의 귀족 사회에게 알려지면 이샤=리체는 귀족의 명예를 먹칠했다고 명예 결투 신청을 당하거나 심하면 영주에게 귀족 지위를 박탈당할 수도 있다.
이해 못 하는 안느에게 환인이 설명해준다.
“역사가 없는 신규 가문의 초대 가주가 사망한 뒤 사리 분별이 모호한 어린 가주가 가문을 말아먹는 일은 의외로 흔하다. 내막에 이인자나 삼인자가 가문의 재물을 빼돌려 착복하는 일은 더더욱 흔하고.”
=…….=
“아직 경우의 수가 남아있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리체 가문의 무대는 십중팔구 저 여자를 끝으로 막을 내리겠지.”
니오네브레스나 지구나 똑같다.
현대판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재벌이나 기업의 몰락은 대체로 무능한 후손이 일으키기 마련이니까.
귀찮음과 성가심이 다시 밀려오지만, 환인은 이게 자신의 운명이라 여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절한 놈들에게 다가갔다.
안주머니 쪽을 두 번 탭 해서 신호를 보낸 환인이 안색이 납빛으로 변한 남작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기절한 셋의 옆구리를 퍽퍽 걷어찬다.
=끄으헉!=
=허윽! 크으…….=
고통 속에서 정신을 차린 셋은 영문을 몰라하다가 안느를 보자마자 흠칫하고 어깨를 떨었다.
정말로 뒷골목 출신의 쓰레기들이었나.
기사라면 겉보기에 무직자인 안느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두고 굴욕과 치욕을 느꼈을 텐데 이놈들은 겁부터 집어먹었다.
정신 상태부터가 썩어있다는 증거다. 이런 놈들이 기사일 리는 없겠지.
환인은 아신위가 아닌 보통의 존재감을 슬쩍 드러내며 세 남자를 압박했다.
“감히 귀족을 돕는 척하며 등쳐먹으려 음모를 꾸미다니, 간도 큰 놈들이군. 곱게 죽을 생각은 버리는게 좋을 거다.”
그와 함께 환인의 좌우로 상급 물과 바람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니 남자들은 무직자로 보이는 눈앞의 인간을 치우고 도망칠 가능성을 점치다가 눈꼬리가 찢어지도록 눈을 부릅떴다.
=헉!=
=사, 상급 정령사……!=
눈앞이 아득해졌다. 저쪽에 서 있는 미친 플뢰년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국에 상급 정령이 2체나……!
호흡이 곤란해질 정도로 놀란 것은 리체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에게서 정령의 향기는 거의 안 느껴졌고 무직자인데다 무술도 익히지 않은 걸로 보였다.
그래서 지갑을 뺏을 계획을 실행에 옮겼는데 갑자기 상급 정령이 튀어나오다니, 자신이 감지할 수조차 없는 수준의 정령사라는 뜻이 아닌가.
다리에 힘이 빠진 어린 남작은 흘러내리듯이 털썩 주저앉아 넋을 놓아버렸다.
상당한 정신적 충격으로 저항의 의지를 상실한 모습.
환인은 세 놈을 심문하기보다 이샤=리체 남작을 털어보는 게 더 빠르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보아하니 성인식을 치른지 얼마 안 된데다 세상 물정 모르는 듯한 어린애다.
편리하게 이용당한 내막도 보이니 자초지종을 알아내는 데는 남작을 조지는 게 더 빠르겠지.
“이실리테, 안느. 이놈들이 도망가거나 헛짓거리 못하게 붙잡고 있어라.”
=네, 주인님.=
=응.=
여자친구들에게 세 놈을 던져준 환인은 멍하니 바닥만 내려다보는 남작에게 다가갔다.
넋이 나간 듯 혹은 체념한 듯, 리체 남작은 환인의 질문에 고분고분 대답했다.
=부상단주 아저씨랑…… 자문가라는 사람이 하자고 해서…….=
“…….”
