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1 항구 도시 니아마드
다음 날 아침.
이실리테가 정성껏 만든 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환인은 컨시어지를 통해 캐러벨선을 판다는 귀족 가문에 방문 요청을 남겼다.
그리고 답장을 기다리며 거실을 스윽 둘러보았다.
선원 영혼은 엘위드리스의 플뢰 기사 영혼들, 해전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선박의 조타에서부터 항해까지 열심히 가르치는 중이다.
아영은 어젯밤 환인이 지시한 것을 수행하러 유르파에게 몇 가지 마도구를 받아 외출한 상태이며 김영수와 김철수는 아침부터 안느와 유르파에게 교육받는 중.
빡!
“끄헥!”
공간 도약을 끝마치자마자 이마에 꽂힌 딱밤은 김영수에게 두개골이 쪼개지는 고통을 선사했다.
이마를 감싼 채 애벌레처럼 웅크려 부들부들 떠는 김영수에게 안느가 지적한다.
=너 그 버릇 좀처럼 안 고쳐지네.=
“으그극……. 그, 그건 안느 누님이 예민하셔서 그런 게 아니고요?”
=그런 것도 있어서 공간 도약 징후가 느껴지는 것도 있는데, 다시 도약 써봐.=
“…….”
촵!
“꾸엑! 끄어어어……!”
공간 도약을 펼치려던 김영수는 5m 떨어져 있던 안느가 번개같이 달려드는 걸 막지 못하고 수도에 목젖을 얻어맞아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봐. 너 공간 도약 쓰려할 때 무의식적으로 이동할 장소를 보잖아. 너희 수준 정도 되는 적들한테는 괜찮을지 몰라도 우리나 도령 정도 되는 사람들한테는 목이 잘릴 수도 있는 치명적인 버릇이야.=
그녀의 설명에 김영수는 목젖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도 헉? 하고 놀랐다.
방금 수도가 만약 검이었다면 자신은 머리랑 몸통이 분리되었을 거란 이야기가 아닌가.
고통도 한순간 잊고 멍해지는 그의 표정에 안느가 지시봉으로 그의 머리를 통통 두드렸다.
=넌 공간 지각도 있잖아. 왜 눈을 쓰려고 해. 공간을 감각적으로 낱낱이 파악할 수 있다면 전투 중에는 눈을 쓸 필요 없지 않아?=
“어, 그건 그런데 습관이…….”
=적이 죽이려 달려드는데 습관 때문이니까 봐달라고 할 거야?=
“아뇨…….”
=고쳐야지?=
“넵…….”
=다시 해봐.=
육체와 정신 양쪽으로 단련하는 김영수에 비하면 김철수는 다소 편한 부분이 있었다.
오로지 정신 집중만으로 차원벽을 전개하는 데 집중하면 되니까.
특히 광산 도시에서 공격받은 일로 정신 집중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김철수는 차원벽 전개의 안정성에 몰두 중이다.
능력을 억제하는 곳에서도 자신의 뜻대로 차원벽을 펼칠 수 있게끔 말이다.
‘둘 다 조금만 더 하면 패시지 침투는 어렵지 않겠군.’
물론 맨몸으로 들여보내는 게 아니라 유르파가 제작한 각종 강화 마도기를 채워야겠지만, 그럼에도 경계가 삼엄한 차원 방랑자 관리국에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은 능력의 효용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다.
안느에게 얻어맞으며 공간 도약 버릇을 고치는 김영수와 유르파의 정신파 술법을 맞으면서 차원벽을 유지하는 연습 중인 김철수를 구경하던 환인은 둘을 불렀다.
“이제 훈련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간다.”
“마지막!”
“단계!”
적지않게 흥분하는 둘에게 환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제부터 기습적으로 간간이 너희를 공격할 거다. 이 훈련의 목적은 고통 속에서 이성을 유지해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능력을 펼치는 것이며, 일정 수준 이내의 고통에 대한 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기습 공격받아 고통에 허덕이다 능력을 펼치지 못해 죽는 경우를 막기 위한 훈련이라 하자 두 김씨는 바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옙.”
“넷.”
“어떤 공격이든 받는 순간 몸을 굴려 피하던지 능력을 펼쳐 회피하든가 방어해라. 대처가 늦으면 후속 공격이 계속 이어질 것이고, 일정 횟수 이내에 방어와 회피를 성공해내지 못한다면 그날은 저녁까지 상처를 치유해주지 않을 거다.”
김철수와 김영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실리테, 안느, 아영과 훈련과 대련과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받으며 누님들이 얼마나 강한지 뼈저리게 느꼈던 둘이다.
그런 세 명의 실질적인 무술 스승이라 할 수 있는 환인 형님은 얼마나 강할지 짐작도 안 간다.
‘도령이 얼마나 강하냐고? 으음…… 신체 능력이나 직업 능력을 제외하고 붙으면 우리가 전부 달려들어도 도령을 못 이겨. 그렇다고 신체 능력도 약한 게 아니라서 유물을 발동시키면 나나 이슬이 정도로 신체 능력도 대폭 강화되니까…….’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싸우면 오빠를 이길 수 있냐고? 킥킥. 차라리 능력을 봉인하고 싸우는 쪽이 더 이길 확률이 높을걸?’
‘주인님은 무술과 영혼술 양쪽으로 아신에 오르실 정도의 실력을 갖추신 분이야. 우리는 어느 쪽이든 주인님의 발치에도 미치지 않아.’
그런 형님이 이제부터 공격한다니…….
긴장이 절로 감도는 와중에 둘은 환인의 검지가 어느 순간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이이이이잉…….
귀를 울리는 이명과 함께 눈을 끔뻑였다.
엉? 왜 눈앞에 벽이 보이는 거지. 아니, 저건 천장인가? 내가 언제 쓰러졌지?
“……으그극?!”
“끄어어……!”
움직이려 한 순간 멍석말이를 당한 것처럼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두 김씨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헐떡였다.
단순한 육체 고통이 아니라 극심한 몸살을 앓고 난 것처럼 몸 안쪽이…… 영혼이 욱신거린다.
고통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워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둘에게 백려강이 냉수를 내밀었다.
=괜찮아요?=
“누님…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온몸이 찢어지는 거 같아요…….”
“아이고 나 죽네…….”
=두 사람은 오라버니의 간단한 영혼술에 직격당하고 1시간 동안 기절했어요.=
“……?”
“……??”
뭐에 당한 줄도 모르겠는데 1시간 동안 기절했다고?
위장을 얼릴 것 같은 냉수를 마셔 간신히 정신을 차린 둘은 거실에 유르파 누님과 백려강 누님, 이모렐 누님뿐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형님은요?”
=캐러밸선을 구매하시려고 외출하셨어요. 에잇.=
깜찍한 기합과 함께 백려강이 목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둘은 인지 부조화로 움직이지 못하고 머리, 어깨에 한 대씩 맞았다.
그리고 밀어닥친 극통.
“끄어억!?”
“꾸에엑…!”
전신 근육통을 앓다가 맞으면 이러할까.
둘은 영혼이 사출될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아니, 마음만 굴러다녔다. 그저 한 바퀴 바닥을 굴렀을 뿐인데도 수십 번 멍석말이를 당한 거 같은 복합적인 고통이 전신에 밀어닥쳤기 때문.
둘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헐떡이며 목검을 두 손으로 잡고 다가오는 백려강에게 애원했다.
“누, 누님 왜 때리시는 거예요…. 살려주세요…….”
“죽을거같애죽을거같애죽을거같애죽을거같애…….”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리면 대신 훈련을 시키고 있으라고 오라버니께서 지시하셨거든요. 얼른 일어나서 피하거나 능력으로 막지 않으면 계속 때릴 거에요!=
귀여운 말투와 목소리하곤 정반대로 목검을 위협적으로 휘둘러오는 모습에 김철수와 김영수는 기겁해서 몸을 일으키……려했지만 고통에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능력을 쓰려해도 고통이 머리를 흔든 상태라 정신 집중이 어렵다.