=다섯 번만, 다섯 번만 하면 상단은 정상으로 돌아갈 거라고 해서, 그래서…….=
이런 병신 같은 일을 저지른 이유를 물은 환인은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한마디로 남작 가문이라는 귀족 지위를 이용해 공갈과 갈취를 저지르겠다는 이야기 아닌가.
더욱 짜증이 난 환인은 구석에 처박힌 세 놈을 모질게 두드려 팬 뒤 배후에 누가 있는지 확인, 이실리테와 환연을 보내 부상단주라는 인간과 자문가를 잡아오라고 보냈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리체 상단 건물은 남작가에서 불과 20분 거리.
남작의 패를 들고 찾아간 이실리테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상단주 사무실에서 담배와 술, 계집질하고 있던 셀핀 프라우드 남자와 인웅족 루크랑 남자 하나를 포박해 리체 남작가로 돌아왔다.
=응? 빨리 왔네. 아무리 패가 있더라도 덤비는 애들이 나왔을텐데.=
=있었지만 다 기절시켜놨어. 당분간 깨지 않을 거야.=
아무리 무기가 없다고 해도 그녀의 주먹은 이미 흉기 수준. 핵꿀밤 한 대면 평범한 사람은 족히 하루는 정신을 못 차린다.
상단주 사무실을 아지트마냥 점거하고 있던 놈들은 전부 머리에 주먹만 한 혹이 난 채 거꾸러졌다.
남작가 응접실 바닥에 패대기쳐진 둘은 황급히 바지를 추슬러 올리며 벌게진 얼굴로 항의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리체 남작님!=
=왜 우리를 납치하다시피 끌고 온 겁니까!? 이 사실이 귀족 사회에 알려지면 남작님은 물론이고 당신들도 절대 멀쩡하지 못할 겁니다!=
콰앙! 쩌적—
두 놈의 아우성에 안느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한 번 발을 구르자 견고한 대리석 바닥이 발자국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쫙 금이 간다.
=입 다물어. 우리가 질문할 때 외에 입을 열면 그때마다 몸의 뼈가 하나씩 늘어날 거니까 명심해두는 게 좋을 거야.=
=왜, 왜…….=
으직.
=끄아아악!!?=
경고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었던 불곰 머리 남자가 그녀에게 짓밟혀 부러진 정강이를 잡고 비명을 지른다.
=또 소리 지르네. 본보기로는 부족했나봐? 또 뼈 하나 더 늘려줘?=
=……! ……!!=
그녀의 서늘한 목소리에 이를 악물고 소리 내지 않으려 애쓰는 불곰머리 남자를 묵묵히 바라보던 환인은 여전히 만사를 체념한 것처럼 주저앉은 리체 남작에게 물었다.
“누가 부상단주고 누가 자문가지.”
=…저 인웅족이 자문가에요. 저쪽은 부상단주 아저씨고요…….=
그녀의 손가락질에 모피가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던 불곰머리와 지구에서는 11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소년이 동시에 몸을 떨었다.
상황을 대충 눈치챈 셀핀 프라우드족의 람다 부상단주는 진땀을 주룩 흘리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망할. 개시부터 이런 미치광이들이 걸리다니. 재수도 없지……!
자신을 잡으러 온 저 호박색 말총머리 여자도 그렇고 은발의 저 여자도 사람 다리를 해골 병사 뼈 부러트리듯 박살 내는 미친년이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가 상급임이 분명한 바람과 물의 정령으로 향했다.
거기다 상급을 다루는 정령사. 하나도 아니고 둘을 다룬다면 5급이 아니라 6급 직업자도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다.
정황을 보면 저 주황색 머리의 플뢰 남자가 소환한 거 같은데…….
부상단주는 응접실 구석에 구겨지듯이 처박혀있는 3급 직업자, 큰돈을 주고 데려온 3명을 발견하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지금 이 난국을 무사히 헤쳐나갈 수 있을까.
당황하며 애써 머리를 굴리는 그의 귀로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갔다.
“배우는 전부 모인 것 같으니 슬슬 시작하지. 리체 남작.”
=……처음은, 부모님이랑 오빠, 집사 아저씨랑 언니가 죽은 뒤부터였어요.=
시작은 이샤=리체의 부모이자 리체 남작가의 2대 가주가 대량의 해양 운송 의뢰에 실패하고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된 데서 비롯되었다.