“히이익!”
“으그악!!”
그래도 그간의 훈련이 헛되지 않아 어떻게든 몸을 굴러 2번째 공격은 피했지만…….
퍼벅—
“컥! 화, 화살은 반칙……!”
이어서 날아온 촉 없는 화살에 맞아 나뒹굴며 바르르 떨었다.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둘의 모습에 백려강은 조금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연습용 활에 화살을 장전하며 설명했다.
=참고로 오라버니의 신식 영혼 폭발은 육체와 영혼 양쪽에 극심한 피해를 줘서, 저항에 실패하면 정상적으로는 며칠 동안 고통이 사라지지 않아요.=
“……!?”
“……!”
=육체의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영혼의 고통은 오라버니가 영혼 치유를 걸어주지 않으면 완벽하게 낫는 데 몇 주가 걸리니까…욧!=
부웅—
“으아악!”
“히에엑!”
활을 쏠 줄 알았는데!
관절염에 걸린 것처럼 삐걱거리는 몸으로 백려강의 검격을 간신히 피한 둘은 휘청이며 백려강에게서 거리를 둔 순간, 그녀가 화살을 조준하는 걸 보곤 기겁해서 다시 바닥을 굴러 화살을 피했다.
바닥을 구른 순간 또다시 끔찍한 고통이 밀려와 머리가 하얗게 마비된다.
간신히 화살을 피한 김철수는 차라리 화살에 맞는 게 덜 아프지 않을까 했지만, 엉덩이에 촉 없는 화살을 맞고 소리 없는 영혼의 절규를 지르는 김영수를 본 순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공격을 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어떻게?
가까우면 검격이 쏟아진다. 멀어지면 화살이 날아든다.
그녀의 활 솜씨가 어떤지 아는 김철수는 백려강이 살살 봐주면서 공격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지만 그래서 더욱 암담함을 느꼈다.
누님이 마음만 먹으면 그순간 자신들은 고슴도치가 되어버릴테니까.
어떻게, 어떻게 하지? 환인 형님이 돌아올 때까지 이렇게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 피해 다녀야 하나?
……형님이 오시기 전에 뒤지겠는데?
절망에 빠지려는 김철수의 귀로 유르파의 안쓰러워하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얼마나 아프면 능력을 써서 막을 생각을 못 하니…….=
……맞아! 능력! 차원벽!
그제야 훈련의 목적을 떠올린 김철수는 언제 이렇게 집중한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차원벽을 ‘간신히’ 쳤다.
툭 건드리면 깨질 정도로 얇고 그마저도 불안정해 울퉁불퉁한 방패 모양이지만 어쨌든, 차원벽을 펼쳤고 거기에 화살이 닿아 떨어지자 백려강이 작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김영수만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 살았다…….”
=쿡쿡.=
유르파의 웃음 소리를 듣고 그녀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 인사를 한 김철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유, 유르파 누님. 어… 언제까지 쉬게 해주는 거예요……?”
=으응~? 그걸 말해주면 훈련이 안 되잖니. 그나저나 2인 1조로 활동해야 하는 파트너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렇게 남일 보듯 보고 있어도 되겠어?=
“……헉!”
맞다. 영수 저놈하고 같이 행동해야 하지?
유르파의 의도를 눈치챈 김철수는 화살에 연달아 맞아 거의 혼절 상태 직전인 김영수를 향해 몸을 던지며 이를 악물고 다시 차원벽을 쳐 화살을 막아낸다.
그러자 그게 정답이라는 듯이 백려강이 부드럽게 웃음 지어주고 유르파에게 걸어갔다.
이, 일단 몇 분은 살았다는 생각에 김철수가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좀비처럼 신음을 흘리는 김영수를 붙잡고 흔들었다.
“야. 야임마. 정신 차리고 들어봐, 좀.”
“으어어……. 뭐, 뭔데……?”
“환인 형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공격을 능력으로 막거나 피해야 해. 넌 공간 도약으로, 난 차원벽으로.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고 협력하기도 해야 해. 공격을 못 피해서 맞아 쓰러지거나 하면 너는 나를, 나는 너를 능력으로 지켜줘야 한다는 거야.”
“…….”
정신이 혼미한데도 김철수가 하는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 김영수였다.
형님이 언제 돌아오실지도 모르는데, 돌아오신 뒤에도 이 훈련이 이어진다는 생각을 하자 진짜 진저리가 쳐지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든다.
그만큼 지금의 고통은 끔찍한 수준이었던 것.
하지만…….
“……하렘을 위해서라면.”
“그래. 하렘과 낙원을 위해서는 형님이 주실 미션을 완벽하게 클리어해야 해. 지금 훈련은 그걸 위한 거고.”
고통에 혼탁해져 있던 두 남자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2마스트 캐러밸선을 판다는 리체 남작가를 방문해 정문을 넘은 환인은 남작 가문의 재정 상황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정원이 좀 엉망이네. 정원사가 실력이 없나봐.」
=그러게. 저택도 좀 관리가 소홀한 거 같고.=
들쭉날쭉한 관목과 듬성듬성 쥐가 파먹은 듯한 작은 잔디밭, 덩굴이 타고 올라가는 저택 외벽은 벽돌식인데 잘 보면 군데군데 금이 간데다 비바람에 풍화되어서 부서지는 게 보인다.
마냥 방치해둔 게 아니라 보긴 안 좋아도 어느 정도 관리하려 애쓴 흔적들.
저택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분수대와 포장된 길은 깔끔한 게, 가문의 자금이 상당히 경색되어있다는 게 느껴지는 광경이다.
호텔 컨시어지는 리체 가문은 상행위로 재산을 벌어들여 부를 이루고 작위를 얻은 상인 출신 가문이라 하였다.
그 때문에 전대 가주이자 상단주는 얼마 전 해상 운송에서 최악의 사태와 마주하며 사망, 짐도 모두 분실하고 상단주도 사망하는 재난을 겪었다고 들었는데 그로 인한 여파가 저택 관리에까지 영향을 끼친 모양새다.
저택에 도착하자 출입문 앞에 나와 있던 고풍스러운 하녀복 차림의 플뢰족 여성이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린다.
=리체 남작 가문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가주님께 안내해드리기에 앞서 무기를 맡고자 하니 협조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별로 안 내키는데…… 꼭 맡겨야 해?=
하녀장은 안느의 반응에 그녀의 허리춤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작게 흠칫했다.
저건 땅신교단 고위 전투 성직자에게만 분출 허가가 나오는 예식용이자 실전용 땅의 망치.
루크랑족 여성이 허리에 찬 묵빛 검 또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두르데인의 특상급 마도검인 더브릴이다.
이어 그녀들이 입고 있는 옷으로 시선이 간 하녀장은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둘 다 외투로 가리고 있지만 한두 푼 하는 마도기가 아니었던 것.
“안느, 이실리테. 이쪽의 요청으로 저택을 방문하는 것이니 방문자의 예의를 갖춰야지.”
그의 이야기에 안느는 예식용 워 해머를 꺼내 넘겨주며 가볍게 위협했다.
=무기에 이상한 짓 했다간 가만 안 둘 거야.=
이실리테도 묵빛 검을 검집째 끌러주며 날카로운 시선을 주었고, 하녀장은 침을 꼴깍 삼키며 이 무기는 아랫것들이 아닌 자신이 관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 하녀장의 안내에 따라 이실리테, 안느를 대동해 응접실에 들어선 환인은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금색 머리카락의 플뢰족 여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트린 금발에 뾰족한 귀, 하얀 블라우스와 감색 조끼에 감색 바지를 입은 여자는 어른이라기보단 어른처럼 입은 아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 그녀가 이쪽을 보는 눈빛이 무언가 심상치 않다.
=당신이 배를 사겠다는 사람인가요?=
안느는 불만을 속으로 삼켰다.
아무리 이쪽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지만 앉으라는 말도 안 하고 자기소개 시간도 없이 본론에 들어가다니. 매너 위반이잖아.
“예. 즉시 거래하길 바랍니다.”