부모님인 남작이자 상단주, 그리고 차기 가주로서 수업 중이던 장남과 가주를 보좌하던 집사가 전부 해양 사고로 죽은 뒤 이샤는 작위를 계승하고 상단을 물려받고 찾아오는 귀족의 조문을 받으며 정신없이 2달이란 시간을 보냈다.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사건, 사고는 자연히 사라지거나 기다려주지 않는다.
대규모 물류 운송의 실패로 막대한 손해 배상을 치르고 그 외에도 여기저기 대금이라던가 미납금 등을 내다보니 풍족하다 할 수 있던 가문의 재산은 창고에서 곶감을 빼먹는 것처럼 야금야금 빠져나가 어느덧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가주가 멀쩡했다면 채권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전대 리체 남작은 뛰어난 수완으로 상단을 꾸려온 인물이었으니 한 번의 실수 정도는 주변 사람들도 좋은 경험이라며 기다려주었을 테니까.
그동안 벌어둔 재산도 많고.
그러나 그 가주 내외가 죽었다. 가주 교육을 받던 차기 가주도 죽었고 가주를 보필하던 집사 부부도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사망했다.
뭣도 모르는 계집애가 남작의 작위를 계승했고 상단을 이어받았다.
가문과 상단을 이끌어나갈 머리가 통째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덜 여문 대가리의 여자애가 들어선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채권자는 없을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빚의 상환을 요구받은 이샤는 조언을 받을 사람도 없어 순진하게 그 요청을 접수해 부모가 빌린 돈을 전부 갚았고…….
=……그렇게 배상하다 보니 아빠, 엄마가 모아둔 재산은 눈 녹듯이 사라졌어요. 그 뒤로도 계속 돈이 나갈 일이 생겨 전답도 팔고 별장도 팔고 배도 하나 빼고 전부 다 팔았어요.=
환인의 차가운 시선이 람다 부상단주에게 향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살벌한지 람다 부상단주는 가슴에 얼음 칼이 날아와 꽂히는 듯했다.
“이름은?”
=라, 람다…… 입니다.=
“이 대목에서 네가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듯한데.”
=그…….=
=야. 머리 굴리지 말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 개소리나 숨기는 게 하나씩 나올 때마다 넌 몸에 뼈가 두 개씩 늘어날 거야.=
그를 주시하는 안느의 두 눈이 황금빛에 휩싸였다.
플뢰족의 선천 능력인 최상급 진실의 주시자가 발동되었다는 표식에 람다 부상단주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고, 그때 환인의 추가 지시가 내려졌다.
“아직 꾀를 쓸 여력이 있나 보군. 이실리테, 그놈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봐줘라. 안느는 회복약을 준비해두고.”
=네, 주인님.=
=자, 잠깐! 기다려…… 으아악!!=
쿵쾅, 뻑! 우직— 뚜둑, 콰즉! 뻐걱, 퍼버벅……!
……30분 동안 정말로 ‘죽지 않을 정도’만큼 얻어터진 람다는 온몸이 찐빵처럼 부풀어 오른 몰골로 쌍코피를 줄줄 흘리며 리체 남작의 뒤에서 저지른 짓을 실토했다.
전대 가주의 사망으로 리체 남작가가 침몰하는 배라는 사실을 눈치챈 람다 부상단주가 그때부터 횡령과 절도 같은 비리를 저지르기 시작한 것.
후계 교육은 오라비에게 맡기고 놀러만 다니던 이샤에게 그 사실은 어두컴컴한 수면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설마 람다 부상단주가 배신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이샤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리체 남작. 계속해라.”
=……사, 상단의 일은…… 부상단주 아저씨한테……….=
멋모르는 귀족이란 상인에게 있어 뜯어먹기 좋은 먹잇감일 뿐.