거기에 맞춘 환인의 직설적인 발언에 여자, 리체 남작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400금화에 팔겠어요.=
“듣기로는 200금화였습니다만.”
=가격은 파는 사람 마음대로 아닌가요?=
그의 질문에 리체 남작은 작게 코웃음 치며 팔짱을 끼고 조금 어수룩하지만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
이 여자는…….
환인은 잠시 물끄러미 이샤=리체, 리체 남작을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급한 건 이쪽입니다. 하지만 덤터기를 써가면서까지 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군요. 거래는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하? 거래를 취소하겠다니, 감히 귀족의 시간을 빼앗다 못해 능멸하고도 무사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나요?=
그리 말한 리체 남작은 책상 위에 놓인 말채찍을 들며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에요. 200금화를 사죄 비용으로 내고 돌아가던가, 버르장머리 없는 그 태도가 고쳐질 때까지 훈육받던가.=
휘익— 짝!
말채찍이 한차례 휘둘러지며 책상을 때리자 날카로운 파열음이 응접실을 채웠다.
감히 귀족을 만나러 오는 자리에 별것 없는 호위를 대동한데다 예의도 차리지 않는다니. 귀족도 아닌 자가 귀족 앞에서 교만한 태도를 보이면 혼쭐이 나야 하는 법이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인데, 어째서인지 무표정인 남자는 둘째치고 호위로 대동한 여자들의 반응이 이상하다.
보통은 귀족과 다툼이 발생할 것 같으면 엿됐다거나 망했다는 기색이 흘러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저 둘은 마치 이쪽을 정신병자를 보듯이 하고 있지 않은가.
“이해가 가질 않는…… 아니, 관두지.”
=뭐라구요?=
리체 남작이 뾰족한 목소리를 내며 말채찍을 꽉 움켜쥐었지만, 환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응접실 내부를 한차례 훑었다.
방범 마도구는커녕 일반 마도구도 없다. 기감에 따르면 옆 방에 직업자가 세 명 대기 중이지만 고작 3급.
툭툭.
안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환연에게 신호를 주어 소리를 차단시킨 후 저벅저벅 소파로 걸어가 앉으며 물었다.
“이샤 리체 남작. 아무리 가주직을 계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도 이런 식의 어거지 일 처리는 가문의 이름에 하등 좋을 게 없다는 것도 모르나.”
=무, 무… 무슨……!=
“상대의 신분을 봐서 이런 식으로 꼬투리를 잡아 금품을 갈취하는 건 애새끼나 할 법한 발상이라는 말이다.”
내심을 간파당한데다 노골적인 조롱을 들은 이샤=리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나름 인간을 보내 이쪽을 살핀 모양인데 그마저도 수박 겉핥는 식으로 일 처리를 한심스럽게 하니…… 죽은 조상이 이 광경을 보면 혈기가 역류해 혼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겠군.”
컨시어지를 통해 리체 남작가에 기별을 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단의 인간들이 찾아와 주변을 살피고 돌아갔었다.
돌아간 장소는 리체 남작가.
환연이 알려주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쪽을 건드려도 괜찮을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보낸 자들이겠지.
=거, 건방진……!=
귀족으로 살며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는지 노여움에 부들부들 떨던 이샤=리체가 바락 소릴 질러 옆방에 대기 중이던 기사를 불러들이려 한 순간이었다.
정말 우연히 건방진 남자의 눈을 들여다본 순간 이샤=리체는 정체불명의 존재감에 한겨울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태연한 태도와 이쪽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궁금하다는 호기심이 엿보이는 남자의 얼굴.
항거할 수 없는 괴물을 앞에 둔 듯한 위압감에 못된 짓을 하려는 자각은 있어 안절부절 조마조마해 하며 흐려졌던 이성과 지성이 돌아왔고, 상황 파악이 머릿속으로 이루어지며 큰일 났다는 생각이 그녀의 작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신이 남작이며 여기가 남작 가문의 저택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저렇게 거만하고 태연자약하다는 건 남작 가문인 이쪽을 무력이든 권력이든 억누를 자신이 있다는 증거.