상단의 일은 부상단주에게 전부 맡긴 이샤는 점점 줄어만 가는 가산에 초조함을 느꼈고, 결국 금고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소지품과 선물받은 명품 마도구, 마도기는 물론 가문의 보물을 전부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아빠가 아끼던 장서, 엄마가 아끼던 명품 드레스와 마도구, 식기, 다과 세트, 명화, 명품 아이템, 보석, 장신구 등 갖은 물건들.
판매 대금으로 족히 천수백 금화가 나왔지만 그럼에도 금고를 채우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당연하다. 항아리 바닥에 구멍이 났는데 암만 물을 붓는다고 물이 차오를리 없는 것이다.
팔 수 있는 것은 전부 팔았지만 가산이 줄어드는 속도는 늦춰지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 들어갈 곳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
그 점을 이상하게 느낀 이샤는 부상단주 아저씨를 찾아가 물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돈이 너무 빨리 없어진다고.
하지만 아저씨는 자신을 믿으라고, 상단주님이 남긴 상단은 어떻게든 지켜내겠다고 호소했기에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데다 선천 능력인 진실의 주시자도 미약한 이샤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
환인의 시선이 람다 부상단주에게 향하자 이실리테가 피 묻은 주먹을 들었고, 람다는 기겁하며 진실을 토해냈다.
리체 남작이 마련한 자금은 물품을 몰래 구하고 외상을 다는 식으로 청구 영수증을 마련해 리체 남작에게 제출, 빼돌린 물건은 딴 곳에 팔아서 착복했다고.
그 이야기에 또다시 충격을 받은 듯 리체 남작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저, 저는…… 흑. 전 어떻게든 가문을 지키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떻게 지켜야할지 몰라서,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어서…… 흐윽.=
참다못해 눈물을 보이며 리체 남작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홀로 망망대해에 떠 있는 듯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이샤에게 상단 자문가라는 사람이 접근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팔 수 있는 것은 대부분은 팔아서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생전 부모님이 그녀의 성인식 선물로 준 특주품인 2 마스트 캐러벨선, 리지나 뿐.
리지나 호는 니아마드에서 뱃사람이라고 자칭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배였다.
두르데인에서 명장을 초대하고 소재도 최고급으로만 맞춰 완성하는데 거의 300금화에 가까운 돈이 들었을만큼 외형에서부터 성능까지 훌륭한, 뱃사람이라면 탐낼 수밖에 없는 명품이었던 것이다.
리지나를 기점으로 호화 유람선 붐이 불어 니아마드 영주의 딸도 개인 유람선을 마련할 정도였으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는 부분.
비슷한 배는 많아졌지만 유행을 선도했다는 의미에서 리지나 호의 유명세는 가라앉지 않았다.
당연히 이샤에게도 둘도 없는 보물이자 이제는 부모님의 유품이나 다를 바 없는 배였기에 리지나 호만큼은 팔 수 없다고 했는데…….
이샤는 자문가와 아버지의 부하인 부상단주의 꾐에 빠졌다.
이런 유흥품에 가까운 배를 사려는 사람은 당연히 막대한 돈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귀족이 아니면서 그만한 돈을 모은 사람은 어딘가 문제가 있기 마련일 테니 그 돈을 뺏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나왔다.
배를 팔면 큰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니 배를 사러 온 돈 많은 평민의 등을 치자는 계획에 발을 담그고 만 것.
한 번에 200금화씩, 5명만 등쳐먹어도 1000 금화라는 거금이 생긴다.
1000금화면 급한 불을 끈 뒤에도 상단을 몇 년은 유지할 수 있는 큰돈.
저택의 하인, 하녀들에게 지급할 봉급도 없을 만큼 돈이 무척 필요했던데다가 자문가와 부상단주의 탁월한 언변에 속아 넘어간 이샤는 급기야 그 계획에 동참하기에 이르렀고…….
=……당신이 첫 번째로 배를 사러 온 거였어요…….=
=하…….=
경위를 모두 들은 안느가 기막혀하는 탄식을 흘렸다. 그러다 화난 얼굴로 온몸이 찐빵처럼 부풀어 시푸르딩딩해진 람다 부상단주를 삿대질했다.
=너는 진짜 인간도 아니야. 너만 믿는 조카 같은 아이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애가 괴로워하는데 양심의 가책도 안 느껴졌어?=
=…….=
=말해!=
=안느, 그만해. 저런 놈에게 양심은 돈벌이의 수단일 뿐이야. 화내봤자 돌아오는 건 능글맞고 뻔뻔한 대답이거나 옆구리를 찔려서 나오는 사과밖에 안 돼.=
화가 나서 가슴이 답답한 안느에게 이실리테의 이야기는 찐 고구마를 억지로 먹이는 수준이었다.
나쁜 놈을 처벌하지 않고 말이 안 통하니까 내버려 두라니?
하지만 그녀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이실리테는 저런 상인 놈들 때문에 창단했던 용병단이 망하고 도적으로 전락하는 경험을 했으니까.
……그래서 아까 저놈을 두드려 팰 때 손속에 감정이 느껴졌었나?
=에휴…….=
자신의 한숨에 흠칫하는 부상단주와 자칭 자문가라는 놈들을 노려본 안느는 팔짱을 끼고 묵묵히 선 환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도령. 어떻게 할 거야?=
“……솔직히 말하면 귀찮아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럼 도령이 편한 대로 하자.=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는데도 안느는 아무런 불만 없이 받아들였고 그건 이실리테도 마찬가지였다.
괜찮겠느냐는 뜻이 담긴 환인의 시선에 안느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도령이 마냥 귀찮아서 피하자는 건 아닐 거 아냐.=
“그래.”
=응. 그러니까 됐어.=
“…….”
자신을 믿기에 넘어가자는 것을 받아들이는 건가.
환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귀찮아서 넘어가고 싶단 마음은 별게 아니었다.
리체 남작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려면 니아마드 영주에게 이쪽의 정체를 밝히고 리체 남작의 처벌을 정식으로 요청해야 한다.
저렇게 멍청해도 일단은 남작, 귀족이니까.
이쪽의 정체를 밝히는 쪽으로 가면 니아마드 영주는 자신을 극진히 환대하거나 두려워하며 대접하려 들 것이다.
대접을 거절하고 배만 챙겨서 출항해도 되지만, 문제는 이쪽의 다음 목적지가 결명회로 흘러 들어갈 수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벌어질 일이다.
지금 상황을 보자면 결명회가 미친척하고 이쪽을 공격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마냥 안전하다고 볼 수도 없고 전투가 벌어진다면 바다에서 치러질 텐데, 재수 없으면 바다의 초대형 마물이나 마수와 난전을 벌여야할 수도 있다.
여자친구들의 안전을 생각하면 전투는 최대한 피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인 것.
잠시 쓴웃음을 짓던 환인은 표정을 고치고 여전히 넋을 놓은 리체 남작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을 올려붙였다.
쫘악!
=하윽……!=
발라당 자빠진 남작…… 이샤=리체는 입가에 피를 한줄기 흘리며 떨리는 눈으로 환인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정신을 차렸군. 대충 짐작했겠지만 이쪽이 신분을 밝히면 너나 저런 버러지들은 간단히 밟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원치 않으니 이번에는 넘어가 주도록 하지.”
=……차라리, 차라리 저랑 저 새끼들을 전부 죽여주세요…….=
“누구 좋으라고.”
단 두 마디로 이샤의 주둥이를 닥치게 한 환인은 짜증 난다는 투로 이샤의 금발 머리채를 움켜잡고 뒤로 젖혔다.
=아윽……!=
“아까까진 어떻게든 가문의 이름을 남기려 애를 쓰더니 이제는 다 포기한 건가. 고작 저런 쓰레기에게 배신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
“저런 버러지에게 배신당한 게 부모님이 남겨주신 목숨까지 버릴 만큼 절망적이었나? 정말 그런 거라면 소원대로 죽여주마. 하지만 간단히 죽이진 않을 거다. 그 형편없는 몸뚱이와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굴려서 1철화 한 푼까지 박박 긁어모은 다음 산채로 개돼지의 먹이로 줘서 그 보잘것없는 인생에 종지부를 찍어주지.”