스톱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춘 상태인 이샤=리체의 귀에 환인의 작은 조롱이 날아들었다.
“머릿속에 똥만 든 멍청한 년은 아닌가 보군. 그 머리로 낸 결론은 뭐지? 옆방에 대기 중이던 3급 직업자 셋을 불러들여 이쪽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건가? 이쪽의 무기는 하녀장이 챙겨서 다른 방에 있으니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나?”
꾸드득—
이샤=리체는 정체불명의 남자 뒤에 선 두 여자에게서 숨이 막히는 살기를 느끼며 주춤주춤 물러나다 책상에 엉덩이가 부딪쳤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던 이샤=리체는 진땀을 한 방울 흘리며 눈앞에 앉은 주황색 머리카락의 남자 플뢰에게 물었다.
=다, 당신은 누구……죠?=
“모든 행동에는 그에 걸맞은 리스크가 있는 법이다. 지금 넌 리턴이 아닌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는 상황이고. 이런 상황에 묻는다는 게 고작 이쪽의 정체인가.”
=……!=
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못 배워먹은 서민이 아닌 제대로 된 고등 교육을 받은 인간이라는 걸 보여준다.
이샤=리체는 이런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말괄량이로 자란 그녀에게 모진 풍파가 닥치지 않도록 기둥과 벽, 지붕이 되어주던 부모님 및 집사와 삼촌 아저씨들은 모두 죽고 없으니까.
하지만 상단주이자 남작 가문 가주가 아닌 꼬마 이샤라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걸 해도 되는 건가? 아빠는 귀족이란 자고로 아무 데서나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건 아니랬는데…….
“안느, 저 방에 가서 세 놈을 끌고 와라.”
=응.=
살기 등등한 얼굴로 저벅저벅, 응접실과 붙은 방으로 향하는 안느.
잠시 후 벽 너머로 쿵, 쾅, 으악, 커어억, 타격음과 남자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더니 안느가 양손에 전사 둘과 엽사 하나인 3급 직업자 셋을 질질 끌고 나왔다.
안느의 얼굴에는 분노보다 어이없음이 더 드러나고 있었다.
=이 자식들 뭐야? 기사도 아니고 껄렁한 게 딱 시정잡배 수준인데 이런 게 왜 여기 있어?=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에 올린 환인이 안색이 파리해진 채 책상에 반쯤 걸터앉아 후들후들 다리를 떠는 리체 남작을 가리켰다.
“저택 관리를 이 꼴로 할 정도라면 가문의 재정은 이미 바닥일 테고 상단의 재정도 최악이라는 말이 되겠지. 어떻게든 숨통을 틔우기 위해 사재를 팔아 자금을 확보하려 했나 본데 남작님의 옆에 그놈들 말고 다른 시정잡배 하나가 붙어 간교한 혓바닥을 놀린 게 아닐까.”
비싼 배를 판다고 해놓고 꼬여 드는 사람들을 파악한 뒤 건드리기 위험한 사람에게는 이미 배를 예약하고 간 사람이 있다고 둘러대고, 건드려도 무방할 거 같은 여행자나 신분이 낮은 인간이 찾아오면 꼬투리를 잡아서 금품을 갈취하거나 살해해서 매장해버리자고.
=어, 어떻게……!=
이샤=리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줄 알았다.
어떻게 이쪽의 사정을 저렇게 잘 아는 거지? 이걸 하자고 한 건 시정잡배가 아니라 아빠의 상단에서 부상단주를 하던 아저씨였지만…….
호, 혹시 영주님이 보낸 감찰관인가?
믿기지 않게도 무직자이면서 3급 직업자 셋을 맨손으로 때려눕힌 여자와 그런 여자만큼이나 무서운 기세를 내뿜는 여자, 그리고 이쪽의 사정을 모두 꿰뚫어 본 남자의 무서운 시선에 이샤=리체는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러시아 개꿀잼 이벤트가 개최된 걸 보고 있었더니 판타지 작가로서 또다시 패배감이 드네용
지구 작가님은 역시 이길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당...