환인의 노골적이고 저열한 협박에 이샤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떨었다.
몸의 떨림이 공포 때문인지 분노에 의한 것인지는 당사자와 환인만이 알 것이다.
=저, 저는…….=
무어라 말하려는 이샤=리체의 눈빛을 본 환인은 그녀의 머리채를 놓아버린 뒤 손가락 사이사이에 걸린 금색 머리카락을 털어내고 저벅저벅, 람다 부상단주와 자문가에게 걸어갔다.
람다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사색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헉! 사, 살려주십쇼! 뭐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목숨만—=
써걱- 터덩
광명창을 짧게 휘둘러 하나의 생명을 거둔 환인은 이어서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며 기어서 도망가려는 자문가의 머리도 쳐서 떨군다.
이어서 기절해 구석에 처박혀있던 셋도 죽인 뒤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크게 뜬 이샤=리체에게 말했다.
“따라와라. 기분 나쁘지만 한 발 걸치고 말았으니 뒷정리까지는 해주지.”
시체에서 흔들거리며 빠져나오는 다섯의 영혼을 강제력으로 불러들여 갈무리한 환인은 덜컥, 응접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마침 티 카트를 밀고 왔던 하녀장이 피바다인 방안 풍경을 목도하곤 깜짝 놀라 반대편 벽으로 물러선다.
=사, 살인……!=
“하녀장. 방안의 시체들은 이샤 리체 남작을 속여 남작가의 남은 자산을 빼돌렸던 범죄자들입니다.”
=……네?=
“지금부터 저자들과 한통속인 리체 상단의 남은 범죄자들을 잡으러 갈 예정이니 하녀장은 병영에 연락해 병사들을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이샤 아가— 나, 남작님!=
하녀장은 어리둥절해하다가 한발 늦게 뺨을 맞고 머리카락이 엉망인 채 나오는 이샤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론나. 난 괜찮아. 저분이 말씀하신 대로 병사들을 불러서 안의 개……자식들을 수습해줘. 부탁할게.=
=네, 네에…….=
대체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녀장은 의문이 굴뚝 같았지만 어릴 때부터 키워온 남작의 부탁에 일단 병사를 부르러 가려다 안느에게 손목이 잡혔다.
=하녀장씨. 일단 우리 무기부터 돌려주면 좋겠는데?=
=네? 아! 네, 여기 있습니다.=
깨끗하고 하얀 천으로 무기를 감아 품에 안고 있던 하녀장이 서둘러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무기를 돌려준다.
그사이 저택을 빠져나가 람다의 영혼을 쥐어짜다시피 정보를 뽑아내던 환인은 황급히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으며 달려오는 이샤=리체를 기다렸다가 통보하듯 말했다.
“부상단주가 횡령해서 숨겨놓은 재물과 재산을 찾아 돌려주지. 대략 930금화 정도 된다고 하니 그걸 자본 삼아 다시 상단을 일으키든, 가문과 상단을 전부 정리하고 아무 남자나 붙잡아 시집가든 신경 쓰지 않겠다.”
=……?=
도와……준다고? 이샤는 눈앞의 무자비한 남자가 하는 말을 한순간 받아들이지 못했다.
조금 전까진 자신까지 죽여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180도 반전해서 재물을 찾아주고 도와주겠다니.
덜 여문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워 눈만 끔뻑이는 이샤에게 환인이 설명을 조금 더 덧붙였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리지나라는 캐러벨선은 내가 받아 가지. 그리고 영주의 기사가 찾아와 우리에 대해 캐물어도 상단의 배신자를 색출해내준 감사의 대가로 배를 넘겨주었다고만 해라.”
=그걸로…… 괜찮은 건가요?=
“만약 약속을 어기거나 날 더 귀찮게 한다면 그땐 너를 포함해 저택의 모든 인간을 죽여주겠다. 이해되나.”
=……!=
심장을 찌르는듯한 살기에 이샤는 목이 부러져라 위아래로 끄덕였다.
“계약 성립이군.”
짧게 말한 환인은 몸을 돌려 리체 상단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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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내 여자에게만은 상냥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